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세계화와 한국 경제의 진로 - 민주적 시장경제의 길, 민주주의총서 05
조영철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본문만 474쪽이다. 이틀을 아무 것도 안 하고 이 책만 봤다. 여느 때보다 하루 많은 그래서 고마운 요번 2월 안에 다 읽고 서평까지 쓰려고 굳세게 마음 먹고 시작했다. 너무 급하게 넘어가서 그랬던 것일까? 아님 서문과 1장이 너무 재미있어서였을까? 혹은 기대가 너무 컸었나? 그것도 아님 직전에 읽은 책이 워낙 훌륭해서였나? 뭐 다일 것이다. 두께와 제목에 비해 기대에 못 미쳤다. 이 책이 별볼일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단지 내 기대가 너무 지나쳤다는 말일 뿐이다. 어찌 보면 봇물처럼 쏟아져나오는 미래의 대안적 정책방향에 관한 최근의 연구 조류가 “좋은 말”을 넘어 이것이 실제로 “좋은 결과”를 갖고 올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이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에 대한 갑갑함 때문일 수도 있다. 좋은 말은 어찌 보면 이미 차고 넘치는데, 문제는 그것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이고, 이는 그러한 연구들이 해결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어찌 되었든 정치력 부재로 인한 전망의 판단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또 그것과는 조금은 다른 그 좋은 말들에 대한 미심쩍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1, 2, 3부는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지은이 조영철 선생은 성장과 형평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확고한 케인즈주의자이다. 학문체계로서 케인즈주의 경제학에 별로 익숙하지 못한 내게는 많은 공부거리를 던져 준 것 같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를 금융억압과 자유화의 교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무척 재미있다. 1장에서 지은이는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를 세 단계로 구분한다.
(1) 19세기 – 1929년 대공황: 영국헤게모니의 성장과 쇠퇴. 자유무역 제국주의, 고도금융, 국제금본위제.
(2) 대공황 - 1970년대 말: 미국헤게모니. 뉴딜. 경영자자본주의, 케인스주의 관리금융, 포드주의 체제의 성장과 쇠퇴.
(3) 1980년대 - : 신자유주의 구조재편. 주주자본주의. 금융주도 축적체제(finance-led accumulation regime)의 형성.
여기에서 지은이는 지오바니 아리기의 “긴 20세기”의 논의를 중심으로 어떻게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구성하는 세 가지 축이었던 포드주의 임노동관계, 경영자자본주의, 케인스주의 관리금융체제 간의 연계가 유러달러시장의 출현,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 통화주의 긴축정책으로의 전환 등과 더불어 진행된 금융자유화와 함께 해체되었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미국 정부가 사적 고도금융의 규제자에서 강력한 지원자로 바”뀜에 따라 기존의 노사간의 계급타협을 주주자본주의가 대체한 과정도 잘 서술하고 있다.

1부의 보론에서는 기업과 혁신, 대리인비용, 행동금융학에 대한 논의를 알기 쉽게 잘 정리해놓았다. 최근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혁신에 관한 논의를 간혹 접하면서도 그에 대한 의미를 잘 알지 못했는데 보론을 통해 그 논의의 함의에 좀더 가까이 다가간 듯한 느낌이다.

2부의 2, 3, 4장에서는 자본주의의 다양성(varieties of capitalism) 논의에 입각하여 각각 미국, 독일, 스웨덴 모델의 역사적 전개를 위의 세 시기로의 구분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다. 미국의 경영자자본주의의 등장과 뉴딜 금융체제, 그리고 이후 신자유주의 금유자유화와 IT, 벤처 열풍, 달러-월스트리트 체제, 독일의 종합금융(겸업은행), 공동결정제도, 스웨덴의 사회적 코포라티즘, 렌-마이드너 모델, 연대임금 정책, 이후 신자유주의적 제3의 길의 등장 등이 흥미 진진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드디어 한국의 금융화를 다루는 3부. 발전국가에서 재벌주도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추적하는 5장은 개발도상국 일반이 초기 산업화 단계에 맞는 어려움들에 관하여 아담 스미스와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유명한 논의들을 대비시키며 시작한다.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후발국이 산업화를 하려면 유치산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 협소한 국내 시장규모로 인하여 분업 심화∙산업 심화가 제약되는 후발국의 한계를 지적한 스미스의 논의로부터 유추될 수 있는 개도국의 전략은 협소한 국내 시장이 아닌 넓은 세계 시장을 출구로 삼음으로써 시장제약을 극복하는 것이다. 리스트적인 국내시장 보호와 스미스적인 수출지향전략은 국내 시장가격 왜곡과 세계시장 가격 순응이라는 이율배반적 과제를 동시에 추구해야 할 필요를 제기하는 데, 발전국가는 바로 이 모순적 과제 수행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후 지은이는 발전국가의 전개를 여러 측면에서 살펴본다. 1960-70년대 확립된 고부채∙고투자 산업화 방식은 투자위험의 상당 부분을 국가가 부담하는 체제였고, 국가는 기업에 조건부 지대(contingent rents)를 지급하는 동시에 저임금∙장시간 노동 동원체제를 보장하였다. 이러한 국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재벌은 전문화보다는 다각화를 통해 산업구조 고도화를 이루었고, 이 과정에서 재벌 총수의 지배체제는 공고화되었다.

1989년 삼저호황의 종식과 더불어 발전국가체제의 균열은 갈수록 가시화되었다. 정부는 재벌의 비관련 다각화를 수정하기 위해 업종전문화 정책을 펼쳤지만 이는 오히려 재벌의 독점적 시장지배력과 경제력집중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275). 1980년대 들면서 정부가 재벌에 대한 선별적 특혜금융에서 벗어나 금융의 시장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제2금융권에 대한 진입장벽을 완화하자, 재벌은 제2금융권에 본격 진출하였다. 3저 호황 이후 국제수지 흑자와 민간기업의 대외신용도 증가로 외자차입에 대한 정부보증과 국가관리 필요성도 줄어들게 되자, 재벌은 발전국가 시기 자신에게 특혜금융을 제공하였던 기반인 금융억압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3저 호황 이후 금융억압이 아니라 금융 자유화가 재벌의 이해와 일치하게 되었으며, 또한 국제자본도 금융자유화와 자본시장 개방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러한 재벌과 국제자본의 이해 일치는 OECD 가입 시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282). 그런데 3저호황을 전후하여 금융억압에서 금융자유화로 넘어가는 국면에 대한 지은이의 독특한 해석이 돋보인다. 지은이에 따르면, 억압으로부터 자유화로 바로 넘어가게 됨에 따라, 실제로는 금융억압과 금융자유화가 중첩되어 버림으로써 결국 금융억압이 너무 늦게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만약 승자기업 선별을 완전히 은행에 맡기는 금융제한정책을 추진하는, 곧 금융억압과 금융자유화의 중간단계로서 “금융제한”의 국면을 거쳤다면 사정은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결국, 국가∙은행∙기업의 3자 관계 속에서 고저축, 고투자, 고성장을 유지했던 한국 경제발전모델은 1980년대 이후 자유화 과정에서 수직적 국가∙기업 간 관계와 관치금융을 완화하고 동시에 건전성 감독강화와 긴밀한 은행∙기업 간 수평적 협력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이로 인해 외생적 충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차입의존경제의 위험관리체계는 더욱 약화되었던 것이다” (285).

이처럼 재벌은 금융부문에서는 “금융자유화라는 국가후퇴를 요구”했지만, 노동부문에서는 오히려 “노동억압적 국가복귀”를 요구했다 (291). 발전국가 시기 국가는 “자본시장과 생산물 시장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국가가 시장규율을 대신한 데 반해 노동시장에서는 … 노조조직화를 억제함으로써 경쟁시장의 규율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했다” (288).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이는 저항에 부딪치게 되고, 국가의 노동억압 기제에만 의존하는 노동시장 규율체계에 의존하는 것의 한계가 분명해지자, 재계는 노동시장 유연화와 같은 새로운 시장 규범을 확립시키고자 하였다 (294).

외환위기의 원인과 이후 전개를 다루는 6장에서 지은이의 시각 중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발전국가에서 민간주도 경제로의 이행이나,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 등이 단순히 외부에 의해서 강요된 것이 아니라 한국 경제가 제약 속에서 나름대로 선택한 결과라고 해석하는 부분이다. 6장에서 지은이는 발전국가의 지속불가능성, 곧 한시성을 강조하며 시작한다. “발전국가모델은 시장미발달, 시장 미비로 시장경제만으로는 산업화의 동인을 찾기 어려운 현실에서 유효한 모델이었기 때문에 산업화에 성공하고 시장경제가 점차 발달하면서 민간주도의 경제체제로 이행해야 했다” (299-300). 이 민간주도 경제로의 이행의 상이 당시에는 무척 불분명하였으나, 외환위기 이후 구조재편은 영미식 모델을 수용하면서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을 분명히 하게 된다 (311). 그리고 이는 단지 IMF의 정책 제약 때문만이 아니라 김대중 “국민의 정부의 적극적 선택”이었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또 관치금융의 폐해를 교정하기 위해 도입된 주주자본주의의 확립으로 인해 재벌들도 주주가치 경영을 펴게 되었지만, 이는 이전의 발전국가에는 없었던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한다. 무엇보다도 주주가치 경영은 투자의 외부효과를 고려하지 않는 투자 결정으로 인해 바람직한 수준보다 과소투자가 이루어진다. 이전 발전국가에서 문제는 재벌의 문어발 확장으로 인한 과잉투자였다면, 이제는 과소투자가 문제로 대두한 것이다.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국가에 의해 선택된 정책이었다면, 다른 대안은 없었는가? 지은이가 5장에서 ‘금융제한’의 정책적 대안을 취하지 못했던 것을 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6장에서는 신자유주의 구조재편 이전에는 한국 경제가 은행 중심의 탈발전국가체제로 이행할 기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기회는 사라졌고, 결국 영미식 모델의 차용으로 인해 단기투자, 과소투자가 일반화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가능한 대안적 방향은 어디에서 구해져야 하는가? 지은이는 제2의 선진국 따라잡기를 하여 선진국에 진입하려면, 높은 투자 위험을 부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여 “모험적 장기투자”를 활발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저투자가 심각한 문제인 것은 사실이지만, 선뜻 수긍하기는 좀 힘들었다. 모험적 장기투자가 없는 것은 단지 주주가치 경영 때문만이 아니라, 모험적 장기투자를 할만한 꺼리가 없기 때문 아닌가? 있다면 왜 안하겠는가?

7장에서는 외환위기 이후 유연성(flexibility)과 거시경제 변동성(volatility)의 증가가 소득분배에 끼친 악영향과 투자율 저하로 인해 훼손된 성장잠재력 등을 여러 선행 연구와 구체적 데이터를 통해서 논증하고 있다. 4부 8장에서는 2부에서 살펴보았던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로 돌아가서 경제성장률, 고용성과, 노동생산성, 소득불평등과 삶의 질 등의 측면에서 미국모델, 라인모델, 노르딕모델을 비교하며, 노르딕 모델에 대한 지은이의 선호를 명확히 한다. 9장에서는 “민주적 시장경제모델”이라는 낯익은 단어를 통해 한국의 새로운 발전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발전국가로의 복귀도, 신자유주의 정책도 해법이 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시장경제의 효율과 역동성을 존중하되, 사회경제적 평등이라는 실질적 민주주의 가치도 함께 실현하는” 모델이며, 여기에 가장 근접한 모델은 북유럽의 사회민주적 시장경제 모델이라고 한다. 이는 사실 김대중 정부부터 노무현 정부까지 일관된 정책 기조였다. 물론 겉보기에 비슷한 말이 실제 정책을 통해서는 얼마나 다른 차별성을 보일 지는, 여기서 지은이가 제시하는 정책방향이 실제로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 지에 달려있을 터이고, 이는 이명박 정부 동안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지금은 뭐라고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 정책 기조와의 차이는 지은이의 확고한 케인즈주의적 입장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 같다. 그에 따르면 발전국가 시기 확립된 “수출에만 의존하는 경제성장은 비정상이며 안정적 축적체제일 수 없”고, 따라서 “생산성 향상에 기반을 둔 고임금과 복지서비스 확대”를 통해 내수 중심의 경제성장체제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분명 역대 남한 정권 모두와 차별되는 부분이다. 그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이른바 “고진로 전략”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임금억제, 비용삭감, 사회적 덤핑 경쟁을 통해서는 중국, 인도에 당해낼 수 없기 때문에 한국 경제는 투자확대∙기술혁신∙인적자원관리∙사회신뢰 강화 → 생산성 향상 → 고임금과 복지확대 → 내수 창출의 고진로 축적 구조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럴 때 “말은 참 좋은데…”라는 말을 쓰는 것 같다.

좋은 책에 후진 서평을 한 것 같다. 당분간 서평은 쓰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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