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 아닌가 - 버지니아 울프 산문선
버지니아 울프 지음, 정소영 옮김 / 온다프레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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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책 전체에 대한 리뷰가 아니라, 오직 "베넷씨와 브라운 부인"에 대한 리뷰이다. 르 귄의 <밤의 언어>를 재미있게 읽는 중이다. 하루에 에세이 한 두 편 정도씩 보고 있어서 일주일쯤 후면 리뷰를 쓰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중간쯤 읽었는데, "SF와 브라운 부인"을 읽자니, 그 글은 버지니아 울프의 "베넷씨와 브라운 부인"을 읽어야 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읽은 버지니아 울프의 글이다. 소설은 아니고 짧은 에세이.




이 리뷰를 쓰는 목표는 아주 단순하다. 훌륭한 르 귄의 글을 읽기 전에 초심자인 내가 읽어서 일단 무슨 말인지를 내 말로 정리해 적어두기 위해서다. 르 귄의 고매한 통찰을 접하기 전, 배우는 마음으로 정리하는 글이다.  


1. 청순한 정리

에세이는 이렇게 시작된다. 작가에게 그 작가가 쓰고 있는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가 놀리듯 이렇게 말한다. "Catch me, if you can." 그 캐릭터를 잡으려는 노력이 바로 소설 쓰기이다. 


에세이 안에 아주 짧은 소설의 한 장면으로 쓸 수 있을 법한 컷이 삽입되어 있다. 리치몬드에서 워털루로 가는 기차 안에서 픽션이 이뤄진다. 등장인물은 세 명, 스미스씨, 브라운 부인, 그리고 화자이다. 앞의 두 명만이 말을 한다. 픽션 밖 에세이는 화자인 젊은 "나", 곧 버지니아 울프가 요즘 소설 좀 쓴다는 것들의 방식이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소설 속 인물의 사실성(the reality of characters in a fiction)"을 강조하는 아널드 베넷("Five Towns"라는 소설의 작가란다)에게 반론을 펼치는 내용이다. 


베넷은 인물의 사실성이 그 인물에 대한 자세한 묘사에 의해 창조된다고 보는 것 같다. 울프는 이를 지나간 시대(에드워드 시대, 1901-1910)의 시류로 간주하면서, 그 이후의 조지 시대(1910-1936)에서 인물의 사실성은 그녀의 생김새, 출신계급, 옷차림 같은 표면, 또는 "사물의 짜임새"(fabric of things, 167)에 대한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그녀 내면의 경험에 대한 작가의 주목으로부터 탄생한다고 본다. 에드워드 시대의 작가들은 그녀가 보는 것, 또는 그녀의 옷, 그녀가 지금 있는 열차칸의 모습에 대해 디테일한 묘사를 할 뿐, 그녀를, 그녀의 삶을 보지 않는다(163-164).


작가는 자신이 창조하고 있는 캐릭터의 내면을, 그/녀가 무언가 경험하면서 느꼈을 감정의 파고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 브라운 부인이 껍데기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과 엄청난 다양함을 지닌 노부인"(176), 또 사람의 마음을 지닌 캐릭터로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그제서야 작가와 독자는 같은 열차칸에서 여행하는 동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약간의 거들먹

이게 맥락이 맞는 연관짓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글을 읽고 푸코가 쓴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 관하여>가 생각이 났다. (제목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뭐 어쨌든...)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좀 전의 프로이센에서 당시 유행하던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두고 설왕설래가 벌어졌고, 이에 대해 칸트가 멋진 말들을 했었다. 그리고 그 칸트의 멋진 글이 출판된 지 2백주년을 맞아 푸코는 죽음을 앞두고 글을 쓴 것이다. 계몽... 미성년에서 벗어남... 스스로 책임질 수 있음.... 이성의 공적 사용... 뭐 이런 말들이 아련히 기억나는데...


그 텍스트처럼 이 텍스트도 시대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캐릭터의 리얼리티를 살리는 방식에 대한 신구갈등이 소재이다. ... 음... 여기까지... 더 쓰려면 칸트 글도, 푸코 글도 다시 펴서 봐야 할텐데... 나는 지금 공부를 하고 싶지는 않다. 


3. 다시 겸손해질 때

나는 해러웨이를 읽다가 르 귄을 읽게 되었고, 르 귄을 읽다 보니 또 르 귄이 너무도 사랑한 훌륭한 작가들을 만나게 된다. 노자, 폴 굿맨, 머레이 북친, 칼 융,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다 이름만 들어본 이들이었다.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만, 이들을 다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르 귄의 헤인시리즈부터 천천히 차근차근 읽는 것이 먼저다. 오지랖을 좁게 유지해야만 중심을 잃지 않고 집중할 수 있고, 궤적을 그릴 수 있다. 이렇게 다짐해도 또 호기심이 발동해서 시간을 들여 무언가 새로운 텍스트를 읽게 된다.

 

지난 번 <세상 끝에서 춤추다>를 읽으면서도 울프의 <3기니> 이야기가 한참 나와서 읽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잘 참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못 참고 읽어 버렸다. 1924년에 쓰여진 글이니, 백 년 전에 쓰여진 글이다. 영문학의 역사는 전혀 모르고, 빅토리아 시대는 들어봤어도 그 이후의 에드워드 시대와 조지 시대가 나와는 무슨 상관이겠는가? 단지 르 귄이 이 글을 읽고 자신의 글을 썼기 때문에 그 르 귄 글을 읽기 위해 읽었을 뿐이다. 따라서 대단한 감동이나 통찰을 얻지는 못했다. 정리나 해두었을 뿐...


자, 이제 다시 르 귄의 글을 읽을 차례이다. 또 나는 경탄하면서 겸손해질 것이다.






울프가 태어난 19세기 말은 영국이 번영을 구가하던 빅토리아 시대가 저물어가던 때였지만, 그의 부모님은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인물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은 1837년에서 1901년이지만 사회문화적 변화라는 측면에서 빅토리아 시대는 1820년경부터 조지 5세가 즉위한 1910년이나 1차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의 기간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소설 형식의 필요를 주장하는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에서 울프가 에드워드 왕 시대 작가와 조지 왕 시대 작가를 구분하며 1910년을 기점으로 드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 P7

울프가 <여성과 직업>에서 언급하는 ‘집 안의 천사‘(Angel in the House)는 우리의 ‘현모양처‘와 아주 흡사하게 가족 구성원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여성에게 부여했다. ... 그 전까지 사회적 지위와 재산 여부에 따라 제한되었던 투표권이 1884년에 노동자계급 남성에게까지 부여되었지만, 30세 이상의 대부분 여성이 투표권을 획득한 것은 그보다 수십 년이 지난 1918년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므로 자연스럽게 공적 영역으로 분리된 생산 분야는 남성이 장악하고, 여성이 속한 가정은 예전과 달리 생산에서 배제된 사적 영역이 되었다. - P9

... 일단 에드워드 시대 인물과 조지 시대 인물, 두 진영의 구분부터 해보겠습니다. 웰스 씨와 베넷 씨와 골즈워디 씨는 에드워드 시대 인물이라 하고, 포스터 씨와 로런스 씨, 스트레이치 씨, 조이스 씨, 엘리언 씨는 조지 시대 인물로 칭하겠습니다. ...

에드워드 시대는 빅토리아 여왕의 뒤를 이어 1901년부터 1910년까지 통치한 에드워드 7세의 통치 기간을 말한다(1차대전 전까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조지 시대는 ... 1910~36년의 조지 5세의 통치 기간을 의미한다. - P143

여기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끄는 인물이 있어요 (Here is a character imposing itself upon another person). 이 이야기의 브라운 부인은 거의 자동으로 소설을 쓰게 만드는 그런 인물이지요. 모든 소설이 맞은편 구석자리에 앉은 노부인과 함께 시작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소설은 인물을 다루는 것이고, 소설이라는 형식은 ...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는 거죠. - P152

이 모든 소설에서 이 위대한 소설가들은 우리가 보았으면 하는 것들을 이런 저런 인물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게 아니라면 소설가라고 할 수가 없지요. 시인이거나 역사가거나 논문 저자면 모를까. - P155

이 열차는 리치먼드에서 워털루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영국 문학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기차입니다. 왜냐하면 브라운 부인은 영원하기 때문이에요. 브라운 부인은 인간성 자체여서 단지 표면만이 달라질 뿐이라, 그 안을 들락날락하는 것은 소설가거든요. 그렇게 부인은 앉아 있지만 에드워드 시대 작가들 누구도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온 힘을 다해서 열심히 무언가를 찾으면서 공감하는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볼 뿐이죠. 공장을, 유토피아를, 심지어 열차 칸의 장식과 가구를 바라보면서도 절대 그녀를, 삶을, 인간 본성을 보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목적에 맞는 소설 기법을 발전시킨 겁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해줄 도구를 만들고 관습을 확립한 거죠. 하지만 그 도구는 우리의 도구가 아니고 그들이 하는 일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관습은 파멸이고 그러한 도구는 죽음입니다. - P163

에드워드 시대의 도구가 우리가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그들은 사물의 짜임새를 엄청나게 강조했거든요. 집을 제대로 보여주면 독자들이 그 집 안에 사는 사람을 추론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어요. 집을 제대로 대접하기 위해 훨씬 살기 좋은 집으로 만들어냈죠. 하지만 소설은 일차적으로 사람에 대한 것이고 그들이 사는 집은 이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식으로 소설을 시작할 수는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조지 시대 작가들은 당시 널리 쓰이던 그 방법을 집어던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브라운 부인을 독자에게 전달할 방법이라고는 없이 홀로 부인을 대면하게 되었던 거죠. 하지만 이 말은 아주 정확하진 않아요. 작가는 절대 혼자인 법이 없거든요. 늘 대중과 함께하니까요. 같은 자리에 앉아 있지 않더라도 적어도 옆 칸에는 있는 거죠.
대중이란 여행을 함께하는 낯선 동행입니다. - P167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은 쇠퇴의 과정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더 신나는 우애의 교류를 위한 서막을 열어줄 어떤 관례, 작가와 독자가 함께 받아들일 관례가 부재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각 시대의 문학적 관습은 워낙 작위적-누군가를 방문하면 내내 날씨 얘기를 해야 하고, 오직 날씨 얘기만 해야 한다는 식으로-이라 약한 사람은 울화통이 터지고 강한 사람은 문학계의 기초와 규칙 자체를 아예 파괴해버리는 것도 당연해요.
어딜 보나 이런 징조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어요. 문법을 어기고 문장을 해체하죠. - P171

작품은 독자와 작가 사이의 친밀하고 동등한 동맹관계에서 태어나는 건강한 자식이어야 합니다. 작품을 무력하고 타락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러한 독자와 작가의 분리, 여러분 쪽에서의 겸손함, 우리 쪽에서는 전문가연하는 오만과 체면이거든요. 매끈하고 반지르르한 소설들과 거들먹거리는 우스꽝스러운 전기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비평들, 그리고 현재 그럴듯한 문학으로 통하는, 고운 가락으로 장미와 양의 순수함을 찬미하는 시들이 바로 거기서 생겨나는 겁니다. ...

바로 지금 영국 문학에서 또 하나의 위대한 시대가 태동하고 있다고요.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브라운 부인을 버리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결심할 때에만 가능합니다.(1924)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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