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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톤 프로젝트 - 1집 유실물 보관소
에피톤 프로젝트 (Epitone Project) 노래 / 파스텔뮤직 / 2010년 5월
평점 :
나는 신문을 볼때 뒤에서부터 읽는다. 1면의 기사는 한번도 내가 읽고싶었던 기사였던 적이 없으니까. 시사주간지를 간혹 볼때도 역시 뒤에서부터 읽는다. 앞쪽에는 무거운 시사들이 가득 차 있어서 그다지 읽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아주 가끔 잡지(패션지이든 남성지이든)를 보게 될때도 뒤에서부터 읽는다. 그와 그녀의 섹스라이프, 혹은 섹스에 대한 로망은 언제나 잡지의 뒤쪽에 자리잡고 있다. 앞에는 쓰잘데기 없는 사진들만 가득하다.
시디를 사면 나는 시디케이스에서 시디를 꺼내 오디오 혹은 시디플레이어에 걸고 음악을 먼저 듣는다. 가사집은 절대로 먼저 읽어보지도 훑어보지도 않는다. 시디를 들으면서 그 노래가 좋을때, 그래서 그 가사가 내 마음을 움직인다고 생각할 때, 바로 그때 나는 가사집을 꺼내서 펼쳐보고 그 가사들을 읽는다. 그래서 가사집을 읽지 않았던 시디도 여럿 된다. 정말 좋은 노래라면 내가 굳이 가사집을 읽지 않아도 그 가사들이 귀에 와서 박힌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움직인다. 그것이 나를 움직였을 때, 나는 그때 가사집을 펼쳐 그 깨알같은 글씨들을 읽어본다. 정확히 이렇게 쓰여진 가사구나, 하고.
밤(夜)정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경험해본 사람들은 다 알것이다. 밤에 함께하는 것들. 밤의 웃음 밤의 농담 밤의 음주 밤의 노래, 그 모든것들을 함께하는 밤의 상대를 잊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 쯤은, 정말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옆집 아저씨도 알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경쾌한 목소리로 에피톤 프로젝트도 알고있다고 노래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별들
그 보다는 가까운 가로등 불
어딘가에 여기 어디쯤인가
함께했던 그대와의 발걸음 -『반짝반짝 빛나는』
별을 함께 보다니! 하아-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사랑할 수 밖에.
이 노래만 듣고도 이 앨범이 좋아질 것 같다고 마구 흥분하고 있는데, 뒤이어 나오는 노래들은 정말이지 가슴을 후벼판다. 모두에게 그런 경험은 있을것이다. 가슴이 꽉 막힌듯 답답하고 아픈 하루. 자꾸만 한숨이 나오는 그런 하루. 이유없이 눈물이 마구 고이지만, 사실 그 이유는 가슴 속 깊이 혼자 알고 있는 그런 하루. 에피톤 프로젝트는 또, 그것도 알고 있다고 노래한다.
낮은 한숨이 늘었어
이유 없는 일에 눈물을 흘리고
때론 당연한 하루가
가끔 너무 속상해서
우리 사랑했었던 날들
우리 함께했었던 기억 떠오르면
좋은 기억들 보다는
아직 미안한 맘이 더 많아 -『한숨이 늘었어』
아, 이쯤되면 뭐 더 들을 필요도 없다. 이 한 곡 만으로도 과거를 미친듯 회상하기에 충분하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사랑들이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 날들이 자꾸 떠올라서 가슴을 후벼판다. 나는 어제 비가 퍼붓던 날, 우산을 받치고 에피톤 프로젝트의 앨범을 듣다가, 아, 우산을 떨어뜨릴 뻔 했다. 물론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우산을 떨어뜨리면 비를 맞을테고, 그러면 대머리 될테니까. 그건 안될 일이다. 비가 퍼붓는 날 듣다가, 나를 적시는게 비인지 혹은 가슴 깊이 흘러나오는 흐느낌인지 알수 없게 하는 노래를 그들은 불렀다. 그 노래는 바로 『이화동』
우리 두 손 마주잡고 걷던 서울 하늘 동네
좁은 이화동 골목길 여긴 아직 그대로야
아름답게 눈이 부시던
그 해 오월 햇살
그대의 눈빛과 머릿셜까지
손에 잡힐 듯 선명해
아직 난 너를 잊을 수가 없어 -『이화동』
하아- 죽겠다, 정말. 어쩐지 무너져버릴 것 같다. 아, 이렇게 흐물흐물 나는 무너져 내리면 어쩌지?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이 앨범에 바로, 내가 쓴건가 싶은 노래가 있다.
술 한 잔 했어요
그대 보고 싶은 맘에 또 울컥했어요
초라해지는 내가 보기 싫어
내일부턴 뭐든지 할거에요
같은 방향을 가는 줄 알았죠
같은 미래를 꿈꾼 줄 알았죠
아니었나봐요 -『오늘』
술 한 잔 했어요, 울컥했어요, 아니었나봐요.. 와- 나 진짜 이 가사 내가 쓴 줄 알았다. ㅠㅠ
나는 컬러링과 벨소리를 자주 바꾸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래서 내게 요즘 아이돌 가수들의 후크송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사실 나는 후크송을 싫어하는 편이라 할 수 있다. 성의없이 만들어진 것 같다. 사람의 가슴을 후벼파야 하는데, 그들의 그 반복되는 후렴구들은 그다지 내 가슴을 후벼파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공일오비의 노래를 생각하며 추억에 젖었던 건, 이제는 그런 가수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루시드 폴에게 많이 고마워하고 있었는데, 아아, 내가 몰랐던 거다. 아직 노래란것이 어떤것이 보여주는 가수가 존재하고 있다고, 에피톤 프로젝트가 말하고 있는거다. 아, 제기랄. 이 감개무량함이라니!
에피톤 프로젝트의 이 앨범은 나직나직하게 속삭이는 노래들이다. 격렬하게 울부짖지도 않고 찬란하게 외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앨범에 참가한 모든 가수들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해야 듣는이의 마음속에 파고들어 그들을 흐물흐물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눈시울을 적실 수 있는지를, 심장을 톡톡 쫄 수 있는지를. 실재로 몇시간전에 누군가는 내게 '남편은 알지 못하는 나의 과거들이 계속해서 떠오른다'고 말했다.
나는 사실 이 앨범으로 그다지 오랜 과거들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 과거 보다는 내 감정들이 더 많이 떠올랐다. 내가 가진 사랑과 내가 가진 설레임과 내가 가진 추억과 내가 가진 소망들이 더 많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이화동은 계속해서 돌려듣기를 했다. 돌려듣기를 하면서 계속해서 가슴이 무너진다. 그러면 듣지 말아야 하는데, 바보같이 또 듣고 있다. 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도무지 이 시간들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 지 알 수가 없다. 기운이 쏙 빠진다.
나는 여름을 사랑한다. 나는 여름을 사랑하고, 여름에 태어난 나를 사랑한다. 나는 여름에 태어난 모든것들을 사랑한다. 그런데 이 앨범은 봄에, 5월에 태어났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러지 않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다. 봄에 태어난 이 앨범도 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봄에 태어난 이 앨범이 여름에 태어난 나를 무너뜨리고 있다. 나를 무너뜨리는데 대체 왜 사랑하는걸까. 이런 나쁜앨범 같으니라구!
일단 듣자. 일단 그들의 노래를 듣고, 그리고 무너져내리자. 나는 무너져내리고, 그들의 앨범은 반짝반짝 빛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