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에 들어갔다가 눈에 보이길래 흑백사진 한 컷 가져왔다.
흑백이 주는 느낌이 좋다. 여긴 어딜까.
취미로 사진 찍는 사람이 인터넷엔 넘쳐 나서, 구경거리가 많다.
순간을 담는 예술 장르.
순간을 영원으로 간직하는 사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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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m 달리기 출발선 앞에 두 명의 여학생이 뛸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중 한 여학생의 얼굴에 유난히 긴장의 빛이 감돈다. 기록 때문일까? 승부욕이 강해서일까? 아니다. 누가 봐도 안예쁜 그는 누가 봐도 예쁜 상대 여학생의 미모가 부담스럽다. 달리기에 지면 “못생긴 게 달리기도 못한다”고 할 테고, 이기면 “독한년” 소리를 들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땅! 출발. 달리기 하나에도 걸림돌이 되는 외모. 달리기는 곧 끝나겠지만,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는 끝이 없다.

파란닷컴에 연재 중인 만화 ‘삼봉이발소’의 한장면(그림 아래)이다. 외모에 심각한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이 ‘외모 바이러스’에 걸려 발작을 일으키고, 이발사 삼봉이가 그들을 치료하러 다닌다. 치료법은 대화. 무엇 때문에 힘들었는지 고민을 찬찬히 얘기하고 나면 삼봉이가 이발을 해주고 거울에는 ‘외모지상주의’라는 안경에 가려졌던 그들의 진짜 모습이 나타난다.

삼봉이발소는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만화로 입소문을 타면서 갈수록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회당 조회수는 20만번에 육박하고, 팬들이 그림을 그려 바치는 ‘팬아트’도 등장했다. “새 만화가 올라오는 수요일까지 기다리기가 힘들다”는 댓글들을 보면 공중파 드라마 인기가 부럽지 않다.

만화를 그린 하일권씨(24)는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려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저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외모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고 했다. ‘외모에 대한 이야기’가 곧 ‘외모지상주의 비판’이 된 건 만화가의 실수도, 독자들의 오독(誤讀)도 아니다. 탓은 모든 사람을 미인이거나 추물이거나로 구분하는 세상에 해야 맞다. 조사에 따르면 10대들의 절반 이상이 성형수술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작가가 삼봉이발소를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만화로만 보는 것에 섭섭해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만화는 못생긴(혹은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위로하지 않는다. 작은 노력도 없이 예쁜 사람만 대접받는 세상을 원망만 하지는 않았는지 묻고, 그런 세상을 욕하면서 스스로도 외모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는지 되짚어보게 한다. 만화 속에서 한 여성이 면접에서 떨어진 진짜 이유는 사각턱 때문이 아니라 자신없어 보이는 표정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예뻤던 여학생은 ‘예쁘니까 생각도 없고 돈많은 남자만 좋아할 것’이라는 편견에 괴로워한다.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를 유혹했다는 오해를 받고 뭇매를 맞기도 한다. 못생겼거나 잘생겼거나, 그들은 모두 겉만 보는 시선의 피해자들이다.

삼봉이발소는 대학생인 작가의 첫작품이다. 작가는 “원래 괴물에 맞서는 영웅의 이야기를 그리려 했는데 그리다보니 감성적인 이야기가 됐다”며 웃었다. “괴물을 설정하다 자연스레 추한 외모를 떠올렸고, 왜 꼭 괴물은 추해야 할까 하는 자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작가의 첫마음과는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독자들은 읽는 내내 싸우고 있다. 못생기면 반성해야 하는 마음 속 괴물과.

〈장은교기자〉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S2D&office_id=032&article_id=0000200691&section_id=103&section_id2=243&menu_id=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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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블리오테라피. ‘독서치료’를 이르는 말이다. 책을 읽음으로써 마음을 다스리고 정신을 일깨우며, 자기신뢰를 회복하고 삶의 전망을 얻는 것, 독서에는 그런 치유의 힘이 있다.

철학자 김용규씨가 쓴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는 카페에서 가벼운 정신상담을 받듯, 문학 작품을 놓고 ‘멘토링’을 듣는 기회를 주는 책이다. 삶이 왜 이렇게 힘든가, 인생에 의미가 있긴 있는가, 허무한 마음을 벗어날 길은 없는가. 이런 의문을 품고 있다면 누구든 이 카페에 들러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지은이는 <영화관 옆 철학카페> <데칼로그>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와 같은 전작에서 대중예술을 재료로 삼아 철학 요리를 선보인 바 있다.

새 책에서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카프카의 <변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리고 최인훈의 <광장>,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포함해 모두 13편의 문학작품을 실마리로 삼아 철학의 길, 삶의 해법을 찾고 있다.

세계를 알고 자기를 아는 것, 그리하여 세계 안으로 자신을 던져 넣을 용기를 얻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지은이가 먼저 내미는 작품이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의 <파우스트>다. 독일어로 쓴 최고의 근대문학으로 꼽히는 이 비극은 주인공 파우스트를 근대인의 전형으로 일으켜 세운 기념비적 작품이다.

25살 청년이 81살 노인이 될 때까지 괴테가 전력을 다해 창조한 파우스트는 윤리적 관점에서만 보면 결코 반듯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무한대의 욕망을 지닌 사람이다. 이기적이고 거만하고 자기밖에 모른다. 그는 세계의 모든 비밀을, 모든 진리를 파헤쳐 알려는 ‘진리의지’에 불타는 사람이며, 감각적 즐거움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만끽하려는 ‘쾌락의지’에 몸을 내맡기는 사람이다.

그는 이 욕망 때문에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해 젊은 사람으로 재탄생하고, 아름다운 처녀를 탐하는가 하면 살인을 저지르고, 그리스 신화의 미인 헬레나를 찾아 지하세계를 다녀오고, 전쟁터에서 승리를 거머쥐어 황제의 하사품으로 드넓은 바닷가 땅을 얻는다.

철학카페에서 독서치료를

»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는 장 폴 사르트르. 사르트르는 <구토>에서 지저분하고 불결한 도시 안에서 방황하는 지식인 로캉탱의 견딜 수 없는 허무감을 묘사했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이 땅을 간척해 옥토로 바꾸는 꿈에 취한 그는 그 최고의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고 외치며 죽는다. 악마와 거래하고 살인도 마다지 않는 그는 도덕관념으로 보면 구원받을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도 천사들은 이 ‘영혼을 팔아넘긴 자’를 신의 품으로 끌어올린다. 여기에 이 작품의 비밀이 있다. 그가 구원받는 것은 끝없이 노력하고 분투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기실현을 향한 투쟁에서 한 발짜국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내면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 실현하는 일, 오직 이 목표 하나만을 바라보고 파우스트는 수많은 죄악과 슬픔, 그리고 절망을 견디면서 다시 희망을 품고 폭풍같이 일생을 해쳐온 것이다.” 이 무자비한 열정, 한계 없는 용기야말로 구원의 비밀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이 자기탐험과 자기실현을 향한 끝없는 도전의 드라마는 괴테 이후 독일 문학에 ‘성장소설’(교양소설)이라는 장르를 낳았다. 그 성장소설의 20세기적 모델로 평가받는 것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919)이다.

헤세는 에밀 싱클레어라는 주인공을 내세워 13살부터 20살 무렵까지 성장기를 겪는 젊은이의 내적 갈등과 진통을 빼어나게 묘사했다. 에밀의 삶에 ‘멘토’로 등장하는 것이 상급생 데미안이다.

어린 에밀에게 데미안은 “어른처럼 낮설고 성숙하며, 너무나도 우월하고 냉정하고 의지에 가득 찬 완벽한 초인”이다. 에밀은 데미안을 통해 자기투쟁과 자기극복의 비전을 본다.

청년이 된 그가 발견한 삶의 진리는 이 소설의 유명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알을 깨고 나온 새, 미숙에서 성숙으로 진화한 새는 ‘아브락사스’에게로 날아간다. 아브락사스는 악마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통합한 신이다. 이 신은 인간 내면에 거주한다. 그러므로 헤세가 말하려는 것은 분명하다.

선과 악, 정신과 본능, 성스러운 것과 추한 것이 공존하는 내면을 직시하고 그 대립하는 두 세계를 조화시킴으로써 삶을 온전히 사는 것이다. 성숙한 인간은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이 하나로 포개져 있다. 자기실현은 절망과 고통의 강을 건너는 일이다. 거센 물살이 두려워 거기서 멈춰서는 강 건너의 세계로 갈 수 없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 실존주의 문학의 기수 알베르 카뮈. 카뮈는 <페스트>에서 출구 없는 상태에서 흑사병에 휩싸인 도시를 배경으로 삼아 이 죽음의 전염병과 싸우는 사람들을 그려냄으로써 삶의 무의미와 대결하는 ‘반항의 정신’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그러나 자기실현은 세계 안에서 세계와 더불어 이루는 일이다. 세상이 폐허고 허무라면, 자기실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20세기 혼란의 한복판을 살았던 장 폴 사르트르는 소설 <구토>(1938)의 주인공 앙투안 로캉탱의 입을 통해 “삶이란 아무것도 아니며 그저 텅 빈 껍데기일 뿐이다”라고 외치게 한다.

익명성과 평균성의 도시, 불안과 권태가 스모그처럼 낀 도시는 삶의 사막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 사막에서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르트르와 함께 실존주의 문학의 최전선에 섰던 알베르 카뮈는 소설 <페스트>(1947)에서 사막 같은 삶에 덮쳐든 무의미라는 역병과 싸우는 인간을 그려냈다.

사람은 사막에서 견디는 법 배워야

카뮈가 시지프스 신화를 빌려 보여주는 인간의 삶은 무의미 자체다. 시지프스는 산 꼭대기로 바위를 굴러올리는 형벌을 받았다. 바위가 굴러 떨어지면 그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이 무한한 반복의 형벌을 카뮈는 ‘반항’으로 역전시킨다.

자유를 품은 인간의 결단으로 카뮈의 주인공들은 구원도 희망도 없는 사막에서 자살에도 포기에도 호소하지 않고 반항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존재의 승리를 확인한다.

“이리하여 일관성 있는 유일한 철학적 입자은 반항이 된다. 반항은 인간이 자신의 어둠과 벌이는 끝없는 대결이다.” 반항을 삶의 형식으로 삼은 시지프스는 자기 운명 앞에서 절망하지 않는다. 카뮈는 말한다.

“그가 꼭대기를 떠나 신의 소굴을 향하여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순간 시지프스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7244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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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는 시간이다.
질질 끌려가는 시간이다.
내가 이끌어야하는데 항상 끌려가는 거 같다.
이런 느낌은 매번 느끼는 거다.
달라질 순 없는 걸까.

얇은 책 한 권 읽고 약간의 두통으로 하루를 보냈다.
추워지면 아프게 된다.
날씨가 날 아프게 한다.

마음의 집시를 가지고 사는 모든 사람에겐
평화가 깃든 자유가 함께 하길...
내가 나한테 시달리는 것 만큼 힘든 일도 없다...
내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마음 지키기'다.

순간순간 마음이 바뀌어버리는 데는 장사가 없지만,
그래도 의식적으로 노력하면서 좀 덜 바뀌어가도록
내가 날 조종하면서 몰입하면서 살아야지.

누구 대신이라는 건 없는 게 인생이니까.
나도 제정신차리고 정말 한 가지에 몰입이라는 걸 하면서
살아야만 한다!!!

마음을 느긋하게.
조용하게 지키면서 하루를 감사로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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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1-22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라라라차!!! 좀 아프죠. 저도 날씨탓인지 좀 더 아프네요^^;;

거친아이 2006-11-22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추워질 날만 남았는데..겨울이 싫어요~알라딘 버벅대네요.
한참만에 들어왔네요.^^;;
 

라틴어의 ‘무()’를 의미하는 니힐(nihil)이 그 어원으로, 허무주의를 이르는 말.

엄밀한 의미에서의 니힐리즘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즉 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그리스소피스트 고르기아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을 니힐리스트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에서 니힐리즘이란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 ·가치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 그러한 입장에 따른 생활태도 등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도 일종의 니힐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사회의 진보란 모든 사회적 제도를 해소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는 무정부주의도 니힐리즘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니힐리즘의 의식은 19세기 후반 F.W.니체, M.슈티르너, F.M.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사상에 반영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 급속히 퍼진 사상이다. 니힐리즘의 한 극()을 이루는 것은 절망적 니힐리즘으로서 일체의 주의 ·주장을 부정하고 인생에는 어떠한 의의도 없다고 규정, 찰나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쪽과 모든 것에 전적으로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쪽이 있다. 다른 또 하나의 극은 무를 무로서 받아들임으로써 자유로운 삶과 자유에의 길을 모색하는 그룹으로서, 실존주의는 원래 후자에 속하는 것이다.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라는 입장에서 삶의 가치를 부정하고 권력을 쇠퇴시키는 그리스도교 도덕이나 불교 도덕을 수동적 니힐리즘이라고 하여 배척하고, 삶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면서 기성가치의 전도()를 지향하는 능동적 니힐리즘을 제창하였다. J.P.사르트르나 A.카뮈로 대표되는 프랑스 실존주의도 역시 이 세상의 부조리를 극복하면서 자유로운 삶을 타개하려는 입장에 있다. 《존재와 시간》에서의 M.하이데거의 사상이 바로 그 선구()라고 할 수 있으며, 존재 그 자체에의 순종을 강조하는 후기 하이데거의 사상은 니힐리즘의 초극()을 위한 모색이며, 또한 K.야스퍼스는 S.A.키르케고르와 마찬가지로 세계() 내의 무에서 반전(), 세계를 초월한 초월자()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니힐리즘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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