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한 단어 만으로도 꽤 낭만을 느낄때가 있다. '여름'이란 단어가 그렇고, 'summer'도 그렇다. 『500일의 썸머』를 아무 내용도 모르는채 극장으로 달려가 보게 됐던것도, '썸머'란 단어 때문이었다. 그 단어 자체로 설레임을 주는, 그런 단어.
'어젯 밤'도 그렇다. 아, 어젯 밤, 이라고 말하는 순간 뭉클거리기도 하고 말랑거리기도 한다. 왈랑거리기도 하고 멜랑콜리해지기도 한다. 그것이 영어로 Last Night 이어도 마찬가지다. Last Night 은 사실 어젯 밤, 이라기 보다는 '지난 밤' 정도로 해석되는게 더 근사하긴 하지만. 어젯 밤도, 지난 밤,도 어쨌든 지나버린 밤은 그 자체로 사연을 품고 있다.
이 책 『어젯 밤』의 작가 '제임스 설터'는 내 예상과는 달리 남자 작가이다. 그리고 1925년생. 꽤 나이가 많다. 이런 감성적인 단어를 제목으로 쓰는 작가가 남자일줄도 몰랐고, 나이들었을줄도 몰랐다. 그리고 읽다 보니 이 작가, 자꾸만 과거를 뜯어 먹는다. 가장 찬란한 시절에 만났던 가장 찬란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 가장 찬란한 여자와 보낸 가장 찬란한 시절의 이야기, 그것이 그가 자꾸만 반복하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이런거다.
그녀는 스물두 살이었고, 펜실베이니아에서 왔다. 보기 드물게, 타고난 품위가 있었다.
-당신은 정말로...그가 말하고서 갑자기 조심스러워졌다.
-뭔데요?
-진짜로 예뻐요.
-아, 모르겠어요 .
-두말할 필요도 없죠.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그가 말했다. 몸무게가 얼마에요?
-52킬로그램 정도요.
-아마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정말요?
-아니, 그건 아니고, 뭐라고 말해도 그렇다고 했을 거예요. (「귀고리」p.114)
그는 그녀에게 아주 푹 빠져 있었다. 스물두 살의 예쁜 그녀에게.
커튼을 치러 일어난 그녀가 잠시 커튼 사이 불빛 속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그 빛나는 아름다움과 신선함! 그는 이제껏 그런 건 본 적이 없었다.
패밀라는 일 때문에 집을 비운 사람의 아파트를 빌려 살았다. 그렇다 해도 가구가 없는 편이었다. 그는 그녀와 만날 때 마다 뭔가 선물을 주고 싶었다. 생각지도 못한 어떤 것, 이를테면 쇼윈도에서 본 가죽 의자를 바로 배달시킨다든가, 반지, 장미나무 보석함 같은 걸 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주는 건 갖고 있지 않도록 조심했다. 쪽지, 이메일, 사진 따위는 증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예외는 있었다. 침대 위에서 그가 찍은, 그녀가 반쯤 일어나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어깨와 젖가슴, 부드러운 배, 허벅지가 드러난. 누군지 알 수 없을 터였다. 사진을 사무실에 있는 책의 갈피 속에 끼워두고 생각나면 들추어 보았다.
그때는 욕망이 하도 깊어 다리까지 풀려 지냈다. (「귀고리」p.115)
그녀가 주는걸 그가 갖고 있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그는 이미 아이를 둘이나 둔 누군가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가장 좋은 단편은 『플라자 호텔』이었다. 이 단편을 끝까지 읽다보면, 피츠제럴드의 『겨울 꿈』을 보는듯하다. 가장 뜨거운 사랑, 가장 뜨거운 시간, 전해지지 못한 이야기들, 간직한 사연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사라져 버리는 그 모든 것들.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전보다 스무 살이 더 많았고, 체중도 불었다. 얼굴까지 퉁퉁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는데.
-좋아 보이는데, 그가 말했다. 어디서 만나도 알아볼 수 있겠어.
-당신이야말로 좋아 보여요. 그녀가 말했다.
-글쎄, 나쁘진 않아.
-나도 그렇죠. 다들 어떻게 됐어요?
-누구?
-모리스는요?
-돌아가셨어. 5~6년 전에.
-아, 그랬군요.
-그전에 큰 저녁 파티를 열어줬어. 아주 좋아하셨지.
-있죠, 당신과 만나고 싶었어요.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그 지겨운 이혼 수속을 하느라...암튼, 이제 자유예요. 당신의 조언을 따랐어야 했는데.
-그게 뭔데?
-그와 결혼하지 말라는 거요. 그녀가 말했다.
-내가 그랬어?
-아뇨, 하지만 당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잖아요.
-질투가 났으니까.
-정말요?
-물론이지. 이봐, 이제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녀가 그를 보고 웃었다.
-우습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과 만난 지 5분도 안 지나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으니.
그녀가 입고 있는 옷까지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사랑은 죽지 않으니까. 그가 말했다.
-진심이에요?
-당신도 알잖아.
-봐요, 저녁 할 수 있어요?
-아, 달링, 그가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 당신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 약혼했어.
-그렇군요. 축하해요. 그녀가 말했다. 몰랐어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말이었다.
-정말 잘됐네요. 그녀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를 보고 웃었지만, 그 웃음은 알고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플라자 호텔」pp.149-150)
아, 가슴이 싸-해진다. 거칠거칠한 사포로 심장을 밀어버리는 것만 같다. 어쩐지 담배 한대 피워줘야 할 것 같다. 아주 깊게.
출근길에 거의 대부분은 강남역 1번출구로 올라오는데, 오늘은 들를곳이 있어 2번출구로 나왔다. 양복을 입은 M증권사의 직원 여러명이 전단지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살짝, 가슴이 뛰었다. M증권사에 다니는 (지금도 다니고 있을까? 그건 이제 내가 알 수 없다.) 한 청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갑자기, 느닷없이.
그는 M증권사에 다니기 전 C 회사에 다녔는데, 나를 만나 술을 한잔 하면서는 회사를 옮겨야겠다, 스트레스를 받는다는등의 자잘한 일상을 얘기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존대를 하는 사이었는데, 그런 일상의 보고가 나는 참 귀여웠다. M증권사에 입사서류를 내고 면접을 보고와서는 또 면접관이 어떤 질문을 했는지, 그리고 자신은 어떤 질문을 했는지를 얘기했다. 합격을 하고서는 전화를 해서 이러이러한 부서로 오라는데 말이죠, 하면서 보고를 한다. 그때의 그는 정말이지 아이같았다.
얼마 뒤, 친구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고 있고, 업무에 필요한 책을 사기위해 서점에 들렀다 가는 길이라며. 나는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그와 통화를 했고, 통화를 끊기 전, 하얀 스커트를 입었는데 스커트에 커피를 엎질렀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 좀 신경질이 난다고. 나는 왜 이렇게 애가 덜렁거리는지 모르겠다고. 우리는 웃으며 전화를 끊었는데, 끊자마자 그로부터 문자메세지가 왔다.
[하얀 스커트 입은 다락방님이 얼마나 섹시할지 생각하고 있어요.]
하아- 그럴때의 그는 더할나위 없이 남자였다. 남자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역의 벤치에 앉아있었지만, 내가 그날 서 있었다면 아마도 다리가 풀려서 결국 앉아버릴 수 밖에 없었을것이다.
오늘 출근길 M증권사의 양복입은 남자들을 보았고, 그중에 길고 가느다라며 젊은 남자의 옆모습을 보며, 실례인줄 알면서도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물론, 내가 아는 그는 아니었다. 사실 또 그가 맞다고 해도 나는 아는척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 집을 나오기 전 나는,
양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