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처음 읽을 때에도 놀랐지만 다시 읽는 지금도 여전히 놀라는 것은, 그녀의 놀라운 성찰과 통찰이다.
레이첼 모랜은 십대 미성년자 시절에 21살 남자친구의 중개로 성매매에 처음 발을 들였다. 노숙하는 처지의 어린 여성이 선택할 길이 도대체 뭐가 있었을까. 그녀처럼 미성년자이며 성매매된 여성 중에는 어릴 적부터 성적 학대를 당해 여기에 와있는 여성들도 많았다. 어차피 늙은 남자들로부터 자꾸 성적학대를 당할거라면, 차라리 그걸 돈주고 팔자 하는 마음으로. 이것이 잘못된 것일까?
마침 어제 잠자냥 님의 계급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 오늘 아침 레이첼 모랜의 글에서도 또 만난다.
‘삶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생계 수단은 성매매뿐이라고 느끼게 될 때까지 성매매에 완전히 빠져들기에 나는 성매매에 ‘잠식되었다‘라는 표현을 쓴다. 불법적 일을 모두 경험해보지는 않았어도 이 말이 눈에 띄게 불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버는 다른 일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는 안다. 은행 강도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하겠다고 결심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에게 이것이 얼마나 낯선 개념일까? 그가 통합되고 싶어 하는 사회는 결국 은행을 포함하는데 말이다. 불법적인 돈벌이 방법들은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을 사회가 용납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항상 반대되는 자리에 위치시킨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구별된 삶이 있다. 사회적으로 용납이 가능한 삶과 그렇지 않은 삶으로 나뉘는데 후자의 삶을 살아보지 않고는 그 두 삶 사이의 간극을 충분히이해할 수 없다. 같은 공간을 차지하는 이 두 가지 세계는 엄청나게 다르다. - P108
계급은 없어야 한다고 우리 모두가 생각하지만, 그러나 계급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역시 분명하게 알고 있지 않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없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다시 말해, 계급이 없는 사회 였다면 계급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필요 자체가 없는 거 아닌가. 게다가 계급의 가장 밑바닥에서 혹은 이쪽이 아닌 다른 쪽의 계급이라면, 계급에 대해 더 들여다보고 더 체감하고 더 생각하게 될 것이다. 눈 돌리는 그 모든 곳이 계급으로 나뉘어지지 않았을까.
레이첼 모랜이 '일반적인 사회생활'에 대해 생각하게 된것, '사회적으로 용납이 가능한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모두 그녀가 원하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는 일에 그녀가 종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멸시와 혐오 그리고 착취와 학대까지. 그녀는 제삼자가 '선택'이라 부르지만 그녀 자신에게 그것은 한 순간도 스스로의 의지로 인한 선택이 아니었던 것들로 용납되지 않는 사회쪽에 있었다. 그런 경험이 있었다는 것으로부터 그녀는 벗어날 수 없을테지만, 그러나 그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글을 쓰면서 그 때 느꼈던 것,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하게 된 것들을 털어 놓았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슴 아팠던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아마 누구나 경험해보았을것 같은데, 과거의 어떤 글을 쓰는 순간 내가 그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 그 일이 레이첼 모랜에게도 일어났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스스로 미성년임을 인지하지도 못했던 그 시절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떠올리면서 그녀는 그 시간을 다시 산다. 이제 열다섯살이 얼마나 어린 나이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녀는, 그 때 내가 그렇게 어렸었는데, 하는 것을 성인이 되어 떠올린다. 그 괴로웠던 일들을 적어나가며 그 괴로웠던 시간들 속에서 그녀는 다시 그 때의 그녀가 되기 때문에 글 쓰는 일이 힘들어 멈칫하게 된다. 나 역시 과거의 어떤 일들에 대해서 토로하다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 살아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레이첼 모랜의 괴로움을 어느 정도 짐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어쨌든 그녀는 이 책을 써냈다. 그 괴로운 시간을 돌이켜보는 일을 기어코 해냈다.
위 링크한 잠자냥 님의 글에서 '그러나 <바깥 일기>나 <밖의 삶>이 지금까지 만났던 에르노의 여느 작품들과 조금 달리 느껴지는 지점은 자신의 내부를 집요하리만치 들여다보던 시선이 사회와 세계로 그 사유의 폭을 더 넓고 깊게 확장했다는 것이다' 라는 구절은 좋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인 것 같다. 레이첼 모랜이 계급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타인 혹은 인간 개인의 타락에 대해 언급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끊임없이 자기에게 일어난 일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집요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던 사람이기에 가능했던 거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나를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사회와 세계도 볼 수 있다고 믿는다.
매 문장마다 너무 좋아서 오늘 아침에 읽으며 또 감탄했다. 세상에, 역시 이건 사람들이 많이 읽어야 해, 라고 거듭 생각했다. 이 책을 이번 달의 같이 읽기 도서로 선정한 내 자신이 진짜 너무나 짱인 것 같다. 이 책, 세상에 묻혀지기에 너무 아까운 책이란 말이야.
레이첼 모랜의 책 번역된 것도 이거 한 권이고, 페이드 포 나온 출판사에서 나온 책도 이거 한 권이다. 이래서는 안된다. 출판사들아, 힘내요! 레이첼 모랜 책 또 썼다고. 얼른 번역해내랏!! 심지어 소설이랫!!! >.<
열다섯 살을 ‘어린이‘로 부르는 것이 가능한가? 가슴이 발달하고 클리토리스가 기능하기 시작하면 여성이 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갖췄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10대 초반의 아이들과 사춘기 이전의 어린이들을 향한 성적 관심을 구별 지으려 애쓰는 사람들을 항상 수상히 여겼다.
가슴과 생식기에 관해서 말하자면, 가슴은 이미 열다섯에 충분히 자랐고 클리토리스로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었지만, 나는 접힌 피부들 뒤에 있는 그것이 클리토리스인지도 몰랐고, 자위는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성인처럼 선택과 결정 들을 내릴 수 없었다. 누구든지 성인기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성인이 되는 정말 중요한 분기점은 가슴이나 생식기가 아니다.
물론, 그 모든 세월이 지나고, 엄마가 된 지금의 나는 열다섯 살은 아이라는 사실을 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그러나 그 당시 아이였던 나의 이미지와 여전히 씨름한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충분히 납득하기 어렵기는 하지만, 내 아이가 당시의 나와 같은 나이가 되고 난 이후로 그 이미지를 외면하기 더 어려워졌다. 불가피하게 비교를 하게 된다. 아들이 열다섯에 얼마나 어렸는지, 세상을 상대할 준비가 얼마나 안 됐는지를 생각한다. - P111
자, 계속 읽어보자.
여러분, 이 책은 꼭 읽어보세요,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