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여름만큼이나 겨울도 좋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나는 추위에 약한 편이 아니라서인지, 퇴근후 바깥 바람을 맞으면 살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무척 좋다. 어제 치킨을 먹으면서 이 얘기를 했더니 엄마는, 하루종일 사무실에 갇혀 있다가 바깥에 나오니 왜 안그렇겠느냐 하셨다. 아아,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보부아르가 말한 그거 아닌가, 이 한 잔의 물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나의 갈증!
고착되어 있는 순간은 결코 새롭지 않다.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순간은 새로워진다. 바로 지금 출현한 형태는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배경이 뚜렷하고 분명해야만 자신의 모습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나무 그늘의 시원함이 귀중한 것은 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대낮의 길가에서이다. 휴식은 고된 일과를 마친 뒤의 편안한 긴장 이완이다. 작은 산꼭대기에서 나는 내가 돌아다녔던 길을
바라본다. 내 성취감의 기쁨 속에 현존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길 전체이다. 이 휴식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보행이다. 그리고 이
한 잔의 물을 귀중하게 만드는 것은 나의 갈증이다.- 《모든 사람은 혼자다》, 시몬 드 보부아르, P33
오늘은 오늘의 해야할 일이 있고 그것은 나의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월요일에도 역시 월요일의 스케쥴이 있고 그런 일들 없이 직장생활 하면 안될까 싶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것은 콧노래를 절로 나게 하는데, 사실 뭐 금요일이 아니어도 나는 콧노래를 잘 부르는 편이고, 베이킹 할 때면 늘 흥얼대서 그런 나를 보고 엄마는 "너는 빵 구울 때 너무 행복하니?" 묻기도 하셨다. 하하하하하하하하. 그렇게 출근을 했고, 출근 하자마자 해야 할 일들을 마치고, 업무를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남고, 나는 이 시간을 너무 사랑하고, 나는 또 요즘에 내가 얼마나 바깥을 사랑하는지 깨닫고, 외투도 없이 정원으로 나간다. 커피를 한가득 내려서는.
바람을 맞으면서 아 시원하다, 고요한 이 아침, 너무 좋네, 커피도 좋아, 울고 싶을 정도로 행복한데, 나는 오늘 음악도 듣는다. 심규선의 앨범이 새로 나온다고 해서 듣다가 그만 보관함에 있던 노래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고, 아아, 이 고요한 아침, 나는 감성에 젖는다. 에피톤 프로젝트가 <연착>을 불러주기 때문이다. 님이여...
아니, 이 노래가 이렇게나 좋았던가. 바람을 맞으며 아무도 없는 아침에 혼자, 커피를 마시면서, 노래를 듣는데, 아아, 나는 이 노래를 듣는 순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가있다. 아, 나여...
에피톤 프로젝트... 내 페이퍼 보고 가사 쓰는걸까? 어쩜 이런 가사가 나와, 어쩜...
안녕이라는 말로 다 못해
너 때문에, 내 마음만 뭉클거려서
그래, 여기까지 나는 왔어
너 때문에, 보고 싶은 마음 꼭 안고
서투르지 않게
출발이 좀 늦었지만
기다려줄래
나는, 널 향해 가고 있어
마음 막 벅차올라
보고 싶었다고 말할까?
아니 더 근사하게
사랑한다 말해볼까?
마음 막 벅차올라
눈물 날 것 같다 말할까?
어쩌면 이 순간을
너무 오래 기다렸다고
안녕이라는 말로 다 못해
너 때문에, 내 마음만 뭉클거려서
그래, 여기까지 나는 왔어
너 때문에, 보고 싶은 마음 꼭 안고
서투르지 않게
출발이 좀 늦었지만
기다려줄래
나는, 널 향해 가고 있어
마음 막 벅차올라
보고 싶었다고 말할까?
아니 더 근사하게
사랑한다 말해볼까?
마음 막 벅차올라
눈물 날 것 같다 말할까?
어쩌면 이 순간을
너무 오래 기다렸다고
얼마나 기다렸는지, 너를
어찌나 보고 싶은지
어쩔 수 없는 내 마음은,
이만큼 오랜 시간 그리워했는지
저, 새벽 어스름 견디고
나는 네게 가고 있어-
아아, 이렇게 행복해도 좋은것인가, 답답한 일정들을 앞에 쌓아두고도 나는 행복하다. 이 순간이 너무 좋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커피를 마시면서 바깥바람을 쐬는 이 순간이 너무 좋다. 너무 좋아 ㅠㅠ 다시 업무를 시작해야 하지만 이 순간이 좋다. 사무실 문 열고 정원으로 나가서 바람을 쐴 수 있는 거 너무 좋고, 내가 내린 커피가 있고, 에피톤 프로젝트의 연착이 있다.
크- 아니 저 가사를 보라지.
출발이 좀 늦었지만 기다려줄래 나는 널 향해 가고 있어 ㅠㅠㅠㅠㅠㅠ힝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보고싶었다고 말할까 아니 더 근사하게 사랑한다 말해볼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눈물날것같다 말할까 ㅠㅠㅠㅠㅠㅠㅠㅠㅠ눈물날것 같다는 말은 내가 들었던 말이기도 하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이만큼 오랜 시간 그리워했는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 금요일 아침 나의 마음 촉촉해진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나는 네게 가고 있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랬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네게 가고 있다. 결과적으로 항상 네가 왔지만, 나는 늘 가고 있었어. 이것이 나여... 나다. 나란 말이야! 에피톤 프로젝트 차세정님, 이런 가사 써주어서 고마워요. 출발이 지연된다고 해서 당황했던 2017년의 여름이 생각납니다. 낯선 나라에 도착했을 때 나가는 길을 찾느라 헤매이던 때가 생각이 나고, 가까스로 찾아서 입국 수속 받고 나갔을 때, 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도 생각이 납니다. 서로를 발견하고 우리는 끌어안았지. 아 그만하자, 오늘 이 아침, 행복한 마음 그대로 간직해. 울지 말자. 그렇지만 슬픈건 아니야. 인생에 그런 시간을 갖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 큰 축!복! 어떻게 그런 인생을 살았지? 대단하다, 정말 대단해. 아름다운 시간들이 내게 있었어. 여기에서부터 꽃다발을 챙겨간 내가 있었다. 아, 좋은 시간이었다. 그만해, 빠져나와, 더 과거로 들어가기 전에 빠져나와, 빠져나와랴 슝슝- 뿅!
아침에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스맛폰으로 북플에 들어갔다가 이규리의 시집이 새로 나왔다는 걸 알게 됐고, 크- 아니, 너무 좋잖아? 장바구니에 쏙- 밀어담고, 트윗에 들어갔다가 그러고보니 일전에 심규선이 앨범 새로 발표했다고 한 게 생각나 검색했다. 심규선의 앨범은 음원으로만 나온 것 같다. 그래서 들어보았다. 오늘 또 앨범이 새로 나온다고 하니 들어봐야지.
삶은 이런 순간들로 연속되는 것 같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들을 기다리면서. 이규리의 새로운 시집을 볼 생각을 하니 너무 씐나네. 하하하하. 제목도 <당신은 첫눈입니까> 라니. 너무 좋다. 이 겨울에 맞춤한 시집일 듯! 여러분, 시를 읽자!!
세상에.
그러고보니, 소설 읽어, 여성학 읽어, 철학 읽어, 시 읽어, 음악 들어, 커피 내려, 빵 만들어, 플랭크 해(네?), 여행도 해..와... 뭐 이렇게 부족함 없는 인간이냐, 나는... 삶의 천재네. 일상의 천재다.
그럼 이만.. 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