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 현실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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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서평을 써야지 다짐하고 앉았다. 다 읽는 데 한 달 좀더 걸린 것 같다. 중간쯤 읽을 때에 가끔 가는 꽤 큰 전통시장에서 송이버섯 구경을 하면서 높은 가격에 입맛만 다시기도 했다. 갓이 핀 송이는 더 쌌지만, 그 가격도 내게는 벅차 포기했다. 만약 그때 송이버섯을 살 여유가 있었다면 좀더 재미있게 읽지 않았을까? ㅋ 처음엔 재미있게 읽었는데, 나중엔 계속 똑같은 이야기 같아서 지겨웠다. 소위 포스트휴먼 인류학도 그저 그렇다.


1. 주변자본주의에서의 구제 축적

애나 칭은 송이버섯 채집현장에서의 참여관찰과 심층면접에 기반해서 버섯 채집인, 구매자, 중개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자연 존재들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자 하는 인류학적 방법을 성실하게 실행한다.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 모두에 대하여 귀기울여 듣기와 알아차리기의 기술을 실행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그녀가 머리속에 갖고 있는 패치(patch) 자본주의의 밑그림에 기반하여 일종의 스토리텔링으로 재현한다. 패치는 어떤 장소에 자리잡고 있는 얽힘의 배치(assemblage, 56~61)이고, 이 배치들은 상품사슬에 의해 연결된다. 상품사슬의 각 마디에서는 일종의 번역이 이뤄진다. 여기에서 번역은 라투르가 정화의 대립항으로 쓰는 번역과는 조금 다르다. 상품사슬의 상류에서 번역은 야생의 노동과 자연이 자본증식 과정에 투입되어 조율되는 과정을 가리키기도 하고, 하류에서는 상품이 선물로 바뀌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칭은 상류의 번역을 구제(salvage)”라는 말로 포착하고자 하는데, 그 의도는 어느 정도 짐작은 하겠는데, salvage구제로 옮기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딱히 대안이 생각나지는 않는다. 이 송이버섯이 채집되어 구매인에게 넘겨지는 구제 축적의 장소는 자본주의의 내부인지 외부인지가 애매하므로, 주변자본주의(pericapitalism)라는 그녀만의 용어로 불리운다. 칭은 그곳에 단일경작 플랜테이션 농장의 임금노동의 규율과 확장가능성(scalability)과는 대비되는 채집인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있다고 해석한다. 이 자유는 그 순간 그 장소에 존재하지만, 상품사슬에 편입되면서 송이버섯이란 비인간 존재도 소외를 겪는다.


2. 교란과 오염으로 함께 만드는 다종의 세계 만들기

미국, 중국, 일본 등의 송이버섯 숲의 이야기들이 등장하는데, 교란과 오염을 자연과 송이버섯에 해가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미국식 이해가 오히려 그것이 송이버섯 키우기에 도움이 된다고 이해되는 일본식의 이해와 대조된다. 중국 윈난성에서는 이것이 절충적인 방식으로 실행된다. 같은 윈난성에서도 티벳 채집인이 한족 구매자에게 버섯을 판매하는 과정에는 열띤 흥정이 존재하지만, 채집인과 구매자가 모두 이족인 마을에서는 신뢰와 장기적 관계에 기반해 있기 때문에 그러한 흥정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부분의 이야기는 해러웨이와 카옌의 관계 같은 것, 곧 마굴리스의 이론을 발전시킨 공동발생 이야기의 연장이다. 서로 다른 종들이 얽히면서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고전파 정치경제학과 집단유전학의 개체주의적 전제가 비판된다.


3. 잠복되어 있는 공유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중심에서건 아니면 안팎의 경계가 불확실한 주변자본주의에서건 불안정성과 불확정성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칭은 이 제도화된 소외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얽힘의 일시적 순간들에서 잠복해 있는 공유지(latent commons)”의 가능성을 탐색한다(450~452). 꼭 있으라는 보장도, 꼭 더 좋으라는 보장도, 구원의 보장도 없지만 이 잠재적 공유지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 모두가 함께 여기에서 만들어가는 희망의 과정이다.  


큰 꿈은 꾸지 말되 포기는 하지 말자. 뭐 이런 이야기 같다. 일상 속의 작은 희망, 그래그거 중요한 거다. 에효


4. Anti-ending??

연구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는 글들은 보통 결론 대신 결론에 대신하여같은 이름의 결말부로 끝나는 것을 종종 본다. 그런데 이 책처럼 마지막 장 직전 챕터인 20장의 제목이 “Anti-ending”인 글은 처음 본다. 이 책은 끝맺기를 거부한다(503). 나는 대체로 열린 결말로 끝나는 서사구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글도, 영화도. 왠지 저자가 내지 못하는 결론을 독자, 청중, 관객에게 미룬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도 그래서 끝부분이 좀 실망스러울 뻔했다. 마지막 부분에 인용한 글이 르 귄의 「소설의 운반 가방 이론」(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 https://blog.aladin.co.kr/eroica/14149146#Comment_14149146)이 아니었다면, 분명 이 책의 독서경험은 나의 고정관념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르 귄의 캐리어백 픽션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정형으로 제시한 시작, 중간, 끝이 있는 이야기에 반대하며, 오우로보로스가 상징하는 원환의 이야기를 긍정한다. 칭이 이 책의 마지막에서 인용한 르 귄의 스토리는 실뜨기가 되어 해러웨이의 손으로 넘어간다.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 하기』 제2장을 보라. 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책은 끝나지만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계속된다. 포스트휴먼 인류학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너무 지루해져서 별 네 개 줄까 하다가 르 귄 이야기로 끝나서 별 다섯 개다.


역자는 매우 훌륭한 번역을 하셨지만, 칭이 인용한 르 귄의 이 글 맨 앞 부분을 오역했다. 『세상 끝에서 춤추다』(이수현 역, 황금가지) 297쪽이니 찾아보시기를…. 번역에 관해서 한 마디만 하고 마치겠다. 정말 훌륭한 번역이다. 아무나 이렇게 유려하게 못한다. 그러나 putting-out내놓기로 번역하면 안 된다. Putting-out system(영어판 pp. 114~115, 한글판 214)은 보통 선대제(先貸制)로 번역한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비롯하여 경제사 책에 산업혁명 이전의 자본주의 관계의 등장을 이야기할 때 빈번히 나오는 개념이다. “주변자본주의의 구제축적 이야기를 하려면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인본주의적 개념화라고 깔보기 전에 말이다. 짜잘한 이의제기들을 더할 수 있지만, 역자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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