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환상문학전집 34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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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의 Staying with the Trouble  6을 읽었을 때,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는 르 귄도, 그녀의 헤인 시리즈도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나의 시선이 머물던 곳은 제임스 캐머런의 <아바타>(2009)가 르 귄의 이 소설을 헐리우드 스타일로 각색한 것이라는 언급였다. 그리고 이 소설이 아니라 르 귄의 캐리어백 픽션 이론이 나를 더 사로잡았다. 그때부터 조금씩 르 귄을 읽어 왔다. 나의 느린 독서 속도로 인해 언제쯤 , 이제 르 귄 쫌 안다고 할 수 있을 날이 올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르 귄과 해러웨이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앎과 느낌을 준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어떤 힘찬 기운으로 가득 찬다. 이 기분이 아마도 르 귄을 본받아 해러웨이가 애용하는 형용사 ‘mindful’로 재현할 수 있는 정동이 아닐까 싶다.

 

1972년에 처음 출판된 이 소설은 1968년 겨울 영국에서 완성되었다. 당시 이 중편에는 작은 녹색 인간들(The Little Green Men)”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출판하면서 지금과 같은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The Word for World is Forest)”으로 바뀌었다. 르 귄은 미국에서 1960년대 내내 많게는 수백 명, 적게는 열 명쯤의 시위대에 속해 반핵과 반전 구호를 외쳤지만, 속마음으로는 무력함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녀가 1968년 한 해 동안 타국땅에 머물면서 그 전에 평화시위의 조직과 참여에 쏟았던 에너지를 이 중편의 집필에 쏟아부었다. 이 소설은 당시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대응일 수도, 또는 15세기 이후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 정복, 학살, 착취(<미션>)에 대한 알레고리일 수도 있다. 어쨌든 <아바타>에게 영감을 준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르 귄의 모든 스토리가 그렇듯 읽는 사람에 따라 여러 이야기들을 할 수 있겠지만, 이 리뷰에서는 그동안 내가 읽은 르 귄의 다른 글들과 맞닿는 주제들을 다루고자 한다.


 


1. Terran Vs. Athshean

작품 중 갈등을 구성하는 두 축은 지구인(Terran) 정복자 데이비드슨 대위와 애스시아인(Athshean) 셀버다. 이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지구인과 애스시아인을 비교해보자. Earth, terra, tellus가 지구의 흙(soil)과 행성(planet)을 동시에 뜻하는 것처럼, Athshea는 행성 이름이면서, 세계(world, 세상)라는 뜻과 숲(Forest)이라는 뜻을 함께 지니고 있다(95). 애스시아인들은 지구인과는 다른 생체 리듬으로 살아간다. 지구인처럼 밤에 자고 낮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낮에도 종종 반쯤 자는 상태에서 꿈을 꾼다. 그들은 세계(==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며, 나이든 여성이 통치한다. 족장도, 사냥꾼도 여자다. 자연과의 관계나 성별분업의 측면에서는 지구와 정반대다.


지성은 남자에게, 정치는 여자에게, 윤리는 그 둘의 상호작용에 맡겨져 있지”(104).

지구인들은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이 완전히 파괴된 지구를 떠나 애스시아를 식민화해 이 행성에서 나무를 벌채하여 지구로 보내는 일을 한다. 모두 남자인데 2천여 명쯤이고, 지구에서 212명의 여자들을 태운 우주선이 도착하는 장면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애스시아에는 이미 다른 인간들이 살고 있는데, 지구인들은 이들을 크리치라고 부르고, 애스시아인들은 지구인들을 유멘이라고 부른다. 지구인들은 키가 1미터밖에 안 되고 녹색털을 갖고 있는 크리치들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애스시아인들은 같은 인간을 죽이는 유멘들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엄연히 인간 에 속하는 두 (two species of the genus Man)이다(105). 이들의 계통적 관계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헤인인들은 오래전 자신의 조상들이 지구와 애스시아를 포함한 여러 행성들을 식민화했고, 그들의 후손이 각 행성의 환경에 맞게 진화했다고 주장하지만, 지구인들은 지구에서 사라진 아틀란티스의 거주자들이 애스시아를 식민화했지만 그들은 모두 죽었고, 그 행성에 있던 원숭이들이 오늘날의 크리치들로 진화했다고 생각한다(14).

 

2. 데이비드슨, 그 순수한 악: 영웅서사

르 귄은 의식적으로는 순수하게 악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단다. 그러나 그녀의 무의식은 달랐다고 고백한다. 빗속에 몇 명 되지도 않는 시위대에서 느꼈던 무력감을 뒤로 하고 영국에서 이 작품을 집필하던 시기, 그녀의 그 무의식이 악당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데이비드슨의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지구에서 온 정복자 중 한 명인 데이비드슨은 훗날 캐리어백 픽션 이론이 비판하는 뾰족한 무기를 휘두르는 영웅 이야기의 전형이다. 그는 애스시아의 자연, 여성, 식민지를 수탈하는 데에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사내가 정말로 그리고 완전히 사내인 유일한 때는 여자를 소유했을 때나 다른 남자를 죽였을 때뿐이다. 그건 그가 만들어 낸 생각이 아니었다. 몇몇 옛날 책들에서 읽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그런 장면들을 상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그 때문이었다. 크리치들은 실제 인간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87)

 

데이비드슨은 주워듣거나 책에서 본 말들을 몸으로 행함으로써, 이야기를 사실로 만든다. 크리치 여성을 강간하고 죽이고, 그에 항의하던 여성의 남편을 반쯤 죽어라 팬다. 아니 죽였을 것이다. 지구인 인류학자 류보프가 말리지 않았다면. 크리치에 대한 그의 혐오와 분노는 자신의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늘 계속된다. 전 은하계 동시 통신장비인 앤서블(ansible)을 통해 지구에서 애스시아인들에 대한 기존의 구금과 착취를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을 때에도, 그는 상관의 눈을 속이고 크리치 살육에 나선다. 그는 애스시아인들이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맞아도, 죽여도 대들지 않았다. 셀버만이 예외였다.

 

3. 셀버, 신이자 번역자: 단어의 중의성

데이비드슨의 반대편에 애스시아인 셀버가 있다. 그는 데이비드슨이 강간살인한 여인의 남편이다. 애스시아인은 원숭이를 사냥해서 먹기는 하지만 같은 인간은 절대로 죽이지 않는다. 아니, 않았다. 그러나 이 오랜 전통을 깬 것이 바로 셀버다. 그리고 이 전통을 깬 순간 그는 신이 되었다. 데이비드슨에게 맞아 죽을 뻔하다 살아난 이후 그는 바뀌었다. 데이비드슨이 지구에서 새로 온 여자들과 즐기러 센트럴빌에 간 사이에 셀버는 다른 애스시아인들과 함께 뉴 타히티 기지를 완전히 불태우고, 거기 있던 모든 지구인들을 살해한다. 다시 돌아온 데이비드슨은 보고도 못 믿을 광경에 아연실색하고, 무릎을 꿇은 채 처음으로 셀버를, 애스시아인들을 올려다 보며 목숨을 구걸한다. 셀버는 그를 살려주지만, 데이비드슨은 정신 못차리고 까불다가 결국 애스시아에 있는 모든 지구인 기지들이 불타게 되고, 지구에서 온 여자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다 죽고, 남은 남자들은 그들이 크리치들을 가뒀던 아주 좁은 구덩이에 갇히게 된다.

 

셀버 샤압(Selver sha’ab). 샤압도 두 가지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번역자(translator)”라는 뜻이다. 무엇이 번역되는가? 애스시아의 꿈꾸는 사람들(Dreamers)은 다 남자 말(Men’s Tongue)”, 곧 꿈과 철학의 언어를 일상의 언어인 여자 말(Women’s Tongue)”로 옮길 수 있다. 이들은 무의식이 지각한 것을 소리내어 말함으로써 두 현실(two realities), 곧 꿈 시간(dream-time)과 세계 시간(world-time)을 연결한다. 이들은 말함으로써 행위한다(111). 셀버는 원래 꿈꾸는 사람였지만, 이제는 신이 되었다. 꿈꾸는 사람의 말 자체가 행위이지만, 셀버는 이전에 애스시아에 없던 말, 곧 살인(murder)을 무의식 속에서 지각했고, 이를 일상의 언어로 번역해서 애스시안인들 모두를 인간을 살해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고, 이를 통해 지구인들에게 피의 복수를 행할 수 있었다.

 

이 부분은 장자의 도덕경과 칼 융의 이론을 르 귄이 소설에 녹여낸 것으로 보인다. 도덕경은 못 보았지만, 호접지몽을 모티브 삼아 애스시아 인들의 동등한 두 현실을 창조해낸 것 같다. 밤의 언어(119~125)에서 르 귄은 개인의 자아(ego) 깊은 곳의 무의식의 심연은 자기(self)에 닿아 있는데, 이는 집단 무의식이며, 인류라면 공유하는 최소공통분모, 집합적인 마음(mass mind)이라는 융의 이론을 설명한다. 그때 낮의 언어에 대비되는 밤의 언어라고 칭했던 것이 애스시아인의 두 현실 중 하나, 꿈 시간에서 만나게 되는 비전(vision)일 것이다. 신의 속성인 번역밤의 언어의 키워드이다. 애스시아의 남자 말여자 말은 이 소설이 출판된 후 1986년에 발표한 브린모어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는 그것의 지구식 판본이라 할 수 있는 학교에서 배우는 힘의 언어인 아버지 말(Father Tongue)과 그전에 익숙하게 썼던 어머니 말(Mother Tongue)로 변주된다.



 

4. 살인 이후의 무구하지 않은 삶

애스시아 말로는 나오지 않지만, 애스시아에서는 꿈을 가리키는 말은 뿌리(root)”. 지구인들에 대한 살해로 애스시아는 평온을 되찾았지만, 이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할 줄 알게 된 애스시아 인들은 지구인들이 물러간 다음에 과연 이전으로 돌아가 다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소설의 끝은 헤인인 레페논과 셀버와의 대화로 끝난다. 레페논이 질문한다. 애스시아인들이 단결하여 지구인 정복자들을 살인한 이후에 애스시아인들 사이에서 살인이 벌어지지는 않았느냐고. 아직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셀버도 확신할 수 없다. ?


셀버: “서로를 죽이는 데 합당한 이유가 있는 척해서는 안 됩니다. 살인에는 합당한 이유가 없어요.”

레페논: “우리는 갈 겁니다. ... 우리 모두. 영원히. 그러면 애스시의 숲들은 예전처럼 존재하게 될 겁니다.”


레페논의 희망이 이뤄질지에 대해서 셀버는 자신할 수 없다. 사람들 사이의 살인이든 나라 간의 전쟁이든 처음에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된다면 처음의 이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망각된다. 상대가 죽고 내가 살아야 한다. 내가 상대를 쳐부수고 이겨야 한다. 이것만이 중요하게 된다. 지금도 전쟁이 진행중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주변 기운도 하수상한 요즘 살인에는 합당한 이유가 없다는 셀버의 말이 마음에 무겁게 내려 앉는다.

 

Haraway(2016: 120)는 여러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이 영화 <아바타>와 다른 점을 두 가지 지적한다. 첫째, 이 소설에는 과거의 오류를 반성하는 백인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다(인류학자 류보프가 조금 비슷할텐데, <아바타>에서는 시고니 위버가 연기한 여성 인류학자가 나오는데, 둘 다 인류학자지, 지구인 점령군에 대항해 싸우는 전사는 아니다). 둘째,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에서 나오는 구원 서사 같은 것이 르 귄의 이 작품에는 없다. 애스시아인들은 이전에는 몰랐던 살인을 할 줄 알게 되었고, 그 기억은 한 번 존재하게 된 이상 계속 존재하게 된다. 그들은 더 이상 무구(innocent)하지 않다. 그들이 과연 지구인들이 오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5.

레페논이 셀버에게 이제 그 누구도 당신들의 행성을 침략하거나 나무를 베러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어쩌면 학술적인 연구 목적으로는 올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긴다. 이것이 아마도 단편 <제국보다 광대하고 느리게>에 대한 복선이 아닐까 싶다.

 

2023년 한해가 저문다. 하고자 했던 일 두 가지를 못했다. 하지만 그저 놀면서 마음 편히 지내지는 않았다. 못한 일을 새해에는 꼭 해치웠으면 좋겠다. 한해를 마치면서 뭘 해야 하나 짱구 굴리다 고작 생각해낸 것이 이 책 읽고 리뷰 쓰는 거였는데, 어쨌든 이거 하나는 했다. 언제 읽을지 모르겠지만, 네 번째 읽기는 로캐넌의 세계가 될 듯하다.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리고 평화를 빕니다~  

Shalom! May peace be with you! And a happy new "mindful"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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