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점심 산책시간에 정희진의 오디오매거진 6월호를 들었다.
이번호에서 선생님은 미국, 미군 얘기들을 하셨는데 '이태원 살인사건'에 대한 언급도 하셨다.
선생님으로서는 아주 아쉬운 영화라고, 피해자와 유가족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미스테리의 기능이 더 부각됐다는 거다.
나는 그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 듣다가 선생님에 대해 또 감탄하게 됐다.
책이든 영화든 뭐든 언급하시게 되면 그 모든 걸 다 기억하고 관련된 것들까지 다 가져오시는 거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이번호 매거진에서의 영화는 <맨체스터 바이 더 시>인데, 각본가의 전작과 쓰인 음악, 그리고 그 음악의 작곡가 까지 … 물론, 사람이 관심이 있으면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알아보고 싶고 더 기억하게 되긴 하지만, 내 경우에 그건 지극히 한정적인 부분에만 쏟아지는데 선생님의 경우에는 어느 분야든 가능해지는 것 같은 거다.
일전에 김혜리의 팟빵에 게스트로 출연하셨을 때에는 일본에 여행간 얘기를 하시면서 일본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도 좌르륵 말씀하시더니 이번에도 주둔하는 미군과 달라진 한국 사람들의 시선, 그 시선이 달라진 시간의 흐름까지… 그래서 예전부터 생각했던 걸 새삼 떠올리게 됐다. 내가 아무리 아무리 여성주의 책을 읽어봤자 결코 정희진 쌤처럼 될 순 없다는 것. 이런 류의 사람, 인간 종류는 따로 있다는 거다. 그건 문과냐 이과냐의 문제든, MBTI 의 문제이든, 혈액형의 문제이든, 아이큐의 문제이든, 그러니까 뭐가 됐든 선생님이 속한 인간의 집단과 내가 속한 인간의 집단은 다르다는 거다. 이걸 '류' 나 '집단' 이라는 단어 대신 뭔가 다른 단어를 쓰고 싶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여하튼 인간들을 분류했을 때 내 '과'는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살다 보면 이런 사람들의 존재를 알게 되고 보게 되고 만나게 되는데,
읽거나 보는 것들을 습득하고, 그걸 머릿속에서 지도를 그려서 위치시키고, 그 위치에 맞는 다른 것들과 또 연관시켜서 지도를 그려버린다고 해야할까. 내 경우에 전체적인 그림을 보지 못하는 맹점을 갖고 있는데 이건 나의 고질적인 문제다. 암기를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사실 암기라는 건, 내가 이미 이해를 잘 하고 있다면 굳이 필요없는 게 아닌가. 그런데 왜 암기를 못하냐, 머릿속에 그리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머리속에 그리려고 펜을 똭 잡으면 어휴 귀찮아 하고 펜을 던져버리게 된다고 해야할까. 국사, 세계사를 못하는 데에는 어느 시대에 어떤 일이 일어나서 상황이 어떻게 변했고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되가지고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고~ 하는 걸 내가 그려내야 되는데, 나는 그걸 그리는 사람이 못되는거다. 그보다는 어떤 사건을 맞닥뜨렸을 때 '뭐야 이 개새끼 소새끼 말새끼 아 너무 힘들었겠다' 이렇게만 되어버린달까. 내가 나 이런 거 문제인 거 알아서 전체적 그림을 그려주는 책을 읽고 도움을 받고자 하면, 읽을 때는 오 알겠어 알겠어 이러는데 책 덮고 나면 기억이 또 하나도 안나는 거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떤 하나에 대해 얘기를 딱 할라치면, 그 전에 이랬잖아요? 그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고요, 그래서 이게 이렇게 된 거 아닙니까, 하면서 머릿속에 어떤 하나의 사건을 던지는 순간 지도가 그려지는 것 같은 거다. 지도가 그려진 것뿐만 아니라 지도 곳곳에 또 책장이 있어서 그 책장에서 이것저것 상세하게 끄집어낼 수도 있는 거다. 난 …이게 안돼.
나는 개인적으로 내가 이렇게 머릿속에서 지도를 그리지 못하는 것이,
내가 길치인 것과, 내가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없는 것과, 요리를 못하는 것과, 프랑스 영화등을 비롯한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다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클래식 음악의 경우, 나는 공연에 갔다가 이건 완전한 이과의 영역이다, 라고 생각했던 게,
어느 지점에서 어느 악기가 어떤 강도로 어떤 속도로 연주되는지를 배치해야 하고,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합을 이루는지를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하나의 음악이 탄생하는 거다. 현악기가 여기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관악기는 피아노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알아야 훌륭한 음악이 나오는 거다. 내가 서울시립교향악단 연주 보러 갔다가 높은 관객석에서 무대를 보는데, 이건 단순히 작곡과 연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지도를 그리고 그러면서도 세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요리도 마찬가지. 각 재료의 특징을 파악하고 그것들이 어느 순간에 어떻게 섞여야 어떤 맛이 나는지를 이해해야 요리를 잘 할 수 있는데, 나의 뇌는 너무나 단순하게
버터 좋아
청경채 좋아
둘이 섞으면 더 좋겠지?
이러다 망해버리는 거다.
내가 도저히 나랑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프랑스 영화, 책 등의 예술등에 대해서도 그 어떤 예술의 지도를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안에 뭐가 있는 것 같고, 그러니까 그들이 그렇게 한걸텐데, 그게 뭔지를 내가 모르게쒀 …뭐, 문학도 예술이긴 하지만, 내 경우에 스토리에만 반응하는 것 같다고 할까.
그런데 정희진의 오디오 매거진 듣다보면, 선생님은 머릿속에 지도를 그리고 곳곳에 책장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떻게 이게 되는걸까' 싶은 거다. 그걸 다 달달 외우시는 걸까? 아니면 읽다가 혹은 보다가 다 기억이 되는걸까? 나는 왜 내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거지? 오전에도 우연히 내가 몇년전에 쓴 책의 리뷰 보면서 '뭐야 이런 책을 읽었어?' 라고 깜짝 놀랐는데 내가 그 리뷰로 이달의 당선작도 됐더라. 그런데 정말이지 기억이 전혀, 1도 나지 않는다. 리뷰를 읽어도 모르겠더라. 나는, 왜 읽지? 내가 읽는 이유는 뭐지? 내가 읽는 의미는 뭐지? 왜 선생님은 이렇게 되는데 나는 못하지?
역시… 아이큐 탓인건가.
선생님이 언급하셔서 <동맹 속의 섹스> 주문했는데, <동맹의 풍경>도 장바구니에 담는다.
그런데 이래봤자 뭐해, 나는 읽어도 다 까먹는데, 머릿속에 지도도 못그리는데. 내 머리는 … 뭘 하고 있지?
머리야, 그렇다고 너 싫다거나 원망하는 건 아니야.
나는 이런 나를 받아들인단다. 내 머리, 내 몸, 모두 나지.
내 엉덩이 내 가슴, 모두 나지.
내 팔 내 다리, 모두 나야.
하도 이슈가 되어서 오히려 살까말까 망설이다가 중고로 샀고 그래서 아까 잠깐 펼쳐보는데 집 도면이 나오는 거다. 아, 그러면 또 나는 그 도면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일단 건너 뛰고, 글이 다 말해주겠지, 한다. 봐봤자 모르니까 볼 생각이 없어져버리는 부분 …
에휴, 커피나 내려 마셔야겠다.
난 학교때 공부 열심히 했어도 전교1등 각은 아닌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