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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 비용 ㅣ 데버라 리비 자전적 에세이 3부작
데버라 리비 지음, 이예원 옮김, 백수린 후기 / 플레이타임 / 2021년 3월
평점 :
실리아가 구조에 나섰다. 실리아는 80대 초반의 배우이자 서점주였다. 1월 하순의 어느 날 저녁, 실리아가 자기 집 부엌에 앉아 있던 내게 웨일스어로 노래를 불러 주었다. 나는 실리아에게 웨일스어를 모른다고 말했다.
"나야 웨일스에서 태어났지만 당신은 아니니까요. 근데 노래를 부르면서 실은 당신에게 글 쓸 곳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실리아는 정원 뒤편에 있는 헛간을 가리켜 보였다. 실리아의 남편이자 이제는 고인이 된 훌륭한 시인 에이드리언 미첼Adrian Micthcell이 봄과 여름에 종종 집필실 삼은 곳이었다. 사과나무 바로 아래 지은 헛간이었다. 정확히 3초 만에 나는 월세를 내고 헛간을 빌려 쓰는 데 동의했다. 실리아는 내가 (그의 표현대로라면) "적잖은 식구"를 경제적으로 뒷바라지하는 처지란 걸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우리는 실리아가 각별히 좋아하고 주로 콜라오 섞어 마시는 하바나 럼을 한 잔씩 마시며 서로의 조건에 맞춰 거래를 성사시켰다. 하바나 럼을 마실 때마다 실리아는 쿠바가 이룩한 높은 문해율의 기적에 잔을 들어 건배했다. "참, 그리고 다음에 또 공동 보일러가 고장 나거든 다들 내 집으로 목욕하러 와요." -p,42-43
'데버라 리비'는 이혼한 후 딸 둘을 데리고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갔다. 복도는 음침했으며 따뜻한 물은 수시로 나오지 않았고 짐을 다 풀어 정리할 수도 없었다. 그랬기에 글을 쓸 공간을 아무리 생각해도 마련할 수 없었던 터, 80대 초반의 실리아가 너 글 쓰는 곳 필요하지 않니, 우리 헛간은 어떠니? 제안을 한거다. 글 쓸 공간이 필요했는데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데버라 리비는 당장 계약하고 실리아의 헛간에 책 몇 권을 가져다두고 그곳을 작업실 삼아 글을 쓴다. 이 책도 바로 그 작업실에서 쓴 것이라고 한다. 언덕 위에 있는 집과 작업실을 오가기 위해 전기 자전거도 마련했다. 아침에 일어나 헛간으로 와 글을 쓰고 저녁에는 장을 봐서 자전거를 타고 언덕 위의 집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십대의 딸에게 줄 저녁을 준비한다. 큰 딸은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났다. 그녀와 딸은 좀 음침한 집에 살면서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정기적으로 손님을 초대하기도 하고 이제는 가끔 십대의 딸이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십대 아이들 특유의 수다스러움이 집안을 채우기도 한다. 나는 특히 그녀가 와인을 준비해 자신의 친구를 부르고 딸도 친구를 데려와 함께한 저녁 식사의 풍경이 마음에 든다. 유독 되는 일이 없었고 피곤한 하루였던 그 때가 바뀌던 풍경.
결국 와인을 따기로 정하고 친구 릴리에게 한잔하러 오라고 문자를 보냈다. 딸기 한 상자를 사 들고 온 릴리가 자기 하루에 대해 이야기하며 목욕물을 받아 줬다. 내 딸과 딸의 10대 친구들이 식탁을 차렸다. 아이들은 큼직한 링 귀고리를 하고 입에는 립글로스를 바르고 있었다. 삶에 미치고 삶에 열광하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하는 말은 흥미롭고 예리하고 배꼽 잡게 웃겼다. 얘네라면 세계를 구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다른 건 모두 잊었다. 딸과 딸 친구들과 릴리와 내가 남김없이 먹어 치운 차에 치인 통닭 살처럼, 모두 사라졌다. -p.83
글을 쓰는 사람인 데버라 리비의 먹고 사는 일에 대한, 특히 살아가는 일에 대한 에세이다. 그녀가 만나는 주변의 사람-유독 친절하고 또 다 들리게 흉을 보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기도 하다-들과의 대화, 낯선이들이든 익숙한 이들이든 그녀가 항상 느끼는 남자들과의 '아내의 이름없음'에 대한 단상, 우연히 만난 젊은 여성의 외국어 공부, 자주 마주치는 이웃의 쌀쌀한 오지랖, 그리고 그녀가 읽어온 책들이 단아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들고 인생에 대한 통찰이 반짝반짝 빛난다. 그녀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여성이고, 엄마이고, 딸이고, 친구이고 또 아내였다. 그녀의 어떤 생각들이 그리고 어떤 문장들이 특정하게 나라는 사람을 노린것처럼 확 와서 훅 박혔다. 죽음을 앞둔 엄마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찾아가는 장면이 그랬고 특히나 다시 누군가와 함께할 가능성에 대한 언급이 그랬다.
클라라는 자기 고향에서 만드는 화이트 치즈를 내 딸들이 좋아할 거라고 말했다. 순하고 신선한 치즈였다.
"그래서, 누군가와 같이 또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클라라가 물었다.
"적당한 거리가 있다면요." 내가 대답했다. "장거리라면요."
"아뇨." 클라라가 말했다. "떠나고 돌아오는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서 장거리로는 못살아요. 떠나고 돌아오는 공간에서만도 몸의 세포가 달라지는데요." -p.130
궁극적인 사랑의 목표 혹은 완성이라는 것이 둘이 오래오래 함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따로 있으면서도 그 사이에 물리적 거리가 존재해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거리를 사이에 두고 너와 나의 사랑의 완성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면 역시나 될 수 없는 것이 맞았다. 사랑은 이벤트이기보다 일상이고 조화여야 했던 거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그게 아마도 세상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일 것이다. 클라라는, 떠나고 돌아오는 공간에서만도 몸의 세포가 달라진다고 말한다. 떠나고 돌아오는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서 장거리로는 못산다고 말한다. 나는 클라라의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러나 그렇구나, 떠나고 돌아오는 사이에 많은 일이 벌어질 수 있겠구나 싶다. 떠나고 돌아오는 공간에서만도 몸의 세포가 달라지는건 너무나 당연하겠구나. 떠나고 돌아오는 공간과 시간속에서 우리는 서로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예상치 못한 일을 겪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떠나고 돌아오는 공간에서만도 몸의 세포가 달라진다는 것을 누군가 생각하다니, 그런 말을 해준다니, 그것을 내가 이렇게 글로 읽을 수 있다니, 너무 좋지 않은가? 저 문장 너무 좋지 않아요, 여러분? 나는 뒤로 쓰러질 뻔했네.
내게는 이 책, 살림 비용이 올해의 에세이다. 데버라 리비의 다른 책들을 사서 읽어봐야지. 너무 좋다 진짜루 ㅜㅜ
남자와 아이의 안위와 행복을 우선 순위로 두어 오던 가정집이라는 동화의 벽지를 뜯어낸다는 건 그 뒤에 고마움도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무시되거나 방치되어 있던 기진한 여자를 찾는다는 의미다. 모두가 즐거이 누리는 가정, 순조롭게 기능하는 가정을 짓는 일은 수완과 시간과 헌신과 공감 능력을 요한다. 다른 이들의 안녕을 건설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넉넉한 인심에서 비롯하는 행위다. - P21
자기가 치러야 할 대가가 올그런이 치러야 할 대가보다 크단 걸 보부아르는 알았다. 그리고 결국, 자기는 그런 대가를 치를 사정이 안 된다고 결론 내렸다. 제발 파리를 버리고 시카고로 와 함께 살자고 올그런이 사정했을 때, 보부아르는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난 행복과 사랑만을 위해 살 수 없어. 내 글쓰기와 일이 유일하게 의미를 가지는 곳일지도 모를 이곳에서 계속 글을 쓰고 일을 하는 걸 단념할 수 없어." 글을 쓰면서 행복과 사랑과 가정과 아이도 가질 수 있지는 않았을까? 보부아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게 얼마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일인지 경험했다. - P87
정원사는 어느 대화 상대에게건 오롯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식물을 가꾸는 것에 버금가는 태도였다. 이 식물이 날씨와 토질에 어떻게 반응하고 다른 식물들과 어우러져 살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가늠하는 세심함. 그의 강렬한 푸른 시선을 보고 나는 그가 배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사물과 사람에 호기심이 있었다. 연기란 특이한 직업이라서, 배우는 다른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 안에 거처해야 한다. - P96
헛간에서 메두사 신화를 연구화는 가정에서 내 안에 메두사가 들어앉았다. 메두사가 내 내면에 깃든 게 반길 일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메두사는 막강한 힘을 지닌 여자이자 심기가 거슬린 여자였다. 남성의 시선을 피해 눈을 돌리는 대신 정면으로 되쏘아 보며 맞서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메두사는 신화 중에서도 특이한 경우에 해당하고, 결국 여자가 잔혹히 참수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여자의 머리(곧 마음, 주관, 주체성)와 몸의 분리로. 여자의 머리가 지닌 잠재력이 그만큼이나 위협적이란 듯이 말이다.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위협적인 여성 권력을 끝장내고 남성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에서 메두사를 참수한 것이리라 추정한 바 있다. 그런 메두사가 뜻밖에도 내가 새로이 쓰고 있던 장편 소설로 걸어 들어오기 시작한 거였다. - P97
현대 가정을 둘러싼 변덕스런 정치가 한층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진 터였다. 내가 아는 현대적이고 외관상 힘있어 보이는 여자 중의 다수가 다른 이들을 위해 가정을 꾸리고도 보금자리에서 느껴야 마땅할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집보다도 사무실이나 다른 형태의 작업 공간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후자에선 그나마 누군가의 와이프 이상의 지위를 누리기 때문이었다. - P98
그날 밤 어머니 침대 옆에 앉아 책을 읽다 말고 세면기에 분홍색으로 녹아내린 풍선껌 맛 아이스크림을 회환에 찬 눈길로 바라봤다. 사실 책에 집중할 수가 없어 그저 페이지나 훑고 있던 참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어머니 옆을 지키고 있다는 데서 위안을 얻었다. 그날의 마지막 회진을 돌던 의사가 병실에 들어왔을 때 어머니가 앙상한 손을 들어 보이며 그무렵에 이르러 극도로 작아진 목소리로 용케 고압적이고 위엄 있게 말했다. "조명을 더 가져오라고 하세요. 내 딸이 어둠 속에서 책을 읽고 있잖아요." - P112
몇 주간 골을 내며 냉동고 한끝으로 밀어젖히기만 했던 버섯을 사러 어느 일요일에 잡화점에 들러 보니 터키에 휴가를 갔던 막내 형제가 돌아와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그가 신문에 싼 물건을 선물이라며 건넸다. 포장을 열자 은으로 세공한 격자 무늬 잔 받침과 뚜껑이 달린 희고 자그마한 커피 잔이 나왔다. 그는 내가 예전에 터키 커피를 사면서 유리잔에 마신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유리잔은 차 마실 때 쓰는 거고, 터키 커피에는 이 잔을 쓰는 게 맞거든요." 그가 말했다. 그 잔이 조의를 담은 선물임을 알 수 있었다. - P114
클라라는 자기 도시와 정치관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내게는 질문을 했다. 어디서요, 언제요, 어디서요? 나는 아홉 살 이전에는 아프리카 남부에서 나라는 사람의 정체가 형성되었고, 나머지는 영국에서 내가 직접 빚었다고 말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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