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잎사귀처럼 - <사이보그 선언문>의 저자 다나 J. 해러웨이의 지적 탐험, 다알로고스총서 2
사이어자 니콜스 구디브.다나 J. 해러웨이 지음, 민경숙 옮김 / 갈무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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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97년경에 이뤄진 구디브와 해러웨이 간의 대담을 싣고 있다. 구디브는 해러웨이의 학생였고, 현재는 뉴욕 시각예술대학 미술사학과의 교수지만, 그때는 아직 교수가 아니었다. 해러웨이가 막 겸손한_목격자@두번째_밀레니엄.여성인간_앙코마우스를 만나다(1997)라는 기괴한 이름의 책을 펴낸 직후에 몇 번에 걸쳐 이뤄진 대담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이 두 명은 겸손한_목격자출판 20주년을 기념해서 다시 한 번 더 대담을 하였고, 그 대담은 2018년에 출판된 겸손한_목격자 2판 서문으로 실려 있다. 이 두 번째 대담을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는데, 그때는 트러블과 함께하기가 나온 직후이기 때문에, 그 글을 본다면 아마도 과거 작업과 현재 작업 간의 연관성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나중 일이고, 일단 이 책 이야기나 정리해보자.

 

이제 해러웨이에 대해 조금은 익숙해졌나?(싶다). 그녀의 글은 결들이 많아서 다시 읽어도 이전엔 안 보이던 것들이 늘 보인다. 그래서 해러웨이 독서는 공이 많이 들고, 공들인 만큼의 어떤 앎의 수확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저번에 종과 종이 만날 때는 그 기대에 못 미쳤다. 이건 어쩌면 내가 사는 상황과 그녀의 상황의 상이성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책은 2007년에 나온 책이었고, 나는 트러블과 함께하기(2016)를 처음 읽고 그녀에게 매료되었고, 해러웨이 선언문에 실린 두 글(1985/2003)과 대담(2014)을 읽고 설득되었으며, “상황적 지식들”(1987)을 보며 비로소 그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다. 물론 이해는 또한 새로운 의문을 동반한다. 한 장의 잎사귀처럼에서는 그 질문들에 대한 해러웨이 본인의 친절한 답들이 제공된다. 출판연도가 2000년이므로, 그녀의 20세기 저작들에 대한 일종의 중간결산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독서를 한 셈인데, 마음잡고 해러웨이를 알고자 하는 요량이라면 80년대 저작 중 중요한 것,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특히 그 중에서도 3부에 실린 글들을 먼저 읽고 질문을 정리한 후 이 대담집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답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내가 의문을 가졌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비롯한 21세기 저작들을 보고, 구디브와 해러웨이의 두 번째 대담을 보면 해러웨이 이해가 한결 수월할 것이다.

 

1. 개인사

1장에서 대화의 주제는 그녀의 성장기다. 이전에 해러웨이를 읽을 때 낯설었던 것 중 하나가 유한성(mortality)에 대한 강조였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지만 그것이 딱히 학술적 담론의 일부를 이룰만한 대단한 통찰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였다. 그저 해러웨이의 전공이 생물학여서 그 사실을 좀더 민감하게 생각하나 보다 하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그녀의 가족과 지인들(친구/연인)과의 관계가 평범하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한쪽의 죽음으로 끝나는 관계는 그녀에게 익숙하지만, 그것이 주는 슬픔이 어떤 이론적 통찰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듯 싶다. 그녀의 회상에는 15년쯤 후 울프와의 대담(2014)에서 보여준 담담함이 아닌 어떤 촉촉함이 느껴진다. 이 촉촉함이 유한한 존재들의 얽힘에 대한 관계적 사유에 깃들어 있는 따뜻함과 연관되어 있을 것 같다.

 

외국 학자나 문인들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읽다 보면 부러운 것 중 하나가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경쟁에 대한 스트레스는 덜한 상황에서 열심히 한다는 것인데, 해러웨이 역시 그렇다. 생물학, 영문학, 철학을 함께 전공하는 것이 물론 쉬운 일이 아니겠고, 그런다고 그것들이 어른이 된 후 자신의 작업에 직접적인 자양분을 제공한다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겠지만, 대학 전공대로 살 길을 찾는 것이 힘든 우리한테는 참 부러운 일이다. 물론 나는 그녀를 부러워할 뿐 질투하지는 않는다. 그녀를 존경하고 내 주제를 알기 때문이다. 해러웨이는 어렸을 때 겁도 많고 호기심도 많은 여자아이였을 뿐이다. 소련과의 핵전쟁을 두려워했고, 하느님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외국에 나가 선교를 업으로 삼는 수녀가 되리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대담에는 나오지 않지만, 학업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그녀가 만든 이론대로 살고자 노력한다. 이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에 감사할 줄 안다(114). 이 겸손함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2. 추상적 관념에 대한 알러지, 메타포, 그리고 세속적 실천

2, 3장에서는 해러웨이의 박사논문 Crystals, Fabrics and Fields,영장류의 시각』, 그리고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를 저술할 당시 그녀의 삶과 생각을 짚고 넘어간다. 나는 그녀가 형상(figure)과 메타포에 대해 설명해주는 4장이 제일 흥미로웠다. 형상은 그 자체로 말(words)이 아니며, 비문자적(non-literal)이다(145~146). 그러나 이 형상들은 말로 이뤄진 이야기(story)로 옮겨진다. 그런데 말과 이야기는 비문자적인 형상들의 세계에 대한 문자를 통한(literal) 기술과 묘사뿐만 아니라, 은유(metaphor) 역시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해러웨이가 사실(fact)과 픽션, 물질성과 기호성, 대상과 비유(trope)의 동시성에 주목하는 이유다(141). 따라서 과학 담론인 생물학에도, 곧 생물들의 형상을 관찰하여 기술하고 설명하는 이야기에도 은유가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가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이야기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 이야기들이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들에 문자화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이해한다. 다른 말로 대상들은 이야기로 얼어 있다(frozen, 178).

 

해러웨이는 말과 언어가 관념(ideas)보다는 육체(flesh)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한다(146). 구디브가 이에 대해 맞장구치면서 인용하는 롤랑 바르트의 구절은 매우 인상적이다. 언어는 피부처럼 다른 언어에 닿는다고, 말들은 손가락을 갖고 있다고. 말은 행위하고, 기호는 하나의 신체와 같은 것이 된다. 곧 해러웨이는 물질성/신체성과 기호성이 결부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148). 더 이상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이 메타포의 문자적(literal) 본성과 상징화의 신체적 성질에 대한 그녀의 감수성은 어린 시절 성당의 성체성사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222). 심지어 우리 몸도 말 그대로 은유라고 이야기한다(178). 따라서 해러웨이의 이야기는 메타포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메타포 이상의 것이다(140). 여러 결들의 존재가 가능한 것은 바로 이러한 대상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literal) 기술과 메타포가 그녀의 글쓰기에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점은 바로 그녀에 대한 오해가 야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179). 해러웨이의 이런 글쓰기는 추상적 관념을 피하기 위한 포석인데, 학술언어에 익숙한 독자들은 그녀의 글쓰기에서 어떤 추상적 고갱이, 문자로 딱 정리된 핵심을 캐내려고 한다는 말로, 어떤 상황에든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대안을 찾으려고 한다(는 말로, 나는 이해했다). 이 잘못된 독법 때문에 그들은 해러웨이를 상대주의자로 오해한다(182).

 

해러웨이는 실재론과 상대주의 간의 양자택일을 거부한다. 그녀 특유의 어휘인 세속적(worldly)”이라는 형용사는 이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이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는데(182~183), 나는 그것을 현실의 특정 상황 속에 위치지어진 비전(vision)과 그에 기반한 진솔한 대화와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세속적인 것의 반대편에는 목적론과 결정론이, 신성함, 곧 남신뿐만 아니라 여신이, 구세주 또는 미륵불에 대한 희구가, 또는 억압받는 세계를 해방시키는 프로메테우스적 실천의 전망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인류는 멸망할 거라는 자조적 초연함(이라고 쓰고 무능함과 무책임, 응답하지 않으려고 눈감고 귀막음이라 읽는다)도 세속적인 것의 반대편에 있을 것이다.

 

3. 회절

구디브는 계속해서 독자들이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그녀 특유의 개념과 형상에 깃든 의미를 캐묻고 해러웨이는 이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한다. 이 중에서도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은 회절(diffraction) 개념이다. 반영(reflection)이 원본(original)을 그대로 재현(representation)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개념이라면, 회절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찾아보니 겸손한_목격자@두번째_밀레니엄.여성인간_앙코마우스를 만나다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개념이고, 훗날 캐런 바라드가 물리학적 통찰에 기반하여 또 새롭게 발전, 변주시킨 개념였다.



 

다음 인용문은 이 책의 169~170쪽에 실린 부분인데, 겸손한_목격자마지막(영문판 p. 273; 민경숙 역, 503)에 실린 것이다.


해러웨이: 회절 패턴은 상호작용, 간섭, 강화, 차이의 역사를 기록한다(170). ... 반영과 달리, 회절은 동일자를 다소 왜곡하여 다른 곳으로 옮김으로써 형이상학 산업을 성장시키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회절은 기독교 지배로 고통스러웠던 천년의 막바지인 오늘날 다른 종류의 비판적 의식을 위한 메타포로서, 동일자의 신성한 이미지를 반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 차이를 만들어낼 메타포가 될 수 있다. ... 회절은 복수의 의미들을 결과적으로 산출할 수 있는 서사적, 회화적, 심리적, 영적, 정치적 테크놀로지이다.

 

랜돌프: 모든 여성의 삶의 기억의 스크린에는 힘센 남성의 형상이 비치는데, 이 곳이 바로 변화가 발생해야 하는 장소다. 나이가 들고 정신적 변화를 거치면서 발생하는 변화를 통해 복수의 자기들(selves)이 하나의 몸에 합체된다. 이 변화는 여기에서 두 개의 머리와 열 개보다 많은 손가락들, 그리고 중간세계의 형이상학적 공간에 존재하는 중심의 인물 형상으로 구현된다. 회절은 미래의 한 구석에 있는 장소, 미지의 심연 앞에서 발생한다. 은하계 물체(matter)의 구조적 패턴이 매그놀리아 꽃 안에서 반복될 수 있다. ... 나는 중요한 문제가 되는 몸(bodies that matter)을 창조하고자 한다. 여성의 현실을 간섭 패턴들로 구성되는 장소인 SF 세계 안에 위치지으면 어쩌면 오늘날의 여성은 동일자의 신성한 이미지와는 다른 어떤 모습, 부적절하고, 기만당하고, 이 세계에는 잘 맞지 않으면서도 마술적인 어떤 존재, 곧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로 등장할(emerge, 창발할) 수도 있다. 


동일자의 반영과 재현(representation)이 회절을 통해 창발되는 새로운 의미들과 대립된다. 회절이란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있는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간성에 대한 이야기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렇다면 이 회절도 실재론과 상대주의 간의 양자택일을 거부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겸손한_목격자민경숙 역, 63). 이 회절 개념이 또 이번 독서에서 발견한 그녀의 새로운 결을 구성한다. 나중에 더 공부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5장은 주로 사이보그와 앙코마우스라는 기술생명정치의 형상들과 인종주의가 깃든 뱀파이어가 다뤄진다. 그런데 겸손한_목격자@두번째_밀레니엄.여성인간_앙코마우스를 만나다를 제대로 읽지 않아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서 읽었다. 나중에 새 번역본이 나오면 읽는 걸로...

 

4. 실뜨기

회절 개념 때문에 리뷰를 중단하고, 한참을 겸손한_목격자를 들춰봤다. 제대로 읽지는 못했다. 그런데 랜돌프의 <회절> 이야기가 나오기 직전, 그러니까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여성인간와 앙코마우스실뜨기이야기이다. 실뜨기라면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해러웨이가 다른 저자들에 대한 자신의 리뷰를 빗대 말한 것이다. 그런데 해러웨이의 훌륭한 학생 구디브는 일반 독자라면 할 수 없는 질문을 한다. 실뜨기는 그저 또 다른 형상(figure)인지 아니면 방법론인지 묻는다(241). 해러웨이는 이에 대해 그것은 소문자 methodology, 작업방식이면서도 그 작업에 대해 사고하는 방식이면서 결투가 아닌 방식으로 관계를 맺기 위한 형상이라는 멋진 대답을 제시한다. 상대방을 적으로 취급하는 결투의 방식이 아닌 우정어린 대화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결과 전투 메타포에 대한 라투르의 지나친 의존을 비판하면서, 그녀가 계발한 대안적 스토리텔링이다(242-243). 내가 라투르보다 해러웨이를 더 좋아하는 이유에는 이런 것도 있었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다.

 

5.

이제는 친구가 된 선생과 학생이 함께 저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이든 해러웨이 교수님이 요즘 학생들은 너 때랑은 참 다르다고, 난 이제 얘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투정한다. 난 이들의 대화가 너무 실감이 난다. 앞에서도 잠깐 말했듯, 구디브는 겸손한_목격자2판에도 해러웨이와 함께 훌륭한 대담을 실었다. 다나 여사의 건강을 빌지만, 아마 훗날 누군가가 그녀의 전기를 써야하는 시간이 온다면 구디브는 가장 훌륭한 후보 중 한 명일 것이다. (별점은 번역과 무관하게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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