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couldn‘t see it.
《기척》은 《제인 에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써낸 '레이철 호킨스'의 소설이다. 레이철 호킨스를 내가 들어본 것 같고 읽어본 것 같아서 검색해보니 읽은 작품이 없더라. 그런데 왜이렇게 이 이름이 익숙하지? 엄청 익숙한데? 하고 곰곰 생각해보니, 오호라, 폴라 호킨스였다. 내가 읽은 건 폴라 호킨스였어. 호킨스 라는 성 때문에 내가 들어본 것 같았구나!
진 리스가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썼는데 레이철 호킨스가 《기척》을 쓰다니. 《제인 에어》가 읽고나면 정말 할 말이 많은 작품인가 보구나 했다. 진 리스가 제인 에어를 읽고 '다른 면이 있을 거'라며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집 안에 갇힌 버사 부인의 입장에서 써냈다면, 레이철 호킨스는 제인 에어도 읽고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도 읽고 제인과 버사 부인 모두를 화자로 내세워 기척을 써냈다. 제인 에어의 현대적 재해석이라니, 내가 제인 에어를 막 좋아햇던 건 아니었지만, 요즘 작가가 어떻게 써냈을까 싶어 호기심에 읽어 보았다.
'제인'은 위탁가정을 옮겨다니던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고 지금은 부유한 동네에서 부유한 집안의 개를 산책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개 산책을 시키던중 '에디'라는 부유한 남자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고 그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며 결혼하기에 이른다. 그 남자는 잘생기고 섹시하고 다정하고 심지어 엄청난 부자이다.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던 집에 살게 되고 한 번도 경헙해보지 못한 욕조에 몸을 담글 수도 있다니. 그녀는 이제 이 부유한 마을의 다른 여인들처럼 되고자 한다. 그 과정은 사실 결코 쉽지 않다.
에디는 현재 싱글이지만 그에겐 실종된 부인이 있다.언젠가부터 제인이 집안에서 나는 소리들을 듣게 되는데, 이런 굵직한 이야기의 흐름은 제인 에어와 같지만, 그러나 현대적인 제인과 현대적인 버사는 브론테의 제인, 버사와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제인은 백인 남자가 사회에서 가지는 위치, 그리고 빈부의 계급차를 알고 있다. 제인과 버사의 목소리를 교차시키는 건 브론테와 진 리스를 읽었기에 가능해진 부분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로체스터인 에디에게도 물론, 나름의 생각과 계획과 사정이라는 게 있다.
에디는 이 큰 집의 침실에는 제인을 두고 그리고 저기 위층에 버사를 두고 두 여자 사이를 오고간다. 그러다가 독자인 나는 느닷없이 이런 문장을 읽게 된다.
하하하하하. 자, 그와 잔 여자는 누구일까요?
1. 제인
2. 버사
3. 제 3의 여인
4.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얼마전에 (먼댓글로 연결한) 단발머리 님의 페이퍼에서 읽었던 문장이라, 이 책을 통틀어 가장 반가운 문장이었다.
음. 제인이 버사의 존재를 알게 되는지 궁금해서, 진실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지만, 그러나 이 책은 딱히 내가 좋아할만한 책은 아니다. 좀 더 현대적인 시선을 갖추고 있고 또 버사와 제인에게 주체적이고 생생한 캐릭터를 부여하긴 했지만, 이 책에 쏟아졌다는 찬사가 적합한 것 같진 않다. 가난하게 자란 시절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부유해지고 싶은 마음 너무 잘 알겠고,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본 적 없으니 그들에게 속하고 싶은 것도 알겠지만, 바로 그런 지점에서 내가 공감하지 못하고 튕겨져 나오고 있었다. 어제 페이퍼에도 썼던 것처럼, 그동안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나의 지금을 형성했고, 내가 지금 이런 사람이 된 건 다시 말해 나의 그런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인이 부촌 마을의 부유한 여자들 무리에 단단히 속하고 싶은 마음은 모르는 바도 아니고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 전제되는 게 이 부자 남자의 아내, 반드시 결혼으로 맺어진 아내여야 하기 때문에 그로부터 프로포즈를 받기 위해 어떤 수를 쓸까, 하는건 너무 내 취향이 아니었다.
가족도 없고 가난했으니 나 스스로 재산을 형성하기엔 당연히 무리가 있고, 아무리 열심히 이집 저집의 개를 산책 시켜봤자 부촌 마을에 어떻게 집을 사나. 그런 집에 살고 싶다면 그런 집에 사는 남자를 꼬시는 게 더 빠른 길이다. 아니,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부자 남자와 결혼하는 젊은 여자들에 대해 세상이 '돈 보고 결혼했다'고 손가락질 하는 걸 보노라면, 나는 되묻고 싶다. 너는 뭘 보고 결혼했는데? 뭘 보고 할건데? 왜 돈 보고 하면 안되는데? 돈 없는것보다 있는게 낫고, 내가 가진 자원이 미천하여 미친듯 노동해도 한 달에 이백 번다면, 그러면 이미 억대 연봉 받는 남자랑 결혼하는 게 좀 더 편한 삶에 빠르게 가는 길 아닌가. 뭐 그렇긴 하지만 지금 여기의 나에게 '어떻게 저 남자로 하여금 나랑 결혼하고 싶게 만들지?' 이건 내 감성이 아니라서.. 제인 에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면 역시 진 리스가 짱인 것 같다.
어제 올렸어야 했지만 너무 바빠 못올린 책탑.
지난주에는 이렇게 세 권만 딸랑 샀다.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는 줄리언 반스의 소설이다. 최근에 읽은 책에서(뭐였지?) 이 책이 언급되길래 읽고 싶어서 샀다.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은 내가 진작에 산 줄 알았는데 책장에 없어서 샀다. 물론 사기 전에 '아 이거 산 것 같은데' 하고 <산책>앱도 검색했는데 안나오더라. 안..산건가? 사실.. 산책 앱에 책 안올린지 좀 되었다. 내가 그럼 그렇지.. 여튼 안보여서 샀는데, 안산거 맞쥬?
《암컷들》은 트윗에서 원서 알게 되어서 나중에 번역본 나오면 사야지 찜해두고 있었는데 아니 번역이 되었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일이야,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구먼! 하고 부랴부랴 주문했다. 마음이 급했다. 연휴 동안 하노이에 갈 계획이었는데, 비행기 안에서 읽을 책을 고르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었던 바, 바로 이 책이다 싶었던 거다! 비행기 타기 전에 내 손에 들어오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문했고, 그렇게 도착도 완료하였고, 그래서 비행기에 가지고 탔지만!! 오고 가는 길에 작가 소개만 읽은 거, 실화인가요?
하 … 가방만 무거웠고, 제기랄…
비행기안에서 이 책 읽을거야! 하던 간절한 마음이 한국으로 그리고 내 집의 내 침대로 돌아오는 순간 싹 사라져버려, 아마도 이 책은 또 사두고 안읽은 책이 될 것 같은 느낌적 느낌 …
그래서 어제 책을 주문했다는 놀랍지만 안놀라운 소식…
자, 이제 작업실에 출근한만큼, 여행기 페이퍼를 쓰러 가겠다. 고고씽!!
아, 그리고 내가 인생 목표 하나 또 생겼으니. 저 문장 실제로 써보는 거다.
'독자여, 나는 그와 잤다!'
얘들아, 내가 자고 싶은 남자가 생기면 저 문장 페이퍼에 꼭 쓸게. 꼭 기다려,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