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언어 -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서문"이기보다는 나중에 이 소설이 어떻게 쓰여졌나에 대한 회고담이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자체도 훌륭한 중편 소설이지만,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그 글을 썼고, 그 안의 캐릭터들을 어떻게 창조해냈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빼앗긴 자들』 읽으면서, 에이이오국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분위기가 고조되다 진압되는 과정을 묘사한 장면을 보면서 너무 탁월하다고 생각했었다. 오래전 나도 그런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장면을 읽으면서 르 귄도 한 때는 데모꾼였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1960년대 반핵시위와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 조직에 앞장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리뷰를 써야 하는데, 며칠이나 더 걸릴지 모르겠다. ㅋ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은 처음에는 순수하게 자유와 꿈을 추구하며 시작했으나, 결국 부분적으로 그런 설교단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 작품이다. SF 작가들은 이런 유혹을 아주 강렬하게 느낀다. 다른 소설가들에 비해 개념(ideas)을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며, 개념에 의해 다듬어지거나 개념 자체를 내포한 은유를 사용하며, 따라서 항상 개념과 의견을 혼동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 P280

내가 "작은 녹색 인간들 The Little Green Men"을 처음 쓴 것은 ... 1년간 런던에 체류하던 와중인 1968년 겨울이었다. 나는 미국에서 60년대 내내 비폭력 시위를 조직하는 일을 돕고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핵무기 실험 반대 시위였고, 나중에는 베트남전 속행 반대 시위가 되었다. 무력하고 어리석고 완고한 사람이 된 기분으로, 열 명이나 스무 명이나 백 명의 다른 무력하고 어리석고 완고한 사람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올더 가를 거닌 적이 몇 번이나 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쨌든 시위는 평화적이었고, 나는 거기 참여하며 내 작품과 완벽하게 유리된 방식으로 내 도덕 및 정치적 의견을 표현할 수 있었다. - P281

류보프도 셀버도 단순히 ‘위풍당당한 미덕‘(Virtue Triumphant) 그 자체인 인물은 아니다. ... 그러나 데이비드슨은 복잡하지 않은 인물은 아니지만 순수하다. 그는 순수한 악이다. 그리고 나는 의식적으로는 순수하게 악한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내 무의식은 의견이 다르다. 무의식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데이비드슨 사령관(Captain Davidson; 대위)이라는 인물을 창조해 냈다. 그를 부인할 생각은 없다. ...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이제 옛일이 되었다. ... 이야기 속의 훈계조가 이제 또렷이 드러나 보인다. 후회가 되기는 하지만 이 또한 부인할 생각은 없다. 작품을 살아남거나 스러지게 만드는 요소는 결국 모든 특정한 분개와 항변 속에 숨은 내밀한 갈망이다. 분노와 절망 속에서 정의나 재치나 우아함이나 자유를 향해 아무리 머뭇거리는 손을 뻗어봤자 변명은 될 수 없다. - P282

가상의 외계인을 홀로 창조해 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세노이 족을 묘사하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잘 찾아보면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인물은 데이비드슨 대위뿐이 아니다. 서로를 살해하지 않는 조용한 부족도 그 안에 존재한다. 사실 무의식 안에는 꽤나 많은 것들이 존재하는 듯싶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따라서 부인하는) 것들도,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따라서 부인하는) 것들도.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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