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자들 환상문학전집 8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

처음 읽은 르 귄의 장편이다. 정말 대단한 작품이다. 오랜만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영원회귀 부분을 펼쳐보기도 했다.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몇 개의 테마를 골라 본다. 머릿속에서 맴도는 키워드들은 이런 것들이다. 두 시간성의 공존, 과학과 윤리, 약속, 책임, 집으로 돌아오는 것... 그런데 이것들을 엮어 줄거리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한 번 해보자.

 

1. 화려하지만 불평등한 현실 Vs. 척박한 자연 속의 가난한 아나키스트 공동체

1974년에 출판된 이 책에서 르 귄이 상상한 두 행성의 모습은 당시의 현실과 이상 간의 대조이다. 우라스에는 자본주의 국가내 양극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간의 냉전, 3세계의 독재와 민주화 운동의 대립이 미니어처처럼 들어 있고, 아나레스에는 1960년대말 히피들이 이루고 싶어 한 평등한 공동체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우라스의 현실이 아주 참혹하지도 않고, 아나레스에 구현하고자 노력한 이상이 그리 완벽하지도 않다. 분명히 밸런스 게임 같은 인상은 존재한다. 부와 지식을 소유하고 그것을 과시하는 상층계급과 그것들을 소유하지 못한 하층계급 사람들이 상층계급에 의해 소유된 채 필요없을 때는 보이지 말아야 하는 양극화된 나라인 에이이오 국. 자연환경도 척박하고, 식량이나 천연자원도 넉넉하지 않지만, 화폐, 도둑, 감옥, 거지, 소유, 계급, 직업, 성매매, 결혼, 가족, 음주가 없는 오도주의(Odonian) 공동체 아나레스. 이 대립적인 두 장소는 생태계, 제도, 언어, 어휘, 복장, 사고방식, 관계맺음이 모두 다르다.

 

160여년 전만 해도, 아나레스는 우라스의 위성, 곧 달이었다. 아나레스에도 생명이 살았지만 우라스만큼 많은 종이 살지는 않고, 자연환경도 훨씬 더 척박하다. 우라스력 아홉 번째 천년대의 738년 아나레스에 수은 채굴을 위한 정착지가 건설된다(113). 우라스에서는 저항운동이 전개되어서 747년 봉기가 발생하였고, 이를 이끌던 지도자 라이아 아시에오 오도(698~769)는 검거되어 드리오의 감옥에서 9년을 지내야 했다(102, 106). 그녀가 죽은 후 771년 정부가 전복되었고, 오도주의자들에게 달, 그러니까 지금의 아나레스를 주어서 그리로 이주시키자는 제안이 제시된다.이에 따라 오도주의자들의 아나레스행 이주가 20년 동안 진행되었다(113). 정착이 완료된 이후 두 행성간에는 그 어떤 인적 교류도 없이, 무역물을 수송하는 우주선이 1년에 8회만을 왕복하고 있다. 일종의 관리무역인 셈이다. 아나레스의 인구는 2천만 명이다(57). 10억명의 우라스의 1/50밖에 안 되지만, 지구상의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평등한 대규모 공동체인 것이다.

 

2. 원환 구조: 13개의 장과 교차편집 구성

이 소설은 1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장은 쉐벡이 아나레스에서 우라스로 떠나는 이야기이고, 마지막 장은 그가 다시 고향 아나레스로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그 사이의 열 한 개의 장들은 우라스와 아나레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교차 편집되어 있다. 우라스에서의 약 6~7개월과 아나레스에서의 약 38년 남짓의 세월이 책 전체에 걸쳐 교차하며 탄탄한 이야기 전개를 선보인다. 시간상으로는 2, 4, 6, 8, 10, 12, 1, 3, 5, 7, 9, 11, 13장으로 배열된다. (만약 다음에 읽게 되면, 한 번 이 순서로 읽어봐야 하겠다.) 12장의 이야기가 1장으로 이어지는 원환 구조이다. 그런데 이 원환(cycle)은 소설의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테마로 등장한다.

 

3. 일반 시간성 이론: 두 개의 시간성의 공존

오도의 핵심 사상 중 하나는 목적과 수단(ends and means)이 뒤바뀔 수 있다는 인과적 가역성(Causative Reversibility) 원리인데, 이는 당시 우라스와 아나레스 모두에서 정상과학 반열에 올라있던 시간 연속성(Sequency) 이론과는 모순된다(59). 숫자를 좋아하던 아이 쉐벡은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이 간극에 대한 논문을 계획했고, 이후 시간물리학자로 성장한다. 그를 최고 학자로 만들어줬던 것은 동시성(Simultaneity) 이론이다(123). 동시성 원리라는 말은 그의 음악가 친구 살라스가 작곡하고자 한 실험음악의 이름에서 유래했다(200). 이전까지 아나레스의 정상급 물리학자였던 사불은 우라스 물리학계와의 교류를 독점하였고 처음에는 쉐벡의 연구를 도와줬지만 나중에는 그를 견제한다. 타크베르의 조언을 수용한 쉐벡의 타협으로 둘은 공동연구를 발표했고, 이 저작은 우라스 물리학계 최고권위자인 아트로의 무한연속성 가설을 정상과학의 지위에서 끌어내린다(133).

 

연속성과 동시성은 무엇인가? 7장에서 우라스인 디어리에게 쉐벡이 자신의 이론을 설명할 때 이 두 시간관은 명확히 나타난다(253~256). 연속성이 시간의 화살”, 곧 시간이 과거를 거쳐 현재를 통과해서 미래로 가는 모델이라면, 동시성이란 시간의 원이다. 이 책에서는 오도주의의 상징인 생명의 원이 이를 상징하는데, 이는 곧 니체의 영원회귀이고, 르 귄과 해러웨이가 사랑해마지 않는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인 오우로보로스(Ouroboros)의 형상이다. 이는 아기나 성인의 무의식 상태의 마음이며 신화와 전설의 시간이다. 여기에는 시제의 구분이 없고, 원인과 결과가 뒤엉킨다.

 

쉐벡은 (오도로부터 영감을 받은) 동시성 이론으로 (우라스 최고 물리학자 아트로의) 연속성 가설을 쳐부수는 것을 넘어서, 양자를 통합한다(318). 르 귄은 쉐벡의 입을 빌어, 데카르트와 베이컨을 종합한 칸트와 같은 말을 한다.


존재(being)나 생성(becoming) 어느 한쪽을 환영이라 치부해 버릴 수 있을까요? 존재 없는 생성은 의미 없는 것이지요. 생성 없는 존재는 커다란 지루함이고...”(256)

그의 일반 시간성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의 꿈을 상기시킨다. 아니, 그보다 더 원대하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을 물리학 자체로 받아들여야지 철학이나 윤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기 때문이다(316). 그러나 쉐벡은 지속만이 아니라 창조까지, 존재만이 아니라 생성까지, 기하학만이 아니라 윤리학까지 포함하는 복잡성을 다루는 질문에 골몰한다(258)

 

4. 시간의 윤리: 약속과 책임

아인슈타인과 달리, 쉐벡의 우주론은 윤리학을 수반한다. “지금과 지금 아닌 것의 차이를 보면서양자간의 연결을 만들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는 도덕성, 책임이 개입한다. 약속을 깨는 것은 과거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현될 미래에 대한 희망도 부인하는 것이다(257). 동시성만 존재한다면, 곧 존재 없는 생성만 있다면, 이러한 윤리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책임성의 약속이 과거와 현재를, 현재와 미래를 함께 묶어두는 것이다. 이 약속의 윤리는 그의 시간 이론뿐만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한다. 기억을 통해 과거는 현재와 연결되고, 의도를 통해 미래 또한 현재와 연결된다(210).

 

약속은 오도가 747년 봉기 이후 투옥되어 감옥에서의 편지유추를 쓰며 9년의 시간을 견디게 해준 힘이며(106~109), 수단과 목적을 분리하지 않는 쉐벡과 타크베르의 반려관계가 존재의 완전함이라는 기쁨에 이르게 한 힘이기도 하며(210, 378~380), 우라스의 총파업에 쉐벡이 앞장서고, 총상을 입은 참가자를 끝까지 돌보게 한 힘이면서 다른 동료들이 쉐벡을 탈출시키게 한 힘이기도 하다(341). 약속은 자발적이어야 하고, 일단 맺은 약속은 방향을 택했다는 것을, 따라서 선택이 제한됨을 뜻한다. 따라서 약속은 자유와 대립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복합적 자유에 있어서 필수적이다(280).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가늠할 때에 계속 곰곰 생각해봐야 할 말 같다.


행동은 과거와 미래의 조망 속에서 일어날 때라야 인간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지속성을 확고히 하고, 시간을 전체로 묶는 충실함이야말로 인간 힘의 근원이다”(379).

5. Come back home

진정한 여행은 집으로 돌아오는 것”(13/439, 번역누락) ... 나는 이 구절을 르 귄의 다른 글들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래서 이 익숙한 글의 출처를 찾아보았지만 도대체 어떤 글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왠지 그 글을 찾으면 이 섹션을 훨씬더 마음에 들게 쓰고 리뷰 자체를 알잘딱깔센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과거에 보았다고 생각한 다른 글은 지금은 못 찾았지만 미래에 보게 되리라.


세계일주처럼, 여행(the voyage)의 진정한 본성은 귀환을 포함한다”(68).

이 소설의 줄거리를 아주 짧게 정리하면 이렇다. 빈손으로 우라스로 떠난 쉐벡이 일반 시간성 이론을 완성한다. 이것이 전우주적 실시간 의사소통 시스템인 앤서블(ansible) 개발의 기반 이론이다. 이 이론의 소유권을 확보하고자 했던 에이이오국의 음모에 넘어가지 않고, 쉐벡은 이를 전우주적 공통재(commons)로 만든 다음에 다시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이 전체적 구조 안에서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의도가 현재라는 순간 안에 교차되고, 여정 끝에 결국 집으로 돌아오면서 약속이 이뤄진다. 아직까지 아나레스에서의 반응이 어떨지는 분명치 않은 채 소설은 끝이 난다.

 

Come back home, 귀환이라는 테마는 소설 전체에 걸쳐 복선으로 계속 등장한다. 어린 쉐벡은 벽에 가로막혀 집에 돌아가지 못하다 부모의 음성을 듣고 집에 돌아왔음에 안도하는 꿈을 꾼다(2/43~44). 타크베르와 여행 중의 쉐벡이 주고 받은 편지도 쉐벡의 귀환에 대한 갈구를 담고 있다(8/ 289, 293).

 

우라스에는 얻을 수는 있지만 충족될 수는 없는 쾌락(pleasure)이 있었을 뿐이다. 쾌락은 끝나고, 끝나면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닫힌 원, 잠긴 방, 감옥이다(379). 여기에는 시간도 길도 약속도 없다. 반대로, “여행과 귀환(journey and return)”은 시간 안에서 이뤄진다. 여정은 시간의 흐름과 미래에 대한 불확정성을 수반한다. 한 순간에 끝나거나, 꽉 짜여진 각본이 그대로 실행되는 여행은 없다. 여행에는 운, 우연, 용기가 필요하다. 시간을 낭비하거나 거스르지 않고 그 안에서 일하면서 존재의 완성을 추구하는 여정. 그 끝에 약속이 실현된다. 이것은 쾌락(pleasure)이 아니라, 기쁨(joy)이다.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이지만, 기쁨은 고통마저 포함한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쉐벡이 타크베르와 파트너십을 결심하던 순간(6/206)뿐만 아니라, 우라스로 떠나기 직전 임신한 타크베르와 함께 있을 때(10/377~380)에도 찾아온다. 타크베르는 이를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대화로 표현한다. 그녀는 우라스로 떠나는 것을 망설이던 쉐벡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길을 떠난다면 말이야. 당신은 늘 가려는 곳에 도달하지. 그리고 항상 돌아오는거야.”(12/431)

6. 원환이면서 화살인 시간

읽는 데 열흘, 리뷰 쓰는 데 보름쯤 걸린 것 같다. 제대로 읽고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을 이겼다. 그런데도 부족함을 느낀다. 애초에는 아나키스트 유토피아 소설이라는 점이 기대되었는데, 그보다는 시간 이론, 진정한 여행은 돌아오는 것, 쾌락과 기쁨의 대조 등이 더 마음에 남는다. 물론 누군가와 아나키즘 이야기를 해야할 일이 있을 때면 이제 크로포트킨이 아니라, 르 귄의 이 책을 떠올릴 것 같다.

 

화살이면서 원환이기도 한 시간이라는 아이디어는 매우 매력적이다. 심장이 뛰는 것, 오른발과 왼발을 번갈아 내딛으며 걷는 것, 다 아주 작은 현재의 반복이다. 이 작은 반복은 그보다 큰 반복 또는 순환이라 할 수 있는 오늘 하루 안에 존재하고, 그 하루도 올해 1년 안에 존재하고, 그러한 순환의 단위를 셈으로써 우리는 시간을 측정한다. 걷거나 뛰거나 헤엄쳐서 어떤 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몸의 반복행위의 현재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 공간적 이동의 궤적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출발 지점부터 도착 지점까지 나는 반복운동을 하지만, 그것의 결과는 두 지점 사이의 선, 방향을 따라 걷는 길로도 나타난다. 오늘 아침 집을 나설 때 나는 걸어서 고개를 넘었고, 이따가 퇴근할 때는 막걸리와 간단한 찬거리를 사서 언덕을 올라 집으로 돌아간다. 걷는 현재의 반복이 시간의 흐름 안에서 출퇴근이라는 공간적 이동 여정으로 바뀐다.

 

하루가 아니라 더 큰 시간단위라면 어떤가? 올해 안에 마쳐야 하는 일들... ... 생각하기 싫다. 그래도 해야 한다. 하기로 약속했고, 하고 싶기도 했고, 결과물도 보고 싶다. 미래가 현재가 된 순간 행복하려면 지금 현재를 잘 보내야 한다. 이 웬 갓생러 같은 소리냐?

 

Ps.

다음 헤인 시리즈 읽기는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이다. 이 시리즈 읽기 시작하면서 원래 해야 할 일들, 먼저 약속한 것들을 미루지 않기로 혼자 다짐했다. 그래서 언제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을 읽을지는 모르겠다. 약속이란 선택의 제한을 동반하는 것이니...

 

이 리뷰의 별점은 순전히 내용에 관한 것이다. 번역은 문제가 좀 있다.

(번역 문제는 이 페이퍼에 정리해두었다: https://blog.aladin.co.kr/eroica/14638111 )


기억해둬야 할 것 하나 더. 르 귄은 폴 굿맨이라는 미국 아나키스트를 좋아했다고 한다. 찾아보니, 국내에 번역된 책이 하나 있다. 바보 어른으로 성장하기: 부조리한 사회에서 생존한다는 것. 정성과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잊지 않기 위해 적어둔다.

 

또 하나 더.

찾아보니, The Disposseseed를 포함해서 르 귄의 작품들 중 일부가 라디오극으로 제작되었다. https://libcom.org/article/dispossessed-radio-play

이 사이트에 가면 들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