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세태풍자극이 아니라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초절정 비극이 된다. 성정의 우유부단함과 영혼의 뺀질뺀질함, 그리고 경제적 무능함을 가진 한 젊은 남성이 제도 앞에서 느끼는 주눅을 냉소와 자조로 표현하며 뻗대다가 결국 처절하게 무릎 꿇게 되는 사연인 것이다.

"아니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요?" 이 너무나도 순진한 역설법은 '시장'에서 그 조건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사실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반증이며 동시에 그 따위에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 자기방 기제가 작동한 결과이기도 하다.

제도권 속으로 쑥 진입하기에, 혹은 제도권 밖에서 격렬히 저항하기에, 별 변변한 무기를 가지지 못했으므로 그는 제도를 얕잡아 보는 태도를 표방한다.

(한겨레,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출처: 한겨레 미디어 전망대 중에서)

우리를 속박하던 전통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대가로 우리는 외로움과 공허를 얻었다. 고독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잘 포장해 타인에게 알리고자 온갖 정성을 다한다. 블로그와 미니홈피에 올린 연출된 사진과 동영상, 멋진 글을 통해 타인과의 소통을 꾀하는 동시에 타인으로부터 사랑받으려 애쓴다. 일종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타인과의 소통을 위해 손을 내미는 모습이다.

홍숙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출처: 슬라보예 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 중에서)

- 서양 불교는 광란의 시장 경쟁 속도에 대하여 내적 거리를 두고 무관심할 것을 설교하는 대중 문화의 한 현상이다. 이는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듯 보이면서 자본주의 역학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완벽하게 참여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이는 후기 자본주의의 전형적 이데올로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출처: 한겨레,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에서 발췌)

-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난 이런저런 사람이라 단정적으로 말들 한다. 착각이다. 자신이 누군지를 결정하는 건 자신의 선택이다. 자신이 했던 무수한 선택들이 하나하나 모여 결국 자신이 누군지 결정하는 거다. 선택의 누적분이 곧 당신이다.

- 사람들이 선택 앞에서 고민하는 진짜 이유는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선택으로 말미암은 비용을 치르기 싫어서다.

- 이거 사실, 수용키 어렵다. 누구나 야비하고 몰염치하고 이기적이며 부도덕한 선택, 한다. 그리고 그런 선택 뒤 대다수는 사연부터 구한다. 그런데, 그랬으면 하는 자기가 아니라 생겨 먹은 대로의 자신을 덤덤하게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순간이 있다. 자신이 멋지지 않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서 멋질 수는 결코 없는 법이란 걸 깨닫는, 이거 절로 안온다. 도달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출처: 설동훈 <강자의 횡포가 만든 차별의 언어 - '코시안'>

사람들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소속 집단의 대변자가 되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그렇게 간주하기도 한다. 특히, 특정 집단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이 작용할 경우, 개인을 집단의 성원으로 파악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은 그 대상 집단에 속한 사람들과 인간적인 만남을 할 수 없게 마련이다. 예컨대, "이슬람교도들은 과격하고 폭력적이다." 라는 부정적 선입견을 가진 사람은 특정인이 이슬람교도라는 이유로 그와의 만남 자체를 기피할 것이다. 집단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그 집단의 성원으로 인지되는 개인은, 그 선입견 속의 전체를 대변하는 하나의 사례로 환원될 뿐이다.

'죠센진' 이 편견을 담은 용어가 된 것처럼 '코시안' 도 이미 그렇게 쓰이고 있다. 정책 대상 집단을 정확히 꼬집어 지칭하는 용어는 분명히 얼마 안 되는 어휘로 많은 뜻을 포함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담고 있다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기술하는 표현은 사용하되, 적시하는 말은 만들지 않는 것이 그들을 배려하는 기본 자세이다.

--------------

(출처: 정호근 <이성은 더 이상 이성적이지 않다>)

동일화하는 이성과 개념은 대상의 고유한 존재들 사이의 '다른 것', 즉 '차이' 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폭력을 가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그 대상은 두려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 대상이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동일화될 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닌 '알려진 것'이 되며,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인간은 두 가지 차원에서 '낯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세계와 교섭한다. (중략) 인식이든 노동이든 주체인 인간은 자기의 틀로서 대상을 파악하거나 변형시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