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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고독으로부터 찾는 해답 ㅣ 서양문학의 향기 10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김재혁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6년 7월
평점 :
삶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어렵다. 어제를 살았고 오늘을 살고 그리고 내일을 살아간다는 것, 일년 후와 십년 후를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 맞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 용기로 살아보지'라고 하는 말들을 우리는 종종 듣게 되는데, 정말 어려운 것은 죽는게 아니라 사는것이다. 삶을 유지한다는 것은 삶을 끝내는 것보다 더 큰 용기와 지혜와 견딤과 그리고 의지가 필요하다.
여기서 삶이란 '인간적인 삶'을 의미한다. 좀비가 창궐한 세상에서 좀비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인간은 끊임없이 숨고 도망쳐야 한다. 좀비에게 물려 좀비가 되는 걸 선택하는 일은 쉽다. 그것은 어떤 행동도 더 하지 않고 그자리에 있으면서 포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달리고 또 달리고 숨고 또 숨고 생을 이어가기 위해 음식을 찾아내고 또 물리길 원하지 않는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이 모든 과정들이 더 어려운데도 우리는 숱한 좀비영화에서 볼 수 있다. 끝끝내 좀비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들을. (나는 이래서 좀비 영화를 좋아한다.)
코로나가 창궐한 세상에서도 마찬가지. 내가 하기 쉬운 선택들만 골라 한다면, 그러니까 병원에 부러 찾아가서 백신 접종을 하지 않고, 마스크를 쓰지 않고 살아간다면 코로나에 전염될 확률이 높지만, 굳이 그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하고 백신을 맞고 사람들과 거리두기를 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영화 그래비티 에서는 그저 가만 있으면 죽음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굳이 살아내려고 알지 못하는 외국어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동안 배운 것들을 머릿속에서 반복하며 그 다음으로 나아가고자 끊임없이 시도하고 시도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무사히 살아 귀국한다고 해도 그녀에게 죽었던 딸이 살아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귀국을 반겨줄 사람이 없음에도 그녀는 더 어려운 '살기'를 택한다. 인간의 삶이란 것은 더 어려운 것이 맞다. 산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것을 기어코 해내는 것이 삶이며 인간인 것.
얼마전에 우연히 티비에서 한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됐다. 평소 인기가 많아 티비에 자주 나오는 목사였고 그래서 가끔 보게 되는데, 하는 말마다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목사였다. 짜증나는 말중에 기억나는 건, 성공한 남편 뒤에는 우는 아내가 있다는 거였다. 아내가 많이 울수록 남편이 성공한다는 취지의 말이었고, 기독교가 보수적인 종교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이 너무 끔찍했다. 남편의 성공을 위해 아내는 그 많은 날을 울어야 하는가, 그걸 견뎌야 하는가, 그래서 인자하고 어진 아내가 되어 훗날 훌륭한 남편의 배우자로 우뚝 서야 하는것인가. 재수없었다.
그 목사가 또다른 방송에서 얘기하고 있었다. 부부간의 일에 대한 고민을 듣고 그에 대해 게스트들을 불러 상담하고 결국 설교하는 그런 방송인가 보았다. 일반인들의 편지와 게스트들의 일화들이 나왔는데, 그 목사가 방송을 마치면서 예의 보수적이고 고루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다가, 그런데 그런 얘기를 하는 거다. 혼자 사는 건 쉽다, 같이 사는 게 어려운 거지.
늘 내가 해오던 생각이고 해오던 말인데 그 목사의 입을 통해 들을 때는 그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혼자이길 선택하고 혼자이길 원하는 것, 거기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앞으로의 삶도 이렇게 꾸려나가고자 할 때의 나는 혼자의 편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목사의 시선으로 다시 보는 나는, 더 어려운 걸 선택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목사는 같이 사는게 힘들고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함께 살아가다보면 성장을 한다는 거였다. 혼자이면 편한대로 살아 성장할 수 없지만 함께 살면 나와 다른 사람에게 서로 맞춰주고 인내하면서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거였다. 나는 이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고, 완전히 다른 시선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삶이란 것이 죽기보다 더 어려운 걸 선택함으로써 이어진다고 생각해왔었는데, 그리고 더 어려운 걸 선택하는게 기어코 인간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뜻한다고 보여졌을 때, 그렇다면 혼자 사는 조금 더 편한 삶보다 누군가랑 함께 섞여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또 타협해야 하는 순간들을 보내야 하는 것이 더 궁극적인 인간의 삶인건 아닐까, 하는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함께할 파트너를 찾아야 하는가, 그것이 궁극적 인간의 삶으로, 그러니까 성장하는 삶으로 나를 이끌 것인가.
사실 나는 외로움과 고독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왔다. 그건 늘,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 고독한존재라고 생각한다. 외로움과 고독이 주는 느낌은 그러나 좀 다르다. 내가 끌어안고 살아가야 할 것, 평생을 함께 가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외로움'이라 정의된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그 외로움을 상쇄하기 위한 선택을 하고자 할 것이다. 친구를 만들고 애인을 만들고 그래서 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할 것이다. 내가 '외롭다'고 느끼는 순간 사람은 한없이 바닥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고독'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삶을 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독이 인간에게 필연적인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그렇다면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 어쩌다 내게 닥친 고독한 시간에 나는 그 시간을 온전히 내것으로 만들 수 있다. 고독이 찾아들면 나는 사색하고 사유하고 관찰하고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내 고독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다른 사람의 고독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고, 내가 고독한 것처럼 다른 모든 고독한 존재들과 손을 내밀어 관계를 맺을 수도 있는 것이다. 고독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가 필요한게 아니라, 고독한 나와 고독한 네가 만나는 것이다. 고독은 해소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선택해온 시간이 그리고 지금까지의 삶이, 저 목사의 말을 빌자면, 그렇다면 더 쉬운 것이었나. 이것이 며칠째 내게 찾아들어 나를 괴롭게 했다. 나는 내가 더 쉬운 걸 선택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내가 선택한 것이 나를 성장으로 이끌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괴로웠다. 최근에 인셀(비자발적 독신)에 대해서도 생각했는데, 인셀들을 놓고 보자면 누군가와 함께 살지 않기 때문에 성장하지 못한다는 목사의 설교가 맞아 떨어지는 게 아닌가. 성장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퇴보하며 자신을 그리고 타인까지 망치지 않는가.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함께 살지 않기 때문이고 그것은 외로움 때문이고, 그렇다면 내가 여기에서 뭐가 다르고 얼마만큼 멀다는 건가. 내가 선택한 혼자는 인셀들의 혼자와 다른것인가?
여기, 릴케가 있다. 아니, 있었다. 프라하에서 1875년에 태어난 시인 릴케가 2023년의 내게 와 읽힐 줄, 릴케는 알았을까? 이 책은 한 젊은 사관생도가 자신이 선택한 길이 맞는 길인지 고민이 되는 젊은 시절에 자기 말 좀 들어달라며 릴케에게 편지를 쓰면서 시작한다. 이미 자신보다 앞서 자신과 같은 길을 지나쳤고 그리고 자신처럼 고민했던 릴케에 대해 알았던 까닭이다. 처음 이 사관생도의 편지를 받고 릴케가 답장을 보내준 때가 1903년, 그의 나이 28살 때이다. 놀랍게도 릴케는 답장에서 인간은 모두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자신의 그러한 깨달음을 고민 많은 청년에게 들려주었던 거다. 나는 인간의 고독함, 인간의 삶이 본질적으로 고독하다는 것을 아주 늦게 깨달은 것 같은데, 릴케는 세상에 그걸 일찍 깨달아서 스물여덟살엔 다른 사람에게 그에 대해 말해주기도 하다니. 어떤 사람들은 삶의 진리를 스스로 일찍 깨닫기도 하는 것이구나. 그의 이런 깨달음은 그의 성장일텐데, 그건 그가 그렇다면 혼자가 아니었다는 뜻인걸까?
그랬다.
릴케는 혼자가 아니었다.
고독에 대해 깨닫고 그걸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가 진행되는 내내 릴케가 싱글인 줄 알았는데, 아니 이 편지를 쓴 시점에 이미 결혼 3년차였던 거다. 그에겐 아내도 있었고 아이도 있었으며 우정을 나누는 친구도 여럿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성장과 그의 깨달음은 누군가와 더불어 함께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일까?
정말로, 혼자 사는 것은 쉬운 일인가? 어려운 건 함께 사는 일인가? 내가 혼자인 게 편하기 때문에 더 쉬운게 맞나?
고독대신 사랑과 우정을 선택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당신의 고독을 사랑하고 고독이 만들어내는 고통을 당신의 아름답게 울리는 비탄으로 견디도록 하세요.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멀리 느껴진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것이 당신의 주위가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당신의 영역이 이미 별들 바로 밑에까지 다다를만큼 커졌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p.45
나는 혼자인 게 더 쉽고 같이 사는게 더 어렵기 때문에 같이 사는 걸 해내면서 성장한다는 목사의 말은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틀리지 않기 때문에 내내 떠오른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참인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릴케의 말을 빌자면, 고독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내 주위가 넓어지기 때문이다. 내 주위가 넓어진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게 더 많아진다는 것을 뜻할 것이고, 그것은 그게 뭐가됐든, 그러니까 그것이 사랑과 우정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음을 뜻한다고, 또 거부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고독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내 주위를 넓게 만드는 것, 릴케가 말하는 바로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성장이 아닌가.
우리가 어려운 것을 향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어려운 것을 향합니다. 자연 속의 모든 존재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자라며 자신들을 방어하고 또 안으로부터 제 특징을 만들어내며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리고 어떠한 저항에라도 맞서면서 그와 같은 고유성을 지키려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우리가 어려운 쪽을 향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와 같은 확실성만이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고독하다는 것은 훌륭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독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무언가가 어렵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 일을 하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것 역시 훌륭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어려우니까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 그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과제 중에서 가장 힘든 과제인지도 모릅니다. -p.68
인간의 삶이란 것은 왜 계속 어려운 길을 향하는가, 왜 삶을 포기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려운가, 에 대해 나는 종종 생각해왔는데, 릴케는 말한다. 어렵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그 일을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라고. 그 어려움은 사랑일 것이고, 고독일 것이었다. 기어코 저항하거나 견뎌내거나 버텨내거나 내딛는 일, '기어코' 해내고야 마는 일들이 우리를 결국 살아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런 한편 고독과 사랑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릴케의 삶을 놓고 보자면 그는 타인과 함께 살기를 하고 있었으나 인간의 고독을 알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함께 사는 것은 어렵고 그것을 해내면서 성장한다는 말은 참이되 그러나 반드시 참은 아닌 것이, 함께 산다고 해도 인간의 고독을 깨닫지 않으면 결코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과 우정이 바탕이 되어 우리가 함께 살아간다고 할 때에도, 그것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너와 함께 살면서 우리가 각각 고유한 자기만의 고독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함께의 삶이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나의 외로움만 해소하기 위한 더불어 삶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저 어려움일 뿐이고 그 어려움은 빡침일 뿐이다. 너와 내가 함께하는게 어렵다는 걸 알고 성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나의 고독과 너의 고독을 인정하는 것이 필수일 것이다. 함께 사는 삶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고 인간은 어려운 걸 선택하면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고독한 존재라는 사실을 필히, 필히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고독하다. 당신도 고독하다. 인간은 모두 고독하다.
어느날 문득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당황하지 말고, 바로 이 말을 떠올리면 된다.
아 맞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고 했지!!
그 순간 우리의 삶은 더 넓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