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씨가 그토록 여러 차례 파멜라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한다는 사실은 이 여성이 하인의 몸이나 저명한 가문의 몸에 들어 있는 것과는 다른 형태의 힘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 준다. 리처드슨은 이 여성을 계약의 한 당사자로 만듦으로써 남성이 협상을 해야 하는 독립적인 당사자, 남성이 통제하는 관계 바깥에서 그 관계에 앞서 존재하는 여성적 자아를 암시한다. -소설의 정치사, p.232
낸시 암스트롱은 소설의 정치사에서 '새뮤얼 리처드슨'의 《파멜라Pamela》를 다룬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작품이라며 근거를 드는 것중에 하나는, 사회계약은 남성들만이 그 계약 당사자가 될 수 있는데 파멜라에서 는 귀족인 B 씨와 계약하는 당사자, 협상의 당사자가 '파멜라' 즉, B 씨보다 신분이 낮으며 여성이라는 거였다. 그렇네. 그러보고니 B 씨는 파멜라에게 이러면 되겠냐, 이건 어떠냐 하고 조건을 변형하여 계약을 맺고자 한다. 그러니 낸시 암스트롱 말대로, 한 사람의 여성을 계약 당사자로 본 것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이겠구나 했다. 새뮤얼 리처드슨은 1689년 생이고 파멜라는 1740년 작품이다. 그런데 남자가 여자한테 계약하자고 자꾸 협상을 시도해? 그래, 이건 놀라운 일이겠구나.
'캐롤 페이트먼'의 자신의 책, 《여자들의 무질서》에서 남자와 남자가 맺는 것이 사회계약이었다고 밝혔던 바 있다.
내가
처음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사회계약이 가부장적인 계약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
계약이 아버지들-그들이 동의함으로써 가족이 묶여지는 것이라고 여겨지는-에 의해 맺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범주가 아무나와
누구나를 뜻하는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개인들'은 사회계약을 맺지 않는다. 거기에 여자들의 몫은 없다: 자연적 주체들로서 여자들은
[계약에서]요구되는 수용력과 능력을 결여한 것이다. 이 이야기들에서의 '개인들'이란 남자들이지만 그들은 아버지로서 행위하지
않는다. 결국 이 이야기들은 아버지의 정치적 권력이 패퇴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남자들은 더이상 아버지로서의 정치적인 장소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들은 남편들이기도 하며-로크의 친구 티럴(Tyrrell)은 아내들이 '남편들에 의해 체결된다'라고 적고
있다-또 다른 관점에서, 사회계약에 참여하는 자들은 아들들 내지는 형제들이기도 하다. 계약은 형제들-혹은 형제애적
집단(fraternity)-이 맺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형제애가 자유와 평등과 함께 손에 손을 잡고 출현한 것도, 형제애가
정확하게 그것이 말하는바- 즉, 형제들 간의 사랑(brotherhood)-를 의미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여자들의 무질서, p.72-73
인도의 결혼지참금을 예로 들며 그 지참금은 딸 당사자가 아닌 아버지에서 딸의 남편될 사람에게로 옮겨진다고 지적된게 1976년의 글인데, 남자와 남자의 계약이 사회계약인것은 그렇다면 여전히 유효하지 않은가.
여성들은
결혼할 때 부모의 집을 떠나 매우 멀리 떨어진 남편의 가정으로 들어간다. 젊은 여성들은 일단 결혼하고 나면 죽은 뒤에라야 남편의
집을 떠날 수 있으며 모든 고통과 굴육을 참아내야 한다는 권고를 받는다. 며느리는 새 가정에 적응하려면 늘 최선의 행동을 해야
한다. 며느리는 시가 식구들에게 고분고분 순종해야 하며, 자신이 소유한 물건에 대해서도 사심 없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남편의
가족은 현금은 물론 특별히 지참금 용도로 제작하거나 구입한 보석 및 가정용품을 받는다. 지참금을 딸이 받는 상속 재산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Goody 1976).
이와
관련해서 집고 넘어가야 할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이 있다. 첫째, 지참금은 신부가 아니라 신랑 가족에게 전달된다. 시부모는
지참금의 분배에 관한 완전한 통제력을 갖는다. 둘째, 내가 아는한, 토지는 절대 지참금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여성에겐
재산이 없다. 이른바 그녀의 재산으로부터 아무런 부를 창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젠더에 따라 특정된 성격이
만들어진다. 남자들은 국가 경제에 공헌하고 생계비를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여자들은 남자에게 의존하고, 외부세계에 대해 무지하며, 자녀양육과 가사에 몰두한다. 그런 이유로 여자들은 지나치게 과소평가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바로 지참금 마녀 사냥에서 핵심이 되는 문제다. -페미사이드, p.231-232
그러니 1740년에 쓰여진 파멜라에서 귀족인 B씨가 신분이 낮은 여성에게 거래를 제안하고 거절당하면 또 제안하는 것은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 그럴 수 있겠어, 그런데.
하필이면 그 계약은 왜, 어째서, 파멜라의 처녀성, 섹스, 육체여야 했을까? 내가 돈을 줄테니 너랑 한 번만 자게 해다오, 라고 하는 것을 과연 우리가 계약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인가? 그게.. 계약이 될 수 있어? 설사 파멜라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돈 줄테니 섹스해줘'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일반적 계약으로 볼 수 잇을 것인가? 그것은 여자의 육체(성)를 돈 주고 거래할 수도 있다고 보는게 아닌가. 나는 낸시 암스트롱이 저렇게 장점이라고 짚어주기만 할까봐 애가 탔다. 그래서 화가 나있는데, 몇 장 넘기면 확실히 짚고 넘어간다.
B씨는 파멜라의 몸을 차지하는 대가로 돈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파멜라는 자신의 진정한 가치는 몸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파멜라는 남성들 사이의 교환 체계에서 통용되는 화폐가 아니다. 파멜라가 여러 차례 말하고 있듯이, 이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즉 '여성의 물질적 신체가 아닌 다른 곳에 가치를 둘 생각이었다면, 왜 리처드슨은 장황하고 쉴 새 없는 유혹의 이야기를 지어냈는가?' 파멜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성적 순결에 달려 있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말대로, "여성에게서 정조를 빼앗는 것은 그녀의 목을 베는 것보다 더 나쁘기" 때문이다. 만일 남성이 강제로 여성의 몸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이 비귀족 여성의 목숨 자체를 빼앗는 것이라면, 주인이 자신의 가정에 속하는 사람들의 몸에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살인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권력 행사는 이들의 가치를 파괴한다. 리처드슨은 독자들이 이런 권력 행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정치체제를 비난하도록 만든다.
리처드슨은 이런 방식으로 여성의 몸을 다시 씀으로써 정치적 관계들이 자연스럽고 올바르다고 이해되는 기반을 전복했다. 그가 이런 작업을 하고자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리처드슨이 쓴 유혹의 이야기가 훨씬 더 거대한 문화적 기획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파멜라는 자신의 몸을 소유해야 한다는 주장이 소수파의 견해인 세상에서 자신의 몸을 소유하기 위해 싸운다. -소설의 정치사, p.235-236
리처드슨의 파멜라에 대해서라면 이미 다른 책에서 언급된 걸 본적이 있었고, 무슨책에서 그랬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나지만, 그때 읽어보고 싶어서 전자책으로 사두었었다. 소설의 정치사를 읽기 시작하면서 파멜라가 언급된다는 걸 알고, 오 파멜라네?하고 나는 소설의 정치사와 함께 파멜라도 읽기 시작했다. 편지로만 이루어진 소설인데, 와 초반부터 엄청 재미있다. 며칠전 퇴근길에는 지하철 안에서 이북으로 파멜라 읽는데 너무 재미있더라.
재미있는건 재미있는 거고, 그렇지만 파멜라에게 닥친 시련이 너무 어마어마하다. 파멜라는 귀족의 집에서 주인 마님의 몸종으로 2년째 일하고 있다가 주인 마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난처하게 되었다. 주인 마님의 아들은 B씨가 이 집의 유일한 주인인데 자신으로서는 그렇다면 이곳의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었던 것. 그러나 마님이 파멜라를 어여삐 여겨 공부도 시켰었고 죽기 전에 아들에게 파멜라를 잘 돌보아 달라고 유언을 남긴다. 파멜라는 귀족 B씨의 총애를 받으며 계속 남아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고작 열다섯살인 파멜라에게 나이도 훌쩎 많은 B 씨는 성적으로 다가온다. 강제로 입을 맞추기 시작하는 거다. 1740년에 쓰여진 소설이니 열다섯이면 글쎄 결혼도 할 수 있는 나이였겠지만, 지금의 내가 보기에 열다섯은 너무나 어리지 않은가. 게다가 당시에는 여자에게 정조는 생명이었다. 정숙해야 한다고 순결해야 한다고 파멜라의 부모는 끊임없이 파멜라에게 말하고, 파멜라 역시 절대로 정조를 잃어서는 안된다는 걸 신념으로 삼고 산다. 그러니 B 씨의 육체적 접근이 너무나 무섭고 괴롭다. 도망치고 피하는 파멜라에게 B 씨는 다른 사람 누구에게도 이 일을 얘기하지 말라고 한다. 그 자리에서 도망쳐 정조를 지켰지만, 그런데 이걸 언제까지 이겨낼 수 있을까. 파멜라는 너무 괴로워 부모님께 이 일에 대해 편지를 쓰고, 결국 참다 못해 자신을 딸처럼 어여삐 생각해주는 이 집의 하녀 '저비스 부인'에게 토로한다. 이걸 알게된 B씨는 노여워한다.
"그래서 이처럼 내가 웃음거리가 되어야만 한단 말이냐? 그러냐?" 그가 말했어요. "그것도 내 집에서, 또 내 집 밖에서, 너같이 건방진 풋내기 때문에 온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어야만 하느냐?" - 파멜라, 책속에서
너무... 머저리 같지 않은가.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파멜라가 말하지 않아야 하는게 아니라, 자기가 우스운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된다. 자신의 행동이 먼저였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된건데, 그것이 손가락질 당할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부득부득 그러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바보같음에 어처구니가 없다.
게다가 파멜라에서 아주 짜증나는 지점 한가지는 끊임없이 파멜라의 외모에 대해 언급한다는 거다. 너무 예쁘다는 거, 정말 너무 예쁘다는 거. 귀족 부인들은 그렇게나 예쁘다는데, 하면서 파멜라를 구경하고, 너같은, 너처럼 예쁜 아이는 본 적이 없다는 말을 수시로 듣는다. 한 귀족 부인은 우리집에는 너같은 애를 둘 수 없겠다, 내 남편하고 같이 못두겠다, 라는 말도 한다. 마치 B 씨가 파멜라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이, 파멜라의 몸을 차지하고자 하는 것이 파멜라가 너무 예뻐서이기라도 한것처럼. 저비스 부인 역시도 그 분이 그러는 것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너는 정말 너무 예쁘지 않니.. 라고 하는거다. 그 집에서 같이 일하는 남자 하인들도 '내가 조금만 더 젊었다면 .. '이러는거다. 대환장.. 이 파멜라에 대한 쓸데없이 지나친 외모 칭찬은 강간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는데 힘을 준다.
아, 이 열다섯의 하녀 파멜라, 그 집에서 얼마나 버티기가 힘들까. 잠도 저비스 부인과 이제 같이 자려고 한다. 혼자 있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이 집에서 나가 자신의 집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이 집에서 일을 그만둔다면 자신은 가난으로 곤란해지겠지만, 순결을 잃느니 가난한 것이 훨씻 낫다는 생각을 가진 터다.
그런데 이 열다섯의 하녀 파멜라가 굉장히 영특하다. 그러니까 리처드슨은 위계에서 오는 강간에 대한 개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거다.
"제발 아주머니까지 절 비난하지는 마세요. 아무리 지체 높은 사람이라도 아주 신분이 낮은 자기의 하녀에게 그분 자신이 거리를 두지 않는다면 하녀가 거리를 두기는 정말 어려워요." -파멜라, 책속에서
B 씨를 두둔하며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려는 저비스 부인에게 파멜라는 이렇게 얘기한다.
"그는 첫번째 행동에도 난처해했지만 두번째 행동에 대해서는 더욱더 난처해하고 있단다."
"맞아요." 제가 말했어요. "그러니 그는 세번재, 또 네번째 행동에도 난처해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는 마침내 아주머니의 가엾은 아이를 완전히 망쳐놓게 되겠지요. 그러면 그때 난처해할 이유를 가진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요?" -책속에서
강간을 당한다고 피해자가 망쳐지는 건 아니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지만, 어쨌거나 저 자리에서 파멜라가 가해자의 난처함에 대한 얘기를 듣고 그렇구나, 그렇다면 실수일 수 있겠구나, 라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세번째 네번째에도 난처하겠지! 라고 말하는 것, 그것은 결국 피해자를 난처하게 만드는 일을 벌이게 만들 것이라는 알고 있는게 너무 좋지 않은가. 자, 우리 명민한 파멜라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난 네게 모든걸 다 말해서는 안 되지만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에게 더 중요한 존재야."
"아니면 제가 바라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겠지요." 제가 말했어요. "그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면 그 결과 마침내 전 저 자신이나 다른 누구에게도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될거니까요." -파멜라, 책속에서
아아, 정말이지 말 너무 잘하지 않는가.. 대단하다.. 남녀사이의 일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계속되는 거부에 B 씨는 화가나고 어떻게든 이 예쁜 아이가 갖고 싶어 미치겠다. 결국 이 미친놈은 저비스 부인과 함께 잠드는 바로 그 방에 숨어든다. 벽장에 숨어서는 옷 갈아입는 걸 몰래 지켜보고 그러다 튀어나와서는 옆에 저비스 부인이 있는데도 파멜라에게 입을 맞추고 가슴을 만지고 그걸 계속하고 싶어서 저비스 부인을 그 방에서 내보낼 구실도 만든다. 그러나 너무 놀란 파멜라가 기절해버리고 그 일이 더 진행되지는 못하는데, 아니 얼마나 개똥멍청이가 섹스에 돌아버렸으면 옆에 사람 있는데도 저지랄이야... 진짜 와 없던 정도 떨어지지 않는가.
나는 고작 1권의 29%를 읽었을 뿐이다. 아마 2권 전체까지 하면 10프로 정도 읽은걸텐데, 여태 계속 섹스하자고 막 덤비는 놈만 나오고 파멜라는 계속해서 자기 방어를 한다. 저 방어는 언제까지 가능할까. 저렇게 방어하며 살아야 하는 삶이 얼마나 피곤할까. 여자로 태어난 죄로 열다섯인데 이렇게 온 에너지를 자신을 방어하는데 써야 하다니.. 진짜 좆같지 않은가.
소설의 정치사에서는 B 씨가 끊임없이 파멜라에게 제안한다고 한다. 돈을 줄테니 자자, 이렇게 해줄테니 자자.. 라는 식으로. 그리고 그 때마다 파멜라는 거절을 하고. 와 진짜 피곤한 삶이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이것이 남자가 여자를 계약당사자로 세워둔 일이다!!), B 씨는 변화한다고 한다. 파멜라의 몸이 아닌, 그런 말과 글을 하는 높은 정신을 지닌 파멜라를 알아보고 사랑하게 되는 걸로.
우리는 파멜라가 이 자아를 내어 주지 않을 힘을 얻는다는 오직 그 이유 때문에 자아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 소설의 정치사, p.242
파멜라가 지닌 저항의 힘은 오로지 그녀의 언어에 달려 있다. 파멜라가 말하듯이, "그렇다면, 주인님, 저를 파멸로 이끄는 온갖 수단들을 혐오한다는 걸 보여 주는 것 말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220) 진정으로 "말"은 지위와 막대한 부(富)의 강압에 맞서 파멜라가 행사할 수 있는 전부이다. 그런데 파멜라의 "말"은 그녀가 가진 유일한 힘이기 때문에 훨신 더 강력한 것으로 드러난다. 파멜라를 소유하려고 하면 할수록, B씨는 점점 더 자신의 행동을 그녀의 관점에 내맡기게 되고, 파멜라는 지배문화의 중심부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 지배 문화의 요소들을 자신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자료로 전유하게 된다. -소설의 정치사, p.243
비록 파멜라의 몸을 뚫고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B씨는 작가 리처드슨에게서 글로 씌어진 파멜라의 자아의 비밀을 마음껏 엿보고, 그녀의 글쓰기 행위를 모조리 염탐하고, 그녀의 편지를 중간에서 가로채고, 그녀에게 더 많은 편지의 행방을 밝히라고 강요할 수 있는 허가를 얻는다. 특이하게도 이 소설에서 가장 에로틱한 장면, 아니 어쩌면 에로틱한 유일한 장면은 B씨가 완벽하게 자아가 각인된(self-inscribed) 파멜라를 소유할 때이다. 마치 리처드슨이 전통적으로 매력적인 여성을 글로 씌어진 여성으로 바꾸고서, 마침내 소설관습이 이 여성을 마음대로 다루도록 허용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의 정치사, p.244
그녀의 말과 그녀의 글을 접하면서 그가 변하였고 그리하여 자아가 각인된 파멜라를, 그러니까 파멜라에게 자아가 있다는 걸 인식하면서 그런 그녀를 사랑하게 된 B씨와, 비로소 파멜라는 결혼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결혼해서도 파멜라는 가정의 모범이 되고 사회의 모범이 된다. B씨는 이제 파멜라의 몸이 아닌, 그런 영혼을 가진 파멜라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 파멜라를 다 읽지 않았고, 그리고 솔직히 다 읽을 자신이 없다. 고작 1권의 20프로에서도 널 가질거야 안돼 이렇게 싸우는 것만 반복되는데, 앞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도 한참이나 더 그렇게 된다는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기운이 빠지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싫다는데 그만좀 해라. 재미있게 읽고 있었지만 강간할게 안돼가 계속 반복된다면 나는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게다가 책속에서 B씨는 여성의 얼굴이나 몸이 아닌 여성에게 자아가 있는 것을 알고 그 여성을 들여다볼 줄 알게 되었지만, 이런 변화 자체가 드문 일일뿐더러, 그렇게 변화했다고 그 남자와 결혼까지 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좀 갸웃할 일이다. 무엇보다 내가 알지 않은가. 내가 싫다는데도 나한테 입맞췄던 것을, 내 방에 숨어들어 나를 덮쳤던 것을, 나는 너랑 잘거야 잘거야 잘거야 이렇게 신분이 낮고 힘도 약한 나에게 반복적으로 가했던 폭력을, 내가 알지 않나. 책을 더 읽어보면 아, 그렇구나 사랑에 빠질만하구나, 받아들일만 하구나, 하는 지점을 내가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현재의 나로서는 대체 이런 남자를 무슨 계기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다. 누구나 철없을 때 손가락질당할 어떤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고, 그리고 그 점에 대해 인지하고 고치면서 성장하는 것이겠지만, 그래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길 수 있는 일이 나를 강간하려고 반복해 시도했던 일이라면... 나는 파멜라를 다 읽지 않은 지금, 파멜라가 대체 왜 강간범이 되려고 했던 남자를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받으면서 인간관계는 그리고 사회는 굴러가는거지만 나를 강간하고자 했던 놈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함께살 수 있을까? 그냥 얼굴 보면 날 강간하려던 그때의 너.. 같은 거 떠오를 것 같은데. 아직 다 읽지 않았고, 낸시 암스트롱이 짚어준 파멜라의 긍정적인 지점들에 동의하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이 작품을 남자가 썼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결말이란 생각이 든다. 만약 그게 누가 됐든 여자 작가였다면, 여자가 이런 줄거리를 펼쳐 가고자 했다면, 그 결말을 나를 강간하려고 했던 남자와 결혼해서 부유하고 행복하게 타의 모범이 되는 부부로 살아가는 것으로 그릴 것인가.. 라고 하면 나는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거다.
이와는 별개로, 뭔가.. 자아 각인된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마땅한 것인데 너무 드문 일이다보니까 B씨가 나중에 그렇게 되었다고 하니, 오, 대단한데? 하게 되어버린다. 여자의 자아를 볼 줄 알아? 얼굴과 몸만 보는게 아니고? 짱인데? 이렇게 되어버려. 아아 남자들은 얼마나 하향평준화 되어있는가... 당연한걸로 올려치기 당할 수도 있다니... 여튼 그간 나는 남자들과 연애할 때 그 남자의 자아를 보고 사랑에 빠졌기 땜시롱 얼굴도 몸도 보지 않았었다. 그렇다. 나는 상대의 외모로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래서 내 이상형과 연애할 일이 거의 없긴 했는데, 전완근과 등근육 멋진 남자가 자아도 멋지기를 바라본다... 있나요? 이젠 기운 없어서 연애도 못하겠지만...
전완근과 등근육 너무 좋아하지만 자아를 더 좋아합니다..
방금 아빠로부터 전화가왔다. 오늘 퇴근 후에 아빠가 외출해 없을 수도 있다는 걸 알리려고.
"와서 아빠 없다고 쓸쓸해하지마."
"전혀 쓸쓸하지 않아. 그점에 대해선 절대 걱정하지마."
"거짓말!"
아 빵터졌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상 끝.
지배계급의 남성은 설사 난봉꾼이나 속물의 특성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지만 이 남성의 배우자가 될 여성은 대개 그렇지 못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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