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와 목자 : 푸코와 파레시아
나카야마 겐 지음, 전혜리 옮김 / 그린비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0.

20216월 중에 읽은 책. 600페이지쯤 되는데 매일 보지는 못해서 보름 조금 넘게 걸렸다. 이전에 본 아렌트, 데리다 해설서처럼 서양 학문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훈고학적 해석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두껍지만 내용 자체가 그리 어렵지 않고 번역도 훌륭해서 막힘 없이 잘 읽혔다. 번역을 탓하지 않고, 번역서를 읽은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1. 요점

『육체의 고백』이 출판되기 전인 2008년에 일본에서 출판된 이 책은 푸코의 1980년대 저작들 - 『주체의 해석학: 1981-82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 『성의 역사』 2, 3(1984), Wrong-Doing, Truth-Telling (1981년 루벵 가톨릭대학 강의) 에서 언급된 고대 그리스 철학(현자)과 초기 기독교 교부철학(목자)에서 전개된 고백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주체인 자기개념의 전개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요점만 이야기하자면, 전자에서 자기는 배려의 대상이었던 반면, 후자에서 자기는 부정과 포기의 대상으로 자리매김된다. 자기 포기는 니체가 『도덕의 계보』를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저주해 마지 않았던 니힐리즘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겠다. 전자, 특히 소크라테스적인 진실 말하기에서는 주로 스승이 말하고 제자가 들었지만, 후자에서는 제자가 말하고 스승이 귀를 기울인다. 전자의 목표가 자기 배려와 자기 통치라면, 후자의 목표는 자기 포기, 다른 말로 타자의 권력에 복종하는 주체의 형성이다 (575).

고대 그리스의 파레시아와 초기 기독교의 고백은 모두 타자와의 비대칭적인 관계에서 행해지는 진실 말하기이지만, 이처럼 그 효과는 전혀 다르다. 파레시아가 리스크를 감수하며 용기있게 진실을 말하는 행위인 반면, 기독교의 자기해석과 자기고백에서 중요한 것은 말해지는 내용의 진실 여부가 아니라, 그 말한다는 행위를 통해 공고화되는 전면적 복종과 자기 포기이다. 이 자기 포기야말로 예술작품으로서 자신을 가꿔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고, 『감시와 처벌』에 나오는 순종적이고 쓸모있는 신체의 또 다른 모습이다.


2. 『육체의 고백』과의 관계

『육체의 고백: 성의 역사 4권』을 읽기 전에 보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 책을 읽었던 덕에 이 책을 더 쉽게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난 번 『육체의 고백』 리뷰(https://blog.aladin.co.kr/eroica/11540266)는 다시 봐도 너무 난삽한데, 그 때는 잘 몰랐던 교부 철학자들이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활동한 이들였는지를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육체의 고백』에서는 잘못 번역되었던 엑소몰로게시스와 엑사고레우시스도 어쭙잖게 한국말로 번역되지 않고 원문대로 표기되어 있어 그 뜻이 오도되지 않는다. 그 때는 엑소몰로게시스는 옷차림이나 행위로, 엑사고레우시스는 말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라는 정도만 알았는데, 전자는 수도원 밖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후자는 수도원 안에서 이뤄졌다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육체의 고백』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욕망하는 주체(따라서 고백되어야 하는 주체)와 권리의 주체(따라서 책임져야 하는 주체)의 포개짐이 서구 역사에서 성행위의 이론적 위상 변화를 갖고 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책 『현자와 목자』에서 법적 주체와 관련된 측면은 주목되지 않는다.


3. 마치며

참을성을 갖고 꾸준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고, 나중에 그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면 열 페이지도 안 되는 결론을 대신한 글을 읽으면 될 것 같다. 역자 후기는 푸코 초심자들에게 유용한 내용으로 아주 쉽고도 유려하게 잘 쓰여 있다. 파레시아의 핵심도 잘 정리되어 있고, 그것이 초기 기독교의 고백과 어떻게 다른지도 명확히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푸코의 1970년대 중반 이후 연구의 전반적 맥락을 잘 보여준다.


4 문득 생각난 것, 더 생각해볼 것 등

1) 역시 푸코에 대한 나의 주요 관심은 1975년부터 1979년 사이의 저작에 한정된 것 같다. 그 이전 저작들도, 그리고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그 이후  1980년대 저작들도 약간의 호기심과 경외의 대상일 뿐, 지금 당장 다른 것들을 제쳐두고 공부할 엄두는 내지 못하겠다.

2) 『성의 역사』 4부작을 만약 다시 읽는다면, 1권부터 4권까지 차례대로 읽을 것이 아니라, 이 책 『현자와 목자』를 길잡이삼아 2, 3, 4, 1권의 순서로 읽어야 할 것 같다. 2, 3권이 고대 그리스-로마의 쾌락의 활용과 자기 배려를 다루고 있고, 4권이 초기 기독교에서 리비도에 주목하게 되면서 고백과 참회(엑사고레우시스/엑소몰로게시스)가 자기 포기의 효과, 곧 예속적 주체화를 가능케 하는 진실 말하기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가 각주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 책의 가장 끝부분(585)이다.

3) 역자 후기를 감탄하면서 읽었는데, 권력(관계)에서 통치성으로의 (연구대상이라기보다는) 문제설정(problematique)의 변화를 정리한 부분(598-599)을 읽으면서 든 느낌적인 느낌(그러니까 아직 사유는 말할 것도 없고 생각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무언가 말로 정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곧 통치성 연구로의 전환의 배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통치성 연구로의 변화가 과연 이전의 권력관계 연구에 비해 더 가치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물론 파레시아와 대항품행과의 연관 속에서, 곧 정치와 윤리의 통합적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움직임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규율권력과 생명관리권력이 제기한 문제들, 또 그것이 야기한 논란들이 통치성 논의를 통해 해결된다기보다는 회피되는 것이 아닐까? 그냥 문득 든 의문이지만, 답이 빠르고 쉽게 나올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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