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러브테마 내맘대로 좋은 책

결국 그녀는 시애틀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고, 장님이 그 침대 옆에서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임종을 지켰다. 그들은 결혼을 했고, 같이 살았으며, 일도 같이 했고, 잠도 같이 잤다. 물론 섹스도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장님은 그녀를 땅에 묻어야 했다. 그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보지도 못한 채 말이다. 그건 확실히 나 같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 장님에게 약간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 가련한 여인이 어떤 인생을 어떻게 살다 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여인을 상상해 보라.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일 년 열두 달이 지나도 오늘 따라 유난히 예뻐 보인다는 둥, 옷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칭찬 한 번 못들어 보는 여인을 상상해 보라. 화장을 하거나 말거나 아무런 차이도 없는 여인, 마음만 먹으면 한쪽 눈에만 초록색 아이섀도우를 바르고 한쪽 콧구멍에만 코걸이를 하고, 노란바지를 입고, 보라색 구두를 신어도 남편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여인을 생각해 보라. 그러다가 어느날 불쑥 찾아온 죽음 앞에서 눈먼 남편이 손을 잡은 채 뜨거운 눈물만 흘리고 있을 때-이제사 나도 조금씩 상상이 가기 시작한다-그 여인은 마지막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이 남자는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내가 어떤 표정으로 무덤 속에 묻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로버트-그 장님의 이름이다-에게 남은 거라고는 몇 푼 되지 않는 보험증권 한 장과 20페소짜리 멕시코 주화 반쪽이었다. 다른 반쪽은 벨루아와 함께 관 속에 묻혔다고 한다. 가련한 사람들이다.(「대성당」 pp.217~218)  

 

 나를 볼 수 없는 사람과 같이 산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볼 수 없다면? 때때로, 아니 거의 대부분 나는 장애나 죽음이 가져다 주는 고통은 본인보다는 그를 사랑하는 주변인들에게 더 크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볼 수 없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노력이 너무 고통스럽지는 않을까, 그가 내가 없는 곳에서 더 큰 위험을 만나지는 않을까 늘 안타까울테니. 게다가 가끔은 설사 이기적으로 느껴질지라도 그가 나를 보고 한마디만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은 누구나 하게 되지 않을까? 나 오늘 예쁘게 보이고 싶은 날이라 꽃무늬 스커트를 입었는데, 게다가 팔랑팔랑 거리는게 제법 섹시한데, 이런 내게 그는 오늘따라 예쁘다, 는 말을 해줄 수 없다. 이런 나를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은 볼 수 없는 사람에게도, 그리고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고통이겠지.  

 

바로 뒤에서는 사내들이 고함을 지르며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마른 남자의 코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교코가 멀리 있는 아이에게 노란 공을 흔들어 보였다. 교코의 등 뒤에는 피를 흘리는 사내들과 바람에 꽃잎을 흩날리는 만개한 벚나무가 있었다. 두 배경을 등지고 미소 짓는 교코가 내게는 너무나 고요해 보였다. 너무나 무서운 고요함이었다. (p.173)

이 소설속의 교코는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 그녀는 상대방이 말할때의 입모양을 보고 그가 무슨말을 하는지 짐작할 수는 있지만, 보고 있지 않을때에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다. 그녀의 뒤에서 피를 흘리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위험해, 피해, 라고 소리지를 수 없다. 소리를 질러도 그녀에겐 닿지 못한다. 그것이 그에게는 몹시 두렵다. 그녀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 같이 살자고 하지만 그녀는 이를 거절한다.  

나를 보여줄 수 있지만, 그리고 종이에 글자로 그녀가 하는 말을 볼 수도 있지만 그녀의 목소리로 들을 수는 없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종이를 찾고 글씨를 쓰는 순간에 그 빛이 바래기도 한다. 벌거벗은 그녀의 몸을 안고 그 귓가에 니 몸이 얼마나 따뜻한지 속삭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사랑하지만 완전하지 못한 느낌. 완전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가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었다면, 그렇다면 그것이 완전한 사랑이 될까? 

 

 

"뭐 필요한 것 없어요, 당신?"
"필요한 것? 구두끈 하나 필요하지. 이틀 동안 노끈으로 매고 돌아다녔으니까."
"그것밖에 없어요?"
"나 아직 쓰러지지 않았어. 날품팔이 일도 많이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할 수 있어. 그리고 또 추억이 있지, 추억들이. 애니, 당신에 관한 추억들은 하나도 안 잊었어. 그리고 그걸 기억해 낼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 당신 처음 만났던 날의 키비네 나뭇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생각나나, 당신?"
"오늘 아침 일같이요." (p.245)

  

 한때 함께 살았던 남자는 이제 부랑자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찾아와서는 필요한 건 단지 구두끈 하나라고 얘기한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없다. 집이 있고 아이가 있는 아내에게 그는 구두끈 외에 다른 것을 더 요구할 수가 없다. 아내는 그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지만, 그를 붙잡고 싶지만, 그를 그저 부랑자인채로 두어야 한다. 한때는 사랑했지만, 아직도 예전의 추억들을 곱씹으며 살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단지 사랑만으로 모든걸 이겨낼 자신이 없다. 과거의 자신이 파멸로 이르렀던 길을 생각하며 운명을 받아들이는 그이지만, 그를 바라보는 아내의 감정은 어떻게 해야할까. 그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했듯, 그녀도 그저 그를 이렇게 보내야 하는게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걸까? 

 

 

그런데, 

볼 수 있고,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있고,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가진 것도 아니고, 서로에게 해줄 수도 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 사랑은 완전해질까? 그 사랑은 사랑, 그 이름 하나만으로 완성되어졌다고 표현될 수 있을까? 

 

투덜거리긴 했지만 섹스를 끝낸 수컷이 으레 그렇듯 더 이상 붙잡지 않고 윤조는 제 차로 골목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브레이크를 밟은 채 윤조는 손가락으로 제 볼을 가리켰다. 나는 떼쓰는 아이 달래듯 볼에 입술을 갖다댔다.(「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p.226)  

여자는 출판사에 다니고 있고 남자는 치과의사다. 이제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남자는 이제 곧 결혼할 사이이니, 마련해 둔 집에 들어와서 살라고 하지만, 여자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가난한 골목집에 머무르겠다고 말한다. 여자와 남자는 모두 사랑을 말할 수 있다. 적당히 표현할 수도 있다. 서로 경제적으로 자립 할 수도 있고, 여자가 없는 것을 남자가 주려고 할 때에는 그걸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날, 여자는 체기가 있었다. 속이 안좋아서 섹스를 하자는 그에게 오늘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남자는 그럴 기분이 아니라는 여자에게 재차 다리를 벌릴 것을 요구하고 그녀는 그저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기만 했다. 그리고 그날 여자는 안좋은 몸에 내키지 않은 섹스를 해서 몸이 균형을 잃고 흐트러진다. 골목 앞까지 데려다 주는게, 자상함과 사랑의 표시라고 말하기엔 지나치게 이기적이다. 섹스를 끝낸 수컷, 이라고밖에 표현 할 수 없다. 이 부족한 것 없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무언가 하나 부족한 채로 사랑하는 사람들보다 더 완전하고 완성되어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사랑은, 

그 단어 자체에 불완전함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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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인생. 2009-02-15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페이퍼 참 좋아요. 사랑은 그불완전함을 안은채, 허둥대는것이 아닌가 싶어요. 사랑은.
참 이기적인 남자죠.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저도 인상깊게 본것 같네요.

다락방 2009-02-15 22:50   좋아요 0 | URL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읽고 정미경에게 푹 빠지게 됐었어요. 벌써 몇년전의 일이네요. 그녀가 말하는 그 모든것들이 그대로 현실이었죠.

그러게요, 사랑은 그 불완전함을 안은채 허둥대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그래도 하지 않는 쪽보다는 허둥대면서라도 하는쪽이 나은 것 같아요.

람혼 2009-02-15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보여주시는 '병치(juxtaposition)'의 글쓰기는 그 자체로 참 흥미롭습니다.

다락방 2009-02-16 09:1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람혼님.
언제나 조용히 계시다가(제가 볼때만 그런가요?) 이렇듯 나타나셔서 기분 좋은 댓글 달아주시네요. 부랴부랴 병치의 뜻이 무엇인지 찾아보기도 했어요. 하핫 ;

프레이야 2009-02-16 0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피투성이 연인, 책꽂이에 누워있는 지 좀 되었는데 얼른 읽어야겠어요.
저도 다락방님 페이퍼가 참 좋아요.^^

다락방 2009-02-16 09:15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좋을거예요, 혜경님. [나의 피투성이 연인] 말이지요.
:)

하양물감 2009-02-16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권도 읽은 책이 없네요,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 가 끌려요^^

다락방 2009-02-16 10:48   좋아요 0 | URL
아, 읽어보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책이에요. 퍽 괜찮았거든요. 물론 저는 정미경의 소설을 가장 좋아합니다만. :)

하양물감 2009-02-16 16:27   좋아요 0 | URL
꼭읽어봐야겠네요^^

다락방 2009-02-16 17:06   좋아요 0 | URL
:)

플레져 2009-02-16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미경을 향한 다락방님의 무한한 애정이 부럽습니다 ^^ 저두 좋아하는 작가라는거... 아시죠? ㅎㅎ
문득 책장에서 정미경 책들만 따로 따로 꽂혀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바로, 한 곳에 모셔두었어요. 다락방님이 발췌한 소설들도 좋아하지만 저는 밤이여 나뉘어라를 특히나 좋아해요. 한 달 전에 다시 읽었어요. 그 소설은 아마도 한...5번 이상은 읽지 않았을까 싶어요. 읽을수록 깊이 빠져들어 내가 있는 곳마저 하얗게 물들여놓죠. 마지막 장에선 가슴이 미어져서 으으..짐승소리를 내고 말지만. 사랑은 실패하기 위해 하는거라고 어느 시인이 그러더군요. 무참히 무너지기 위해서 사랑하는 거라고 하니 덜 부담스럽네요, 사랑.

다락방 2009-02-16 17:08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보니 저는 [밤이여, 나뉘어라]를 아직도 읽어보지 않은 것 같아요.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있을텐데, 제가 2006년도것만 구입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제가 가지고 있는 단편집에 그 작품이 있나 살펴본 뒤 구매해야겠어요. 저도 으으..짐승소리를 내게 될까요?

무참히 무너지기 위해서 사랑하는거라니, 흐음. 그래도 무너지지 않고 사느니 한번이라도 무너져보는게 나을 것 같아요. 그치요?

레와 2009-02-16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흐...*^^*

다락방 2009-02-16 17:08   좋아요 0 | URL
헤헤헤헷 :)

2009-02-16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7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7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7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7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9-02-16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의 이 페이퍼는 마치 <월간 페이퍼>의 한 페이지 같아요.^^
근사한 리스트네요. 저도 한번 써볼래요!

다락방 2009-02-17 08:18   좋아요 0 | URL
오옷, 깐따삐야님의 페이퍼를 기다려볼래요!! 막 기대되는거 있죠. 두근두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