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1장에는 백설공주가 언급된다. 책 속 내용을 잠깐 들여다보자.
디즈니가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로 제목을 단 이 이야기는 사실상 '백설 공주와 사악한 계모'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의 핵심 행위(사실상 유일한 실제 행위)는 두 여성의 관계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젊고 창백한 여자와 아름답지만 늙고 사나운 여자, 딸과 어머니, 사랑스럽지만 무지하고 수동적인 여자와 교활하고 능동적인 여자, 천사 같은 여자와 명백하게 마녀인 여자. -p.125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이 백설공주는 2012년 새로이 만들어졌다. 이름하여 <스노우화이트 앤 더 헌츠맨>!
주연도 크리스틴 스튜어트라 엄청 기대하고 보았는데 어느정도 이야기를 해체했지만 어떤 변태성은 남은 영화였다. 일전에 그 영화를 보고 남긴 후기가 있는데, 그 후기가 또 최고되는 것이여.
최고되는 바로 그 후기 ☞ 치마와 공주 (aladin.co.kr)
(2021년 6월에도 졸라 멋진 글을 썼네, 나는…)
<스노우화이트 앤 더 헌츠맨>에서는 계모의 역할인 '이블'이 그렇게 사악해서 스노우화이트를 죽이려는 이유가 나온다. 그녀가 저주에 걸렸기 때문. 너는 아름다울 것이고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한 최고 힘을 가질 것이나 너보다 더 아름다움이 나타나면 사그라질 것이다.
이건 영화속 이블에게만 가해진 주문은 아니다. 세상이 여성들에게 보내는 메세지에 다름아니다. 우리는 그 메세지에 길들여져 더 예쁘게 보이려고 화장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고 수술을 하고 옷을 입고... 그러나 그것이 권력이 아니라는 것은, 여자로서 삶을 살아가다보면 자연스레 깨우치게 된다. 남자들은 진작 알았다고 본다. 아름다움이 너의 권력이야. 이건 일시적으로 권력인듯 보일 수 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사람 주변에 몰려들고 관심을 받고자 하고 인기를 끌게 되니까, 역시 아름다움은 권력이야!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권력은 허울뿐이다. 권력인척 가장한 것이다. 만약 한 남자의 말-사귀자, 섹스하자-을 거부한다면 폭력으로 되돌아온다. 상대가 언제든 거침없이 내게 무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내가 가진 권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힘을 발하는가?
스노우화이트로 하여금 이 이야기를 해체하려고 하였으나, 나는 스노우화이트보다 더 전복적인 해체를 지금의 대한민국 젊은 여성들이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코르셋을 착용하지 않겠어. 여성적이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걸 포기하겠어. 탈코르셋은 그야말로 이블의 저주에 맞서는 가장 큰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애초에 더 아름다운 여자가 나타나면 수그라드는 그런 권력이라면, 그게 권력인 것도 아니지만, 그건 가지지 않느니만 못하다.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늙는다. 아름다움이 가진 힘-다시 말하지만, 그건 힘도 뭣도 아니다-은 언제까지 유효할 수 있을까? 평생을 그 저주에 걸려 발만 동동 구르면서 더, 더, 를 외치는 것보다 그 저주의 바깥으로 물러나는 것이 훨씬 자유롭지 않은가. 아름다움으로 경쟁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 경쟁의 승자가 되려하는 게 아니라, 그 경쟁의 바깥으로 물러서는 일. 아니, 나는 싸우지 않아. 싸우지 않는다면, 질 일도 없다.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는 이 책에서 백설공주에 대해 계속 얘기한다. 결국 백설공주가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죽게된 것에 대한 그녀의 수동성에 앞서, 백설공주의 욕망이 계모의 욕망과 얼마나 닿아있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왜 계모가 가져온 빗과 코르셋이 백설공주에게 먹혔는가.
난쟁이들이 경고했음에도 백설 곡주가 여왕의 '선물' 유혹에 기꺼이 넘어감으로써 이야기는 전화점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이야기 전체에서 백설 공주가 드러내는 유일한 이기심은 변장한 살인자가 주는 코르셋의 끈과 빗과 사과에 대한 '자아도취적' 욕망이다. 베텔하임이 말했듯이, 이는 '계모의 유혹과 백설 공주의 내적 욕망이 얼마나 가까운지를 암시한다.' -p.131
화장품 시장이, 성형 수술 시장이, 다이어트 시장이 돈을 쓸어갈 수 있는건, 그것이 아름다움에 대한 여성의 욕망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계모의 빗이, 코르셋이 백설공주에게 무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백설공주의 욕망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걸 거부한다? 아니, 빗 따위 필요없어, 코르셋 필요없어! 라고 외친다면, 아무리 거기에 독을 쳐바른들 내게 무기가 될 수 없다. 탈코르셋은 바로 그 행위를 하고 있다. 네가 권력이라고 이름 붙여 휘두르는 독이 든 무기를 나는 거부한다. 백설공주로부터 시간이 한참 흘러, 지금 대한민국의 여성들은 완전히 백설공주 이야기를 해체하고 있는 거다. 개멋짐..
물론 이들 여자들이 살고 있는 작품 속 가부장적 왕국에서 여왕의 인생이 딸의 아름다움 때문에 그야말로 위태로워진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런 위험을 내포한 여성의 취약성을 감안한다면 가부장제에서 여성의 유대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도 사실이다. -p.127
아직 빗이 그리고 코르셋이 권력인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그것을 가지지 않겠노라 선언하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그 일이 부드럽게 진행될 수도 없을 터. 여성의 유대가 언제나 유대로만 이어질 수 없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가부장적 왕국에서 아름다움 때문에 위태로운 위치에 놓이느니 그 바깥으로 나가버리겠다는 선언, 여전히 가부장제가 견고함에도 불구하고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겠다는 선언과 행동은 정말이지 대단하고 멋지지 않은가. 나는 아름다움은 권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가고 싶다.
아무튼, 오늘 출근길에도 지하철 안에서 나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