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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선언문 -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도나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 옮김 / 책세상 / 2019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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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끝자락, 나는 비가 참 많이 오던 제주에서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읽었다(https://blog.aladin.co.kr/eroica/12900997). 처음 읽는 해러웨이였고, 문제투성이 번역과 겹쳐 무척 힘든 책읽기 경험였다.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재미있었고, 해러웨이에게 매료되었다. 그 때의 경험이 예방주사였을까? 결코 쉽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난 이 『해러웨이 선언문』을 읽고, 그녀에게 설득되었다. 이 책은 상이한 시점에 작성된 세 글 – “사이보그 선언”(1985), “반려종 선언”(2003), 그리고 캐리 울프와의 대담(2014) - 로 구성되어 있고, 『트러블과 함께하기』와 함께 2016년에 출판되었다.
리뷰를 쓰면서 몇 번을 다시 읽었는지 모르겠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일단 해러웨이가 명확하게(manifestly) 드러나도록 서술하려면 그녀의 지적 정체성(identity)을 실정적으로(positively) 재현할 수 있어야 할텐데, 이는 생물학(리처드 르원틴, 린 마굴리스, 에벌린 허친슨, 그레고리 베이트슨), 페미니즘(첼라 샌도벌, 케이티 킹, 줄리아 크리스테바, 뤼스 이리가레, 모니크 위티그 등), 정치경제학(리처드 고든), SF(오드리 로드, 어슐러 르귄, 옥타비아 버틀러), 부정신학, 인류학(애나 칭, 매릴린 스트래선), 철학(화이트헤드, 푸코, 에스포지토, 데리다), 카톨릭 코스모폴리틱스라는 실천과 결부된 과학철학(라투르, 스텡거스), 그리고 반려견 훈련에 대한 저작들까지 해러웨이가 섭렵한 지식들을 어느 정도 안다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해러웨이 말고 누가 그럴 수 있을까? 또 세계를 진행 중인 세계(the world ongoing; worlding)로 바라보면서 불변의 동일성을 지닌 고정된 것으로 보기를 거부하는 해러웨이에게 어떤 동일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한가? 바람직한가? 잠정적으로는 가능하고 바람직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178, 327-333)은 어떤 “현재진행형의 넘침(ongoing exceedingness)”이라는 양태에서 기인하는 무한성이라는 속성 때문에 부정적으로 기술될 수밖에 없지만, 해러웨이는 유한한 필멸의 존재이다. 우리 같은. 그러나 우리와 다른 엄청 똑똑하고 해박한 인간이면서도 그 도저한 사유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겸손함을 갖고 있는 SF 리얼리스트이다. 그녀만큼 똑똑하지 않다면, 적어도 그녀만큼은, 아니 그녀보다 훨씬 더 겸손하기라도 해야 한다. 정성들여 읽었는데, 미래의 나를 위해 쓰자. 먼 미래가 아니라 가까운 미래의 어떤 희망을 위해.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읽던 때 내가 1년도 채 못 되어 『해러웨이 선언문』을 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설득되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과거는 현재 속에서 되살아난다. 어쩌면 미래에도.
1. 사이보그 선언 (1985)
1985년에 쓰여진 글이니 소비에트 연방이 아직 망하기 전이다. 두 해 전인 1983년 레이건 정부는 스타워즈 계획을 발표하였고 <스타워즈: 제다이의 귀환>이 큰 히트를 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이 첫 선언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자의 진지한 신성모독, 곧 이의제기이다. 무엇에 대한? 직접적으로는 맑스주의/사회주의/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왜? “여성”의 본질적 통일성은 없으니까!(30, 38) 그런 것을 말하는 “우리” 백인 페미니스트의 “여성” 범주가 순수하고 결백한 것이 아니니까(36). “소외”이건 “성적 대상화”건 핵심 기제를 추상적으로 특권화하여 총체화시킴으로써 (인종처럼) 다른 중요한 적대의 문제에 침묵하니까(41). 또 그들의 모습은 그들의 비판대상과 거울 이미지이기 때문에! 비판대상이란? 맑스주의/정신분석학을 포함하여 총체성을 전제하는 전체론(holism)! 그것이 뭐가 잘못되었는데? 현재를 원죄 이전의 태초라는 과거와 묵시론적 종말이라는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으로 가정하고, 이 역사(History)의 전개는 세계의 총체성의 발원이자 귀결인 모순(contradiction)에 의해 작동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의 추동자로 자기동일성/정체성(identity)을 지닌 주체(Subject)를 상정하기 때문에! 이 주류 페미니즘들이 가정하는 여성 주체는,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고 해도, 그 하나의 주체로 동화불가능한 여러 목소리를 지닌(polyvocal) 여성들의 근본적 차이를 삭제해 버리기 때문에(40)! 이렇게 정리하고 만다면, 사이보그 선언은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소위 “포스트모던” 사상의 맑스주의에 대한 배교행위와 별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 선언의 뛰어난 점은 그 와중에 세계의 모습을 다시 그려내고, 가능한 실천양식들을 모색한다는 점이다. 진지하고 겸손하게, 냉소하지 않으며.
해러웨이가 보기에 사회주의/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본원적 통일성을 가정하는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에 의해 본의 아니게 오염되어 있다. 스타워즈 상황에서 탄생한 사이보그는 총체성이 아니라 부분성, 모순이 아니라 아이러니, 동일성(정체성)이 아니라 혼종성(결연과 연대), 전체론이 아니라 부분적 연결, 전위정당이 아니라 통일전선의 정치를 추구한다(20-22, 31). 사이보그는 아이러니를 통해 전자가 가정하고 있는 이원론적 경계를 붕괴시킨다. 1) 인간과 동물, 곧 문화와 자연의 경계, 2) 유기체와 기계의 경계, 3)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견고했던 경계는 이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사이보그 앞에서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23-26). 하이브리디즘의 이원론 비판이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1)보다 앞서 이 <사이보그 선언>에서 선보인다. 라투르보다 훨씬 더 역사적이고, 더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난 라투르보다 해러웨이가 더 좋다.
새로운 산업 혁명의 신기술은 사이보그뿐 아니라, (당연히 여성이 포함된) 세계 노동계급을 재형성하며(53), 해러웨이는 이를 가사경제(homework economy)와 연동시켜 자본주의의 역사를 세 단계로 구분하고, 각 단계에 조응하는 가족 형태, 젠더, 페미니즘의 이념형들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56-57).
<표> 해러웨이의 역사 구분
자본주의 단계 | 지배양식 | 미학 | 가족 형태 | 젠더 / 페미니즘 |
상업/초기산업 자본주의 | 민족주의 | 리얼리즘 | 가부장제적 핵가족 | 19세기 앵글로-아메리칸 부르주아 페미니즘 |
독점 자본주의 | 제국주의 | 모더니즘 | 근대 가족 | 비-페미니즘적 이성애주의의 만개 |
다국적 자본주의 | 다국적주의 | 포스트모더니즘 | 가사경제의 가족 | 여성 가장 가정, 페미니즘의 다양화, 젠더의 강화와 붕괴 |
해러웨이가 수용하는 가사경제라는 시대 진단은 빈곤의 여성화(55), 제3세계 여성 노동자의 증가(56), 구조적 실업(57), 기아(58), 민영화(58), 여성 과학기술자의 증가(61) 현상들과 연결되어 새로운 네트워킹, 곧 “집적 회로 속의 여성들”로 표상된다. 그녀는 가정, 시장, 직장, 국가, 학교, 병원, 교회 등 여러 구분되는 영역을 관통하는 통합된 여성의 정체성 또는 가부장제의 총체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한다(63-68). 만약 그것을 꿈꾸는 페미니스트가 있다면 그/녀 역시 전체론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꿈을 꾸고 있을 뿐이다. 페미니즘의 언어가 여성 정체성/동일성 확립, 전위당, 순수성, 어머니라는 표상에 집착한다면, 이 “진짜 삶을 살고자 하는 여성들”을 타자화하게 된다. 마치 인간(남성)주의적 신화가 여성, 유색인, 자연, 노동자, 동물을 타자화하였듯(76).
동일성/정체성에 대한 집착, 곧 하나(One)가 되고자 함은 자율성을 갖는 것, 힘을 갖는 것, 다시 말해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해러웨이는 이러한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은 환상이라고 비판하면서, 하나가 아니라 타자(the other)가 되라고 말한다(77). 곧 다양해지라고, 변치 않는 경계를 꿈꾸지 말라고, 너의 실체를 고집하지 말라고, 물렁물렁해지라고! 젠더는 보편적 정체성이 아닐 수도 있다고(84).
해러웨이는 여신이 되고자 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무의식을 꺼내 보여준다. 그리고 말한다. 여신이 되기보다는 사이보그가 되라고. 총체화하지 말라고. 경계를 구성하되 다시 해체하라고. 기술을 악마화하지 말라고. “타자와 부분적으로 연결되고 우리를 이루는 부분 모두와 소통하면서 일상의 경계를 재구성”하라고. 공통언어로 말해지는 단결투쟁의 한 목소리가 아니라, 여러 목소리가 각자의 언어로 터져나오는 이종언어(heteroglossia)를 꿈꾸라고. 이것이 그녀가 발휘하는 페미니스트 방언의 상상력이다(86).
2. 반려종 선언 (2003)
<사이보그 선언>의 이면에는 분노가 깔려 있다면, <반려종 선언>에는 사랑이 깔려 있다(271). 전자가 기술과학(technoscience) 속에서 타자(여성)의 타자들(유색인 여성)의 존재를 드러내고 이들과의 부분적 연결 가능성을 모색했다면, 후자는 자연문화(natureculture) 안에서 함께 살과 침을 섞으며 면역을 갖추고, 서로에게 소중한 타자가 되어 공진화해나가는 이종간의 러브 스토리이다(“지저분한 발달성 감염”, 117). 『트러블과 함께 하기』를 읽으면서도 느낀 건데, 해러웨이 할머니는 음란마귀 농담을 좋아하신다. <반려종 선언>의 시작과 끝은 소프트 포르노로 되어 있다. <건축학개론>에서 납득이가 잘 설명했던 뽀뽀가 아닌 키스로 시작해서 15금 영화 수준에서는 최고로 찐한 러브씬으로 끝난다. 엄청 똑똑한 할머니가 하는 음란농담 - “생명력 넘치는 존재론적 안무”, “메타플라즘”- 은 너무 지적이어서 전혀 야하지 않다.
글의 구성은 참 어지러운데, 그 와중에도 일관된 스토리가 제시된다. <반려종 선언>은 로마 숫자가 붙은 다섯 개의 절 - 자연문화의 창발, 진화 이야기, 사랑 이야기, 훈련 이야기, 품종 이야기 –로 구성되어 있는데, 해러웨이 자신의 메모라 할 수 있는 “스포츠 기자 딸의 기록”이 군데군데 네 번 삽입되고, 편지들도 끼어든다. (아, 진짜 정리하기 힘들다. 한줄한줄 읽을 때에는 어떤 영감들이 떠오르는 듯했는데, 정리하자니 참 난감하다. 그래도 해야지.)
I) 자연문화의 창발
동거하는 인간과 개 간의 반려관계는 서로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존재, 곧 소중한 타자성(significant otherness)이라는 종(種)횡단적 사회성을 형성하고, 더 긴 시간 스케일에서는 양자의 공진화를 가능케 한다(121). 실재(reality)를 역동적 과정, 곧 능동태 동사로 보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이 요약되는데, 이것이 사회주의/급진주의 페미니즘이 공유하고 있는 헤겔-마르크스 계보의 총체성 가정에 대한 비판의 이론적 근거이자, 또한 최근에 해러웨이가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개념화한 “촉수사유”의 전제로 보인다(124-125). 존재는 관계맺기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123). 이질적인 존재 간의 관계맺음, 곧 어떤 “우연한 기초” 위에서 맺는 “부분적 연결”에서 출현(창발)하는 새로운 의미들은 상대방을 자신에게 의미를 갖는 소중한 타자로 만들고 자신을 변화시키며 서로를 공구성한다(125-126, 130).
관계를 맺는 반려들은 살/육신(flesh)을 갖고 있는 존재이지만, 이들을 서로에게 의미(significance)를 갖는 소중한(significant) 타자로 묶는 매개체는 말(word)과 같은 기호(sign)이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는 물질적(material)·신체적(corporeal/physical)일 뿐만 아니라, 기호학적(semiotic)이다. 해러웨이는 개인적 출신배경 – 아버지가 스포츠신문 기자인 가톨릭 집안 –이라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 “기호와 육신, 이야기와 사실”(138)은 언제나 함께 묶여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실 이 둘은 근대적 과학이 이질적인 것으로 규정하여 절연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미사 중에 “이 빵은 나의 몸”이라는 신부의 말이 밀떡을 성체(聖體)로 변화시키는 신비(化體說, transsubstantiation)를 믿으며, 마감시간을 앞두고 야구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실을 다음날 신문에 실리는 이야기로 만들어내야 하는 아버지를 보아온 도나에게 둘은 분리불가능한 것이다(Cf. 345). 심지어 그녀가 자리잡은 또 다른 구체적 상황인 과학의 영역에서도 이야기(story)가 필연적이었음을 주장한다. 이제 “육신과 기표, 몸과 말, 이야기와 세계, 이 모두가 자연문화 속에서 결합된다”(141-142). 이것이 그 다음에 나오는 II절부터 V절까지의 제목에 “이야기(stories)”가 붙는 이유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몸, 관계, 세계, 만약 그런 것들이 있다한들 기호로 바뀌어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곧 이야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현전하지 않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의 의아함 – 팩트와 픽션의 분리불가능성 –을 상당히 해소할 수 있었다.
II) 진화 이야기
최초의 가축인 개가 어떻게 종 간 사회화(152)를 통해 인간과 공진화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의 개 길들이기는 일방적 과정이 아니라 상호적 과정이며, 인간과 개뿐만 아니라, 그들과 다른 생물체의 몸을 왔다갔다 하며 양자의 면역체계를 상호구성하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까지 행위자로 참여하는 자연사이다.
III) 사랑 이야기
개에게 “무조건적 사랑”의 능력이 있다는 것은 거짓이고, 반려견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이 해러웨이는 좀 못 마땅하다. 사람을 공격한 적이 있는 개는 죽여야 하고, 그래야만 개와 인간은 서로에게 책임/응답-능력(response-ability)을 갖고 함께 살 수 있다. 사람은 개에 대해 사랑의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되며, 개는 맡은 일을 해야 한다(164).
IV) 훈련 이야기
도나, 마르코(도나의 대자), 카옌(도나의 반려견이자 마르코의 대견)은 함께 훈련하는 킨(kin) 집단이다. 이들 간에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은 결코 평등이 아니고 소중한 타자성인데 그것은 그들이 함께 추는 춤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168). 훈련하는 개는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사이보그 트럭이 아니고, 조련자는 개에게 사부로서의 예의를 갖추고 정성을 들여야 한다. 그런데 인간이 개와의 놀이를 진정 즐기지 않는다면 개 역시 눈치를 채고 만다는 것이다. 이종 간의 환원불가능한 차이를 넘어 “소통”하는 것, 이 상황 속의 부분적 연결에 적합한 이름은 “존중”(177)이며, 그 존중이 타자를 의미를 지닌 존재, 곧 소중한 타자로 만든다(179). 인간과 개의 대화에서는 인간의 언어가 아닌 다른 기호가 필요하다는 통찰이 나오는데, 개(dog)와 신(God)으로 말장난하는 부분은 재미있다(177).
V) 품종 이야기
시간스케일의 중층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해러웨이의 독특한 시간관이 드러나는 절이라 할 수 있다(193, 235). (1) 지구와 자연의 시간대인 가장 긴 진화적(evolutionary) 시간 스케일, (2) 대면 관계를 맺는 타자들과 의미를 생산하는 가장 짧은 개인적(personal) 시간 스케일, 그리고 (3) 그 중간의 역사적(historical) 시간 스케일. 이 서로 다른 스케일을 지닌 시간의 층들이 바로 우리의 "두터운 현재(thick now)"를 이룬다(277).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영원한 현재가 없듯, 영원한 과거도 없다. 여기에서 해러웨이는 앞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역사적 시간 스케일을 두 가지 견종의 역사에 대한 신화와 추정되는 실제(?) 역사를 상상력을 동원해 함께 실뜨기해낸다. [역자는 scale을 "척도"로 번역하였는데, 독자들이 그것을 시간의 다층성과 연관하여 이해할 수 있을까? "스케일"로 그냥 음차하든가, 정 번역하고 싶었다면 "규모"로 직역하거나, "길이"로 의역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이 시간의 다층성을 이해하면, 『트러블과 함께하기』에 나오는 "툴루세" 이야기를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세/자본세/툴루세 이야기는 캐리 울프와 함께한 “반려자들의 대화”에서 소개되고 있다(292-299, 363-366).
3. 반려자들의 대화
독자 겸손하게 만드는 나쁜 인터뷰다. 앞에 실린 두 선언에 대한 친절한 해설을 기대하고 읽은 독자라면 당황할 법하다. 이 책은 2016년 『트러블과 함께하기』와 같이 출판되었기 때문에, 2014년에 이뤄진 해러웨이와 울프의 이 대화는 두 선언의 연관성보다는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배경 소개 차원에서 두 선언이 다뤄진다. 따라서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읽으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들에게 이 부분은 활자들일 뿐, 기호로서 다가가기 힘들다. 또 영문과 교수인 울프가 데리다를 너무 좋아해서인지, 데리다 문외한인 나는 “바보스러움”을 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긴 문외한인 것이 데리다뿐이랴.
하지만 해러웨이는 그런 독자에게도 좋은 개념을 제시해주었다. “상황적 지식”과 “부분적 연결”이라는. 내 상황에서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들과 부분적으로라도 연결이 된다면, 곧 나의 어떤 맥락 안으로 이 지식을 자리매김해서, 이후의 공부 계획에 영향을 끼친다면 좋은 책이다. 부분적 연결은 또 다른 부분과 연결이 되고, 나와 다른 상황을 알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일반화로, 어떤 총체성 부여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처음 읽었을 때의 황당함에 비하면, 나는 해러웨이와 더 친해지고 더 많이 안다. 그러면 됐다.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 그래도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친해지고 싶다.
4. 생명의 정치와 죽음의 정치
이것저것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두 가지만이라도 거칠게나마 정리하고 싶다. 하나는 해러웨이와 푸코의 생명권력과의 연관성이다.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국역서는 생명정치와 연관된 장을 누락, 출판했기 때문에 그 책을 읽을 때에는 전혀 감지하지 못했었다. 울프와 식육용 가축 사육의 문제를 논하는 부분(285-288)에서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을 쓸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면서 “죽임과 죽게 만듦을 통해... 그리고 살게 강요하는 것을 통해... 엄청나게 많은 수를 죽이려고 살게 만드는” 자본주의에 대해 말한다. 이 부분에서 해러웨이는 푸코가 『성의 역사 1권: 지식의 의지』(153-157)에서 과거의 군주권력과는 다른 “생명권력”의 등장을 말하는 부분을 인간의 생명에서 생명 일반으로 확장한 사유를 선보인다. 푸코는 “죽이거나 살게 놔두는(let live)” 군주권력이 19세기에 “생명을 양육하거나 (타인의 생명을 해친 이들의) 생명 보전을 허용하지 않는” 생명권력으로 이행했다고 말한다. 해러웨이는 이 문제의식을 연장하여 이윤을 위한 대량살육, 그리고 이를 위한 대량사육을 문제 삼고 있다. 이제 현대 자본주의의 식용육 생산 과정이 생명정치의 시야에서 고찰된다. 이 강요된 삶과 강요된 죽음은 생명정치(biopolitics)를 죽음의 정치(thanatopolitics)로 전화시킨다(279).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긍정의 생명정치[affirmative biopolitics, 여기서 affirmative를 “긍정”으로 번역해도 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의 문제의식이 논의되는데, 에스포지토를 기억해둬야 할 것 같다. 또 생명정치와 생태정치를 교차시키겠다는 해러웨이의 지향에도 계속 관심을 기울어야 하겠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반성이지만, 고기를 마지못해 먹는 것이 아니라 좋아라 하는 나는....
5. 촉수사유: 화이트헤드와 우로보로스
<반려자들의 대화>가 이해가 쉽지 않은 와중에도 미덕이 있다면 해러웨이의 선언들이 내세우는 형상(figure)의 변화 과정을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사이보그(와 집적회로 속의 여성들, 그리고 나선형의 춤), (“육신이 된 말씀”, 소중한 타자와의 부분적 연결, 그리고) 생식과는 무관한 이종간 또는 비인간 동종-동성애의 형상은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는 “크툴루”라는 촉수를 지닌 지하 또는 수중 생명체의 형상을 띠고 나타나는데, 이 <반려자들의 대화>에서는 “진창 속에 존재하는 우로보로스”의 모습을 띤다. 해러웨이는 “육신이 된 말씀”이라는 기독교적 은유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기 위하여 이 새로운 형상의 은유를 채택한다(345). 해러웨이에게 촉수는 단지 감각, 감응, 소통, 공격하는 기관만은 아닌 것 같다. 두족류의 다리뿐만 아니라, 뱀의 형상을 한 것(우로보로스, 메두사, 고르곤), 곧 무언가 휘감을 수 있고 엉킬 수 있는 것들을 말하는 것 같다(364). <사이보그 선언>에서의 사이보그처럼, <반려종 선언>에서 나온 화이트헤드의 개념이라는 “포착의 합생”(122), “운동 중인 매듭”(123)처럼 우로보로스와 크툴루는 전체론(holism), 총체성, 정체성/동일성, 이원론들, 그리고 해방의 전망을 부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복, 부분적 연결, 재출현에 관심을 기울이는 우리는 모두 촉수의 뒤얽힘 속에서 모든 것을 우리 식으로 재단하고 묶으려 애쓰지 않으면서도 잘 살고 잘 죽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365-366).
우리의 몸은 생명체들로 구성되어 있고, 내 몸은 다른 존재들의 몸과 부분적으로 연결되어 휘감긴다. 그리고 퇴비(compost)가 되어 또 다른 촉수달린 존재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할 것이다. 내 촉수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진흙, 유기체, 퇴비... 시간의 중층성과 시간적 비동시성(297)... 과거, 현재, 미래의 공존, 사실과 픽션의 공존...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영감으로 가득찬 통찰들... 가까운 미래의 나는 이를 좀더 잘 정리할 수 있겠지 하는 기대와 해러웨이의 다음 선언은 어떤 것일까, 그 선언에서 제시되는 새로운 형상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점을 같이 갖게 한다.
6. 번역
번역은 훌륭한 편이다. 나는 이만큼 잘할 자신이 없다. 역자는 한국말 감각이 뛰어난 분 같다. “빈대 잡다가 초가삼간 태운다”(299)는 표현이 나와서 원서에 뭐라고 되어 있나 보니까 “목욕물 버리다가 아기까지 버린다”는 것을 이렇게 번역했다. 훌륭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야구중계를 보는 분 같지는 않다. 덴버 베어스 경기 상황에 대한 묘사는 정확한 번역이지만 “주자 만루, 투아웃”이라고 하지 않고 보통 “2사 만루”라고 한다. 몇 가지 의문들이 있는데, 하나만 얘기하면 worlding을 “세계화”라고 번역했는데, 적절한 것 같지는 않다. 세계-되기?
다음은 나의 읽기.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쪽: 줄 | 원서 쪽 | 황희선 옮김 (책세상) | 대안적 번역 제안 |
20: 13-15 | 8 | 노동을 비롯하여 ~ 않는다. | 노동, 또는 모든 부분들의 힘을 하나의 더 높은 통일성으로 가공하는 최종적 전유라는 유기적 전체성(wholeness)에의 유혹과 상대하지 않는다. |
27: 1-2 | 13 | 반면 인간은 ~ 없다. 사이보그는 | 인간은 어디서든 물질이며 불투명하기 때문에 유동적일 수가 없다. 반면 사이보그는 |
27: 9-10 | 13 | 방어 작업을 ~ 거리 투쟁보다 | 방위산업에서의 일자리를 요구하는, 종래의 전투적 노동운동의 남성주의적 정치보다 |
44: 3-6 | 28 | 종래의 안락한 ~ 볼 수 있다. | 편안하고 오래된 위계적 지배에서 무섭고 새로운 지배의 정보과학으로의 이행은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인데, 이 이분법은 다음의 표로 나타낼 수 있다. |
51: 1 | 35 | 현실의 | 실재의 |
63: 20 – 64: 1 | 47 | 유토피아적 공동체 ~ 냉소적 이론들 | 유토피아 이론이나 그에 준하는 공동체에 대한 냉소적 이론들 |
65: 1 | 48 | 자본주의적인 | 자본가의 |
67: 2 | 50 | 개혁과 | 재형성과 |
67: 3 | 50 | 남성의 산업노조에서는 | 남성 중심 산별노조에서는 |
67: 11 | 50 | 허위의식 또는 | 허위의식처럼 보이거나 또는 |
73: 4 | 55 | 종말을 | 묵시록을 |
73: 9 | 56 | 소통과 통신을 | 통신(소통)과 첩보(지능)을 |
75: 11 | 58 | 정초한다. | 좌초시킨다(ground). |
75: 18 | 58 | 좌초해왔다. | 묶여 있었다. |
76: 17 | 59 | 자율성에 덜 좌우된다고 | 자율성이 부족하다고 |
77: 15 – 22 | | 지배되지 않는 주체 the One이며 ~ 사라지는 것이다. | 자아는 지배받지 않는 하나의 존재(the One)이며, 타자가 제공하는 서비스로 인해 그 사실을 안다. 타자는 미래를 부여잡고 있는 하나의 존재(the one)이며, 자아의 자율성이 거짓임을 알려준 지배의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을 안다. 하나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자율적으로 되고, 강력해지며, 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환상이며, 타자와 함께 묵시록의 변증법에 연루되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가 된다는 것은 해져서 올들이 드러난 소매 끝처럼 분명한 경계가 없고 하나의 실체를 찾을 수 없는 것, 곧 여럿이 되는 것이다. |
86: 9 | 68 | 갇혀 | 묶여 |
133: 18 | 106 | 범주가 생물학적 | 범주가 실제적인[real, 누락!!] 생물학적 |
138: 19 | 110 | 세례 요한의 | 요한 복음의 |
138: 20 - 22 | 110 | 베어스가 ~ 않을까? | 기사 마감 5분 전, 베어스가 2점차로 지고 있는 9회말 2사 만루 투 스트라이크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140: 2-3 | 111 | 팩트는 논문이 ~ 설정해왔다. | 팩트들이 다음날 신문에 실리기 위해서는 마감을 지켜야 한다. |
140: 14, 15, 17 141: 1 | 112 | 수사 | 비유(trope) |
140: 15 | 112 | 문형figure of speech을 | 비유(어)를 |
141: 5 | 112 | 방향이 | 의도가 |
141: 13 | 112 | 취향도 | 흥미(관심)도 |
150: 3-9 | 119 | 인본주의적 기술 ~ 수립했다. | 인간주의적 기술 예찬론자들은 가축화(가축으로 길들이기)를 남성 한부모의 혼자 낳기의 전형적인 행위(the paradigmatic act of masculine, single-parent self-birthing)로 묘사하는데, 이는 마치 남성이 그의 도구를 발명(창조)하는 것처럼, 남성이 가축화를 통해 자신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낸다고 보는 것이다. 가축은 인간의 의도를 그 몸 안에 체현한 것, 곧 자위행위가 개의 몸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남성은 (자유로운) 늑대를 잡아 (복종하는) 개를 만들고 그로써 문명의 가능성을 수립했다. |
152: 6 | 120 | 늑대를 동경하던 개들이 | 개가 되고 싶었던 늑대들(wolf-wannabe-dogs)이 |
178: 2 | 141 | 방식으로 아는 | 방식으로 신을[누락!!] 아는 것 |
179: 6 | 142 | 연결-속의-타자성에 | 연결-속의-소중한 타자성에 |
181: 15-16 | 144 | 개를 ~ 솔직하게 배우기란 | 개에게 진심으로 복종하기를 배우기란 |
184: 1 | 146 | 걸린 듯 뚫어지게 | 걸린 듯 그 던지는 사람을 뚫어지게 |
194: 21 이후 | 155 | 척도 | 스케일 |
209: 7 | 167 | 설문조사에서 | 조사에서 / 서베이에서 |
218: 14 | 175 | 개의 이빨이 달린 | 송곳니(canine teeth)가 있는 |
223: 2 이후 | 178 | “개 전체” | “완전한 개(whole dog)” / 만능 개 / 엄친개 ? |
225: 17 – 226: 1 | 180 | 이 둘 모두에서 ~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 이 둘 모두는 나를 “근대화”라고 점잖게 부르는 것의 자연문화로 딱 이끌었다. |
227: 10 | 181 | 약재 시장 | 마약 판매 지역 (drug sale zone) |
231: 22 | 185 | 이데올로기적 “개선” | “개선” 이데올로기들 |
236: 5-6 | 189 | 통해 백인 중산층적 ~ 세계의 사람들은, | 통해 피레니즈와 오시 세계에서 백인 중산층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
253: 1 | 204 | 인종주의적 구성체 | 인종 공동체들 |
274: 8 | 221 | 둘 다/또한의 | 둘 다 맞는 상반된 이야기의 |
280: 18 | 227 | 확립된 | 공유된 |
281: 10 | 227 | 생명-우선 | 생명존중/낙태(임신중지)반대(pro-Life) |
281: 15 | 227 | 비-생명-우선 | 반-낙태반대 |
286: 15-16 | 232 | 지속을 분절하는 | 살아있는 섬유를 칼로 자르는 |
295: 11 | 239 | 단위가 | 사물이 |
300: 2 | 243 | 자본주의자 | 자본가 |
308: 11 | 250 | 확장되면서 | 자체적으로 펼쳐졌다 다시 |
342: 4 | 277 | 유형적인 인지를 실제로 실행시키는 | 신체의 인지적 실천을 실행하는 |
7. 맺으며
언제나 재미있는 책은 정리를 해도 쓰고 싶은 말들이 남아 있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이다. 두 번째 읽은, 그러나 여러 번 읽고 또 읽은 해러웨이의 책, 기대 이상였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는데, 해러웨이의 다른 글들도 좀 보고, 여기에서 인용되는 다른 이들의 책들도 보고 싶다. 재미있는 책은 읽고 나면 누구랑 같이 얘기도 좀 하고 해야 하는데... 훗날의 대화를 위해 정리해둔다.
읽고 싶은 저작들 (우선순)
1) 해러웨이의 글: “상황적 지식”(1988)과 하나의 세계로서의 생명체를 바라보는 글들
2) 인류학적 저작들: 특히 스트래선
3) 생물학, 생태학 관련 저작: 마굴리스
4) SF 소설들
5)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볼 수 있을까? 읽는다 해도 이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