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직장 상사와 보낸다. 나는 직장 상사를 곁에서 보필하는 일을 하다보니 보통의 직장인들처럼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동료와 보낸다기 보다는 상사와 보낸다는 편이 맞다. 퇴근 후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들도 존재하지만, 그러나 대부분은 잠자는 시간이다. 이 직장에서 이 일을 오래 했으니 깨어있는 시간을 통틀어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쓰와 보낸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한다. 물론 어린시절까지 꼽아보자면 부모님이 되겠지만.
내 온 신경은 직장 내에서 보쓰에게 집중되어져 있다. 회사를 벗어나면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나는 보쓰의 전화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해두지 않았다. 몇해전만 해도 어린 조카들이 내 전화기를 가지고 놀면서 실수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던 터라, 아예 그런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내가 실수를 할 수도 있을테니 가능성을 제로로 만들어야 한다. 다만 전화가 걸려오거나 문자메세지가 온다면 나는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으니까. 혹여라도 문자메세지가 오면 바로 그 문자메세지에 대해 업무를 처리하고 삭제해버린다.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기 위해서.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근무중에 보쓰로부터 문자메세지가 올 때가 있다. 본인이 받은 문자메세지의 내용을 나로 하여금 파악, 확인 혹은 처리하도록 하기 위해 보내는 거다. 방금전에 문자메세지를 받고 바로 확인과 처리 과정에 이르는 나를 바라보면서, 언제쯤 이 짓을 그만둘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걸 정말 그만하고 싶다. 내가 그 누구보다 보쓰를 신경쓰는 일을 그만 두고 싶다. 내가 깨어있는 시간에 가장 오래 함께 보내는 사람이 보쓰인게 싫다. 여러차례 연애를 반복하면서도 나는 내 애인보다 보쓰를 더 신경썼고, 내 애인보다 보쓰의 성격이나 취향을 더 잘 파악해야 했다. 그 어떤 애인도 보쓰보다 더 긴 시간을 나와 함께하지 못했다. 애인은 내 신경을 건드리면 세이 굿바이를 해왔지만, 그러나 보쓰에 대해서라면 하지 못했다. 먹고 사는 일이 달려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억울하고 때로는 화가 나고 때로는 모멸감을 느껴도, 나는 돌아서지 못하고 여기에 있다. 여기에 있음으로써 가능해지는 것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 것, 그 돈으로 먹고 사는게 가능해지는 것. 내 안에서 이것들이 조율하며 조화를 이루고 또 체념하고 만족하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에 이를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신경줄이 팽팽하게 한쪽으로 기우는 것이 만족스러운건 아니다. 방금 보쓰에게 보고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면서, 이제 문자메세지나 전화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일이 자주 있는 건 아니니까 상징적인 표현일테고, 이제 먹고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신경 쓰는 일은 그만하고 싶다, 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내가 나이 먹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나이 먹도록 해놓은 게 하나도 없네, 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 오랜 시간 일하면서 나는 순간순간의 행복과 기쁨, 즐거움을 느끼며 살았겠지만, 굵직하게 보면 내가 내 일로써 이룬건 무엇인가, 우울해진다. 내가 한 게 뭐 있나, 내가 이뤄놓은 게 뭐 있나, 그저 대부분의 시간을 누군가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살아온 게 아닌가 싶어지는 거다.
일을 벗어나 삶으로 봐도 놓고 마찬가지다. 내가 해놓은 게 뭐가 있지? 내 삶은 어떤 식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거지?
얼마전에 9년만에(어쩌면 8년) 친구와 통화를 했다. 그 친구는 나와 연락하지 않았던 9년동안 혼인신고를 했고 아이를 낳았고 이혼을 했고 지금은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했다. 자신은 돌싱이 되었다면서 괜찮다면 자기랑 결혼하지 않겠느냐고 농담을 했다. 그러나 그 친구가 내게 묻는 모든 것에 나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그 친구가 나랑 만나던 때와 같은 직장,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처럼 싱글이었다. 인생의 굵직굵직한 일들이 친구에게 차례대로 일어나고 있을 때, 나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던 거다. 그 친구는 자신이 나에 대해 알던 모든 것들이 그대로인 것을 확인하고는 놀랐다. 너는 어쩌면 그렇게 변한 게 하나도 없냐, 다 그대로네! 했다. 심지어 목소리까지 옛날과 똑같다고.
정말 그랬다.
나는 그대로였다.
같은 집, 같은 동네에 그것도 모자라 같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 십년이 지나도 변한 게 없네. 어쩜 그럴까. 내가 너무 멈춰있나? 친구와 통화를 마치고나서 계속 생각난다. 한 사람에게 혼인 신고와 출산과 이혼과 싱글대디의 육아가 일어나고 있을 때 나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그 친구는 내게 만나서 술 한잔 하자고 했는데, 그 때 내게 묻는다면 나는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노라 말해줄 만한게 아무것도 없는 거다.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던거지? 분명 열심히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걸으면서 나는 무얼 만난거지? 난 무얼 이룬거지? 이루는 것만이 선은 아니지만, 그러나 내보일만한 것이 대체 뭐가 있는거지?
가뜩이나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오늘 불쑥 보쓰를 마주하고서는, 왜 계속 이 사람이 옆에 있는거지? 하게 된거다.
인생, 뭘까?
얼마전 친구가 정희진 선생님 글을 읽고 있다며 몇 구절을 들려주었다. 갑자기 너무 좋아서 오늘 아침 출근길에는 읽던 책들을 내팽개치고 책장에서 정희진 쌤의 책을 찾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구절을 마주하게 된다.
나이와 욕망과 사회적 지위가 일치하는 사람은 드물다. "마흔셋에 미국 대통령이 된 케네디는 젊지만, 대학교수의 마흔 세살 조교는 그렇지 않다."(늙어감에 대하여, 105쪽 재인용) 이 구절을 읽고 나는 조용해졌다. 여러 상대에게 무릎을 꿇는다. 인생 자체, 몸, 사회, 폭력 ……. 케네디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세 살의 조교"보다 늙었으며, 제 힘에 부치는 일이나 그런 일을 시작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조교보다 케네디와 동일시하며 나이듦을 욕보인다. 지헤와 성숙을 내세우는 이도 있지만 거짓말이다. 이것은 개인의 차이지 나이듦과 무관하다. 나이와 저절로 연결되는 인간 본성은 체력밖에 없다. -p.64
일하는 시간은 짧아졌고 평균 수명은 길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나이에 맞는 라이프 스타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있어 보이는 옷, 품위 있는 취미, 식생활 ……. 결국 돈은 이전 세대, 부모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 인류 역사상 이런 세습 사회가 있었던가.
타인의 시선은 사회적 연령(같은 책 97쪽 재인용)이자 곧 나의 시선이다. 자신에게는 "이 나이가 되도록", 타인에게는 "저 나이가 되도록". 상호 혐오 사회다. 아메리는 《자유죽음》과 마찬가지로 삶, 젊음, 나이듦을 존중하지 않는다. 죽어 가며 살아간다는 진실. 단순하다. 인간은 시간의 피조물일 뿐이고 늙음은 절대 운명이다. 그저 흐르는 시간 속에 홀로 있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를 권한다. -p.64-65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 나쁜게 아닌데, 나는 세상의 기준으로 즉 타인의 기준으로 나를 보려했던 것 같다. 그러니 바깥에서 봤을 때 내게 일어난 큰 변화는 아무것도 없어, 이루어놓은 게 아무것도 없어, 누군가 그 긴 시간동안 무얼 했냐 물어보면 이걸 했다고 내놓을만한게 없다. 그저 성실한 하루하루가 있었을 뿐인데, 성실한 하루하루가 대단한 업적이 되지 않았다고 침울해졌던것 같다. 나야말로 마흔셋에 대통령이 된 케네디를 놓고 나를 판단하려고 했던걸까. '이 나이가 되도록' 내가 한게 뭐지, 며칠에 걸쳐 수차례 질문을 해야했으니. 해놓은게 없으니 답이 안나오는데, 그렇다면 내가 답을 낼 수 없었던 것은, 그 '해놓았다'는 것에 타인의 시선을 끌고 왔기 때문인 것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이룬것이 없다지만 앞으로 십년 후라고 내가 뭐 크게 달라질까 생각하면 그렇지도 않을 것 같다. 그때가 되어도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무얼했나' 또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남들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굵직한 것들을 이루고 변화와 싸우고 있을 때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무얼 했나,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으로서는 앞으로 1,2년 정도 이 직장에 더 다니는 게 어렴풋한 인생의 계획 아닌 계획인데, 사실 실행을 못하겠는 것은 그 뒤를 내가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 뒤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없어서 섣불리 지르지를 못하고 여전히 '언제쯤 여기서 벗어나나', '내 온 신경이 어쩔 수 없이 한쪽으로 쏠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파괴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 다음의 구체적 플랜 없이 뛰쳐나갔다가 죽도 밥도 안될까봐 여전히 신경줄 팽팽한 채로 살고 있다. 내가 원해서가 아닌 그래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나는 가끔 내가 인생의 모든 것들에 대해 뒤쳐졌다, 늦되다 생각을 하곤 하는데, 아마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제속도로 걸어가지 못하는 것 같아 절망하지 않을까. 이런 고민을 정희진 선생님도 한다.
'뒤처진 인생'이란 결국 타인에게 뒤처졌다는 얘기인데, 다른 이들도 똑같이 뒤처졌으므로 덜 괴로워해도 되지 않을까. 더구나 당대 자본은 나이에 맞는 지위가 아니라 어린 나이에 지위를 초과 달성한 이들을 원한다. 어차피 웬만한 사람은 다 '루저'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길을 잃지 않으려고 마스터플랜을 쥐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남들 보기에?" 인생 진리 중 하나는 남들은 나를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결국 자신과의 투쟁이다. 10년을 여관방에서 시나리오만 쓴 영화감독, 기약 없는 무명 시절을 견딘 배우, 20년 습작 시간을 거쳐 마흔에 데뷔한 작가 ……. 삶은 할 일로 채워지는 것이지 안정과 성취는 실상 존재하지 않는 관념이다. 나는 조금 태평해지기로 했다. (p.62)
조급할 일 아닌데도 조급해질 때가 있다. 조급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이것이 내 속도고 이것이 내 방향이라고 잘 알다가도 가끔은 혼란스러워하며 나 제대로 가고 있나, 이 속도로 가도 맞나 자꾸 비교하게 된다. 태평해지기로 했다는 다짐은 본받을만하지만 그러나 그런 삶의 태도가 쉬이 취해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모두가 루저이니 내가 루저인 것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모두가 다 자신이 뒤처졌다고, 이 나이가 되도록 이룬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 아침 책장에서 정희진 쌤 책을 꺼내오면서, 아 읽고 싶은 책이 책장에 꽂혀있어서 생각하는 즉시 바로 꺼낼 수 있다는 삶은 얼마나 좋은가, 생각했다. 커다란 변화 없이 인생을 거쳐오면서 책을 자꾸 사모았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었다. 며칠전에는 필립 말로 다시 읽고 싶어져서 바로 가 꺼내들었다. 커다란 변화는 없이 살았어도 읽고 싶은 책 쌓아가며 조용히, 얌전하게, 소극적으로, 조그많게 살고 있었던 것 같다. 태평해지려고 노력하다가도 조급해지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되겠지.
와인 역시 집 와인 냉장고에 빈자리 없이 다 채워뒀으니 오늘같은 날은 와인이나 꺼내 마셔야겠다. 역시 돈 벌기를 멈출 수가 없다.
조금 지긋지긋하고 조금 외롭다.
특정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다. 인간의 변화는 진저리를 동반한다. 독서에는 반드시 몸의 반응이 따른다. 가벼운 바람도 있고 통곡할 때도 있다. 어쨌거나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성들이 여성학 책을 읽을 때가 대표적인 경우다. - P59
결국 도둑은 집을 나가기로 한다. 그러다 발길을 돌이켜 태연스럽게 묻는다.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도둑은 철조망을 넘어왔다. 시인의 생각은 이렇다. 사람이 보지 않을 때는 거리낌 없이 들어왔지만,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다시 철조망을 넘어갈 수는 없는 존재가 인간이란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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