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 기자의 팟빵 <조용한 생활>을 유료 구독하고 있는데, 의외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너는 클래식 음악에 관련된 코너이다. 책 코너도 영화코너도 미술코너도 아니고 클래식 음악 코너. 정윤수 작가가 나와서 설명해주는데 이 코너 덕에 정윤수를 처음 알았다. 검색해보니 여행기를 써둔 것 같아 주문해두었다.
나는 클래식음악을 듣는 귀가 없다. 그러니까 가사가 없다면 이 음악이 저 음악 같고 저 음악이 이 음악 같고 들어본 음악 같고 처음 듣는 음악 같고… 그래서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라면 지식이 전무하며 취향같은 것도 성립되지 않았다. 남들이 클래식 음악 얘기하면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에피톤 프로젝트 좋아하고 루시아 좋아하면서 흐느끼는 쪽의 사람이다. 나름 클래식 공연에 가보기도 했지만, 내가 느끼는 것은 '이것은 확실히 이과의 영역'이라는 거였다. 그러니까 에피톤의 경우는 문과의 영역 같은데 클래식이라고 하면 어디에서 무슨 악기가 어떤 강도로 연주되어야 한다는 걸 설정하고 그대로 연주하고 지휘해서 또다른 곡으로 완성시키는 지점은 확실히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혹은 상상하지 못하는 영역의 것 같은거다. 그런점에서 클래식 음악을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나랑은 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왜 김혜리 기자의 코너에서 클래식 음악을 다룬 코너를 좋아할까. 말러가 화가인지 연주자인지도 모르고 말러라는 이름은 그러나 들어본 상태의 무식한 내가 그런데 이번 코너에서는 말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내가 이걸 유료구독하게 된 계기 자체가 정윤수의 이 코너 때문이었는데, 아니 이게 말러를 얘기하잖아? 그러면 말러 얘기만 하는게 아니라, 말러가 이랬다고 얘기하기까지 끊임없이 줄기차게 아주 다른 많은 것들이 소환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말러 얘기하면서는 세상에, 버지니아 울프도 소환됐다니까? 지난번에 바그너 얘기하면서는 니체도 소환되고. 나는 이런 얘기가 세상에, 그렇게나 재미있다. 그리고 그 시대적 배경까지 다 언급되는데 세상 꿀잼인거야. 한 번 듣는다고 기억하면 좋겠지만 또 그건 아니라서 다 까먹고 어디가서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겠지만, 아 나는 진짜 김혜리와 정윤수의 이 코너 듣는게 넘나 꿀잼이다. 그렇다면,
내가 행복의 약속 책을 링크해두고 왜 김혜리 팟빵 얘기를 했느냐. 그것은 사라 아메드가 본인이 생각한 행복과 불행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다른 작가들의 책과 또 영화들을 예로 들기 때문이다. 꿀잼이다. 내가 본 책이나 영화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알면 아는대로 모르면 모르는대로 이걸 읽는게 넘나 꿀잼이다. 덕분에 나는 SF 장르라서 볼 생각 전혀 없었던 <아일랜드>라는 영화를 보려고 마음 먹었다. 아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좀비' 영화도 그것은 결국 인간에 대해 말하는 영화야!! 라며 다 찾아보면서, SF 도 결국 인간을 말하는 영화임에 분명할텐데 왜 안보는걸까, 나는??? 각설하고,
자, 이렇게 길게 주절주절 말이 많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백인 남자' 이다. 백인 남자. 사라 아메드가 <아일랜드>영화를 소개하기 전에 <칠드런 오브 맨>을 가져오는데, 그 때도 결국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는 건 백인 남자(쉽게 말하면 주인공이자 히어로) 라고 언급했었는데, 아일랜드 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적한다.
거짓 희망(아일랜드)은 진짜 희망(사랑, 해방)으로 전환된다. 전화전이 되는 사람, 행복이 보장하던 거짓 희망에서 클론들을 해방시켜 그들에게 진짜 희망을 주는 사람은, 클론이든 아니든, 백인 남자다. (p.345)
이 지점에서 나는 영화 <히든 피겨스>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화속에 천재 여성들은 모두 흑인인데, 일터에서 흑인의 화장실은 분리되어 있을 뿐더러 저기 먼 데 있다. 일하다 말고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는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저기 저 먼 화장실을 다녀와야 하는 거다. 이 때 그녀가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길다는 걸 인지해 어디 갔다왔냐 묻고, 그것이 백인과 분리된 화장실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며, 그래서 백인전용 화장실이라는 간판을 부수는 사람은 누구냐? 백인 남자다. 불편을 겪은 것은 흑인인데, 그 불편을 겪지 않게 만들어주는 우리들의 히어로, 기꺼이 그 간판을 부수는 사람은 백인인 거다. 정말 불쾌한 장면이었는데, 여기에는 그가 백인 남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 한몫했다. 불편한 당사자인 흑인 여성, 저 멀리까지 기어코 땀 흘리며 뛰어가야만 화장실에 닿을 수 있는 그 흑인 여성은 본인의 힘으로 간판을 부술 수 있었을까? 힘들고 불편하고 빡치는 당사자인 흑인 여성은 왜, 그 간판을 부술 수 없었을까. 왜 백인 남성이 그렇게 해주기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까. 흑인 여성은 고통 당하면서도 부수지 못한 것을, 이 백인 남성은 어떻게 한 번에 부숴버릴 수 있었을까? 너무 빡치지 않나? 역사속에 드러나지 않은 흑인 여성들을 전면에 보여주는 영화여도 어쨌든 백인 남성은 히어로적으로 등장해버리는 부분. ㅋ ㅑ 분리한 것도 백인이고 합치는 것도 백인의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부분… 네…
그리고, 샤론 볼턴을 떠올렸다. 내 사랑 샤론 볼턴.
"글쎄, 이곳에선 적응을 잘 못한 것 같고, 그 점에 있어서는 그들의 말이 맞아요. 이곳 섬들은 작지만 강력한 패거리가 다스리고 있거든요. 체격이 큰 금발의 남자들 말이죠. 모두 같은 학교를 나오고, 같은 스코틀랜드 대학을 다녔고, 노르웨이 부족의 침략이 있던 시절부터 가족끼리 서로 알고 지낸 사람들 말이에요. 토라, 생각해봐요. 병원의 아는 의사들이나, 학교의 교장이나, 경찰이나 치안판사, 또 상공회의소, 지역 시의회까지, 그들이 전부 차지하고 있다고요."
그 점에 관해서는 따로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꽤 많은 섬 주민들이 눈에 띄게 비슷한 외모를 지녔다는 사실을 나도 이미 여러차례 실감한 터였다. (p.249)
이 인용문 가져오려고 페이퍼 뒤졌더니, 내가 샤론 볼턴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당시에 친구와 나눴던 대화가 적혀있더라. 옮겨와본다.
- 이 구절 속에서는 작은 섬이지만 비슷한 사람들이 차지하잖아. 그렇지만 이건 세계로 확장시킬 수 있지.
- 아아
- 백인 남자들이 지배하고, 전세계적으로 남성들이 주요한 위치를 다 차지하고. 작가는 그 얘기를 이 섬에 빗대어 한 것 같아. 그게 너무 좋았어.
- 거꾸로 보면 이렇게 볼 수 있겠네. 백인 남자들이 지배하고 전세계적으로 남성들이 주요한 위치를 다 차지하는 그 짓이 이 세계를 자그마한 섬으로 만드는 짓이다.
- 크- 해석 좋다.
- 아니야 나는 니가 말하기 전까지 저 구절은 그냥 사실적시라고만 생각했어. 과연 니가 좋아할만하네.
- 나는 이 작가가 이래서 좋아. 할 말을 되게 세련되게 해.
사라 아메드가 이 책에서 언제나 히어로로 출연하는 '백인 남성'을 지적했고, 샤론 볼턴 역시도 자신의 소설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백인 남성'에 대해 지적한다. 젊은 작가인 '샐리 루니'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소설에서 '백인 남자'라는 워딩을 등장시킨다. 기억이 맞다면 그 워딩은, 백인 남자의 입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동안에는 지적되어지거나 언급되어진적이 없었던, 그러니까 너무나 당연햇던 일들이, 이렇게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백인 남성, 백인 남성 하고 자꾸 소환되면, 아마도 듣는 백인 남성들 빡칠것이고 우리가 뭘 그렇게 더 누렸다는 거야, 하면서 그렇게 언급하는 여성들을, 사라 아메드 식으로 말하자면, '분위기 깨는 페미니스트'로 보겠지만, 나는 이렇게 여성학책이든 소설책이든 백인 남성이라는 워딩이 등장하는 게 즐겁다. 그 워딩이 등장하는 순간, 그러니까 '백. 인. 남. 성' 이라는 워딩이 등장하는 순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히어로적이지도 않고 지도자 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보다는, '그동안 히어로 역 따놓고 했던 놈들' 의 의미가 더 크다. 짜릿하지 않은가? 챙피하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대표적 히어로 백인 남성이 등장하는 영화 <아마겟돈>을 너무 좋아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거 볼 때마다 우리의 백인 남성이 자신을 희생해 지구를 구하러 가는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오열하곤 했다. 극장에서 통곡해서 같이 보던 동생들이 이제 그만하라고 말려야 했고, 집에서 다시 보면서도 또 울어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부끄럽다. 백인 남성이 지구를 구한다고 자기 한 몸 희생하는데 왜 유색인종 아시아여성인 내가 그렇게 흐느끼는 것이야 …
아직 행복의 약속을 끝내지 못했고 오늘이 벌써 4/28 이다. 주말에 나름의 스케쥴이 있기 땜시롱 오늘 안으로 끝내야 한다. 어제 끝내려고 새로 산 책상에 앉았다가 잠이 쏟아지는 바람에 자버렸… 침대에 앉아서 읽기 때문에 조는 줄 알았더니 책상에 앉아도 졸더라고요? 책상 괜히 산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