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언어 -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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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자들(1974)(https://blog.aladin.co.kr/eroica/14627603)의 진한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다. 그 책에서 주인공 셰벡은 원고를 다듬던 오도가 보이는 비전(vision)을 접한다. 나도 빼앗긴 자들을 쓰던 당시 르 귄의 모습과 생각이 궁금해서 작품 밖의 그녀가 보고 싶었고, 50년 전쯤에 쓰인 글들이 모여 있는 이 책을 통해 살짝이나마 본 것 같아 좋았다. 따뜻한 음색의 명료한 영어를 구사하는 지금 내 나이 또래의 똑똑한 백인 여성. 이 책에서 만난 르 귄은 그렇다. 원래부터 유명하지만 나는 몰랐던,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비로소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요즘 내게 르 귄이 그렇다.

 

1979년에 처음, 그리고 1989년에 다시 손봐서 출판된 책이다. 수록된 글들은 1973년부터 79년까지 출판된 에세이들이다. 세상 끝에서 춤추다(https://blog.aladin.co.kr/eroica/13896013)1976~88년 시기에 쓰여진 글들의 모음이니, 그 책과 시기가 살짝 겹치면서도 약간 더 오래된 글들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생각하기에 따라 큰 흠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한국어판은 편집자 수잔 우드가 주제별로 배열한 순서를 해체하고 발표 연대순으로 글을 재배열해놓았다. “옮긴이의 말에서 이유를 밝혀놓았는데, 별로 납득이 되지는 않는다.

 

1. 르 귄의 창작법과 예술론: “SF와 브라운 부인

르 귄이 좋은 글을 많이 쓸 수 있었던 것은 좋은 글을 아주 많이 읽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에세이에는 언제나 독서 이력이 진하게 묻어난다. 던세이니, 자먀친, 톨킨, 스타니스워프 렘, 필립 K. 딕 같은 판타지/SF 작가들뿐만 아니라,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버지니아 울프, 제인 오스틴, D. H. 로렌스, 솔제니친 같은 소설가들, 카를 융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이 등장한다. 사실 나는 이들 모두에 대해 이름만 들어봤을 뿐 문외한이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서만 약간의 정성을 더 기울여 르 귄이 다루는 울프 글을 읽어봤지만, 정작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아 공들인 것이 좀 아쉽다. “SF와 브라운 부인”(1975)은 울프의 베넷씨와 브라운 부인(1924)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 또는 업데이트다. 울프의 글은 100년 전 글이고, 르 귄의 글은 50년 전 글이다. 두 글 간에는 50년 정도의 격차가 있고, 르 귄이 “SF와 브라운 부인을 쓴 시점과 독자인 내가 그 글을 읽는 시점 사이에도 50년의 시차가 있다.

 

울프는 브라운 부인으로 상징되는 인물(character)에 대한 글을 썼다. 브라운 부인은 “Catch me, if you can!”을 외치고 사라지며 작가들에게 글을 쓰게 만든다. 르 귄은 그 글을 물고 늘어지면서 묻는다. “SF 작가가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그것은 바람직한 것일까?”(200). 르 귄에 따르면, SF는 오웰이나 헉슬리 등에 의해 1930년대에야 태동하였고, 1920년대 초에 그 글을 쓰던 울프는 SF의 존재를 몰랐다. 그리고는 넌지시 말한다. 판타지 문학은 브라운 부인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문학 분야라고, 판타지는 민담, 동화, 신화처럼 인물(character)이 아니라 원형(archetype)을 다룬다고 말이다. 그러나 곧 다시 반문한다. 반지의 제왕을 영화로 본 나도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과 이름이 나온다. “프로도 배긴스!” 톨킨이 대단한 점은 프로도라는 하나의 캐릭터에 실제로는 너댓 원형들(archetypes)을 조합해낸 것이다. 프로도, , 골룸, 스미아골, 그리고 아마 빌보까지 다섯 개의 부분이 프로도라는 하나의 퍼스낼러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어서 SF 소설 두 작품(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나이D. G. 콤튼의 인조쾌락)의 사례를 들어 이제 SF에도 브라운 부인, 그러니까 캐릭터, 또는 우리가 따르며 사는 영혼(the spirit we live by)”이 존재함을 확언한다.

 

[“the spirit we live by”212쪽에서는 우리가 따르며 사는 영혼으로, 218쪽에서는 우리가 그 인도를 따르며 사는 영혼으로 다르게 번역된다. 갈라디아서 525절의 구절이라는 각주가 붙어 있다. 그러나 역자가 이 말이 울프의 베넷씨와 브라운 부인의 맨 마지막에 나왔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한 것 같다. 알았다면 좀더 번역이 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건 그렇고, spirit영혼으로 옮겨도 되나?]

 

반지의 제왕이야기가 나올 때는 재미있었는데, 다른 SF를 몰라서 살짝 지루해졌다. 그런데 때마침 자신의 작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르 귄은 책에 대한 영감을 줄거리나 메시지의 형태가 아니라, 문득 보이는 사람의 모습, 사람이 있는 어떤 비전(vision)에서 얻는다고 한다(214). 그리고 자신은 그 사람과 그가 있는 곳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 사람을 보면, 그곳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르 귄은 빼앗긴 자들의 메인 캐릭터인 셰벡도 그렇게 보았다고 한다. 이 남자 물리학자의 모델은 젊은 시절의 로버트 오펜하이머란다. 원자폭탄 발명가. 때마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도 개봉 예정이다. 외모는 그렇게 보였다 한다. 그 다음은?



 

르 귄은 원래 이 이야기를 단편으로 썼다. 그런데 이것이 “30여년 작가 인생 최악의 작품, 정말 한심한 단편였다나... 이 단편을 발표했을까? 발표했다면 제목을 언급했을텐데, 그런 이야기는 없다. 어쨌든 그 실패작 단편에서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남자 물리학자 캐릭터가 르 귄에게 말한다. 아마 썩소를 날리면서 말했을 것이다. “Catch me, if you can.” 이때부터 르 귄의 캐릭터 잡기 = 둘 간의 대화 = 르 귄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상상이 시작된다.


르 귄: 이름이 뭐니?

셰벡: 셰벡. (이 때에야 비로소 이름이 지어진다.)

르 귄: 그래서 당신은 누구지?

셰벡: 글쎄... 아마도 유토피아의 시민?  


르 귄은 유토피아가 어떤 모습일까 알기 위해 여러 해에 걸쳐, 엥겔스, 마르크스, 폴 굿맨, 셸리, 크로포트킨을 읽는다. 셰벡과 대화하며 상상하는 과정은 아직은 캐릭터로 구현되지 않은 spiritlive by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르 귄에게 셰벡이 있는 곳, 그가 돌아갈 곳 등을 고민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사회와 세계에 대한 고민과 겹쳐 있다. “Catch me, if you can!”하며 달아나는 셰벡을 르 귄은 결국 잡아내서 빼앗긴 자들안에 온전히 담게 된다.

 

이쯤에서 끝나도 좋았을 글인데, 르 귄은 계속한다. 인간중심주의를 거부하면서도, 우리는 객체가 아닌 주체이며, 자연이라는 위대하고 궁극적인 객체도 오직 우리가 함께 해야 전부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베넷씨가 주체를 객체에 대한 묘사로 대체해버리려 했다는 울프의 비판에 동참하면서, 르 귄은 베넷식의 소설작법뿐만 아니라, 현대 심리소설’,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리고 당시의 대중적 SF를 싸잡아 비판한다. 곧 이들은 신 흉내를 내면서 불편부당함을 강조하는 과학자들처럼 주체의 경험을 무시하는데, 이는 비전(vision)을 재생산해야 한다는 예술가의 의무를 회피하는 것이라고 강도높게 비판한다(230, 그런데 번역이 잘못되어 있어 이런 말인지 알기 힘들다).

 

르 귄은 픽션의 매력을 언제나 트러블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찾는다(231). 시와 음악과 달리, 픽션은 초월, 곧 이해(understanding)를 건너뛴 평화를 줄 수 없다. 픽션의 본질은 바로 진창(muddle)이다. 진창은 흐느적거리며 유연하고,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무언가가 새롭게 생겨나는 진흙탕이 바로 소설인 것이다. 소설은 거짓 희망이 아닌 진실한 희망을 주며, 빵은 아니지만 우리가 의지해 살아갈 대상”(what we live by)을 준다. 그리고 브라운 부인이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을 약속한다.

 

이 글 “SF와 브라운 부인은 르 귄의 판타지처럼 글 자체가 하나의 여행이다(74, 125). 버지니아 울프에서 출발해서 톨킨과 다른 SF를 거쳐서 자신의 빼앗긴 자들, 그리고 다시 애초에 울프의 글로 돌아가서 멋진 마무리를 짓는다. 그러나 이 글을 쓰던 당시 르 귄은 몰랐을 것이다. 이 마지막 부분에 그녀가 남긴 실의 형상(string figure)이 도나 해러웨이라는 걸출한 생물학자이자 SF 팬에게 넘어가 트러블과 함께 하기라는 흥미로운 저작이 태어나는 진창 역할을 하게 될지를. 마치 1923베넷씨와 브라운 부인을 쓰고 있던 울프의 실이 50년 후 르 귄에게 넘어가 새로운 형상의 실뜨기 모습으로 릴레이되리라는 것을 울프가 몰랐듯이.

 

2. 판타지는 밤의 언어로 말한다.

르 귄의 책을 읽을 때에는 그것이 소설이 아닌 에세이집이라 해도 제목에 상당히 신경이 쓰인다. “밤의 언어”? 무슨 말일까? 영어책 맨 앞에 실린 수잔 우드의 Introduction은 한국어판에서는 책 뒤에 실린 해설이다. 어쨌든 우드의 그 글은 르 귄이 1976년에 발표한 에세이의 한 구절을 제사(題詞)로 택한다. “... 판타지는 시처럼 밤의 언어로 말한다.” 르 귄은 일단 출판한 글을 다시 손대는 일을 타부로 생각했지만(6), 그녀의 팬이 편집자가 되어, 자신의 수많은 글들을 추리고, 그 중에 나오는 멋진 말 밤의 언어(the language of the night)”를 콕 집어 제목으로 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밤의 언어란 무엇인가? 먼저 우드의 요약에 따르면, 꿈은 말이 아닌 이미지(nonverbal images)로 되어 있는데, 의식의 정신(conscious mind)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꿈이 단어-상징(word-symbols)으로 번역되어야 한다(362). 그래서 우드는 이 책의 핵심어로 번역을 꼽는다. 실제로 르 귄은 아이와 그림자”(1974)에서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대한 훌륭한 비평(130~131)을 제시하는데, 바로 이것이 밤의 언어를 낮의 언어로, 직관적인 과정을 이해가능한 언어-상징으로 번역한 것이다.

 

르 귄은 밤의 언어를 낮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에도 능하지만, 밤의 언어로 창작하는 것에 더 능한 이이다. 르 귄의 출중한 밤의 언어 구사 능력에는 칼 구스타프 융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 르 귄이 융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얼핏 본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난 융을 모르고, 사실 관심을 가질 일이 없었다. 그런데 르 귄은 내게 융의 매력을 제대로 알려주었다. 좀처럼 하지 않는 일인 것 같은데, 르 귄은 아주 친절히 융을 독자에게 설명해준다.

 

융 이론의 핵심은 자아ego는 더 큰 자기self의 부분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합적인 것이며, 모든 인류, 어쩌면 모든 생명체와 공유하는 것, 어쩌면 신이라 불리는 존재로의 연결 고리이다. 곧 자기는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으로서, 이 안에서 우리 모두가 만난다. 곧 진정한 공동체의 근원이다(121). 이 곳에 가는 방법은? 융은 자신의 그림자를 따라가라고 말한다. 그림자는 인간 의식의 그늘 속 형제, 카인, 칼리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하이드 씨, 골룸, 도플갱어다. 의식에 의해서 부정당한 자신의 일부분. 그러나 그림자는 단순히 열등하고, 원시적이고, 서투르고, 짐승 같고, 아이 같은 악한 존재가 아니라, 강인하고, 생명력 넘치고, 즉홍적이다. 막 사춘기를 벗어난 젊은이는 자신의 그림자를 총체적인 악으로 취급하곤 하지만, 결국 그것 역시 자신의 일부라고 인정해야 자기비하와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그림자는 그에게 안내자가 된다. 판타지는 그 그림자를 따라가는 여행이다. 여행자가 그 여행을 통해 바뀌는 여행(74, 128, 188).


자기라는 집단 무의식의 존재가 바로 인간의 소통가능성을 보장한다. 아마도 이것이 프로이트와 융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일 것이다.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내 속에서 자아(ego)id, superego와 겹쳐 있다는 프로이트 이야기는 이제 좀 지겹다. 융은 저마다의 자아가 그 깊은 곳에 최소공통분모(the lowest common denominator), mass mind[120,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라 그런지 역자가 번역을 안 했다]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다 같은 인간이고, 같은 우주의 부분이다. 이 말은 당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이 바로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이다. 르 귄은 이를 다음과 같이 멋지게 정리한다.


예술가는 타인의 내면에 닿으려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 자신의 내면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갈수록 타인에게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188).


역설적으로 들리는 이 말이 가능한 것은 바로 융이 말하는 자기, 곧 집단 무의식의 존재 때문이다.


책꽂이나 텔레비전에서 살아 있는 원형(archetype)을 찾을 수는 없다. 오로지 나 자신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인류 공통의 마음 속 어둠에 도사린, 개인성의 핵심에서 말이다”(189).

타인은 (사르트르처럼) 지옥이 아니라 구원이다”(254).

르 귄의 판타지가 성공한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르 귄이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서 그녀의 독자를 포함한 인류의 집단 무의식, 곧 자기에 잘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 경험을 다른 이들의 내면에 맞닿아 있는 밤의 언어로 뛰어나게 형상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3. 나의 그림자

처음 아이와 그림자”(1974)를 읽으면서는 <악귀>머리를 풀어헤친 그림자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그림자가 나오는 장이 떠올랐다. 한국과 서양은 그림자에 대한 의미 부여가 좀 다른 것 같다. 프로도의 골룸, 나의 또 다른 나.

 

그림자는 평상시 잊고 지내던 과거의 나의 어떤 모습을 투사한 것이다. 아니 반대로 투사하기를 거부하려는 것, 투사되지 않고 안에 남은 불편함의 응어리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림자가 있을 것이다. 가끔 꾸게 되는 힘든 꿈. 보통 나는 그 꿈이라는 직관의 과정을 번역하지 않는다. 아니, 번역을 거부한다. 그리고 나는 잊었다 말한다. 그랬다. 조금 더 어른이 되면 그 시절을 다시 기억하려고 할까? 그러면 뭐가 좀더 좋을까?

 

공상은 이어진다. 그래. 나에게도 그림자가 있다. 밤에 이대로 오랫동안 머물 수는 없다. 날씨가 좀 좋아져서 밤에 걷기 좋을 때쯤 그림자랑 대화를 한 번 해봐야 하겠다. 낮으로 넘어온다.

 

4. 쉬었다 계속하는 꼬리물기처럼...

베넷 부인이 버지니아 울프에게, 꺽다리 물리학자가 어슐러 르 귄에게 말했다. “Catch me, if you can!”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처음에는 순진한 호기심에, 그 후에는 오기도 생기고 재미도 있어 그 캐릭터 꼬리물기를 계속한다. 창작자가 아닌 나는 덕질하는 팬의 마음으로 르 귄의 꼬리물기를 계속한다. 여기에만 탐닉하면 안 될 것 같아 강도와 속도 조절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런데 내가 따라가던 르 귄은 트릭스터처럼 모습을 바꾼다. 바로 나의 그림자로... ... 이 예측하지 못한 반전이란... 내가 따라가던 것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따라가던 나도 달라진다. 책장을 덮은 나는 책을 읽으려고 첫 장을 읽던 나와 달라져 있다


어슐라, 이번에도 재미있었어요. 당분간은 못 와요. 다나 해러웨이한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또 올게요. 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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