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어머니에 대한 두려움은 근본적으로 그녀의 생식력에 대한 두려움임이 밝혀졌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 - P46
'바바라 크리드'의 《여성 괴물》에는 위의 문장이 인용되어 있다. 여성혐오를 궤뚫고 있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공포의 권력은 언제고 꼭 읽어봐야 하는 책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작년 초였나, 펼쳤다가 '아브젝시옹' 보고 다시 덮어 책장에 넣어두었더랬다. 그리고 올해의 같이 읽기 첫 도서, 많은 분들이 이 책의 첫장을 펼친 뒤로 어려움에 고통스러워 하시는데, 나는 아직은 읽기를 미루고 있던 터라 어렵다는 여러분의 감상에 두렵다, 알고 있지만 두렵다.. 그런참에, '김은주'의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에 크리스테바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어제 자기 전에 부랴부랴 다시 꺼내왔다. 찾아보니 2020년에 읽었다고 되어있더라. 그런데도 크리스테바 에 대한 부분, 하나도 기억 안나? 좌절했지만, 그러나 언제든 '이 책 봐야지' 하면 그 책이 책장에 있다는 것은 복된 삶이려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 일단 우리 크리스테바에 대해 잠깐 보자.
크리스테바는 옛 동구권인 불가리아 출신이지만 프랑스에서 본격적으로 학술 활동을 시작했다. 어느 곳에도 완전히 귀속할 수 없는 이방인의 경험은 크리스테바를 경계의 한편이 아닌 경계선 위에 놓는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고 경계인으로 살아가면서, 경계를 위반하는 글쓰기 체계를 생산하고 글쓰기를 행한다. 프랑스어로 말하지만 프랑스인이 아니고, 자본주의 국가에서 살아가지만 동구권 출신이며, 남성들과 진취적으로 학술적 교류를 하지만 여성이다. 이러한 위치에서 크리스테바는 ‘말하기와 글쓰기‘의 조건을 사유하고 말하고 글 쓴다.
그는 자신의 ‘경계성‘을 오히려 말하기의 역량으로 삼았으며, 이방인으로 살아가기를 두려워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그는 살아온 곳과 활동한 곳을 이동해 넘나들면서, 경계를 위반하면서 경계 저 멀리로 나아간다. - P146~147
동구권 불가리아 출신이지만 프랑스에서 학술 활동을 시작하다니. 읽어보면 나중에 미국에서도 교수로 초청하지만,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며 그 교수직을 수락하지 않더라. 불가리아 출신에 프랑스 학자 라니. 물론 이런 사례는 차고 넘친다. 나폴레옹만 해도 프랑스령의 섬 코르시카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 황제가 되었고, 세르게이 플루닌은 우크라이나 에서 태어났지만 영국 로얄발레단의 수석 무용수가 되었다. 내가 사는 곳을 벗어나, 그것은 확대로 볼 수 있을텐데 더 큰 사람이 되다니. 내가 태어난 곳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니지만 내 활동무대는 넓혀버리게쒀!! 물론 다른 곳, 다른 세계로의 이동은 반드시 원대한 목표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지옥같아서 결정되는 일들일 수도 있다. 어쨌든 크리스테바, 불가리아 출신으로 프랑스에 가 학자가 되었고 그 책을 지금 대한민국의 여성들이 읽는다. 대박..
자, 그리고 아브젝시옹.
아브젝시옹은 비체(卑體)로 번역된다. 이는 언어상징계가 요구하는 적절한 주체가 되기 위해,
이질적이고 위협적으로 여겨지는 어떤 것들을 거부하고 추방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비체는 코라 기호계와 관련한다. 주체가 언어적 상징계에 도달할 때, 코라의 기호계에서 빠져나오면서 버린 코라적 에너지가 비체다. 비체는 자아 정체성의 도달에 필수적인 것이다. "내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나는 맹렬한 구토물과 오열과 더불어 자아를 낳는다."
자아가 구성될 때, 언어화되지 못한 잔여물이 남는다.
이 언어화되지 못한 것, 언어화 이전에 존재하는 것에 기반한 비체가 모호한 나의 경계를 창출한다.
비체는 주로 혐오감과 거부감으로 등장한다.
응고된 우유에 낀 막, 똥, 구토물, 시체와 같은 것이 우리에게 구역질과 혐오감을 야기하는 비체다. - P161~ 162
아, 얼마전에 댓글로 독서괭 님이 아브젝시옹이 비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여기 딱 나오네. 아브젝시옹은 비체로 번역된다. 하아- 우리가 비체라는 단어를 앞에 두고 얼마나 어려워했었나요. 여러분, 기억나나요?
우리 바바라 크리드의 《여성 괴물》읽다가 비체 만났고, 그때 비체 낯설어 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우리가 만난 비체들' 이라는 소제목을 가진 이현재의 책을 읽고 비체에 대한 설명을 가져왔더랬다.
그러던 내가 이제 글을 쓰기로 했다. ‘결국, 난 꼰대였던 거야‘라는 좌절에서 ‘그래, 이왕이면 제대로 꼰대질 하자‘로 마음을 바꾼 것이다. 그동안 궁리해온 페미니즘 철학과 이를 가능하게 해준 페미니즘의 계보들을 인용하는 가운데 내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들리지도 않은 채 소거될지라도 내 언어를 입 밖으로 꺼내보기로 했다.
내가 이러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비체abject‘라는 개념을 재고하게 되면서였다. 다시 보니 ‘비a-체object‘, 즉 어떤 규정된 대상이 아니라는 말은 참 유용한 언어였다. 어떤 존재를 무엇이다(A) 라고 규정하기 않고, 무엇이 아니다(~A)라고 말하는 방식은 그 존재를 어떤 경계에 가두기보다 그 여분의 공간, 경계의 열림에 위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페미니즘의 역사는 남성이 정해놓은 위치를 벗어나 경계를 넘나들었던 여성들, 항상 흐르고 있기에 개념적으로 잡힐 수 없는 ‘비-체‘가 되었던 여성들에 의해 쓰인 것이었다. 그녀들이 비판받거나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기존의 언어나 질서로는 파악되지 않는 ‘알 수 없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여성혐오 그 후》, 이현재, p.12-13
자, 좀 더 보자.
비체는 흐르는 것이자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며 고체화되지 않기에 어떤 규정, 어떤 언어로도 잡히지 않는다. 비체가 대상object이 아닌 이유는 그것이 주체의 모든 규정성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비체는 손에 잡히는 착한 대상이 아니다. 비체는 경계를 넘나드는, 그래서 더럽다고 여겨졌던 것이며 잡힐 수 없기에 공포스러운 것이다. 비체는 철통방어라고 여겨졌던 경계에 구멍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존재이며, 따라서 특정 사회적 질서와 동일성을 강화하려는 자들에게 경계를 위협하는 비체는 공포를 넘어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를 여성혐오에 적용해보자. 자신을 여성과 뚜렷이 구분되는 경계를 갖는 주체, 즉 남성으로 이해하고 있는 남성들이 있다. 이 남성들은 남성 정체성의 경계를 교란하고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여성을 오염되고 불순한 것, 공포스러운 비체로 간주하여 혐오하게 된다. 여기서 경계를 흐트러뜨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비체로서의 여성은 뚜렷한 경계를 갖는 주체와 동격이 될 수 없다. - 《여성혐오 그 후》, 이현재, P35
비체로서의 여성은 대상과도 다르다. 만약 남성들이 부여한 대상으로서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즉 착한 대상에 머무른다면 여성은 멸시받기는 하지만 혐오되진 않는다. 그 대상은 적어도 주체가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며, 주체로서의 경계를 뒤흔든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은 자신이 재생산을 위한 성녀임을 입증하는 한, 어느 정도의 보상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대상으로서의 위치를 벗어나 경계를 넘나드는 비체가 되는 순간 여성은 멸시를 넘어 혐오된다. 여성혐오는 여성 대상이 아니라 여성 비체를 향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서구의 철학자, 사상가들이 여성을 알 수 없는 존재‘, ‘예측할 수 없는 존재‘로 간주해온 것은 여성들이 대상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비체로서의 역사를 써나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여성혐오 그 후》, 이현재, P36
자, 비체로 번역되는 아브젝시옹에 대해 이정도 읽고 공포의 권력을 시작해보도록 합시다.
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