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매거진 이에스씨, 일부만 임의로 편집)

- 영화사 대표가 카메라 앞에 서고, 거리에 나서는 것에 대해 김조 대표는 별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다. 97년 청년필름을 세운 뒤 <해피 엔드> <와니와 준하>부터 <후회하지 않아>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까지 큰 영화, 작은 영화, (흥행에서) 성공한 영화, 망한 영화를 고루 경험하면서 쌓은 기술과 요령일 뿐이라고 한다.

- 그는 김용균, 정지우 감독 등 친구들의 제안으로 영화운동집단인 영화제작소 청년에 들어갔다. 거기서 “영화적 지식과는 무관한” 기획과 배급 파트를 담당한 게 그의 영화 이력 가운데 가장 앞부분에 올라가게 된 것이다.

- “피디 계열에서 만든 <파업전야>에 대응할 만한 장편을 만들어보자고 완성한 게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었어요. 그런데 완성도가 너무 떨어지는 거야. 그 이후로 단편만 만들다가 각자 실무 공부를 하고 돌아오자고 약속하고 들어갔던 회사가 동숭아트센터였어요. 사실 영화의 실무는 거기서 대부분 배운 거죠.” 그렇게 1년 반 동안 흩어졌던 친구 7명과 다시 뭉쳐 만든 게 청년필름이었다.

- 10년 동안 10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충무로에서 드물게 자기 색깔을 유지하는 영화사로 버텨온 데는 대가도 따랐다. <질투는 나의 힘> <귀여워>처럼 좋은 평가는 받았지만 대중적으로 실패한 영화들이 남겨준 빚이다. “사실 두 영화는 대규모로 배급할 작품이 아니었는데 그때만 해도 크게 펼치지 않으면 배급 경로가 없다시피 했고 또 노하우도 없어서 시행착오를 겪었던 셈이죠.” 시행착오가 결실로 맺어진 첫 영화가 1억원 남짓의 제작비를 들여 4만7천여명의 관객이 든 <후회하지 않아>다. 11월에 개봉하는 <은하해방전선>과 <색화동> 역시 작은 영화지만 자기 색깔이 뚜렷하면서도 대중적 소통이 쉬운 장르 영화들이다.

- 제작만 많이 하는 건 아니다. 몇년 전 직원들을 ‘압박’해 최초의 영화사 노조를 탄생시키기도 했던 사장인 그는 현재 독립영화 스태프 처우 개선과 지원 방안에 대한 연구 작업을 하고 있고 내년부터는 외화 수입에도 나설 예정이다. 또 일찌감치 커밍아웃을 했던 그답게 ‘커밍아웃 캠페인’을 벌일 계획도 있고, 케이블에 퀴어 채널을 만들고 싶은 소망도 있다. 또 토크쇼 같은 것도 진행해 보고 싶다고 한다. 시시때때로 돈과 싸워야 하는 영화사 대표로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가 산더미지만 하고 싶은 일, 만들고 싶은 영화, 계획하고 있는 즐거운 이벤트의 리스트는 끝없이 이어진다. 그를 보기만 해도 영화사 이름이 왜 ‘청년’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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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본문스크랩] 무대 체질 운동권, 사장님은 못 말려 - 한겨레 기사
    from 은 하 해 방 전 선 2007-10-30 19:35 
    무대 체질 운동권, 사장님은 못 말려 [매거진 Esc] 도대체 누구야? » 청년필름 김조광수 대표 색화동 예고편 직접 출연한 청년필름 김조광수 대표의 재밌는 영화인생 얼마 전 색화동이라는 알 듯 모를 듯, ‘야리꾸리’한 제목의 영화가
 
 
 

(출처: 한겨레, 우효경 칼럼 '2050 여성살이' 중에서)

즐겁게 수다를 떨며 돌아오던 중 갑자기 그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효경씨, K선생님 있잖아, 영어 때문에 외국인(?) 남자 사귄대. 순전히 영어 배우려고. 저렇게 예쁘고 날씬한 여자가 못생긴 영국 남자 사귀면 의심해 봐야 되는 거지’라고 하셨다. 자, 그 자리에서 상대방의 체면과 앞으로의 관계를 생각해서 꾹 참은 내 질문을 이제 한번 물어보자. 영어 때문에 영국인 사귀면 무슨 큰일이 나는데?

연애를 시작하는 데는 누구나 목적이 있다. 당장 그 선생님도 조건 맞춰서 선보고 결혼하지 않았던가. 거기 대체 어디 ‘순수한 사랑’이 있단 말인가. 그놈의 순수한 사랑은 드라마에 있고 영화에 있고 소설에 있지만, 유일하게 현실에만 없는 것이다. 동포 사회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여전히 젊은 여자들이 외국 사람과 돌아다니거나 사귀는 걸 보면 양놈에게 안기는 ‘걸레’라느니, 목적이 있어서 그렇다느니,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저속한 말을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한심하다.

당신들의 연애는 얼마나 지고지순하고 아름답기에? 원래 연애란 상대방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발견하는 것이다. 조건 따져 선을 보는 것은 순수한 사랑이고 외국인과 사귀는 것은 흑심이라는 그 잣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왜 외국까지 나와서 죽어도 한국밥, 한국사람 고집하며 남의 연애에 간섭하며 판단하려 하는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솔직히 나는 한국 남자 뒷바라지하러 여기까지 온 그 선생님이 영국 남자 잘 만나 연애하는 다른 선생님보다 훨씬 불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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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우리로 하여금 곤고함을 견디게 하는 희망의 동의어가 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꿈은 발밑의 땅과 자기 자신의 현실에 눈멀게 합니다. 오늘에 쏟아야 할 노력을 모욕합니다. 나는 이것이 가장 경계해야 할 꿈의 위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우리 세기가 경영해 온 꿈이 재부와 명성과 지위와 승리로 그 내용을 채우고 있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꿈의 유무에 앞서 꿈의 내용을 물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신영복, <아메리카 드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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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는 사람은 결코 독자를 저버리지 않는다. 글을 잘 읽는 사람 또한 작자를 저버리지 않는다. 여기에 작자와 독자 사이에 애틋한 사랑이 맺어진다. 그 사랑이란 무엇인가. 시대의 공민이요, 사회의 공분이요, 인생의 공명인 것이다.

문인들이 흔히 대단할 것도 없는 신변잡사를 즐겨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생의 편모와 생활의 정회를 새삼 느꼈기 때문이다.
속악한 시정잡사도 때로는 꺼리지 않고 쓰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인생의 모순과 사회의 부조리를 여기서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이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요 내 프리즘을 통하여 재생된 자연인 까닭에 새롭고, 자신은 주관적인 자신이 아니요 응시해서 얻은 객관적인 자신일 때 하나의 인간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감정은 여과된 감정이라야 아름답고, 사색은 발효된 사색이라야 정이 서리나니, 여기서 비로소 사소하고 잡다한 모든 것이 모두 다 글이 되는 것이다.

의지가 강렬한 남아는 과묵한 속에 정열이 넘치고, 사랑이 깊은 여인은 밤새도록 하소연하던 사연도 만나서는 말이 적으니, 진실하고 깊이 있는 문장이 장황하고 산만할 수가 없다. 사진의부진의 여운이 여기 있는 것이다.

깊은 못 위에 연꽃과 같이 뚜렷하게 나타나면서도 바닥에 찬물과 같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물 밑의 흙과 같이 그림자 밑에 더 넓은 바닥이 있어 글의 배경을 이룸으로써 비로소 음미에 음미를 거듭할 맛이 나는 것이다. 그러고는 멀수록 맑은 향기가 은은히 퍼지며, 한 송이 뚜렷한 연꽃이 다시 우아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윤오영, <쓰고 싶고 읽고 싶은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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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에서 발췌 편집)

“그는 허기진 개한테 밥을 주려다 손을 물리고도 다음날 그 개에게 다시 음식을 주러 가는 사람입니다. 광견병이 옮을 위험을 무릅쓰고서요. 9·11 이후 폐허가 된 아프가니스탄에 학교를 세우고 젊은이들이 영화를 찍을 수 있도록 팔을 걷어붙여 돕죠. 그는 영화와 삶이 일치하는, 감독으로서 인간으로서 존경받는 거장입니다.”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는 이란의 모흐센 마흐말바프(50) 감독을 이렇게 소개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 비해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가베> <순수의 순간> 등 20여편으로 칸국제영화제 등에서 호평을 받으며 세계적인 거장 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9·11 이전 아무도 탈레반 정권 아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 그는 아프간으로 넘어가 한 달 동안 난민수용소에서 울며 일했다. 그리고 그 땅의 고난을 역설적이게도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게 그린 영화 <칸다하르>를 내놓았다. 이 영화가 한국에서 유일하게 디브이디로 나온 그의 작품이다.

그러나 정작 마흐말바프는 벌써 2년째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개미의 통곡>을 찍으려고 타지키스탄으로 출국한 뒤 그의 영화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정치권이 그를 감옥에 보내려 한다는 친구들의 귀띔을 전해들어 이후 정처 없이 떠돌고 있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허무는 그의 카메라는 가장 헐벗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비춰왔다. 이슬람근본주의자의 이율배반을 들추고 금욕 사회에서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휴머니즘이 그의 종교다. 그래서 그는 이란 혁명 전엔 부패한 팔레비 왕조에게, 그리고 혁명 뒤엔 현 이란 정부에게 눈엣가시같은 존재가 됐다.

■ 나의 고통 = 좋은 영화는 고통을 받아야만 나온다고 생각해요. 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하고 딱 6일 동안만 사이가 좋았어요. 그때 제가 생긴 거죠. 저를 키운 사람은 할머니였어요. 할머니는 신앙심이 너무 깊어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는 걸 죄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거리를 지날 때는 음악이 들릴까 봐 귀를 손으로 막아야 했죠. 무척 가난해서 13살부터 일을 해야 했어요. 어떤 때는 한번에 13가지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어요. 일상생활 자체가 너무 힘들었죠. 17살 때 (팔레비 왕조에 대항하는)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게 됐는데 체포될 때 배에 총상을 입어 100일 동안 병원 신세를 진 뒤 고문을 받았어요. 일주일에 한번 어머니가 면회를 오셨는데 벽을 사이에 두고 수십명이 떠들어대는 통에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어요. 그렇게 4년 반을 감옥에서 보냈어요. 출소한 뒤 저는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척 많았어요. 요즘 감독들의 작품을 보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별로 없는 거 같아요.

먼저 소설을 썼는데 그게 영화로 발전하게 됐어요. 그러니 영화가 뭔지 전혀 몰랐어요. 평론가들이 혹평을 쏟아 내더군요. 영화관련 책을 독파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감옥에서 익힌 학습법이에요. 뭐든지 한 가지 주제를 잡고 6개월 정도씩 거기에만 집중하는 거죠. 그러면 빨리 배울 수 있어요. 요즘 사람들은 정보가 너무 많은 통에 10초마다 관심사가 바뀌는 것 같아요. 처음엔 (호메이니가 주도했던 이란) 혁명을 옹호했어요. 하지만 혁명이 해방과 정의를 가져다주지는 못했어요. 그러다 보니 점점 더 비판적으로 변해간 거죠.

■ 나의 영화 = 가난한 사람들을 찍으려고 반드시 가난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하지만 자기 삶에서 겪은 고통을 기반으로 예술을 해야 하죠. 고통이 없으면 영화는 희망(꿈)을 주지 않는 판타지일 뿐이에요. 저는 사람을 바꾸는 건 정치가 아니라 예술이라고 믿어요.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면 사회도 바뀌죠. 영화 <살람 시네마>에서는 파시즘이 어떻게 생활 깊숙이, 머릿속에 뿌리내리는지 보여주려고 했어요. 아프가니스탄에서 사람들이 굶고 병들어가는 걸 세계가 관심 없어 할 때 그 고통을 영화로 찍어 알리고 싶었어요. <칸다하르>의 모든 장면은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고통에 대한 정보예요. 그러다보니 저도 정부의 눈 밖에 났지만. 제 딸 사미라는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최근 영화를 찍다가 폭탄 테러로 희생될 뻔하기도 했어요. 우리 영화가 사람들을 바꾸는 힘이 있기 때문이에요.

요즘 감독들 영화들을 보면 고난도 관심도 열정도 줄어든 것 같아요. 이제까지 정부가 검열로 영화계를 죽이는 시도는 많았지만 번번이 실패했죠. 그런데 이제 저질 영화가 영화계를 죽이려 하고 있어요. 집중하지 않고 빨리 만들어내는 영화들이 너무 많아 어떤 게 좋은 작품인지 골라내는 것 자체가 힘들게 돼 버렸어요. ‘머리를 위한 패스트푸드’가 난무하다고 할까요. 영화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사랑이고 대량생산으로 찍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면 가장 크고 중요한 고통이 뭔지 골라내 집중하세요. 누가 날 걷어차서 아프다, 그런 아픔을 이야기하면 잡음밖에 안 돼요. 공통의 고통을 찾아보세요. 영화는 사람들에게 꿈을 줘야 하니까요.

글 부산/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손홍주 <씨네21> 기자 lightson@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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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07-10-25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러고보니, 이 기사도 김소민 기자의 것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