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는 어른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과 슈퍼마켓 같은 곳에서 함께 장을 보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어쩐지 즐거울 것 같았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몇몇 사람과 그런 경험을 공유했을 때 실제로 즐겁기도 했다. 처음에는.... 언제부터인가 함께 장을 보는 사람이 집사2로만 낙찰되었고, 집사2랑 장 보러 가는 게 고달픈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해서 최대한 대형 마트는 사람 없는 때를 골라 가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우리 둘 다 일하는 사람들이니 결국 사람 많은 시간을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을 때가 많고 그러다 보니 장보기는 일종의 의무처럼 되었지 딱히 즐거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어졌다.
지난 주말에도 집사2랑 마트에 갔다. 최대한 빨리 사서 돌아오는 게 목적이었으므로 장바구니에 필요한 것만 담고 마지막으로 술을(ㅋㅋㅋ 꼭 필요해!) 담으려고 주류 코너로 갔다. 둘 다 술 구경하는 건 무척 좋아해서 이런저런 술을 살펴보고 있는데 와인 코너 점원이 우리의 장바구니를 쓱 훑더니 와인을 추천해주기 시작했다. 나는 그 점원이 우리 장바구니를 훑는 눈을 애초부터 알아차렸는데, 고기가 담긴 걸 보고 와인을 사라고 하겠구나 싶었더니 그 예상이 100% 들어맞았던 것이다. 그래서 와인도 사고 소주도 사고 맥주도 사고 고량주도 사서(엥? 주정꾼들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계산대에 섰다. 토요일 오후라 줄을 설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앞에 선 사람들이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 품목을 보게 되었다.
우리 앞의 가족은 콜라를 페트병으로 잔뜩 사 가서 신기했다. 집사2도 나랑 좀 비슷한 생각을 했던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콜라를 돈 주고 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뭐 어떤 이들은 우리 뒤에서 둘이 와서 무슨 술을 저리 종류별로 많이 사 가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만). 마트에서 장을 볼 때마다 우리가 늘 놀라는 사실은 콜라를 즐기는 사람들이 저토록 많다는 것이다. 술과 커피에 절어(?) 살면서도 집사2랑 내가 거의 손대지 않는 음료가 있으니 그것은 탄산음료. 그중에서도 콜라는 거의 마시지 않는다. 배달음식을 주문하면 콜라가 늘 덤으로 따라오곤 하는데 우리는 이 처치곤란 콜라를 모아서 당근에 내다 판다(알뜰한 집사2). 그런데 또 신기한 게 어느 품목보다도 가장 잘 팔리는 게 바로 이 콜라 묶음이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는 내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콜라마니아가 존재한다는 것.
콜라를 대량 묶음으로 사 가는 가정은 어떤 가정일까? 그날 그렇게 마트에서 다른 가족이 쇼핑하고 계산대 위에 이런저런 품목을 올려놓은 것을 지켜보다가 문득, 최근 읽은 아니 에르노 <바깥 일기>와 <밖의 삶>의 어느 구절이 떠올랐다. 에르노는 “욕망과 욕구 불만, 사회 문화적 불평등이 읽히는 것은 바로, 계산대에 서서 자신의 쇼핑 카트에 담긴 내용물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비프스테이크를 주문하거나 그림을 평가하려고 입에 올리는 말들에서”(<바깥 일기>, 9쪽)라고 말한다. 이어서 “장소나 사물이 자아내는 느낌과 사유는 그것들의 문화적 가치와 무관하며, 대형 슈퍼마켓 역시 콘서트홀만큼 의미와 인간적 진실을 제공”(같은 책, 9쪽)한다고 덧붙인다.
에르노의 이 생각은 한편으로는 일찍이 부르디외가 말했던 “어떤 제품을 구매하는 경우 어떤 종류의 ‘브랜드’나 상점이 의미하는 ‘질의 보증’을 신용함으로써 그 제품의 질에 대해 안심하는 것처럼 정통적 투자 감각은 출판사, 영화감독, 극장이나 음악당의 이름같이 많은 경우 외부적 지표로 무장되는데 이 투자 감각은 ‘선발된’ 문화소비를 발견하게 해준다.”(<구별짓기> 하권, 601쪽)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니까 인간은 슈퍼마켓이나 상점에서 어떤 물건을 사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신분이나 계급을 은연중 보여주거나 드러낸다는 것이다.
에르노는 슈퍼마켓이 가장 그러한 장소 중 하나로 파악해 <바깥 일기>와 <밖의 삶>에서 슈퍼마켓, 대형 쇼핑몰과 같은 장소를 통해 프랑스 사회의 계급이 작동하는 방식을 살펴본다. 1985년부터 1999년까지의 기록인 <바깥 일기>와 <밖의 삶>은 에르노가 추구했던 사회 탐구 프로젝트의 하나로 그녀는 자신의 내면의 풍경을 기록한 일기가 아닌, 사회를 스케치한 이 외면 일기를 통해 20세기 프랑스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에르노는 자신의 이 같은 흔적을 “집단의 일상을 포착한 수많은 스냅 사진을 통해 한 시대의 현실에 가닿으려는 시도”라고 말하는데 슈퍼마켓을 비롯하여 전철역, 기차역, 거리, 레스토랑 등 일상 공간에서 그녀가 보고 기록한 이 짧은 스케치들은 한 시절 프랑스인들의 생생한 삶의 기록이자 그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경제/문화적 불평등과 계급 차이의 예리한 증언이다.
에르노는 거리에서 오가는 말들이나 저마다의 쇼핑카트에 담긴 것들에서 한 사회의 욕망과 욕구 불만, 폭력과 수치, 계급과 불평등이 은밀하고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말하는데, 이처럼 짧은 글 안에서도 그 모든 것을 포착해 사회의 민낯을 꿰뚫어 보는 그녀의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에르노는 슈퍼마켓 같은 대형 상점이 아닌, 시장의 정육점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계급이 작동함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고객은 자신이 무엇을 소비하는지 열거하고 내보임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식구를 제대로 먹이는 유능한 주부의 기능을 표출하는 데 만족”하며 “부부 고객의 경우, 늘 중년”으로 “그들에게는 일주일 치 고기를 쟁여 두면서 <잘산다>는 것을 혹은 후하게 손님을 대접할 줄 안다는 것을 보여 주며 느끼는 만족감”이 있다고(같은 책, 44쪽) 지적한다. 한편 그녀는 거리에서 들려오는 상스러운 말, 즉 “언론과 책에는 나오지 않고 학교에서는 무시당하며 서민 문화에 속하는 말”을 듣고는 “원래 나의 것이었던-그래서 그런 말은 즉각”(76쪽) 알아보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바젤 미술관에는.......의 그림이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통해서는-이 경우 바젤 대신 암스테르담. 피렌체 등등이 들어가도 된다- 이 말들이 비록 “비개성적이고 대수롭지 않고 종종 듣거나 읽게 되는 문장의 서두”이지만, 이 말을 하는 사람이 “즉각 어떤 세계에 속한다는 의미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이러한 발화를 통해 자신이 “그 세계에서는 개방적이고 식견을 키우는 여행을 자주 다니고, 그림이 삶과 기억에서 중요한 것일 정도로 충분히 생활의 무게가 가벼운 삶을 영위”함을(같은 책, 111쪽) 드러내는 것이다. 에르노의 바깥 관찰기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아 전철, 열차, 병원, 주차장, 역, 정류장 등 전방위적이다. 한 젊은 여성이 블라우스, 귀걸이 등 쇼핑한 물건들을 풀어보는 풍경, 그 물건들을 바라보고 만져보는 그 흔한 광경에서 에르노는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소유한 행복, 실현된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 사물과 맺는 무척 감동적인 관계”(94쪽)를 발견하기도 하는데 이런 장면에서는 오래전 읽은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에르노의 <바깥 일기>, <밖의 삶>이 1980~90년대 프랑스 사회의 기록이라면 페렉의 <사물들>은 1960년대 프랑스 사회의 소설적 기록이다. 갓 대학을 졸업한 후 중산층으로 편입하고자 애쓰는 평범한 젊은이들의 삶을 그린 이 작품은 어느 집의 거실, 서재, 침실 등의 세부 묘사와 함께 그 공간을 이루는 ‘사물들’의 세세한 묘사를 통해 1960년대 프랑스 사회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작품 속 그들은 ‘더 잘 살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한데, 그 더 잘 산다는 삶은 곧 ‘더 널찍한 방, 샤워실, 단지 학교 식당보다 좀 나은 정도의 식사와 자가용, 음반, 휴가, 옷의 필요’를 느끼게 하는 삶이다. 그들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이다. 집, 자동차, 쿨하다고 느끼는 물건들을 원하면서 그 욕망을 채우는 삶에 충실하게 적응해간다. 상품을 욕망하고 소비하고, 그러면서 순간적인 만족을 느낀다. 특별한 물건을 소비함으로써 자신이 남과 다르다고, 또는 남들처럼 잘산다고 착각하면서 그렇게 늙어간다.
<사물들>도 <구별짓기>도 에르노의 <밖의 삶> <바깥 일기>도 모두 프랑스 작가의 산물임을 감안한다면 그 세계도 우리 못지않게 계급과 불평등이 심하구나 싶어지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특정 계급에서만 쓰는 언어를 비롯하여, 고급문화를 소비하는 취향을 드러내고 과시함으로써 나는 다른 계급의 사람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더 민감한 사회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그 눈부신 성과를 이룩한 아니 에르노조차도 여전히 자신의 출신 계급-가난한 노동자 집안-에 그토록 천착하면서 자유롭지 못한 게 아닐까.
그러나 <바깥 일기>나 <밖의 삶>이 지금까지 만났던 에르노의 여느 작품들과 조금 달리 느껴지는 지점은 자신의 내부를 집요하리만치 들여다보던 시선이 사회와 세계로 그 사유의 폭을 더 넓고 깊게 확장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시선은 몹시 비판적이고 신랄하다. 특히 부르주아들의 위선이나 이른바 사회 지배계층, 가진 자들의 위선을 파헤치는 눈길을 매섭다 못해 가혹하리만치 차가워 통쾌함마저 느껴진다.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대다수 소시민”의 고통을 이해하는 듯이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에르노는 “특정 부류의 시민을 향해 그들은 열등하다고 넌지시 암시하는 것은 정도를 넘어선 일이고, 그들이 그런 식의 취급을 받아들일 거라고 에둘러 말하는 것은 더더욱 정도를 넘어선다”고 지적한다. 특히 소시민 운운 “그 말은 또한 대통령 본인은 <대시민>에 속한다는 의미”(41쪽)라고 싸늘하게 비판한다.
또 가난한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풀라는 가톨릭 구호 단체의 홍보 포스터를 보면서 에르노는 “지배 계급이 그려 보는 모습 그대로 가난의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추레한 육신, 후줄근한 옷차림, 얼빠진 표정이라는 이미지 앞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느낄지(97쪽) 반문하며 사람들은 구걸하는 이에게 선행을 베풀 때조차 “선한 일을 하려고 타인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으려고 준다.”고 말하면서 선한 행동 속에 감춰진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꿰뚫어 보기도 한다. 결국 이렇게 가진 자들의 향한 날카로운 비판은 이민자나 노숙자 등 상대적으로 갖지 못한 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지는데, 그 연민이 결코 위선으로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에르노 그 자신이 바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계급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