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올해 1월에 한나 아렌트에 관한 책을 읽고 한나 아렌트에게 너무 푹 빠져서 이 책을 읽으려고 계속 마음먹고 있었는데, 너무 읽고 싶어서 자꾸 뒤로 미루게 됐다. 읽던 소설책이 지지부진하고 지루하고 도저히 끝날 것 같지가 않아서 매우 초조했다. 한나 아렌트의 말 읽고 싶은데... 결국 다 끝마치지 못한 채로 어제 이 책을 들고 외출을 했고, 지하철안에서 펼쳐 읽으면서 뭔가 땀 많이 난 육체에 포카리스웨트 부어주는 느낌이랄까. 막 너무 좋아서, 으윽 정말 좋다, 했다.


나보다 이 책을 먼저 읽었던 친구는 내가 이 책을 딱히 좋아하지 않을거다, 한나 아렌트의 어떤 말들에 내가 실망할거다, 라고 얘기해주었더랬다. 나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쨋든 읽자, 하고 시작했는데, 친구가 내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를 다음의 문장을 보고 알아챘다. 여성주의에 대한 말이었다.



사실 나는 상당히 고루한 사람이에요. 세상에는, 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 여성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여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들이 있다고 늘 생각해왔어요. 여자가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모습은 그냥 보기가 좋지 않아요. 여성스로운 존재로 남아있고 싶은 여자는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으려고 애써야 마땅해요. 이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여부는 나도 몰라요. 나 자신은 거의 무의식적으로-아니, 거의 의식적으로라고 말하는 편이 낫겠네요-늘 이런 사고방식에 부합하게 살아왔어요. 개인적으로 이 문제는 그 자체로는 내 인생에서 아무런 역할도 수행하지 못했어요. 단순하게 말해, 나는 늘 내 마음에 드는 일들을 해왔어요. -p.23


한나 아렌트는 여성해방women's emancipation을 자신의 문젯거리라고 생각한다. 여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 있다고 생각하고 여자가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한다. 나는 물론 그녀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정체화하고 여성주의에 관심을 갖고 여성해방에 힘을 쏟는 사람이었다면 더 좋았을거라고 생각한다. 한나 아렌트는 매우 큰 사람이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니 만약 페미니스트였다면 여성주의에 더 힘을 실어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녀가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또 이래라저래라 하는 여성의 모습을 올바르지 못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고 해서 내가 그녀에게 실망하거나 그녀를 싫어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한나 아렌트이고 아이히만의 재판을 직접 가서 보고, 사유하고, 책을 쓰고, 최종적으로 살았던 미국에서는 매우 인기있는 대학교수였다. 이런 것들이 변하지 않는다. 나는 이 행동, 천재적이고 사유를 하고 강연을 하는 등의 이런 행동들로 자신의 이름을 드높인 여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좋다. 그녀가 후대에 이름을 남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철학자가 아닌 정치이론가라고 불러줘, 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 자체로 그녀가 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한 사람의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면서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드러낼 수 있었던 그런 행동을 우선시한 사람. 나는 이런 여자들이야말로 세상에 더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만으로 다른 여자들에게 본보기가 되니까. 올해 1월 한나 아렌트를 읽으면서 나는 정치이론가의 자리에 그녀의 이름이 있고, 그녀의 책이 여전히 읽힌다는 게 좋았다. 너무 좋지 않은가? 나는 이런 행동에 반한다. 이런 행동을 취함으로써, 실제 행동을 함으로써 어떤 자리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여자라는 것, 그것 만으로 나는 한나 아렌트가 진짜 너무 좋은 거다. 



이수정 박사님도 그러한데 이수정 박사님도 오디오방송이나 인터뷰에서 본인이 여성주의자라고는 정체화하지 않으신다.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고 얘기하신다. 그러면서도 대한민국에서는 그 누구보다 이름을 알린 프로파일러가 아닌가. 나는 한나 아렌트와 이수정 박사처럼 '나는 **이다'라고 말로 자신을 정체화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걸 보여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말보다 행동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말로는 무엇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자기정체성은 사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다. 말보다 행동이고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기 때문에, 내가 어떤 사람이다 정체화하는 사람들, 이를테면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야, 나는 불의를 보지 못해, 나는 한결같은 사람이야, 나는 용감한 사람이야, 라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좋다. 행동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하는 많은 남자들을 보았지만 그들이 실제로 여성의 인권을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아무것도 본 게 없다. 말로는 뭔들 못할까.



말이 아닌 행동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중요하다. 나는 너를 아껴, 너를 사랑해 라는 말들. 말로는 하늘의 별도 따다줄 수 있다. 그러나 행동은 사람을 움직인다. 너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오고, 너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너에게 맛있는 걸 사주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고, 너에게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너의 옆에 오래 머물기 위해 운동을 하고. 이런 행동들이 사랑을 보여주지 나는 너가 너무 좋아서 하늘의 별도 따다주고 싶어, 라는 말은, 별을 한 개도 따오지 못한다면 말짱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그런 남자들에게는 언제나 정나미가 떨어졌다. 무수히 말, 말, 말을 하는 남자들. 연애를 시작할 때, 연애의 도중, 세상 달콤한 말들을 주절대지만, 그러나 스스로의 행동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 말보다 행동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준다. 한나 아렌트와 이수정 박사는 내가 어떤 사람이다, 라고 말로 드러내는 사람이기 보다는 행동으로 어떻게 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고, 나는 정말이지 이런 사람들이 자지러지게 좋다. 그리고 결국 내가 추구하는 바도 이런쪽이다. 나는 말로만 그치는 사람이기 싫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고, 내가 말하는 바에 일치하는 행동을 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러고자 한다. 또한 말을 수십개 해놓고 지키지 않는게 세상 꼴보기 싫어서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내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하지도 않을 것들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한다. 




사람이 자의식에 사로잡혀 공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고 행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사람은 그가 보여주는 모든 행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아요. 말하기도 행위의 한 형태예요. -p.71



아, 진짜 너무 좋지 않은가. 말하기도 행위의 한 형태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은 옳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행위에 속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말을 해놓고 그 다음을 어떻게 하느냐를 보여주는 것이 행위의 한 형태라고 본다. 그래, 나는 너를 위해 하늘의 별을 따줄거야, 라지만 별따러 하늘을 가지 않는다면, 하늘의 별을 따주겠다는 말하기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주는 한 형태가 아닌가. 아, 나는 한나 아렌트가 너무 멋지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에 대한 책을 하나씩 사서 모으고 죄다 읽어보고 싶다. 천천히. 































저기 두번째 링크의 전3권 셋트..깔맞춤으로 사고 싶은데 읽어본 사람들이 도저히 읽히지 않는 문장들이라고 한다. 한나 아렌트 책은 다른 책들도 그렇고 번역이 별로라는 평들이 워낙에 많다. 한나 아렌트 자체가 워낙에 어려운 문장들을 써서 그것들을 제대로 옮겨내는 게 쉽지 않다고 하는데, 나는 과연 읽어낼 수 있을 것인가.. 좋은 번역이라고 평을 얻는 작품이 있다면 그걸 먼저 읽어 보고 싶다. 내가 1월에 읽었던 이 책은 좋았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것 같은데, 그래서 그렇게 잘읽혔나...


















위의 책을 읽고 쓴 페이퍼는 여기 https://blog.aladin.co.kr/fallen77/11436712



그리고 얘들아 이것봐...




칸트를 읽고 키르케고르 읽고 야스퍼스 읽었던 한나 아렌트 나이 열네 살... 아아, 인생이란 무엇인가 사람이란 무엇인가 천재란 무엇인가 보통 사람이란 무엇인가..나는 위의 부분을 읽고 너무 놀라서 ..열네살에 뭐라고요? 내가 열네살에 무엇을 읽었는지 생각해보았다. 늘상 책을 읽는 나란 아이, 열네살에 버지니아 앤드류스의 다락방의 꽃들 시리즈를 마스터했고... 그렇게 내 닉네임은 다락방이 되었고....그 책내용은 다락방에 갇힌 아이들, 독약을 먹여 아이를 죽이는 엄마, 그리고 근친상간.... 꼬꼬마 다락방 어릴 때 도대체 어떤 책을 읽은거야. 한나 아렌트를 봐, 키르케고르를 읽었대잖아. 키르케고르라면, 나는 아직도 안읽어봤는데. 아아. 그래서 한나 아렌트는 한나 아렌트이고 다락방은 다락방인가 봅니다.....







토요일인 어제는 친구를 만났다. 친구를 만나 대화하는 과정에서 내가 가진 트라우마가 내 생각보다 더 크게 자리잡고 있다는 걸 알았고,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한 상처와 스스로에 대한 원망이 내 안에 있다는 것도 들여다보게 됐다. 결국 나는 울었고, 친구는 나를 달래주다 함께 울었다. 어린 시절의 어떤 한 순간에 갇혀서 어쩌지를 못하고 괴로워하는 나를 달래주며 친구도 안타까워 울었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 이것에 대해서 분명히 극복을 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 전문가를 찾아가는 것이 좋겠구나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내가 최근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게 한 권의 책 때문이라는 얘기를 친구에게 했는데, 친구도 이미 그 책을 읽었다고 해서 너무 씐났다. 내가 읽은 책을 친구도 이미 읽었다니. 이런 일은 너무나 신나고 경이롭지 않은가. 만세!

















친구와 스테이크에 와인을 먹고 기분좋게 레스토랑 1층에 자리한 까페로 내려왔다. 따뜻한 커피와 티라미수를 먹다가 문득 하늘을 보았는데 너무 예쁜거다. 나는 부랴부랴 달려나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내 옆에서는 한 젊은 여자가 나처럼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름다운 하늘에 대한 감탄과 옆에서 함께 사진 찍는 낯선 여자에 대한 어떤 동지의식이 느껴져셔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다락방: 이렇게 예쁜게 사진으로 잘 안나오네요.

낯선그녀: 눈으로 보는 만큼 안나와요.

다락방: 저기 달 떴어요!

낯선그녀: 정말이네요!



너무 씐나는 저녁이었다.





쓰고 싶은 말이 더 있는데 엄마가 냉면 해놨다고 부르셔서 냉면 먹으러 간다. 쓩-

아, 그리고 마음의 문을 닫기로 한다. 빗장도 건다.








내 기억력이 내 생각을 모두 기억할 정도로 좋다면 나는 글 쓰는 작업을 하지 않을 것 같아요. 나 자신이 무척 게으른 인간이라는 걸 잘 아니까요. 나한테 중요한 것은 사유 과정 자체예요. 나는 무엇인가 철저히 사유하는 데 성공할 때 개인적으로 상당한 만족감을 느껴요. 내 사유 과정을 글로 적절하게 표현하는 데 성공할 경우에도 만족감을 느끼고요.
내 저작이 남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물어봤죠? 비아냥조로 말하자면, 그건 마초적인 질문이에요. 남자들은 늘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존재가 되고 싶어 해요. 나는 남자들의 그런 성향을 이를테면 허울만 그럴싸하지 실속은 없는 문제로 봐요.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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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7-26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위의 분홍색표지 <한나 아렌트>를 읽어보려 했는데, 왜 그 책이 만화라고 생각했을까요? 실망입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 한나 아렌트 매력 넘쳐요. 그 자리에 있어준 것 만으로도 대단하지만, 그냥 사람 전체가 매력 넘쳐요. 하이데거와의 씬 빼고 전부요.

수이 2020-07-26 20:32   좋아요 0 | URL
하이데거와의 씬조차 저는 좋았어요, 나 변태인가;;

단발머리 2020-07-26 21:10   좋아요 1 | URL
진짜 그런가? 하고 댓글 달면 나 변태인가 : )

다락방 2020-07-27 07:48   좋아요 1 | URL
한나 아렌트 너무 좋아요! 저는 감히 한나 아렌트처럼 될 순 없겠지만(천재도 아니니까 ㅠㅠ) 한나 아렌트처럼 되고 싶어요. 행동으로 보여주고 실천하는 사람요.
저는 하이데거와의 씬 싫지만(그래서 링크된 거에도 엄청 하이데거 까놨죠! ㅋㅋ) 우리는 누구나 어릴 적에 나쁜 사랑 한 번쯤은 해보지 않나 싶으면...(저만 그랬을지도..) 이해되는 부분도 있고 그래요.

저 분홍색 책은 만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잘 읽혀요. 한나 아렌트 입문서로 매우 좋습니다. 오히려 [한나 아렌트의 말]이 더 어려워요. 히융 ㅠㅠ

공쟝쟝 2020-07-28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표지속 그의 모습이 더 놀랍습니다.. 뭔가 진짜 포스 작렬이당🦖

다락방 2020-07-28 11:32   좋아요 1 | URL
저도 포스 작렬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우리 포스를 품고 살아갑시다. 으르렁-

공쟝쟝 2020-07-28 20:27   좋아요 0 | URL
크르렁!!!!!

라로 2020-07-29 0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멋져요! 글은 더 멋지고!!

다락방 2020-07-29 08:55   좋아요 0 | URL
으하하핫 감사합니다, 라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