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에서 발췌 및 임의 편집)

바리공주 설화에서는 바리가 서천에 가서 약수를 구해다가 죽은 부모를 살린다. 하지만 〈바리데기〉에서는 바리가 찾는 생명수가 무엇인지조차 나타나 있지 않다. 혹시 ‘눈물’이 아닐까라는 생각은 든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사람은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물이 과연 생명수일까? 각종 끔찍한 폭력으로 희생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한줄기 연민조차 없다면야 그 어떤 대처방안도 없겠지만, 눈물만으로 굶주림, 구타, 집단강간, 죽임, 테러와 전쟁이 전염병처럼 번져가는 21세기 지구촌을 구할 수 있을까?

오래전부터 폭력에 관한 정당한 대처 방안은 비폭력이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면 그 역시 폭력이기 때문에 폭력의 확산과 악순환을 막을 길이 없다. ‘올바른 폭력은 없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그런데 ‘직접행동’이라는 용어와 함께 비폭력의 새로운 형태가 최근 주목받고 있다.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라’는 식의 전통적인 비폭력은 ‘폭력을 가하는 자가 승리하는 사회’를 만들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것이 이 주장의 시발점이다.

따라서 폭력을 줄이려면 적극적으로 맞서 전략적으로 싸워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직접행동이다. 그 결과 직접행동은 때로 과격해질 수도 있지만 그 목적이 비폭력에 있다는 점에서 테러와는 다르다. 대표적인 예로 ‘간디의 소금행진’을 들 수 있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는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영국이 독점하는 내용의 소금세법이 실시되고 있었다. 간디는 이와 같은 영국의 폭력적 억압들을 폐기하기 위해 11개 항목의 요구안을 제출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제자들과 함께 아마다바드에서 출발하여 무려 388㎞를 걸었다. 그리고 단디 해안에 도착하자 소금을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인도 독립의 견고한 발판이 되었다.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직접행동이라는 표현 없이는 비폭력은 무의미합니다. 직접행동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장 행동적인 힘입니다. 사람은 소극적으로는 비폭력적일 수 없습니다.” 오직 직접행동이라는 적극적 저항에 의해서만 폭력을 줄이고 비폭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오늘날 직접행동은 벌목을 막기 위해 나무에 자기 몸을 묶고, 핵폐기물을 실은 열차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며,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뽑아버리는 등의 다양한 시민운동으로 세계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다. 〈직접행동〉을 쓴 에이프릴 카터는 직접행동은 민주주의의 실천이며, 바로 여기에 민주주의의 미래가 달렸다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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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촌철살인> 게시판에 김어준 한겨레 칼럼이 꽤 많다는걸 깨달았다. 온갖 체면치레에 시달리면서, 솔직함이나 직설화법 조차도 '소비'하고 있는 내가, 조금은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일단 스크랩.

(출처: 한겨레, 김어준의 그까이거 아나토미에서 발췌)

실연으로 내상 입은 자들의 자기보호 방책 중 하나가 바로 이 이성 관계로부터의 필사적 거리유지다. 당신이 실연 후 다른 연애, 생각도 않고 살금살금 살았다는 거, 그게 그 짓이다. 그 남자와의 관계에, 추호도 의심의 여지 없는 우정,이란 제목 쾅쾅 박아 넣은 거, 역시 같은 짓이고.

우리가 동성이었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 … 이성 간 우정, 동성 우정엔 결여된, 성적 긴장 으레 존재하기 마련이다. 동성이 더 좋았을 거란 사발은, 그래서 치게 된 멘트. 혹여 느껴 버릴까봐. 느끼면 간격 무너지니까. 지금 안전 상태가 기뻐, 그걸 견고히 하고픈 무의식이, 그런 오버로, 스스로에게 확인사살 하는 거지.

그렇게 구축된 우정, 일종의 ‘관계’ 판타지다. 안전거리 확보한 채 거절 공포 없이 누리는 유사 애정행각. 다들 눈치 챘는데 왜 본인만 몰랐나. 관계는 제목을 따른다. 우정이라 제목 달면 또 우정인 양, 제목 부합되게, 관계 작동한다. 그 제목만으론 더 이상 스스로에게 사기 치는 게 도저히 불가능한 지점에 덜컥, 도달할 때까진. 바로 지금 당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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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0-06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고민하고 있던 문제의 해답을 보는 것 같군요...
저도 김어준씨글 가끔 읽는데 안 본 부분입니다.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sb 2007-10-06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좋은 일이네요. 반가워요. ^^
 


절충이나 종합은 흔히 은폐와 호도의 다른 이름일 뿐,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는 그 사회, 그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객관적 제 조건에 비추어, 비록 상당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주장이라 하더라도 그 경중, 선후를 준별하고 하나를 다른 하나에 종속시키는 실천적 파당성이 도리어 시중의 진의이며 중용의 본도라고 생각됩니다.

(신영복, 「매직펜과 붓」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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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론을 주장하는 자 누구인가? (중략) 너희들이 동양 평화, 한국 독립 보전을 담보한 조약에 먹물이 마르기 전에 삼천리 강토를 집어 먹던 역사를 잊었느냐?

문화운동론을 부르짖는 자 누군인가? (중략) 검열, 압수 등 모든 압박 중에 몇몇 신문 잡지를 가지고, 강도의 비위에 거스르지 아니할 만한 언론이나 주창하여 이것을 문화 발전의 과정으로 본다면, 문화 발전은 도리어 조선의 불행이다.

외교론의 주장은 (중략) 최근 3/1 운동, 일반 인사의 평화 회의, 국제 연맹에 대한 과신의 선전이 도리어 이천만 민중이 용기 있게 분발하여 전진하는 의기를 쳐 없애는 매개가 될 뿐이었도다.

준비론을 주장하는 자 있으니, (중략) 입고 먹을 방법도 단절되는 이때, 무엇으로 어떻게 실업을 발전하며, 교육을 확대하며, (중략) 군인을 양성한들, 일본 전투력의 백분의 일에 비교라도 되게 할소냐? "

"우리 지나온 경과를 말하자면 갑신정변은 특수 세력이 특수 세력과 싸우던 궁중의 한 때 활극이 될 뿐이며, 안중근 이재명 등 열사의 폭력적 행동이 열렬하였지만 그 뒤에는 민중적 역량의 기초가 없었으며, 3/1 운동의 만세 소리는 민중적 의기가 보였지만 폭력적 중심을 가지지 못하였다.

민중 폭력 둘 중 하나가 빠지면, 비록 천지를 뒤흔드는 장렬한 거사라도 또한 번개처럼 수그러드는도다."

(1923 <조선 혁명 선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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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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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에게 연민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겠으나, 여튼 이 시는 잠시 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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