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지식 주장들과 인식주체에 대한 근본적인(radical) 역사적 우연성에 대한 설명, 2) 의미를 만들어내는 우리 자신의 '기호학적 기술'을 인식하기 위한 비판적 실천, 그리고 3) 유한한 자유, 적당한 물질적 풍요, 고통 속에서도 겸손한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제한된 것이라 해도 행복을 줄 수 있는 지구 전체의 프로젝트에 친화적이면서 부분적으로라도 공유될 수 있는 '실재' 세계에 대한 충실한 설명을 위한 제대로 된 참여적 실천(commitment)."
이 세 가지 사항은 역설적이고 모순적이라 해도 필연적으로 동시에 추구되어야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그 어떤 초월을 약속하는 객관성도, 무제한적인 도구적 권력도, 세계를 재현할 수 있는 무오류의(innocent) 권력 이론도, 세계를 글로벌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이론화도, 한 언어가 모든 번역과 전환을 위한 기준으로 강요되는 환원주의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지구 전체에 걸쳐 있는 연결들의 네트워크(에 대한 이론화)가 필요하다. 페미니스트들이 원치 않는다고 말한 것들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객관성의 속성이자 그것의 부정적 발현태이다. 해러웨이는 덧붙인다. 불멸성(immortality)과 전능성(omnipotence)은 페미니스트의 목표가 아니라고. 이것들은 신의 속성이고, 따라서 그러한 식으로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보이는 객관성이란 “신 흉내(God trick)”일 뿐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이보그 선언>의 마지막 문장-“나는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을 떠올리며 스스로 기특해 했다. <사이보그 선언>은 이 책에는 8장에 실려 있다.
2. 비전의 체현성과 이동가능성, 상황적 지식, 그리고 부분적 연결
기존의 객관성 개념은 “그 어디에도 없는 곳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신 흉내”(the god-trick of seeing everything from nowhere, 339)로서 인식대상에 대한 정복자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재현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신의 시각이 체현된(embodied) 몸은 재현되지 않게 하는, 따라서 그것이 백인 남성의 시선이라는 점을 숨기는 권력이다. 모든 것을 보려고 하면서, 자신은 보이지 않게 만드는 권력이다. 곧 관음증의 권력이다. 이에 대항하는 페미니스트의 객관성은 체현된 객관성, 곧 “상황적 지식들(situated knowledges)”이다. 우리의 눈은 몸의 일부이며, 사람들의 몸이 자리매김된 상황은 다 다르다. 사람들마다 보는 것이 다를 수 있고, 자신이 본 것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이 꼭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더라도 시선이 시작되는 장소와 상황이 없을 수는 없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이렇게 주장한다. “오직 부분적인 관점만이 객관적인 비전(vision, 시야, 시력, 전망)을 약속할 수 있다.” 자신의 부분성을 부정하는 객관성 주장, 곧 총체화하는 시선은 초월적인 신의 시각과 자신의 시각을 허위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페미니스트라면 이를 흉내내려고 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상대주의의 유혹에 굴복해서도 안 된다. 여기에서 문제가 어려워진다. 해러웨이는 총체화와 상대주의 양자 모두에 대한 대안으로 “연대(solidarity)”와 “공유된 대화(shared conversations)”를 통한 연결들의 그물망의 가능성을 견지하는 “부분적이면서,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비판적인 지식”을 주장한다(343). 이것이 상황적 지식이며, 총체화하지 않지만 객관성을 포기하지 않는 해러웨이의 입장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선위치의 이동성과 “열정적인 초연함(passionate detachment)”이 동시에 필요하다. 약자인 자신들의 죄없음을 강변하는 ‘정체성/동일성’의 정치는 그 자체로 그 시선의 옳음을 보장해주지 않는다(344). 따라서 과학적 인식 주체라면, 정체성/동일성의 위치에 고정되어서는 안 되고, 부분적 연결을 통해서 자신의 몸들이 알지 못하는 경험들과 대화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부분적 연결, 곧 가능한 객관성의 주체 위치이다(346).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운동 행위자들이 귀를 열고 들어야 하는 말이다.
이러한 페미니스트 객관성은 (최소한) 둘 이상의 시선을 지닌 복수의 주체들이 대화를 통해서 만들어 나가는 과학을 주장한다(350). 처한 장소의 상이성은 언어의 상이성으로 나타나고, 이러한 부분성은 번역되어야 하고, 번역은 부분적이고 해석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대화는 다원주의라는 손쉬운 해결책의 유혹에 저항하면서도 권력의 작동 가능성을 민감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 페미니스트 객관성은 “최종심급에서의 단순화[결정]”라는 알튀세르의 해법에 저항하면서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 따라서 단 하나의 페미니즘 입장이란 것은 없다. 이 대화의 과정과 목적은 그 자체로 세계에 대한 더 나은 설명이고, 바로 이것이 ‘과학’이다(351~352). 따라서 경합(가능성)은 과학의 속성 그 자체이다(352).
3. 남근로고스중심주의와 백인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남근로고스중심주의(phallogocentrism)는 하나의 진정한 세계의 현존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재현된 세계란 그것이 특정 장소의 그 어떤 몸에 붙어 있는 눈으로 본 것임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곧 부분성을 부정한다. 페미니즘이 부분성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부분성 그 자체가 아니라, 곧 박해받는 동일한 정체성 집단인 여성의 입장의 옳음 때문이 아니라, 부분성을 전제해야만 상황적 지식이 가능해지는 연결 관계들과 예기치 못한 기회들이 비로소 제공될 수 있기 때문이다(352-353).
남근로고스중심주의를 내장한 백인 자본주의 가부장제는 인식 대상인 세계를 “행위자가 아니라 사물로 대상화”한다(355). 여성, 자연, 식민지는 일을 시키고 제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노예, 쓸모있는 것들을 빨대꽂아 바닥까지 단물 쪽쪽 빨아먹고 버려도 되는 원료로 동질화될 뿐이다. 이 남근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해러웨이의 해법은 정반대다. 곧 세계를 사물이 아니라 행위자들로 인식하는 것이다. 세계는 ‘발견’을 기다리는 동질적 대상인 사물들이 아니라, ‘대화’를 거쳐야만 알 수 있는 능동적 행위자들이다(356). 해러웨이의 이러한 통찰은 브뤼노 라투르, 제이슨 무어, 마리아 미즈 등의 통찰과 공유된 대화를 통해 저마다 부분적 연결을 형성하면서, 매우 강력한 객관성 주장으로 발전하게 된다. “주체의 죽음”으로 시작된 로고스적 이성 비판이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인간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는데, 해러웨이의 이 글이 바로 그 흐름의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4. 세계는 사물이 아니라 행위자다.
내가 보는 세계의 대상들을 행위자로 인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해러웨이는 세계를 “위트 있는 행위자(witty agent)”로 본다. 그러면서 미국 남서부 인디언들의 코요테 또는 트릭스터(Trickster) 이야기를 한다(357; 역자는 357쪽에는 역주까지 달아서 트릭스터가 무엇인지 설명을 해놓으면서도 360쪽에서는 이를 ‘사기꾼’으로 번역한다. 어이없음). 만약 해러웨이를 처음 보는 독자라면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당황하기 마련이다.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읽은 나님은 그것이 “크리터(critters)”의 형뻘임을 알게 된다. 다름아니라 이것이 해러웨이가 수동적 범주들을 “능동화(activation)”하는 방식이다. 세계에 대한 정복은 포기하되, 계속해서 객관성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의 실천에 수반되는 것이다.
내 몸의 일부인 눈으로 보는 것과 그/녀의 몸에 달린 눈으로 보는 것은 다를 수 있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부터 존재하는 옳은 시각, 객관성은 없다. 18세기말 낭만주의 시대 이래로 시인들의 시와 생물학자들이 연구하는 유기체의 몸은 그것이 ‘생산’또는 ‘발생’된다는 점에서 유사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해러웨이는 이 관점을 포스트모던한 방식으로 계승한다. 곧 세계를 ‘물질적·기호학적 행위자(material-semiotic actor)’로, 능동적으로 의미를 생산해내는 존재로 인식한다(359). 문학생산의 장소에서 시가 창작의도나 저자로부터 독립된 행위자인 것처럼 지식/인식의 대상으로서의 몸은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기호를 통해 의미가 발생하는 마디들(nodes)이다. 객관성은 특정 상황에서 풀려남(dis-engagement)으로써 얻게 되는 불편부당한 시각이 아니라, 우리가 유한자로서 존재하는 이 세계 안에서 위험을 무릅써야만 얻을 수 있는 상호적이면서 동시에 불평등한 구조화에 관한 것이다(360). 몸과 의미 모두 특정 상황에 강하게 결박되어 있다. 페미니스트 체현(embodiment), 곧 부분성, 객관성, 그리고 상황적 지식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이 희망은 이 매듭이 묶인 마디에서 몸들과 의미들의 대화를 개시하는 것이다.
5. 나가며
인식대상인 세계를 ‘물질적·기호학적 행위자(material-semiotic actor)’로 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또 상대주의, 다원주의, 불가지론의 손쉬운 해결책에 투항하지 않고 객관성을 견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학문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든 비판적 실천에 참여하는 이의 자세일 것이다. 해러웨이가 좋은 이유는 비판을 하면서도 따뜻하고, 그러면서도 활기와 설득력이 있다는 점이다. 무척 똑똑한 할머니와 신나게 대화하는 느낌이 계속 든다. 도나, 부디 오래 사세요!
말로만 들었던 <상황적 지식들>을 보고, 내용까지 정리하니 마음이 놓인다. 다음 여정은 스트래선의 『부분적 연결들』이다. 『해러웨이 선언문』을 읽고 하고 싶었던 것으로 적어 놓았던 것의 대략 70% 정도를 한 것 같다. 화이트헤드는 엄두를 못 낼 것 같고, 스트래선은 이제 읽어야지.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당분간 해러웨이 가지치기는 못할 듯. 아, 지금 읽고 있는 르 귄 책은 마저 봐야지.
[2022. 9. 14. 추기]
우연의 일치이지만, 어제 리뷰 쓰고 새벽에 일어나 다른 책 좀 보다가, 읽다 만 르 귄의 『세상 끝에서 춤추다』163쪽을 펼쳤는데, 바로 코요테와 트릭스터 이야기가 나온다. ^^ 이럴 때 난 기분이 좋다. 부분적 연결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고, 잘 더듬어 따라가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