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왜 이 책을 읽으려고 사두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책장 앞에 서서 자, 이제 무슨 책을 읽을까 하다가 이 책을 꺼내들고는 책날개의 작가 소개를 보려고 했다. 그런데 작가 소개 대신 에디터의 추천사가 있더라. 이 책을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놓을 수 없다는 거였다. 아주 굉장한 작품이라고.
자, 여기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남녀가 있다. 그들은 꼬박 일주일을 함께 지낸다. 그 시간동안 서로가 평생 함께해야 할 상대라고 확신하지만 그들에게는 각자의 집과 계획이 있었고, 그렇게 그들은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그러나 그 후로 남자는 여자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여자는 그에게 자신에게 닿을 수 있는 모든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었고 남자는 그녀에게 자신의 페이스북을 알려주었었다. 여자는 수시로 이메일을 보내고 메세지를 보내고 페이스북에 소식을 전하지만, 그가 확인했다고는 되어있는데 아무런 답도 오질 않는다. 친구들은 그냥 그를 잊으라고 말한다. 그가 너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다면 했겠지. 만약 여자가 내 친구였다면 나도 아마 비슷한 얘기를 했을 것 같다. 그는 네가 생각한만큼 너를 좋아하지 않았던것 같아, 가슴아프지만 받아들여, 하고. 그러나 사랑은 사랑에 빠졌던 당사자들만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 둘만 아는 이야기. 여자는 그가 연락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거라고, 분명히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연락하지 않았던 그 진실, 그 진실이 그녀에게 차츰 다가온다.
흥미롭지 않은가?
나 역시 너무 궁금했다. 그가 전화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만약 내가 남자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면, 연락하지 못한 상황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연락하기 싫어서일 확률이 훨씬 크다. 마찬가지로 남자가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면, 물론 그에게 어떤 일이 있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냥 나한테 연락하기 싫어서일 확률이 크다. 그러나 '어 무슨 일이 있나, 왜 연락이 없지'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건 아마 우리 사이에 신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그냥 이렇게 연락하지 않을 리는 없다, 는 신뢰. 그러나 사람의 감정이란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고 변하기도 하는 것인지라, 그 신뢰는 나만 있다고 믿었던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그에게 신뢰가 있었으나 그는 딱히 나를 신뢰하지 않는 상황일 수도 있다는 것.
이를테면 나는 언젠가 연인과 통화하면서
"우린 꽤 안정적인 커플이니까" 를 말했는데, 그 때 상대는 내게
"그렇게 생각해? 우리가 안정적이라고?" 물어왔다.
나는 우리가 안정적인 커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단 한 순간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상대는 오히려 나의 믿음에 대해 갸웃했던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내가 우리 관계에 대해 착각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그를 애정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아서 나는 우리가 안정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나를 향한 마음은 이미 휘둘리고 있어서 그에게 이 관계는 안정적이지 못한거였다.
그러니까 책 속에서의 여자 '사라'와 남자 '에디'의 서로에 대한 마음은 그 크기 혹은 농도가 같지 않을 수 있다. 아냐, 분명 뭔가 있어, 그의 눈빛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고, 라고 내가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표지 날개에서부터 '진실'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으니, 그래, 그들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에디가 사라에게 전화하지 않았던 사정. '진실'이라고까지 말해야 하는 그 무엇. 그게 뭘까. 나는 그게 알고 싶었다.
누구나 집착하는 것, 애쓰는 것, 유독 싫어하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일에서도 그렇고(건지 아일랜드에서는 침묵을 공유할 수 없는 사이를 견뎌내지 못하는 여성이 나온다), 문학작품에서도 그렇다. 이런건 못읽어, 할 수도 있고 이런건 내가 진짜 좋아하는 주제야, 라고 할 수도 있다. 나로 말하자면, 기다림에 집착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림은 그리고 인내는 나의 화두였다. 그 마음이 유지된다면 그것은 기어코 목적지에 닿는다는 믿음이 내겐 있고, 그래서 그 믿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책과 영화를 좋아한다. 지금 당신이라면 좋겠지만 그러나 언젠가의 당신이어도 좋다는, 그런 책들. '파트릭 모디아노'는 그의 책 《지평》에서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서점을 운영한다는 소문을 듣고 여자를 찾아가는 남자를 보여주면서 소설이 끝난다. 그러니까 그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에게 닿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을 나는 좋아한다.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에서는 사랑했던 여자를 마음속 성소에 저장하고 사는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누군가를 품고 사는 이야기를.
'로지 월쉬'의 《전화하지 않는 남자 사랑에 빠진 여자 The Man Who Didn't Call》의 책날개에서 나는 바로 그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일주일간 뜨겁게 사랑하고 상대에 대한 확신을 가졌던 사람들, 그러나 전화하지 않는 남자, 그러나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계속 두드리는 여자. 아, 내가 좋아하는 바로 그 이야기야! 그런데,
하아, 헤어지기 전, 그들이 처음 우연히 맞닥뜨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속삭이고 그렇게 꼬박 일주일을 같이 지내는 그 사랑이야기 부분이 더럽게 재미없었고 짜증이 났다. 아, 나는 로맨스를 너무나 사랑하는데, 왜 이 사랑을 읽기가 싫은가, 내게 계속 물었다. 그것은 내가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책' 혹은 '소설'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거기에는 이야기에 더해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한다고 당연히 기대하고 바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든 간에,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문장이나 혹은 문체나 그런 것들이 이보다 낫기를 바랐다. 이건 이야기였다. 그냥 이야기였다. 앞으로 뭐가 더 나올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읽고 있지만, 너무 지루하고 매력이 없다. 나는 그만읽을까, 관둘까, 때려칠까를 몇 번이나 고민했다. 그러다가도 책날개에서 에디터가 '진실'이라고 말했던 게 너무 걸려서 끝까지 읽자고 마음을 다잡고 다잡았다. 그 진실이 뭔데, 도대체 뭔데, 그 진실이 끝까지 읽었는데 별 거 아니기만 해봐, 진짜 불태워버리겠다, 으르렁- 하는 마음으로 읽었는데, 아,
그 진실은, 에디터가 진실이라고 강조해야 할 무엇이었다. 아, 이거였구나, 이것 때문에 밤을 꼬박 새워 읽었구나,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여기 있구나, 하면서 나는 그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빠져들었다. 아, 이거였어. 아 이제 어쩌나.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하면서 그 진실과 그 진실이 주는 반전 때문에, 그래서 에디터가 이렇게나 흥분한거였구나, 했다. 그러나,
그 진실과 반전이 주는 흥분도 금세 지나갔다. 결말이.. 하아- 해피엔딩이지만, 나는, 이런 식의 해피엔딩 말고는 다른 걸 상상할 수 없는걸까? 좀 식상했다. 사랑도 그렇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남자와 술을 마시고 그 남자의 집에 따라가고 그대로 일주일간 함께 지낸다는 것은, 글쎄, 잘 모르겠다. 내가 읽고 싶었던 건, 그 후였는데. 그래서? 그 기다림은 얼마나 이어졌고, 그 기다림이 어떻게 목적지에 닿았는데? 가 궁금했는데. 이들이 만나서 사랑하고 연락이 없어서 고통스럽고, 진실을 깨닫게 되고, 그렇게 자기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써내고,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까지 모두 일 년안에 일어난다.
장난하냐..
물론 사랑에 빠진 사람이 연락을 기다리는 데에야 일년이 뭐야, 하루도 너무 길다. 한시간도 길다. 왜 연락이 없지? 문자메세지를 보내놓고서도 답이 없으면 수시로, 몇 초 간격으로 확인하게 되지 않나. 상대가 읽었다면 왜 답이 없는지 역시 또 미친듯이 머리 쥐어 뜯으면서 고민하지 않나. 그러니 일 년안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너네 그걸 고통이라고 생각하냐' 라고 내가 경시할 순 없겠지만, 아니 그래도..
행복하게 잘 사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오늘 아침에 가볍게 책 한 권을 주문했다. 어제 원서 읽었더니 영어 실력 나아졌냐는 물음에 아직 아니라고 답하는 내가 싫어서...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야, 장난 아냐. 영어 천재가 됐어. 이제 영어를 가르칠 수 있어!"
그러나 그럴 수 없었고... 그러므로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하냐......... 계속 읽고 천재가 되어야 한다. 다 늦게 천재가 될 수 있냐? 있다. 내가 내 입으로 나 천재라고 말하면 되는거 아닐까. 그 전에 읽기.. 읽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좀 알아보아야할것이다...
역시 나는 책 밖에 모른다.
어제는 퇴근 길에 내가 이렇게 책을 사대는 것은 문제가 심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예전엔 그래도 다섯 권 사면 두 권은 읽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열다섯권 사면 한 권 읽는 것 같다. 무슨 책을 읽을까 책장 앞에 섰다가 내가 샀는지 기억도 안나는 책들이 너무 많아서 깜짝깜짝 놀라며 반성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또!! 책을 사는 거다. 어쩌면.. 이건 병일까?
그래서, 나는 나와 딜을 하기로 했다. 책을 안사기로 결심하는 것은 부질없고 지켜지지도 않는다. 그러니 나는 나와 딜을 한다. 그러니까,
저녁 한끼 굶으면 책 한 권 사기!
이렇게 쇼부를 쳤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러면 도랑치고 가재잡고 누이좋고 매부좋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언발에 오줌누기는 이거랑 안어울리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무튼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 뭐가 됐든 뭐는 된다. 유 노 왓 아 민? 그러니까 봐봐. 내가 저녁을 한 끼 굶어 그러면 상으로 책을 사. 책을 사서 쌓이긴 하겠지만 저녁을 굶는 다이어트를 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저녁을 먹어, 그러면 책을 안사. 다이어트는 실패지만 책 한 권 늘리는 건 막을 수 있다. 이거봐, 뭐가 되든 되잖아?
역시 천재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