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에 읽은 프리먼의 <뉴잉글랜드 수녀>가 너무 좋아서 작가의 다른 단편들도 모두 읽고 싶어져, 현대문학에 이메일로 현대문학단편선에 프리먼을 추가해달라는 메일을 써두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주길 바랍니다.. 일단 나온다면 저는 꼭 살거고요, 알라딘의 ㅈㅈㄴ 님도 살거라서 두 개는 확실히 판매 책임집니다... (응?)
그 단편이 너무 좋아서 페이퍼를 쓰니 그 단편 정말 좋았다는 ㅈㅈㄴ 님의 댓글이 있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좋았던 단편, 너무나 인상적인 단편들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는 장편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어떤 단편들은 정말이지 아주 강하게 훅- 들어온다니까. 일단 좋았던 단편은 엊그제도 페이퍼를 썼던 '메리 윌킨스 프리먼'의 <뉴잉글랜드 수녀>
위의 책 《엄마의 반란》에 실린 세번째 단편이다. 오래전에 사랑해서 결혼을 약속했지만 약속한 이후 서로 보지 않는 시간이 14년간 이어졌고, 그 후에 다시 만나 서로에 대한 신의로 결혼을 진행하고자 했지만, 그러나 그 사이에 그들은 변했다. 여자는 자신만의 시간과 자신이 쌓아올려놓은 탄탄한 일상의 반복으로 인해 평온했으며 그 평온을 깨기 싫었고, 남자의 마음은 방향이 다른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은 사랑을 못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러나 시간으로 못나질 사랑이라면 애초에 이어지지 않는 쪽이 나았을 것이다. 여자와 남자가 각자에게 더 맞는 짝 혹은 더 맞는 생활을 찾는데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고 긴 공백이 필요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래도 헤어짐은 헤어짐인지라 잠시잠깐 여자는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이내 답답했던 속이 뚫리고 자신의 평온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아주 오래전 일인데 소개팅을 했던 적이 있다. 소개팅 자리에서 남자는 바로 내게 사귀자고 했고 나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했는데, 그는 그러겠다고 했다. 이제부터 내 고민이 시작되겠구나, 했는데, 웬걸, 그는 집에 가기 위해 지하철역에서 헤어지면서 어떻게 생각은 해봤냐, 사귀겠냐, 고 묻는게 아닌가. 아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생각할 시간을 좀전에 주고 집에갈 때 물어보는게 어딨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는 며칠 주는건줄 알았지? ㅋㅋㅋㅋㅋ계속 자기랑 같이 있었는데 무슨 언제 생각을 하라는거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무튼 집에 가는 지하철이 오면서 나는 그러마고 했고(네?) 그 다음에 데이트를 한 번 더했던가 두 번 더했던가 이 관계를 그만두기로 했는데, 그러니까 나는 그를 처음부터 좋아하지도 않았고 앞으로 좋아해야지, 좋아하기 위해 노력해야지, 라고 생각했던 건데도 묘한 슬픔 같은게 있었던거다. 이에 친구는 몇 번만나지도 않았는데 뭐가 슬프냐? 했는데 나도 몰라? 했고, 어쨌든 그런 묘한 슬픔이 자리잡은 가운데 한 이틀 지나고 나니까 씐남이 찾아왔더랬다. 어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남자는 잠깐 만났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연애들에서도 마찬가지. 헤어지고나서는 당연히 슬펐다. 헤어지고 안 슬플 순 없지. 그래도 사람이 관계를 유지하다 헤어진건데. 그래서 흑흑 슬프다 흑흑 ㅠㅠ 이러다가 또 한 이틀 지나니까, 만세! 이제 앞으로 모든 주말이 내꺼다!! 하면서 또 씐남과 흥분 상태가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뉴잉글랜드 수녀>의 루이자가 잠깐 울었지만 그러나 이내 자신의 평온에 큰 만족을 새삼 느끼게 되는게 뭔지 너무 잘 알겠고, 막!!
이 단편집에서는 <뉴잉글랜드 수녀>가 압권이지만, <엇나간 선행>도 좋다.
단편 이야기를 하자면, '샬롯 퍼킨스 길먼'의 <누런 벽지>를 빼놓을 수가 없다. 크- 진짜 대단한 단편이야. 나는 왼쪽의 링크된 책 《허랜드》에 실린 단편으로 읽었는데 최근에 오른쪽 링크된 책 《누런벽지》가 새로 나왔네.
샬롯 퍼킨스 길먼은 결혼후 우울증에 시달리는데 그녀가 찾아간 정신과 의사는 그녀에게 지적인 활동을 하지말고 집안일에만 전념해야 나을 수 있다고 했더랬다. 하아.. 결국 그녀는 그런 생활을 견디다못해 이혼했고 <누런벽지>속에 그 얘기를 녹여냈는데, 우울증을 앓는 아내에게 집에 있어라, 집에서 쉬어라, 하는 남편이 나오는거다. 이 단편 역시 이야기 자체로 완벽한데, 내게는 <허랜드>보다 더 인상 깊은 작품이었다. 샬롯 퍼킨스 길먼은 <누런벽지>를 완성한 후 그 단편을 자신을 진단했던 정신과 의사에게 보냈다고 했는데, 이게 전해지는 이야기이기만 한건지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만약 보냈다면 통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상이 똑똑한 여자를 얼마나 망쳐버리는지 알 수 있는 단편. 정말이지 압도적이다.
이승우를 읽어본 적 없던 사람들이 내게 이승우를 추천해달라고 하면 내가 가장 먼저 권하는 단편이 있다. 이승우를 읽었더라도 그 단편을 읽은게 아니라면, 나는 일단 그 단편을 읽어보라고 한다. <고산 지대>가 바로 그것.
단편집 《일식에 대하여》에 실린 단편인데, 이 단편은 정말이지 웅장하다. 이승우가 신학대학에 다녔었다는 것은 이승우의 책을 읽다보면 작가소개로 다 알게 되는 것이고, 그의 소설을 여러편 읽어봤다면 그는 종교적인 색채에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죄책감을 책마다 녹여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현재 종교가 없는 나이고, 어릴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중간에 너무 싫어 교회를 뛰쳐나온 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우의 <고산 지대>가 주는 어떤 종교적 숭고함은 너무나 인상적이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랐던 예수의 재현.. 이라고 해야할까. 글을 잘 쓰는 작가라면 작품 내에서의 숭고함을 그대로 작품 바깥으로도 뿜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고산 지대>는 바로 그걸 제대로 해낸 작품이다. 헉, 이게 .. 뭐지.. 하면서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느꼈을 어떤 압도적임, 웅장함, 숭고함 같은 것들이 책 밖의 내게도 그대로 전해진다. 책장을 덮으면 도대체 내가 지금 본 게 뭔가, 싶어지는 단편. 이 단편을 읽고 느껴지는 게 뭔지 어떤 단어로 설명할지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분명 '뭔가 있다'고는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내가 정말 좋아해서 여러차례 읽었던 단편중 하나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컷글라스 보울> 이다. 나는 위의 링크된 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피츠제럴드 단편선1》에서 이 단편을 만났는데, <컷글라스 보울>은 결말에서 확 몰아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여자가 헤어진 남자친구로부터 결혼 선물로 컷글라스 보울을 선물받는데 헤어진 남자친구는 그녀가 자기 대신 다른 남자를 선택한 거에 앙심을 품고 그 보울에 저주를 내리는 거다. 여자는 그 보울을 집 선반 어딘가에 두었는데, 그 보울과 연관되어서는 계속 나쁜 일만 일어나는 거다. 그래서 결국 여자는 '모든게 이것 때문이었어!' 하고는 그 그릇을 처분하기로 하는데.. 두둥-
와, 너무나 놀라운 이야기라서, 결말에 진짜 사람을 밀어 넘어뜨리는 것 같아서, 어쩌면 어떤 저주는 실제로 힘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일들이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 우연은 왜 하필이면 컷글라스 보울을 사이에 두고 발현되는 것일까? 나는 이 단편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회사 동료와 점심을 먹고 돌아오던 어떤 오후에는 이 단편을 요약해 들려주기도 했다.
이 단편집에 실린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도 좋다.
아, 우리 이디스 워튼 님의 단편을 빼놓을 수가 없지요. 단편집 《징구》에서도 표제작인 <징구>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그 다음에 실린 단편 <로마의 열병>이었다. 크- 이 로마의 열병은 내가 읽고 완전 흥분해서 긴 페이퍼를 쓴 적도 있는데, 이 짧은 이야기로 내적 갈등 오지게 오는 순간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나라면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계속 고민하게 했달까. 물론 나의 경우 계속 고민하기 보다는 금세 답이 나왔지만, 쉽지 않은 문제다.
1. 짧은 시간 찐하게 사랑하고 평생 그에게 잊지 못할 여자가 되는 일
2. 평생 잊지 못할 여자를 가슴에 품고 사는 그와 평생 옆에서 함께 사는 일
1번에 놓인 여자와 2번에 놓인 여자가 오랜 시간 후에 만나 한 남자에 대해 얘기하는데, 2번을 살았던 여자는 사실 자기가 2번을 살았던지도 모르는채로 1번 앞에서 '내가 이겼어' 라고 하는 거다. 그러나 1번은 훗, 정말 그럴까? 하게 되는 것. 으앗..
이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사랑은 무엇이고 이김과 지는 것은 또 무엇이냐.. 했던 것이다. 짧은 이야기에 절정이 담겨있다니, 너무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런 단편을 써내는 작가들은! 크-
"그래,
내가 졌다. 하지만 내가 널 못마땅해 하면 안 되겠지. 벌써 오래 전 일인걸. 결국,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은 나야. 난 25년
동안 그이를 가졌고, 네겐 그이가 쓰지도 않은 편지 한 통 빼고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로마의 열병>, p.83)
그녀에게는 정말 '편지 한 통 빼고는' 아무것도 없을까? 정말 그럴까?
정말 그녀가 모든 걸 가졌던걸까? 정말 그럴까?
나는 사실 큰 고민없이 1번을 택하는 사람이긴 한데, 최근에는 그게 다 무어냐, 다 부질없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만 편지... 정말 몰랐어요, 사랑이란 유리 같은 것, 아름답게 빛나지만 깨어지기 쉽다는 걸... 뭐 그런 생각이 들고 그러는 것입니다? 어쨌든 <로마의 열병>은 훌륭하다! 만세!
좋았던 단편에 대해 얘기하면서 내가 어떻게 <지옥 천국>을 빼놓을 수 있겠어요..어떻게 그러겠어요...
《그저 좋은 사람》에 실린 '줌파 라히리'의 <지옥 천국>은 내가 너무 좋아해서 읽고 또 읽었던 단편이고 이 단편이 너무 좋아서 원서를 사기도 했다. 그렇게 <지옥 천국>의 아무 부분이나 원서를 펼쳐두고는 여기는 어떤 부분인가, 보고 그랬던 거다.
크. 이 단편 속에는 너무나 인상적인 표현인 '순전한 행복'이 나온다. 여자아이가 엄마의 설레이는 마음을 보고 짐작하게 되는 것. 자기들이 태어난 것까지도 그것은 그저 인생의 자연스런 흐름에 불과했기에 그렇게까지 기쁘지 않았겠지만, 갑자기 등장한 프라납 삼촌, 그러니까 진짜 삼촌이 아니라 미국에 와 살면서 만나게 된 동향의 젊은이, 그렇게 이 가족에게 다가와 친해진 젊은이에 대해 엄마가 품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거다.
그는 엄마에게 처음이자 유일한, 순전한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태어난 것도 엄마를 기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엄마에게 아빠와 결혼했다는 일종의 증거물이었고, 배운 대로 사는 삶이 낳은 예상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프라납 삼촌은 달랐다. 삼촌은 엄마의 삶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즐거움이고 기쁨이었다. <지옥 천국>, p.85
아니, 저런 문장이 있는 단편을 도대체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어떻게... 줌파 라히리는 진짜 짱입니다, 짱이에요. 최고!!
<지옥 천국>이 나의 패이버릿 이기는 하지만, 《그저 좋은 사람》에 실린 연작 단편 중 헤마와 코쉭의 이야기인 <뭍에 오르다>도 좋다. 나는 너무너무 좋아한다. 진짜 좋아한다. 너무 좋아해서 가만히 읽고 또 읽기도 하고, 갑자기 책장에서 원서를 꺼내서 휘리릭 넘겨서 이 문장은 어떻지, 하고 찾아보기도 한다.
"그러면 왜 그 사람이랑 결혼하는 거야?"
그녀는 그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이제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진실이었다. "여러 가지 일들을 바로 잡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는 더이상 묻지 않았다. (p.378)
나는 헤마가 결혼을 하려던 이유가 '여러 가지 일들을 바로 잡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 라고 말하는데에 정말 뒤로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쓰나요, 줌파 라히리 님?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진짜로요. 그리고 헤마와 코쉭의 이야기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정말 저것 말고도 많지만, 이런 문장도 있다.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어. 어머니와 이모들이랑 나가서 블라우스를 가봉하고 장신구들을 골랐어. 사리 상점에서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얇은 푸통 위에 앉아 콜라를 마시고 양고기 롤을 먹으면서 남자들이 보여주는 물건들을 구경했어. 나는 다 좋았지만 빨간색 베나사리를
입겠다고 했어. 하지만 그러는 동안 나는 네 생각만 했어. 내가 실수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하면서. 아직 약간 시차가
있었고, 우리 둘이 함께 먹던 음식들과 좋은 커피와 와인이 너무 먹고 싶었어. 트라이앵굴라 공원에 있는 부모님의 아파트로
돌아오면서,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에서 난 바보처럼 네 얼굴을 찾았어. -<뭍에 오르다>, p.400
아, 너무 숨막히지 않나.. 아 숨이 막힌다. 너무 좋아서 숨이 막혀.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에서 난 바보처럼 네 얼굴을 찾았어. 이거 안해본 사람 없지 않나요? 아 숨막혀..
줌파 라히리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축복 받은 집》에 실린 단편 〈섹시〉도 무척 좋다.
아, 좋은 단편들에 대해 얘기하노라니 너무 좋구나.
내친 김에 올해를 정리하는 페이퍼를 써볼까 하는데, 나에게 에너지가 남아 있을 것인가. 두둥-
쓸까말까 쓸까말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움화화핫.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