네이비씰 요원들을 다룬 '수잔 브럭맨'의 할리퀸 로맨스 소설 시리즈 중에, 제목은 기억 안나는데 (왜 할리퀸 시리즈의 제목은 기억나지 않을까?), 옆집에 사는 네이비씰 요원에게 자꾸만 연정을 품게되는 여자가 등장하는 작품이 있다. 뭔들 안그렇겠느냐만, 어쨌든 그 여자도 멋진 여자고, 그 남자도 멋진 남자인데, 이 남자와 그 여자는 이웃해 살면서 자꾸 친해지고 호감을 갖게 되고 반하게 되고 끌리게 되고 그런다. 그러다가 하루는 이 남자가 네이비씰 모임이 있어서 제복을 차려입고 그녀에게 뭔가 전할 말이 있어 그녀의 집 문을 노크하게 된다. 그녀는 문을 열고, 매일 사복 차림의 그를 보다가, 제복을 차려 입은 그를 보고 홀딱 반하게 된다. 그의 모습을 보고 눈이 부셔서 아무 말도 못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그가 말한다.
"당신 표정을 당신이 봐야하는데!"
하하하하. 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을 한 번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제복을 입은 멋진 남자의 모습이 그녀에게 엄청나게 각인된 건 사실인데, 모두에게는 각자의 로망이 있겠지만, 여자들에게는 이 제복에의 로망도 어느정도는 있는 것 같다.
중학교시절 영어선생님도 첫연애에 대해 얘기해줄때, 돌이켜보면 자신이 사랑했던 건 그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의 제복이라고 말했었다. 제복을 입고 자신을 만나러 나오는 그를 보면 아주 뿌듯했다고. 그래서 나는 그때 아, 그럴수도 있는거구나, 라고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하면서, 어렴풋이 짐작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었다.
대학교시절 미팅을 했었다. 아마도 3학년때였던 것 같다. 여자 네명, 남자 네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해군이었고, 하얀 제복을 입고 우리랑 마주 앉았다. 우리는 즐겁게 이야기를 했고 술을 마셨고 많이 웃었으며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러나 연락처 교환은 형식일뿐, 사실 나는 내가 미팅에서 어필할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우리는 자리가 파하고 다같이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 제복을 입은 남자 네명과, 평범한 여대생 네명이 한 버스 안에 타서 수다를 좀 떨고 그리고 그렇게 헤어졌으며, 역시나 짐작했던 대로 아무도 내게 애프터를 신청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나는 미팅자리 내내 그 누구의 눈길도 받지 못했고, 그 누구의 특별한 관심도 받지 못했으니까. 나한테는 그럴 일이 없다는 것 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며칠 뒤였다. 며칠 뒤 친구중 한명이, 그들 중 한명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며 강의실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오, 그래? 하고 미팅멤버들이 모여 우르르 편지를 돌려 보려는데, 그 친구가 나를 보며 이런 말을 했다.
"야 근데, 여기, 너한테 보내는 편지도 들어있었어."
응? 그 놈이 나한테도 편지를 썼어? 아니, 다른 애가. K 가 너한테 보내는 편지야. 나는 K 가 너한테 보내는 편지라길래 뜬금없어서 뻥인줄 알고 읽어봤는데 정말 너한테 보내는거더라.
나는 깜짝 놀랐다. 나에게 편지가 온 것도 놀라운데, 보낸 놈이 K 라니, 그건 더 놀라웠다. 모두 동갑인 그 미팅에서, K 는 그 자리에서 혼자만 어렸었다. 나랑은 미팅자리에서 말을 한 기억도 없던 친구였다. 미팅 자리에서도 그는 조용했었다. 나도 놀랐고 친구들도 모두들 놀랐으며 아마 그 남자아이들도 놀랐을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뭔가 엽기적인 내용이 아닐까 생각하며 편지를 읽어보는데 아, 세상에, 거기엔 나를 좋게 봤다는 말이 당연히 들어있었고(그러니까 편지를 썼겠지!), 그런데 그 내용들 뒤에 그가 전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거였다. 단 한 문장으로 그는 앞서 했던 말을 요약했다.
"누나랑 의남매 맺고 싶습니다!"
하아-
난 진짜 정말 별 소리를 다 듣는구나. 나는 지나치게 털털한 성격 때문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학교에 간 날에는 친구들에게 학교에 놀러 다니냐는 소리도 들었었고, 늘 만나 술을 마시던 남자사람친구들 한테는 불알친구라는 소리도 들었었고, 남자사람선배한테서는 너는 남자보다 편해, 라는 말도 들어봤지만, 하아, 의남매라니. 대체 의남매는 뭐야. 옆에서 내 편지를 같이 읽던 친구들은 배를 잡고 웃어댔다. 야, 세상에 남자한테 의남매 하자고 편지 받는애는 너밖에 없을걸, 의남매가 뭐냐? 이게 좋다는거야 싫다는거야? 까르르..
뭐 어쨌든 그녀석과 나는 그때부터 연락을 자주 했다. 다른 멤버들 모두 서로서로 전화도 하고 편지도 하고 그랬다. 어려서였는지 딱히 누가 누구랑 사귄다는 개념없이 그렇게 다들 잘들 지냈다. 아마 그들중에는 서로 마음에 더 들어온 상대도 있고 그랬겠지만 표면적으로 우리는 모두 친구였다. 위아더월드.
그러나 K 는 달랐다. K는 다른 여자멤버들에게는 전화하지 않았다. 다른 여자멤버들에게는 편지 쓰지 않았다. K 는 나에게만 전화했고, 나에게만 편지를 썼다. 그리고 나에게는 소포도 잔뜩 보냈다. 그가 군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소품들을 커다란 박스에 넣어 보냈다. 우리는 모두들 서로의 안부를 다른 멤버에게 물을 수 있는 사이었지만, K의 안부에 대해서는 나에게만 물어야 했다. K 가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아서 다른 여자멤버들도 K 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사실 다들 K에 대해서는 그다지 친근함을 느끼지 못했다. K는 모두에게 다정하거나 살가운 스타일은 아니었다. 나는 전화를 자주 거는 편은 아니었는데, 전화를 걸면 가끔 K 가 받을 때가 있었다.
"네 통신보안 *********"
하는 K 의 목소리를 들으면 나는
"K야, 나야."
했다.
그때 아! 하며 전화를 받는 그의 음성은 정말이지 전화기 너머로 그 반가움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여서, 나는 그에게 전화하는 것이 좋았다. 순번대로 통신보안이 정해져 있다고 했는데, 나는 그녀석이 당번인날에만 전화를 걸었다. 그게 그러니까 저절로 그렇게 됐다. 내 전화를 그렇게까지 반갑게 맞아주는 녀석은 또 없었으니까. 그녀석의 반가움은 다른 녀석들의 반가움과는 뭔가 급이 달랐달까. 나야, 할때 그 녀석은 수화기 너머로 웃고 있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도 아주 활짝.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그때 내 전화를 받던 그 녀석의 표정을 내가 한번 봤어야 하는건데!
나는 할리퀸 로맨스의 여주인공처럼 제복을 입은 남자라고 반하지는 않고, 중학교시절 영어선생님 처럼 제복을 입은 남자에 대한 로망을 갖고 있지도 않다. 소설이든 누군가의 일화든, 나는 제복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때 그 녀석의 표정을 보지 못했었던 것이 내내 아쉽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그러니까, 의남매였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