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뷰를 쓰는 목표는 아주 단순하다. 훌륭한 르 귄의 글을 읽기 전에 초심자인 내가 읽어서 일단 무슨 말인지를 내 말로 정리해 적어두기 위해서다. 르 귄의 고매한 통찰을 접하기 전, 배우는 마음으로 정리하는 글이다.
1. 청순한 정리
에세이는 이렇게 시작된다. 작가에게 그 작가가 쓰고 있는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가 놀리듯 이렇게 말한다. "Catch me, if you can." 그 캐릭터를 잡으려는 노력이 바로 소설 쓰기이다.
에세이 안에 아주 짧은 소설의 한 장면으로 쓸 수 있을 법한 컷이 삽입되어 있다. 리치몬드에서 워털루로 가는 기차 안에서 픽션이 이뤄진다. 등장인물은 세 명, 스미스씨, 브라운 부인, 그리고 화자이다. 앞의 두 명만이 말을 한다. 픽션 밖 에세이는 화자인 젊은 "나", 곧 버지니아 울프가 요즘 소설 좀 쓴다는 것들의 방식이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소설 속 인물의 사실성(the reality of characters in a fiction)"을 강조하는 아널드 베넷("Five Towns"라는 소설의 작가란다)에게 반론을 펼치는 내용이다.
베넷은 인물의 사실성이 그 인물에 대한 자세한 묘사에 의해 창조된다고 보는 것 같다. 울프는 이를 지나간 시대(에드워드 시대, 1901-1910)의 시류로 간주하면서, 그 이후의 조지 시대(1910-1936)에서 인물의 사실성은 그녀의 생김새, 출신계급, 옷차림 같은 표면, 또는 "사물의 짜임새"(fabric of things, 167)에 대한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그녀 내면의 경험에 대한 작가의 주목으로부터 탄생한다고 본다. 에드워드 시대의 작가들은 그녀가 보는 것, 또는 그녀의 옷, 그녀가 지금 있는 열차칸의 모습에 대해 디테일한 묘사를 할 뿐, 그녀를, 그녀의 삶을 보지 않는다(163-164).
작가는 자신이 창조하고 있는 캐릭터의 내면을, 그/녀가 무언가 경험하면서 느꼈을 감정의 파고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 브라운 부인이 껍데기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과 엄청난 다양함을 지닌 노부인"(176), 또 사람의 마음을 지닌 캐릭터로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그제서야 작가와 독자는 같은 열차칸에서 여행하는 동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약간의 거들먹
이게 맥락이 맞는 연관짓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글을 읽고 푸코가 쓴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 관하여>가 생각이 났다. (제목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뭐 어쨌든...)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좀 전의 프로이센에서 당시 유행하던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두고 설왕설래가 벌어졌고, 이에 대해 칸트가 멋진 말들을 했었다. 그리고 그 칸트의 멋진 글이 출판된 지 2백주년을 맞아 푸코는 죽음을 앞두고 글을 쓴 것이다. 계몽... 미성년에서 벗어남... 스스로 책임질 수 있음.... 이성의 공적 사용... 뭐 이런 말들이 아련히 기억나는데...
그 텍스트처럼 이 텍스트도 시대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캐릭터의 리얼리티를 살리는 방식에 대한 신구갈등이 소재이다. ... 음... 여기까지... 더 쓰려면 칸트 글도, 푸코 글도 다시 펴서 봐야 할텐데... 나는 지금 공부를 하고 싶지는 않다.
3. 다시 겸손해질 때
나는 해러웨이를 읽다가 르 귄을 읽게 되었고, 르 귄을 읽다 보니 또 르 귄이 너무도 사랑한 훌륭한 작가들을 만나게 된다. 노자, 폴 굿맨, 머레이 북친, 칼 융,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다 이름만 들어본 이들이었다.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만, 이들을 다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르 귄의 헤인시리즈부터 천천히 차근차근 읽는 것이 먼저다. 오지랖을 좁게 유지해야만 중심을 잃지 않고 집중할 수 있고, 궤적을 그릴 수 있다. 이렇게 다짐해도 또 호기심이 발동해서 시간을 들여 무언가 새로운 텍스트를 읽게 된다.
지난 번 <세상 끝에서 춤추다>를 읽으면서도 울프의 <3기니> 이야기가 한참 나와서 읽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잘 참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못 참고 읽어 버렸다. 1924년에 쓰여진 글이니, 백 년 전에 쓰여진 글이다. 영문학의 역사는 전혀 모르고, 빅토리아 시대는 들어봤어도 그 이후의 에드워드 시대와 조지 시대가 나와는 무슨 상관이겠는가? 단지 르 귄이 이 글을 읽고 자신의 글을 썼기 때문에 그 르 귄 글을 읽기 위해 읽었을 뿐이다. 따라서 대단한 감동이나 통찰을 얻지는 못했다. 정리나 해두었을 뿐...
자, 이제 다시 르 귄의 글을 읽을 차례이다. 또 나는 경탄하면서 겸손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