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에서 춤추다 - 언어, 여자, 장소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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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여행 때 갖고 갔다 못 읽고 온 책을 이제서야 펼쳤다. 짧은 에세이들이라 조각시간들에 읽기 좋다. 지난 번에 읽었던 <바람의 열두방향>은 1962년부터 1974년까지의 단편 모음이었는데, 이 책은 1976년부터 88년까지 르 귄이 쓴 짧은 글들의 모음이다. 


페미니즘과 SF에 대한 그녀의 사유의 발전의 여정을 엿볼 수 있어서 재미있다. 


그리고 우로보로스의 형상을 여기서 만나다니... 

처음, 중간, 끝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부분은 다른 두 글(48~49쪽, 73쪽)에서 각기 인용되는데, 우로보로스는 이 시간의 흐름 안에 존재하는 처음, 중간, 끝이라는 서사의 전개 구조를 비판하는 데에 사용된다. 


"유클리드적"(155~)이라는 표현은 유토피아와의 연관성 속에서 논의된다. 현재의 고통이 없다는 일상적인 의미보다는 '살 수 없다'는 측면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런 유토피아는... 살 수 있는 현재는 없고 오직 미래형으로만 말한다"(159). "유토피아는 쭉 유클리드적이었고, 유럽적이었으며, 남성적이었다." 르 귄은 이와는 다른 종류의 유토피아를 제안하고자 한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순진무구하고 결백한(innocent) 세계가 아니라는 해러웨이의 인식과 연결되는 것 같다.   


해러웨이가 언제나 서부의 코요테와 함께 논하던 '트릭스터(trickster)'도 등장한다(163-164, 298).

아, 그런데 장자가 트릭스터라니...


또 Old Nobodaddy라는 표현을 처음 봤는데,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 나온단다 (168). 

이 노바대디의 형상은 해러웨이가 근대적 객관성 개념을 God's trick이라고 야유할 때의 신과 정확히 겹친다.


<브린 모어 대학 졸업식 축사>(1986) 역시 "상황적 지식"에 직접적인 자극을 주었을 거라고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구절들이 이어진다. 쪼개는 "아버지 말"과 연결하는 "어머니 말"의 대비... 아버지 말이란 "무기로 쓰기 위해 경험에서 떼어낸 말들, 상처를 만들고 주체와 객체 사이를 찢고 객체를 드러내고 착취하면서 주체는 숨기고 방어하는 말들"(266), 곧 신 흉내를 즐기는 자의 언어이다. 

르 귄은 엘렌 식수의 "나는 그것이 말하는 곳"이라는 여섯 단어를 한 수의 시로 옮기는데, 아버지말을 쓰는 이들의 귀는 돌로 되어 있다고 비꼰다(274-276). 멋지다!


해러웨이와 라투르의 주요 비판 대상인 Man / Nature의 근대적 이분법 비판도 <여자/황야>에서 선보이고 있다(286-290).


그리고 이 책을 읽게 된 단 하나의 직접적인 이유를 대자면, "소설판 장바구니론 (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1986)을 들 수 있다. <트러블과 함께하기> 2장 "촉수 사유"에 직접적인 모티브를 제공한 글이었는데, 역시 훌륭하다. 해러웨이 읽다 좌절할 필요가 없다. 르 귄의 이 글을 보면 된다!! 

아인슈타인의 엘리베이터, 슈뢰딩거의 고양이, 나의 게센인들은 단순히 생각의 수단이다. 이것들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다. 나는 SF의 핵심 기능 하나가 바로 이런 종류의 질문 던지기라고 생각한다. 습관적인 사고방식을 뒤집고, 우리의 언어에 아직 가리킬 말이 없는 것을 은유하고, 상상으로 실험하기. ...
상상으로 만든, 그러나 인습에 충실하고 평범한, 아니 고루하기까지 한 젊은 지구인을 생리적인 성 구별이 전혀 없기에 성 역할이 없는 상상 속의 문화에 던져넣을 수 있다. 나는 무엇이 남는지 알아보기 위해 젠더(사회적 성)를 제거했다. 아마 그저 인간이 남을 터였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가 공유하는 영역을 알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아직도 이게 제법 훌륭한 착상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험으로서는 엉망이었다. 모든 결과가 불확실했다. ... 과학적으로 보자면 최악이라고 할 만한 실험이다. 괜찮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다. 나는 규칙이 계속 변하는 게임을 한다. - P26

머나먼 서쪽, 브리검 영이 죽고 내가 태어난 그곳에서는 고리 모양의 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고리 뱀이 어딘가로 가고 싶어지면 - 고리 뱀이 뭔가를 쫓고 있어서든, 뭔가에 쫓기고 있어서든 간에, 뱀은 꼬리를 입에 물고 고리 모양을 만들어서 굴러간다. ... 하지만 방울이 달린 고리 뱀들에게는 결점이 있다. 독이 있는 뱀이라, 자기 꼬리를 물면 그 상처 때문에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죽는다는 결점이다. 모든 진보에는 이런 문제점이 있다. 교훈이 뭔지는 모르겠다. ... 여기에서 나오는 교훈이란, 원에서 탈출하려면 원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캠프파이어 주위로 조금 더 바싹 다가가라. 우리가 정말로 원을 그려낼 수 있다면, 시작과 끝을 맺을 수 있다면, 또다른 그리스인이 말했듯 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두려워 말라. 아무리 시도한다 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으리니. 그래도 좋은 이야기보다 더 진짜 고리 트릭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별로 없다. - P50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 말하기 속에서 우리는 모두 한 핏줄이다. 이야기를 입에 물고, 독이 아니기를 빌면서 피가 날 때까지 꽉 깨물어라. 그러면 우리는 모두 함께 끝에 다다를 것이고, 어쩌면 시작에도 다다를지 모른다. 언제나 중간을 살면서 말이다. - P61

아리스토텔레스는 극과 서사시의 핵심 요소는 "사건의 배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서사 또는 플롯 요소가 처음, 중간 끝으로 구성된다는 그 유명하고도 멋진 발언을 이어나간다.

"처음이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지 않고 그 다음에 다른 뭔가가 존재하거나 일어나는 것이다.끝이란 필연적으로 또는 대개 다른 뭔가 이후에 존재하며, 그 후에는 다른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중간은 본질상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다음에도 다른 것이 존재하는 상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서사란 사건들을 연결하며, 방향이 있는 공간 순서와 비슷하게 방향이 있는 시간 순서로 "사건을 배열"한다. 인과 관계가 암시되기는 하지만 정확히 명시되지는 않는다. 내가 이해하기로 주된 연결은 시간순이다. 그러므로 서사란 사건들을 시간에 따라 연결하는 데 쓰이는 언어이다. - P73

그 연결은 처음-중간-끝이라는 닫힌 패턴을 갖거나, 과거-현재-미래의 열린 패턴을 갖거나, 직선으로 보이거나 나선으로 보이거나 순환으로 보이거나 상관없이 공간적인 비유를 쓰기 적절한 시간 "속"의 움직임을 포함한다. 서사는 여정이다. A에서 Z로 가고, ‘그때‘에서 ‘바로 그때‘로 간다. - P74

꿈 서사는 언어보다는 감각 상징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의식적인 서사와 다르다. 꿈속에서 시간의 방향 감각은 공간 은유로 대체될 때가 많고, 약해지거나 역전되거나 사라질 수도 있다. 꿈이 사건과 사건 사이에 만드는 연결은 합리적인 지성과 미학적인 정신에는 불만족스러울 때가 아주 많다. 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연성 규칙을 비웃는 편이고 플롯에 대한 지시도 혼란시킨다. 그렇다 해도 꿈이 서사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꿈은 사건들을 연결하고, 여러 가지를 우리 마음의 일부에만이라 해도 이해가 가는 순서나 패턴으로 엮어 낸다. - P80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나, 스스로와 벌이는 내면의 대화에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고 다니지 않는다. 결코 그런 적이 없다. 우리는 그럴 수도 있는 일, 우리가 하고 싶은 일, 아니면 상대가 해야 하는 일, 아니면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경고, 추정, 주장, 제의, 모호한 말, 비유, 암시, 열거, 불안, 전달, 풍문... 여기와 저기 사이, 아니면 그때와 지금 사이, 아니면 지금과 언젠가 사이의 비약과 교차와 연계, 기억과 인지와 상상을 끊입없이 엮고 재구성하기... 여기에는 스스로를 안심시키거나 즐기기 위해서 만들어 내는 엄청난 양의 소망 충족과 고의이거나 고의가 아닌 다양한 각색이 포함되며, 또한 경쟁자를 호도하거나 친구를 설득하거나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이는 고의적이거나 半고의적인 왜곡도 포함된다. - P84

직설법은 그 앙상한 손가락으로 일차적인 경험을, ‘상황‘을 가리킨다. 하지만 비유, 가능성, 개연성, 우연성, 인접성, 기억, 욕망, 두려움, 의망이라는 끈으로 그 경험들을 잇는 것은 가정법이다. 바로 이것이 서사 연결이다. ... 인간의 자유라고 할 수 있는 도덕적 선택이 가능한 잉는 "우리가 과거와 미래, 또는 머나먼 땅에 가능한 세상과 불가능한 세상들을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 덕분"이다. ... 순전히 사실만들 담아 내는 서사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 서사는 수동적일 것이다. 모든 것을 뒤틀림 없이 비추는 거울이랄까. 스탕달은 감상적이게도 소설을 그런 거울로 여겼으나 소설은 거울상이 아니며, 서술자의 눈은 카메라가 아니다. 역사가는 조작하고 배열하고 연결하며, 이야기꾼은 그 모두에 더하여 개입도 하고 창작도 한다. 소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롯이라고 정의한 시간 방향성의 심미 감각을 이용하여 가능성들을 연결한다. - P85

생명 보존이란 임신중단 반대 세력의 진짜 목적이 아니라 슬로건에 불과해 보이는군요. 그 사람들이 원하는 건 통제예요. 행동에 대한 통제. 여자들에 대한 권력 행사죠. 낙태 반대 운동에 참여하는 여자들은 여자들에 대한 남성의 권력을 공유하고 싶어 하고, 그러기 위해 자신들의 여성성을 부정해요. 타고난 권리와 책임을요. - P142

"창조자 역할을 떠맡"으면서 우리는 있음에 참여하기보다는 노자가 "없음의 이로움"이라고 부른 것을 추구한다. 세상을 재구성한다는 것, 세상을 다시 세우거나 합리화하는 것은 실제 본질을 잃거나 파괴할 위험을 지는 행위이다. - P148

전체주의는 지옥일 뿐 아니라 낙원에 대한 꿈이기도 하다. 모두가 단 하나의 공통 의지와 신념으로 결합하여, 서로에 대해 어떤 비밀도 없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오래된 꿈... 전체주의가 우리 모두의 마음속 깊이 존재하고 모든 종교에 깊이 뿌리내린 이런 원형들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을 매혹할 수 없었으리라. 특히 초기 단계에서는 더 그렇다. 그러나 낙원의 꿈이 현실로 변하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그 꿈을 막는 이들을 베어 내기 시작하고, 그리하여 낙원의 지배자들은 에덴 옆에 작은 강제수용소를 지어야만 한다. 이 강제수용소는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고 완벽해지는 반면, 옆에 붙은 낙원은 점점 작고 초라해진다. (밀란 쿤데라, <웃음과 망각의 책>)

유토피아를 짓는 이성이 순수하면 할수록, 더욱 유클리드적일수록 그 자기 파괴 능력도 커진다. 우리가 통제력으로서 이성이 어질다고 믿지 않는 데에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 P158

트릭스터는 에덴에 산 적이 없다. 코요테는 신세계에 살기 때문이다. 화염검을 든 천사에게 내몰린 이브와 아담이 서글픈 머리를 들자, 히죽 웃고 있는 코요테가 보였나니.
유럽적이지 않고, 유클리드적이지 않고, 남성적이지 않은... 모두 부정형의 정의이고, 그래도 괜찮기는 하지만, 성가시다. 그리고 마지막 표현은 불만족스럽기도 하다. 내가 접근하려는 유토피아가 여성들만 상상할 수 있거나 - 가능한 이야기다 - 여성들만 거주할 수 있는 - 이건 참을 수 없다 - 곳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나에게 필요한 말은 ‘음(陰)‘인지도 모르겠다.
유토피아는 늘 ‘양(陽)‘이었다. 플라톤 시절부터, 유토피아는 어떻게든 커다란 양의 오토바이 여행이었다. 찬란하고, 잘 말라있고, 걔끗하고, 강하고, 단단하고, 활발하고, 공격적이고, 선형적이고, 진보적이고, 창조적이고, 팽창하고, 전진하고 뜨거웠다. - P164

레비스트로스는 신석기 혁명 이후부터 나타났으며, "사회적인 변화와 에너지를 뽑아내기 위해 카스트 사이와 계급 사이의 구별을 끊임없이 촉구하는", "뜨거운" 사회들과 역사적인 온도가 거의 0도에 가깝도록 스스로를 제한하는 "차가운" 사회들을 구별하려 한다.
이 아름다운 인류학적 사고와 내 주제의 관련성은 곧바로 레비스트로스가 직접 증명하는데, 다음 단란에서 그는 인류학자가 인간의 미래를 예언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두고 하늘에 감사하면서도, 만약 인류학자에게 그런 예언을 기대한다면 우리의 "뜨거운" 사회로부터 추론만 하는 대신, 점차 "뜨거운" 사회 중 최고를 "차가운" 사회 중 최고와 통합할 것을 제안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내가 레비스트로스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 통합이란 이미 사회 에너지의 제일 원천인 산업 혁명을 논리적 극단까지, 완전한 전자 혁명까지 밀어붙이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후에 일어나는 변화와 진보는 철저히 문화적이며, 말하자면 기계가 만든 것일 터이다. - P167

"살아남은 원시 사회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그 구조는 인간 조건에 적대적이지 않다."
...
내가 이해하기에, 레비스트로스는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을 결합하려면 유기체 모드는 인류가 유지하면서 기계 운영 모드는 기계에 넘기자고 제않나다. 기계는 진보를 맡고 생물은 리듬대로 살자는 것이다. 초고속 전자 ‘양‘의 열차가 달리는데, ‘음‘의 객차와 식당차 생활은 고요하여 식탁에 올린 장미도 흔들리지 않는 느낌이랄까. 이 모델에서 걱정되는 지점은 통합의 요소로 사이버네틱스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엔지니어 자리에는 누가 앉은 걸까? 자동 조종일까? 프로그램은 누가 짰을까? 또 오래된 노바대디(Old Nobodaddy)인가? 그 차량 중에 또 브레이크가 없는 차가 있을까? - P168

낙원의 추방자들이지만 낙원의 희망은 그 사람들에게 있고, 노동 수용소 주민이지만 그들만이 자유로운 영혼이다. 열차의 정보 체계는 경이롭지만, 그 선로는 코요테 나라를 통과한다.

"고대에 황제가 처음으로 德과 義를 써서 사람들의 마음에 관여했다. 요순이 그 뒤를 이어 다리털이 다 빠질 때까지 일하여 ... 덕과 의를 행하고, 피와 숨을 다하여 법과 기준을 세웠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의 규칙에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었으니, 추방하여 멀리 내쫓아야 했다. ... 그 세상은 지식을 갈망했다. ... 물건을 자르고 만들 도끼와 톱이 있었고, 다듬을 붓과 줄이 있었으며, 구멍을 낼 망치와 끌이 있었으니, 뒤죽박죽으로 흐트러진 그 세상은 큰 혼돈에 빠졌다."

이것이 이성적인 통제를 나타내는 전설 속의 모델 황제에게 야유를 보내는 최초의 위대한 철학 트릭스터, 장자의 말이다. 장자의 시대에도 세상은 뜨거웠으니, 장자는 극단적으로 식히자고 제안했다. - P169

코페르니쿠스는 우리에게 지구가 중심이 아님을 전했다. 다윈은 우리에게 인간은 중심이 아님을 전했다. 인류학자들에게 귀를 기울인다면, 그들이 백인 서구가 중심이 아니라고 돌려 말하고 있음을 들을 수 있으리라. 세상의 중심은 클라마스 강의 어느 벼량, 메카의 어느 바위, 그리스 땅에 뚫린 어느 구멍에 있고 어디에도 없다. 세상은 어디로나 펼쳐져 있으니. - P179

"유토피아라는 말을 되찾으려면, 유토피아를 따라 대심문관조차 보지 못하는 곳에 입을 벌린 심연 속으로 들어갔다가, 그 후에 반대쪽으로 기어나오기까지 한 사람이라야 할 것이다."(Bob Elliot)

내가 듣기에는 코요테 같다. 어딘가 함정이나 심연에 떨어졌다가, 멍청하게 히죽대며 어떻게든 기어 나오는 코요테. ...
만일 그렇다면, 그때 우리는 그의 뒤편 심연 속에 있게 된다. 바깥이 아니다. 전형적인 코요테의 곤경이다. 우리는 진짜 지독한 난장판에 빠졌고, 빠져나와야 한다. 그것도 반대쪽으로 빠져나가야 한다. 그리고 빠져나가는 데 성공한다면, 변해 있을 것이다.
반대쪽에 누가 있을지, 무엇이 있을지는 전혀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그곳에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 언제나 그곳에 살았다고 믿는다. 그곳이 집이라고 빋는다. 그곳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들이 있다. 그 노래 중에는 <세상 끝에서 춤추다>라는 노래가 있다. - P180

레이건 대통령은 암트랙 없이 해 나갈 수 있다고 결정하고 예산에서 빼 버렸다. 레이건씨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나 기차를 타봤을테고 지금쯤은 기차로 여행하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모르지 싶다. 오직 ‘중요한 사람들‘, 시간이 돈인 사람들만 알겠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만이 기차를 탄다. 시간이 돈이 아니라 살았던 삶과 살아갈 삶인 사람들. - P240

저는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러 대학에 간다고 생각했고, 그것도 공부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배운 것은 힘의 언어(the language of power)였어요. 사회적인 힘을 가진 언어요. 앞으로 그 언어를 아버지말(father tongue)이라고 부를게요. - P259

이성은 단순히 객관적인 생각보다 훨씬 큰 능력이에요. 정치 담화나 과학 담화가 이성의 목소리를 자칭할 때는 신 노릇을 하는 셈이니, 엉덩이를 때려 구석에 세워 놓아야죠. 아버지말의 가장 중요한 제스처는 추론이 아니라 거리 벌리기예요. 주체 또는 자아와 객체 또는 타자간의 거리를, 그 틈을 벌리는 작업이에요. 이렇게 인간과 세계 사이의 간격을 벌리는 가르기 작업에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발생해요. 기술과 과학의 지속적인 발전은 그렇게 해서 스스로 연료를 충당하지요. 산업혁명은 세계-원자를 쪼개면서 시작되었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우리가 연속체를 불균등한 부분들로 부수어 그 불균형을 유지함으로써 다른 모든 문화를 정복하는 데 쓸 힘을 끌어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두가 실험실과 정부 건물과 본부와 회사에서 똑같은 언어를 말하고, 그 언어를 모르거나 말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침묵하거나 침묵당허거나 말하더라도 무시당하지요. - P261

백인들은 두 갈래로 갈라진 언어를 말하지요. 백인들은 이분법으로 말해요. 백인의 언어는 쪼개진 세계의 가치들을 표현하고, 다시 쪼갤 때마다 양의 가치를 중시하고 음의 가치를 폄하해요. 주체/객체, 자아/타자, 정신/몸, 지배/피지배, 능동/수동, 인간/자연, 남자/여자 등등... 아버지말은 위쪽에서 하는 말이에요. 한 방향으로 가죠. 어떤 대답도 기대하지 않고, 듣지도 않아요. ...
제가 ‘아버지말‘이라고 부르는 언어는 어마어마하게 훌륭하고 반드시 써야 할 언어예요. 다만 그 언어가 현실에 대한 특권 관계를 주장한다면 위험해질 뿐 아니라 파괴적이 될 수도 있어요. 아버지 말은 화자들의 지속적인 행성 생태계 파괴를 아주 정확하게 묘사하죠. 아버지말 어휘에서 나온 "생태계"라는 말 자체가 화자를 생태계에서 배제시키고, 궁극적인 무책임을 담보하는 주체/객체 이분법으로 쓰일 때가 아니면 불필요한 말이거든요.
- P262

아버지들, ‘올라가는 남자‘, 정복자 남자, 문명적인 남자들의 언어는 여러분의 토박이말이 아닙니다. 누구의 토박이말도 아니죠. 여러분은 처음 몇 해 동안은 아버지말을 들은 적도 없었고, 라디오나 TV에서 나온다 해도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어린 남동생은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어요. ... 여러분 형제에게는 더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고요. 여러분에게는 다른 배움의 힘이 있었죠. 그 시절 여러분은 어머니말(mother tongue)을 배우고 있었어요.
아버지말을 쓰려니, 어머니말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 아버지말에서 배제하는 방식으로밖에요. 어머니말은 타자이고, 열등한 존재예요. 원시적이고, 부정확하고, 불분명하고, 조악하고, 한계가 있고, 하찮고, 시시해요. 소위 여자들의 일이 그렇듯 어머니말도 반복적이에요. 땅에 매여 있고, 집에 매여 있어요. - P263

말로 하든, 글로 쓰든 어머니말은 답을 기대해요. 어머니말은 대화이고, 대화라는 말의 뿌리는 "서로를 돌아본다"죠. 어머니말은 그냥 의사소통이 아니라 관계와 관계 맺기의 언어예요. 어머니말은 연결해요. 쌍방향으로, 아니 많은 방향으로 오가는 교환의 연결망이에요. 어머니말의 힘은 쪼개는 데 있지 않고 묶는 데 있으며, 거리를 불리는 데 있지 않고 통합하는 데 있어요. 문자로도 쓰이기는 하지만, 후세를 위해 서기와 필경사들이 적는 말은 아니에요. 날숨처럼 우리의 생명인 호흡을 통해 빠져나가서 사라지지만, 완전히 사라졌다가도 되돌아오죠. 어디에서나, 언제나 다시 같은 호흡으로 반복되고, 우리 모두가 그 언어를 마음으로 알고 있어요. - P263

어떻게 누군가의 경험이 다른 누군가의 경험에 대한 부정, 부인, 반증이 될 수가 있겠어요? 제가 훨씬 경험이 많다 해도, 여러분의 경험은 여러분의 진실이에요. 어떻게 누군가의 존재가 다른 누군가가 틀렸다는 증명이 될 수 있겠어요? 설령 여러분이 저보다 훨씬 젊고 영리하다 해도, 제 존재는 저의 진실이죠. 전 제 경험을 제공할 수 있고, 여러분은 그걸 받아들이지 않아도 돼요. 사람들은 서로 상충할 수가 없어요. 오직 말만 서로 상충할 수 있지요. 무기로 쓰기 위해 경험에서 떼어낸 말들, 상처를 만들고 주체와 객체 사이를 찢고 객체를 드러내고 착취하면서 주체는 숨기고 방어하는 말들이요. - P266

저는 "진실"이라는 말을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는 의미로 써왔고, "문학"이나 "예술"이라는 암ㄹ은 "잘 산다, 능숙하게, 우아하게, 힘차게 산다"는 의미로 씁니다. 빵 바구니를 지고 그 빵 냄새를 맡고 걸으면서 먹는 것처럼요. ...

"일을 하시나요?" 여자에게 물어보면 그 여자는 부엌 걸레질을 멈추고 아기를 안아 들고 문가에 와서 말하죠. "아뇨, 전 일을 하지 않아요." - P272

문명인 남자는 말합니다. 나는 자아이다. 나는 주인이다. 나머지는 다 타자이며 - 바깥이고 아래이고, 밑이고, 부속이다. 나는 소유하고, 나는 이용하고, 나는 탐구하고, 나는 착취하고, 나는 통제한다. 내가 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내가 원하는 바가 사물의 존재 이유다. 나는 나이고, 나머지는 내가 보기에 알맞은 대로 이용할 여자들과 황야다. - P286

남자들은 삶 전체를 지배 영역에서 살아요. 남자들이 곰 사냥을 나가면 곰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오고, 모두가 귀 기울여 듣는 이 이야기들은 그 문화의 역사나 신화가 됩니다. 그리하여 남자들의 "황야"는 인간(Man)의 소유물인 자연(Nature)이 됩니다.
그러나 여자로서 여자들이 겪는 경험, 남자들과 공유하지 않는 경험은 황야 아니면 철저히 타자로서의 야생입니다. 사실상 인간(Man)에게는 부자연스러운 영역이죠. 문명이 남겨둔 곳, 문화가 배제한 곳, 지배자들이 동물적이라고, 짐승 같다고, 원시적이라고, 미개하다고, 진짜가 아니라고 하는 곳... 이야기된 적도 없고, 이야기가 되더라도 듣는 이 없었던 곳. 이제야 우리가, 그들이 아닌 우리의 언어로 서렴ㅇ할 말을 찾기 시작한 영역. 바로 여자들의 경험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지배자로 인정받은 이들에게 그곳은 진정한 황야입니다. 그들이 이 영역에 대해 품은 공포는 아주 오래됐고 깊으며 폭력적이죠. - P290

잎사귀, 박껍데기(a gourd a shell), 그물, 가방, 멜빵(a sling), 자루, 병, 통, 상자, 용기. 담을 곳. 그릇.

아마 최초의 문화적 장치는 그릇이었으리라... 많은 이론가들이 가장 이른 문화 발명품은 분명 채집물을 담을 용기와 멜빵이나 그물 형태의 운반 수단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엘리자베스 피셔는 <여자들의 창조>(1975)에서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 멋진 크고 길고 단단한 물건, 그 뼈다귀는 어디 가고? 분명히 영화에서 원인이 처음 누굴 때릴 때 그 뼈다귀를 썼는데, 그러고 나서 처음 제대로 벌인 살인의 성취감에 그르렁대면서 하늘 높이 던져 올렸더니 빙글빙글 돌다가 우주선으로 변해서 날아가지 않았나. 그래서 영화 끝에 가면 (이상하게도) 자궁도 없고, 모체도 없이 수정시키고 낳은 사랑스러운 태아가, 당연하게도 남자아이가 은하수 주위를 떠다니지 않던가? 모르겠다.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아니다. - P294

우리 모두가 온갖 막대기와 창과 칼에 대해 들었지만, 때리고 찌르고 두들길 길고 단단한 도구에 대해서는 들었지만 물건을 집어넣을 도구, 물건을 담을 용기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건 새로운 이야기다. 뉴스다.

그러면서도 오래된 이야기다. 무기라는 늦은, 사치스러운, 불필요한 도구가 나오기 이전에 - 생각해 보면 당연히 훨씬 전에 나왔을 것이다. 쓸모있는 단검과 도끼보다 훨씬 전에 나왔을 것이고, 꼭 필요한 빻고 갈고 파는 도구들과는 같이 나왔을 것이다. - P295

차이를 만드는 건 이야기다. 나의 인간성을 나에게 감춘 것도 이야기, 매머드 사냥꾼들이 때리고 찌르고 강간하고 죽이는 일에 대해, 영웅에 대해 늟어놓은 이야기다. 멋지고 독성 강한 ... 살해자 이야기.
때로는 그 이야기가 결말에 다가가는 것 같다. ... 우리들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옛 이야기가 끝났을 때 사람들이 계속 해 나갈 수 있는 이야기를. 어쩌면. 문제는, 우리 모두가 살해자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버렸기에 그 이야기가 끝날 때 우리도 같이 끝날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 생명 이야기의 본질과 주제(subject, 오역!! 오자??)와 말을 찾자니 절박한 심정이 함께 한다. [<트러블과 함께하기>, p. 75] - P297

써 놓은 음악은 어떤 경우에도 연행을 대체하지 못했어요. 우리는 교향악단이나 록 콘서트에 가서 각자 자리에 앉아 말없이 악보를 읽지 않아요.
그런데 도서관에서는 그렇게 하죠.
왜 그런 일이 말에만 일어나고, 음악에는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멍청한 질문이지만, 나에겐 그 질문의 답이 필요해요. 어쩌면 음표는 순수한 소리이고, 말은 순수하지 않은 소리라서일까요. 말은 의미를 갖고 상징하는 소리죠. 순수한 정보가 아닌데도 기호이거나, 기호로 기능할 수 있고요. 그것이 기호인 한 똑같이 임의적인 다른 기호로 대체될 수 있고, 이 기호는 시각 기호가 될 수 있어요. 음표 자체에는 어떤 상징 가치도 없고, 어떤 "의미"도 담겨 있지 않기에 기호로 대체될 수가 없어요. 오직 기호로 지시할 수 있을 뿐이죠.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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