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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국경제 발전사 - 조선후기에서 20세기 고도성장까지 나남신서 384
이대근 외 지음 / 나남출판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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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낙성대경제연구소가 조선후기에서부터 97 경제위기까지 200여년에 걸치는 시기의 경제사를 다룬 것으로서, 열일곱 개의 논문이 실린 책이다. 따라서 서평 쓰기가 그리 만만치 않다. 열일곱 개의 글들 중에서도 박이택 (1), 이헌창 (4), 이대근 (5), 이영훈 (6), 장시원 (8), 김낙년 (9), 이상철 (12), 박영구 (13), 신장섭 (14), 김석진 (16) 글들은 괜찮았으며, 몇몇은 아주 훌륭했다. 하지만 나머지 글들 중에는 쓰레기도 있다.

 

상당수의 글들이 일련의 논쟁 구도에 기꺼이 자신을 자리매김한다. 비판의 대상과 자신의 입장을 비교적 명확하게 한다. 박이택은 내재적 발전론을 비판하며, 이의 대안으로 나카무리 사토루의 소농경제론을 채택한다. 이영훈은, 언제나 그랬듯, 수탈론을 비판하며 식민지근대화론을 옹호한다 (그러나 책에 실린 이영훈의 글은 세간에 문제가 되고 있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실린 그의 글과는 달리 훌륭한 편이다). 김낙년은 식민지기 총독부와 박정희 정부의 유사성(‘강한 국가’) 강조하는 Woo, Eckert, Kohli 등의 서구의 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현행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의 수탈론적 기술을 문제시한다 (196-299, 304). 주익종은 허수열의 <<개발 없는 개발>> 대한 비판과 길인성의 생활수준 정체론에 대해 비판한다. 신장섭은 독점자본론(이강국) 주주민주주의론(장하성) 대해 비판적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입장과 전선, 쟁점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점에서 글들은 입장 자체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일단 미덕을 갖고 있다고 있다.

 

여러 필자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관점이 일관되지는 않다. 개항기를 다룬 1-4장의 글들을 굳이 색안경을 끼고 필요는 없을 같다. 김석진의 글이나 박영구의 글은 사실 기대가 없었는데, 굳이 얘기를 하자면 중도좌파적 시각에서 냉정한 평가를 내리고 있고, 이상철은 대체로 정치적 입장을 배제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다소 싱거운 글을 썼다. 예외들을 제외하면 그래도 전체를 관통하는 관점이 있긴 하다. 그것은 박정희 코드이다. [ 일제강점기 하에서 형성된 반일 민족주의는 무마시키고, 박정희 시기에 형성된 경제발전 지상주의의 남한 민족주의를 전면에 배치하는 민주주의?.. 당근 무시된다노동자? 빨갱이랑 동의어다북한? 책에서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   

 

인상적이었던 글들 중에서 개만 보자.

 

박이택에 따르면, 18세기 조선, 중국, 일본에는 모두 집약적 소농경제가 확립되어 있었다. “소농이란 단혼소가족 혹은 핵가족이 주로 가족 노동에 의거해서 독립된 경영을 하는 농가이고, 소농경제란 소농이 집약적 농업의 발전주체로 확립되어 있는 농업경제이다” (39). 당시 중국 강남지역에서는 소농경제가 전문화 진전이 주축이 되는 스미스적 성장과 혁신이 주축이 되는 슘페터적 성장과 결합하여  생산성 향상을 갖고 왔다. 그러나 중국의 1/10 안되는 규모를 갖고 있는 조선과 일본이 중국과 같은 규모의 시장 분업체계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조선의 경우는, 후기에 접어들면서 전기의 노비제가 해체되고 소농경영이 널리 퍼지면서 근로혁명과 시장규율을 통해 소농경제가 발전하였다 (46-7). 일본의 경우는, 중국과 조선과 달리, 영주제적 사회편성으로 도시화가 진전되었고, 재정적 물류, 상업적 물류, 그리고 농민적 물류가 하나로 통합된 상업도시망이 발달하게 된다. 이에 비해 18세기 조선 왕조는 시장배제적 재정적 물류가 중심인 재분배적 도덕경제가 집약적 소농경제와 결합하였고, 시장 경제는 농민적 물류 속에서 발전하였으나, 기본적으로 국지적 거래에 제한되어 있는 세포질형 시장경제 모습을 띠었다. 여기에서 스미스적 성장이나 슘페터적 성장을 기대하기란 무리였고, 이것이 19세기에 일본과 조선이 상이한 역사적 길을 걷게 것에 영향을 끼쳤다는 필자의 결론이다. 중국 강남지역과 조선, 일본 간의 다각적 비교가 돋보인다.

 

신장섭의 글은 재벌을 죄악시하는 사회분위기에 대한 반론이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재벌의 비효율성 비민주성비판에 대한 반비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 비판의 전제로서 가정되는 신고전파적 자유시장 경제관을 비판하고 있는 점은 옳다고 생각된다. 필자의 논의는 재벌을 기업집단 (business group) 일종으로 다루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기업집단이라는 형태는 개별 기업이라는 형태에 비해 범위의 경제로부터 기인하는 여러 가지 이점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이는 보편적인 추세이지, 자체로 한국에만 특이한 어떤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1997 경제위기의 책임을 재벌에게 묻는 비판에 대해서, 필자는 그게 재벌 책임이 맞다고 답한다. 하지만 재벌에게 책임이 있는 부분은 금융위기 관리에 실패했다는 점이지, 구조 자체의 비효율성 아니라는 것이다. 주식을 얼마 갖고 있지도 않은 총수가 전체 그룹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비판하는 주주민주주의논의는 ‘1 1’(democracy) 아니라 ‘1 1’(plutocracy) 대표되는  상법과 주식회사 제도의 기본원칙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주주집단이 결코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며, 여기에는 국내외 기관투자가들도 있고, 이들은 기업 자체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지만, 주식을 상호보유하고 있는 재벌계열사들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기업의 운명에 책임을 진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양자간의 입장 차이는 주주들의 합리적인 요구 재벌의 비합리적경영의 차이가 아니라, 내부인과 외부인 간의 갈등으로서 서로 다른 합리성의 대결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끝에서 그는 글로벌 스탠다드 거부할 것을 주장하며, 선진국 수준의 성장률을 유지해서는 결코 선진국이 없다는 멋진 주장을 한다.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재벌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 필자의 시도는 참으로 궁색해 보인다. 필자가 하는 얘기란, 국가가, 그리고 사회가 나서서 재벌을 도와주고, (괜히 비효율성이다 비민주성이다 딴지 걸지 말고) 재벌은 국민경제 발전의 기관차 역할을 계속하여 선진조국 창조하자는, 그래서 다시 박정희 시대의 정신으로 살아 보세그런 얘기이다. 올해(2006)처럼 삼성, 두산, 현대자동차 총수들이 줄줄이 사고를 치고 있는 시점에서 보자면, 웃기는 얘기이다. 그들은 민주국가의 법을 1조원 상당의 돈으로 조롱하려 드는데경제위기 사고는 김영삼 정부랑 재벌이랑 쳐놓고, 뒷수습은 국민 전체, 특히 중에서도 하층에게 떠넘기고,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공적 자금으로 비자금이나 만들고, 나중에 문제되니까, 지갑 꺼내면서 얼마면 ?”하고 말하는 재벌을 경영의 투명성만 확보하면 된다는 식으로 옹호하기에는 부족하다. 그건 신장섭이 공부를 덜해서가 아니라, 재벌이 해도해도 너무했기 때문이다.  

 

Parallax view라는 말이 있다. 시차(視差) 정도로 번역하나 본데, 보는 이의 위치가 달라짐에 따라 동일대상이 다르게 관측되는 현상을 뜻한다. 나는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나온 글들을 읽기 전에는 언제나 마음을 다잡는다. 이들이 세상을 오른쪽 애꾸눈으로 본다고 해서, 나까지 이들의 글을 왼쪽 애꾸눈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이들의 주장을 이들의 진심대로 읽어주자고왜냐하면 그래야지만 뭐라도 하나 배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Parallax view 경험은 자신의 시야를 넓히는 것이며, 편협을 교정하는 것이다. 글을 읽다 보면, 설득되는 부분도 있고, 며칠 있다 다시 보면 다르게 생각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자기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야지, 어떤 학적, 정치적 권위에 의해 미리 주어진 조야한 잣대를 새로 읽는 글에 처음부터 들이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내가 지난 10 동안 걸로 충분하다. 분명 몇몇 쓰레기 같은 글들이 있긴 했지만, 근현대 경제사 책으로서 책은 훌륭하다. 다만, 다소 다른 관점에서 서술된 여러개의 글들이 각각 전문적인 분야를 다루고 있어서 비전공자가 가볍게 마음먹고 덤벼들 책은 아니다. (그리고 다수의 오자와 편집상의 실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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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경제연구소 멤버들 중 일부가 주축이 된 교과서 포럼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대한 한겨레신문 비판기사

 

(1)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124976.html

(2)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124974.html

 

아래는 [레디앙]에 실린 이재영의 재벌비판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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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5-20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른쪽 애꾸눈, 왼쪽 애꾸눈, 표현이 멋집니다.^^

에로이카 2006-05-20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칭찬 감사합니다... 두 눈 똑바로 떠야지요.. @.@

waits 2006-05-20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번을 왔다갔다하다가 완독(--;;, 책도 아니고 리뷰를. 흑~)했어요. 모르는 말이 많군요, 근데... 꼭 성장을 하고 선진국이 되어야하는 건가요? 이미 벌여놓은 판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건가요? 두 눈 똑바로 떠도 모르겠다는...

waits 2006-05-20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수업 마지막 발제 주제가 '한국의 대안발전모델(?)' 중 하나고, 제가 발제인데 얼마전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특별히 다루고 싶은 게 있냐고 물으시더라구요. 물론 다들 잘 모르니 묵묵부답. 저는 전부터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오늘 광화문 오가는 길에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를 집어들었는데, 경제성장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고... 더 읽고 이 책에서 취할 부분이 있을까 생각해 보려구요. 전에 술자리에서 전 수업에선 대안체제에 대해 어떤 이야기들이 나왔냐고 여쭸었는데, 별 건 없다고 하더라구요. 결국 교실 안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무기력감 같은 것이나 이야기 한다는 의미 자체 외에 뭐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아마 다들 그랬겠죠? 그래도 함께 하는 고민은 중요하겠지만. 선생님께 여쭤보고 말씀 들으면 전해드릴께요.(어인 긴 댓글~;;;)

2006-05-25 0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6-05-26 0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어릴때님.. 기다리고 있을께요.. ^^

..님, 에이.. 설마 그런 오해를 할까요? 그리고 책 읽는 데에 편식이 어디 있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 읽는거지요.. 전 이렇게 재미없는 책만 읽고 살아서... 재미있는 님 서재가서 음악도 들으면서 고개도 까딱까딱, 발도 까딱까딱하며 장단 맞추고 하는 게 큰 즐거움입지요... ^^
 
동아시아의 지역질서 - 제국을 넘어 공동체로
백영서 외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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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필자에 의해 쓰여진 책은 동아시아 공간이 역사적으로 개의 제국적 질서에 의해 교체 지배되어 왔다는 그림을 그리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 동아시아의 역사를 (1)중화제국의 華夷질서, (2)일본제국의 대동아공영권, (3)냉전기 미제국의 아시아-태평양 질서가 교체되어 것으로 파악한다. 책의 기획의도는 일국사 서술을 넘어서 동아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하되 제국중심의 시각이 아니라, 주변의 시각에서 동아시아의 제국질서의 역사적 전개를 파악함으로써, 탈중심화된 공동체로서 동아시아를 건설하겠다는 전망을 제시하는 것으로 있을 같다. 기획의도는 노무현 정권이 후기에 접어들면서 한미동맹강화론이 재등장함에 따라 동북아균형자론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시점에서 시의적절해 보인다.

 

각론으로 들어가서 살펴보면, 정용화의 주변에서 조공체제 김명섭의 동아시아 냉전질서의 탄생 가장 주목할만하다. 정용화는 고려와 조선에게 조공관계는 경제적 것이기 보다는 정치적 것이었다는 시각을 취하면서, 동아시아국제관계에 사대교린정책을 통해 정권의 안보를 보장받는 동시에 스스로 小中華가 되고자 했던 조선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그는 조공관계를 책봉을 전제로 맺어진 왕조간의 교류형식이자, “동아시아 문명국가간의 소통양식으로 바라본다. 그에 따르면, 19세기말 조선은 이전까지의 조공체제에 잔존하는 동시에 만국공법제 기반한 조약체제에도 편입된다. 그러나 조선은 조공체제와 조약체제의 충돌의 격류 속에 힘없이 몸을 맡기고 말았으며, (서구가 아닌) 일본의 주도로 조약체제가 조공체제를 대체하게 된다. 동아시아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동아시아 주변국의 눈으로 중심국을 보며, 주변국의 피지배층의 눈으로 지배질서를 바라본다는 삼중의 주변의 대한 강조는 특히 귀담아들을만 하다. 하지만 조선의 피지배층의 시각에서 서술이 글에서는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김명섭의 글은 미국의 설계 하에 어떻게 유럽의 식민지적 유제는 부정되었던 반면, (군사력이 아닌 자본으로 무장한) 일본 중심의 질서가 동아시아에서 온존하게 되었는 지를 다루고 있다. 정용화의 글에서만큼이나 여기서도 (공산주의 진영과의 냉전이라는) 정치적 요소가 강조된다. 그는 선진제국에 대한 열세의 만회라는 후진 제국들의 동기에 주목하는 동시에, 여기에서 나아가 서양침략세력에 대한 동방의 방패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반인종주의적 정당화를 지적한다. 이러한 관점은 전에 보았던 Geoffrey Barraclough An Introduction to Contemporary History에서도 지적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김명섭은 안중근이 러일전쟁의 승리를 백인종에 대한 황인종의 승리로 크게 기뻐했다는 (내게는 나름대로 충격적인) 사실로서 관점을 뒷받침한다 (271-72). 전쟁을 현상유지국가와 현상타파국가 간의 대결로 보는 코노에 후미마로의 주장 역시 인상적이었다. 태평양전쟁은 脫亞入歐 주창했으면서도 백인우월주의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던 일본이 아시아의 수장으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현상타파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2차대전후,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의 지역중심으로 활용했고, 일본은 과거의 영일동맹 대신 미일동맹을 통한 국가발전을 도모했다. 미국이 동아시아지역에서 추구한 상호수혜적 교환체계는 일본을 수장 기러기 하는, 이른바 기러기 편대’[雁行] 모델로 발전했다” (294-5).

 

김경일의 글은 일본을 태평양 전쟁으로 이르게 과정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여준다. 세계체제 시각에 따르면, 현상유지국가와 현상타파국가 간의 갈등은 헤게모니 국가와 헤게모니 도전국 간의 갈등으로 이해될 있다. 1930년대말까지 일본은 미국에 경제적으로는 의존적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만성적인 국제수지 적자에 시달리던 일본이 1937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1939 미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일통상항해조약을 파기한다. 이에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를 구질서 비난하고, 미국의 대일경제제재에 대항하여 원유를 확보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노리게 된다. 유럽본토에서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보유한 제국들이 독일에게 밀리는 것을 목격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남방진출을 시도하게 된다. 김경일의 이러한 설명은 유럽과 동아시아 서로 다른 지역들에서 전개된 헤게모니 도전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강진아, 박태균, 백지운의 글들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강진아의 글은, 기시모토 미오와 미야지마 히로시의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와의 연결 속에서, 그리고 책의 정용화의 글과의 긴장 속에서 읽으면 특히 재미있다. 강진아는 조선이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경제적으로는 조공무역체제로부터 별로 이익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유럽과 일본이 각각 라틴아메리카의 은으로 연결된 세계경제체제, 일본 은으로 연결된 동아시아무역체제를 통해 중국의 선진상품에 중독되고 소비하면서 따라잡기형 발전을 준비해갔다 가설을 제시한다 (47-8). 그녀에 따르면, “따라잡기형 발전이라는 면에서 조선과 일본은 모두 중국을 정점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 도자기, 면직 등에서와 마찬가지로 농업에서도 일본이 시기적으로 한국에 뒤처져도 발전 폭이 훨씬 컸다” (61). ? 첫째, 일본은 은이라는 지불수단이 되는 고유상품을 1530-1750년대까지 2백여년간 동아시아 시장에 지속적으로 대량공급할 있었다. 조선은 이에 필적할만한 대표상품이 없었다. 인삼수출은 상대적으로 규모에 한계가 있었다 (57). 둘째, 일본은 자급화의 과정을 국가가 계획적이고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수입대체를 이룰 있었다 (62).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강진아가 조선의 국가는 그랬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갑자기 일본의 비교대상을 유럽(62)이나 라틴아메리카(58) 둔다는 점이다. 그러다 뜬금없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공체제에 강하게 편입되어 있는 국가일수록 정치적 취약성 때문에 자립적인 따라잡기형 발전을 추구할 있는 강력한 국가의 역할은 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64).

 

강진아는 주장을 자신있게 수는 없었을까? 결국 조선이 일본에 따라잡히게 것은 일본에게는 있었고, 조선에는 없었던 (<1>‘이라는 천혜의 조건과 <2> 중심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국가’)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를 따져보기 전에 주장이 좀더 설득력이 있으려면, 일본이 조선을 추월했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언제까지는 조선이 살았는데, 언제부터는 일본이 앞섰다 하는 식으로이것이 증명이 되어야지, 이후에 사실에 대한 설명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증명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 치더라도, 강진아의 사실에 대한 설명은 과연 옳은가도 의문이다. 또 일단 설명이 옳다 쳐도, 그것 외에 다른 설명요소들도 있을 있다. 강진아는 일본의 수입대체산업화를 마찬가지로 귀금속이 풍부했던 라틴아메리카와 비교하면서, 독립된 정치권력을 가졌던 일본이 그렇지 못했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달리 수입대체산업화에 성공할 있었다고 한다. 강진아는 16-19세기를 하나의 역사적 시간대로 다루지만, 그것이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메이지유신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하더라도 19세기 초반 독립을 달성한 라틴아메리카에게는 단절적인 개의 시간대에 걸쳐있는 것이며, 따라서 시기 전체에 걸쳐 라틴아메리카는 독립적이지 못했다고 말할 없다. 만약 외세로부터의 독립이 중요했다면, 정치적 독립 이후 라틴아메리카는 일본과 같은 수입대체발전을 이루지 못했는가도 설명할 없다.

 

여기에는 다른 답들이 존재할 있다. 스기하라 카오루는 라틴아메리카와 달리 아시아 나라들이 연쇄적으로 안행적 발전 (flying geese development) 이룰 있었던 것을 역내 무역네트웍의 발달에서 찾고 있다. 생각에는 일본이 조선을 어느 시점에서 경제적으로 추월했다는 사실이라면, 그것은 일본이 세계체제의 접경지대, 중국중심의 세계체제와 유럽중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 사이의 interstitial location 이점 때문인 같다. 은광 개발 기술이나, 도자기 기술은 조선에서 전해졌다. 의류 뿐만 아니라 화약, 무기류를 만드는 데에 필수적이었던 면포도 조선에서 수입되었다. 다른 한편 포르투갈로부터 전해받은 조총이 있었기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 세력은 일본을 통일할 있었고, 임진왜란으로 조선을 침략할 있었다. 일본의 통일은 국민경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명간 hybrid 결합해서 일본의 조선경제 추월을 가능하게 했고,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편입된 이후, 핵심부의 지위에 올라설 있게 했던 아닐까?

 

괜찮은 책이긴 했는데, 여러명의 필자의 글이 실려 있는 편집서라는 근원적인 한계가 있는 같다. 필자들 간의 의견조율과정을 거쳤다 해도, 통일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어쩔 없는 같다. 특히 이들이 얼마나 주변의 시각에 충실하였는 지는 미심쩍다. 그래도 이러한 연구성과들이 차곡차곡 쌓여, 역사학계 안팎에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면, FTA, 독도에, 신사참배에, 일본군 성노예에, 탈북자문제에, 북미관계에, 동북3성에 바람잘날 없는 동아시아 공간에서 3중의 주변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게 되는 순간도 것이다. 그리고 3중적 주변의 목소리가 추구해야 바는 민족간 경쟁이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체의 평화공존일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책의 끝에서 이남주가 제시하고 있듯이, 국민국가 협력과 더불어, 국민국가 자체의 극복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3중적 주변 세번째 주변, 주변국의 피지배층도, 그러니까 남한의 좌파도,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건설에 관심을 기울여야 것이다.

 

[덧붙임: 그러나 또 중심의 매개 없이 주변끼리 직접 소통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돌베개, 2006)이나, 이즈츠 카즈유키(井筒和幸) 감독의 영화 [박치기(パッチギ!)]를 보고 공감했던 주변부적 삶의 아우라(aura)들은 또 얼마나 섞이기 힘든 것인가? 또 남한은, 나는, 당신은,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미명 아래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이웃을 이미 주변부화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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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6-05-05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시안]에 연재되고 있는 김영길의 남미 리포트 153화는 볼리비아의 자원국유화로 인해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도 피해가 예상되며, 각국 정상들이 이 문제 때문에 협의테이블을 갖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후에 이 문제와 관련된 국제공조가 어떻게 펼쳐지게 될지 궁금하다. 특히 이남주가 제시한 국민국가간 협력과 더불어 역내 국가간체제의 틀 자체의 변형은 이미 남미에서도 움트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다. 주시해야할 흐름이다.

에로이카 2008-03-29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겨레신문]에서는 주경철 교수가 '문명과 바다'라는 꼭지에 글을 올리고 있다. 2008년 3월 28일 자에는 이 꼭지의 26회로 조선의 인삼과 일본 은화의 교역에 관해 대단히 흥미로운 글을 올렸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life/278640.html

에로이카 2008-04-26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에 실린 또 다른 글. 일본에 어떻게 포르투갈의 화승총이 전해졌으며, 이것이 조총으로 개량되었는 지에 관한 흥미진진한 글.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82710.html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
기시모토 미오·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김현영·문순실 옮김 / 역사비평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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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난 긴 글을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 긴 글을 읽는 것은 딱 질색이다. 그런데 내 서평이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는 것을 얼마전에야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더 짧고, 대신 더 명확하게 쓰려고 의식적으로라도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여러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읽는 내내 정말 재미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흥미롭게 읽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맺으며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편입되기 이전 (15세기 경부터 19세기 초까지)의 근세 동아시아 세계의 모습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점을 딱 집어 말하자면, 동아시아 세계는 (그 외연의 가변성과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들끼리 연결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외부의 "긴 16세기(1450-1640)"에 출현한 유럽 중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움직임과도 연동하였다는 것이다(181-4, 359). 동아시아에서 은(銀)의 흐름의 변동을 추적하는 것이 이 연동의 키워드이다. 정리하면, 16세기초 은의 흐름은 조선에서 중국과 일본으로 향하였으나, 1540년대부터 일본이 주요 수출국이 된다. 여기에 16세기 중반 이후부터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들을 통해 남아메리카 포토시 은광에서 채굴된 은까지 들어오게 되고, 중국은 "세계 은의 종점"이 된다. 아메리카 대륙과 달리 아시아는 유럽 세계경제와의 접촉 이후에도 바로 편입되지 않았다 (183) [cf. M. N. Pearson. Before Colonialism: Theories on Asian-European Relations, 1500-1700].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세계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와 연동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 책은 그 자신의 임무를 비교적 충실히 소화해낸다. 물론 이 책은 일국을 넘어선 역사를 지향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명, 청의 중국본토와 조선의 역사를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미완의' 동아시아 각국사이지, 그 자체로 동아시아 전체사이지는 못하다. 곧 일본 이웃나라들 중 나름대로 영향이 컸던 두 지역(중국본토와 한반도)에 관한 역사일 뿐이다. 지은이들이 일본인이라 해도 일본을 중국과 조선과 같은 비중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일본이 조선 경제를 추월하는 데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와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은 주고 있지 않다. (이것은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이 아쉬움과는 별도로 먼저 과연 이 질문이 성립 가능한 질문인가, 곧 일본이 전국통일을 이루기 전에는 조선보다 못 살았다는 것이 확실한 것인가 하는 문제도 매우 궁금하다.) 또 사실 조그만 나라 조선과 큰 나라 중국을 두 명의 저자가 같은 비중으로 다루면서 어떻게 동아시아 전체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 줄 수 있겠는가? 이러한 구성은 일본사라는 일국사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두 주변국의 역사 서술이라는 원래 저자들의 목적에는 부합하는 것일지언정, 그 자체로서 근세 동아시아의 "있는 그대로의 역사"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만큼이라도 할 수 있었던 저자들의 功에 비하면, 그 過는 아주 작은 것이다. 이 한계는 저자들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역사학자들이 앞으로 머리를 맞대고 싸우기도 하면서 힘을 모아 넘어야할 과제를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인 것이다. 

이 책이 내게 제시한 이후의 연구방향을 잠정적으로나마 짧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로의 편입 이전의 근세 동아시아 세계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서유럽과 일본의 경우를 제외하고, 자본주의 이전 단계를 봉건제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제는 웃음거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 월러스틴의 세계체계(world-system) 개념을 다소 교조적으로 동아시아에 적용한 대표적 사례는 하마시타 다케시의 중국 중심 조공무역체계론이다. 명과 청을 세계제국(world-empire)으로 보고 이의 경제적 토대를 조공무역체계로 보는 것인데, 월러스틴의 틀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역사적 사실들을 과도하게 단순화, 과장, 왜곡하고 있다 (reification). 하마시타에 대한 반론의 근거는 이 책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347-51쪽에서도 인용되고 있는 모테기 도시오(茂木敏夫)의 [변용하는 근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1997)에 따르면, 조공국들의 구성은 위계적이기는 하지만, 내적 구성이나 중국과의 관계 모두 이질적이다. 또 한 나라가 청의 조공국이란 것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도 논의거리이다. 그것이 청 세계제국의 부분이라는 것을 뜻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청과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 어느 정도로 그 사회를 규정하였는가를 규명해야 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는 조공을 통해서 주고 받는 물품이 생필품이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일종의 기축적 분업(axial division of labor)이 중국과 조공국 간에 존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텐데, 적어도 조선의 경우 당시 조공은 사치품 중심이었다. 이는 월러스틴의 세계체계 구성 기준에는 못 미치는 것이다. 프랭크 식으로 사치품 교역도 소위 "상호침투적 축적"을 통해 서로 다른 사회들을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야 있겠지만, 이 주장은 당시 동아시아가 내부적으로 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도 이른바 "세계 체계(world system)"의 다른 부분과 연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는 있을지언정, 동아시아 지역체계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한 명대 정화의 아프리카 원정의 중단이나 청까지 시행되었던 해금령, 조선과 일본의 쇄국 등으로 나타나는 내향적 발전 (autarky) 지향은 당시 동아시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조공체계가 당시 동아시아 국가간 체계의 상징적 위계를 보여줄 뿐, 실질적인 경제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하마시타에 대한 즉각적인 반동일 수는 있어도 사려깊은 통찰이 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근세 동아시아 세계는 위계적인 국가간 체계 플러스 알파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국가간체계에서 전제되는 주권국가 간의 형식적 동등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중요한 것은 조공국마다 그 조공무역이 각국 경제를 규정하는 정도가 다 제각각이었으며, 이에 따라 통합의 정도를 달리한다는 인식일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또 눈에 띄었던 것은 조선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의 서술 스타일의 독특함이었다. "중도적 해석의 추구"쯤으로 이름붙일 수 있을 듯 싶은데, 어떤 사실에 대한 기존의 양극단의 해석을 제시하고, 이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이되 단지 절충이 아닌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1)조선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인쇄혁명 같은 발전이 없었던 이유를 한자의 특성에서 찾는 부분(125-6)이나, (2) 당쟁(244), (3) 조선사회정체론과 자본주의맹아론 양자 모두를 지양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강조(264)에서 두드러진다.

마지막으로 번역과 출판상의 흠에 대해 한마디 해야 할 것 같다. 번역은 무엇보다 일제시대 무성영화 변사식 말투가 무척 거슬린다. '뭐뭐했던 것이(었)다'하는 표현이 시도때도 없이 나오는데, 손을 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194, 238, 253, 260, 261.....).  맞춤법(192쪽 밑에서 셋째줄 '빠트리다', 207쪽 '삼가하게')이나 punctuation (178, 191) 상의 실수도 보이고, 연표에서는 색깔 처리를 잘못한 것들도 보인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세계 시스템"이라는 번역어이다. 이는 일본에서 월러스틴의 world-system을 가타가나로 世界システム로 번역한 것을 이에 대해 모르는 번역자가 우리말로 중역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세계체계"라고 번역해야 옳다. 많이 팔리는 책인 것 같은데, 출판사에서 신경 좀 쓰면 좋을 것 같다.

[할 말 더 많지만, 짧게 쓰기로 했으니 여기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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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후사 2006-04-08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세계 시스템'으로 번역된 부분 읽으면서 미심쩍긴 했었는데 월러스틴의 세계체제의 번역어였군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에로이카 2006-04-08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피메테우스님 추천 감사합니다.

2006-04-09 0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 빼앗긴 들에 서다
강만길 엮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9월
평점 :
품절


책을 읽으면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한국통사에 관한 책을 읽은 게 아주 오래된 일이라는 것을… 80년대말 90년대초에 읽은 [다현사], [바보사],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 서사연에서 펴낸 [한자발], 그리고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누런 근현대사 책 이후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저학년 때까지의 아스라한 기억들을 더듬으며 여기 나오는 역사적 사실들을 배열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다. 사실 그동안은 1945년 이전의 한반도 역사를 공부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삼가고 있었다. 현대에 관심을 국한시킴으로써 주의가 분산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또 제도교육과 운동권 교육 모두를 통해 접했던 민족사 중심의 서술에 적잖이 물리기도 하였고, 한국과 일본 양국의 수구파들 덕에 최근 들어 더욱 시끄러워지고 있는 한국근현대사의 쟁점화에 내 눈과 귀를 더럽히고 싶지도 않았다. 20세기 초반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 후반과 21세기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미루고 있던 공부를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해 하게 된 셈이다.

 

이 책은 강만길 교수가 큰 틀을 잡고, 그 제자들이 알맹이를 채우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다. 아무리 같은 학풍을 따르는 이들이고 조정작업을 거쳤다 하더라도, 책의 여기저기에 스며들어 있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역사상(歷史像)을 잡아내는 맛은 한 개인의 독자적인 저서에 비해 떨어진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쉬운 점으로 인해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이 저서의 통찰이 상쇄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그간의 한국통사 책을 통해 접했던 한반도를 '닫힌 공간'으로 서술하는 민족사완결주의적 사관과 거리를 두고 있다. 곧 이 책에서의 역사 서술대상 -곧 일제시대의 한반도와 해방 이후의 남한 – 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역사적 전개에 배태되어 있다는 점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처럼서술대상을 전체의 부분으로 파악함으로써 역사서술의 범위를 시공간적으로 한정짓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이 책이 말하지 않는 부분 – 예컨대, 강만길 교수가 언제고 보충되기를 희망하는 해방 이후 북한의 역사 – 을 명확히 함으로써, 그 부분과의 연관을 어떻게 구성해나갈 것인가, 나아가 한반도와 한반도를 포괄하는 더 큰 실체인 동아시아나 자본주의 세계경제 간의 연관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곧 한반도라는 부분을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전체의 역사적 전개 속에 어떻게 위치지울 것인가 하는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나름대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봉건제라는 용어의 사용이다. 조선 땅이 일제 식민지화를 거치면서 자본주의 세계경제로 편입되었다는 올바른 인식에도 불구하고, 편입 이전의 사회 성격을 기술하는 데에 있어 ‘봉건제’ 혹은 ‘봉건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저자들은 봉건제에 대한 어떠한 정의도 없이 이를 前자본주의 사회 일반과 관성적으로 동일시하는 우를 범한다 (30쪽, 79-80쪽,  etc.). 봉건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 발흥 이전에 서유럽과 일본 정도에서만 발견되는 역사적으로 아주 특이한 사회형태이지, 그 자체로서 역사적 보편성을 획득한 개념이 결코 아니다.

 

둘째, 이 책의 대상 독자층은 아무래도 학부에서 근현대사 교양수업을 듣는 대학 1-2학년생들이 아닐까 싶은데, 이 때문인지 역사적 사료에 대한 각주 처리가 대부분 생략되어 있고, 각 장 끝에 주요참고문헌만을 덧붙이고 있다. 뭐 대중적으로 읽히겠다는 의도야 좋지만, 기왕에 연구자들이 공들여 연구한 내용일텐데, 논쟁의 여지가 있는 역사적 사실들은 각주처리를 하거나 박스 처리를 해서라도 그 사료를 명확히 게시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특히,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수구파들이 판치는 (또 노골적으로 그 수구파들에게 구애하는 일부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존재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역사상(歷史像) 간의 대결은 역사적 사실들 간의 실증적 대질을 통해 수행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조선 말기 남발된 백동화의 상당 부분이 일본인에 의해 오사카에서 위조되었다는 서술이 나오는데 (89쪽), 이 사실의 출처나 근거 혹은 사료가 무엇인 지는 나와 있지 않다. 또한 노동력 강제동원의 추정치를 제시하면서 자료마다 심한 편차를 보인다고 하면서 그것을 단순히 “일제의 조선인 동원이 강제적이고 무차별적으로 진행되었다”(183쪽)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소 naïve하다는 느낌이다 (최근들어 문제를 많이 일으키고 있는 이영훈 교수가 얼마전 종군위안부의 추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좋은 공격거리이다).

 

셋째, 이 책에서 구사된 비판적 역사 기술의 준거에 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의 관점은 한반도의 운명에 영향을 끼친 엘리트들의 정책 운용에 대해 비판적이다. 문제는 역사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에 대해 비판적인 것 자체가 아니라, 그 비판의 준거이다. 이런 식이다. 일제 강점기나 미군정기의 역사 전개나 장면 정부의 역사적 한계 등을 비판할 때에는 '만약 자주적 국민국가를 세웠다면 그러지 않았을텐데' 하는 식으로 늘 反사실적 준거가 동원된다. 이 자주적 국민국가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봐도 자본주의 세계경제 내부에 이 국가가 존재해야한다는 현실적 전제를 유지한다면, 이 국가는 힘센 국가, 핵심부 국가일 것이다. 그리고 핵심부 국가들 중에서도 일본이나 영국 같은 나라들도 헤게모니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과장을 약간 보태면, 자주적 국가는 결국 헤게모니인 미국 말고는 없을 것이다. 결국 이 反사실적 준거란 ‘우리가 미국만큼 힘이 셌으면’ 하는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반사실적 준거에 의지하기보다는 역사서술대상(식민지 조선과 이후의 남한 경제)의 희생이 과연 가해자 혹은 강자(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헤게모니)의 이득으로 연결되었는가,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이러한 불평등 관계가 어떻게 구조적으로 재생산되었는가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는 서술이었을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서술은 이 책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를 더 발전시키는 것이 반사실적 판단준거를 들이대는 것보다 책의 품격을 더욱 높였을 것이다.

 

넷째, 이 책에서 다루어진 근현대사 공간의 역사적 사실들의 서술에 대한 평가는 본인의 역량 바깥의 문제이지만, 책 마지막에 실린 신용옥의 “보론: 박정희정권기 경제성장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 대해서는 몇마디 해두어야 할 것 같다. 발전국가론에 대한 제대로 된 국내 비판을 별로 접해본 기억이 없는 내게 이 글은 무척 반가웠다. 특히 그가 이승만정권과 박정희정권을 대비시키면서 발전국가론이 간과하고 있는 재원의 성격변화(무상원조에서 유상차관으로)를 강조한 것은 발전국가론에 대한 역사학자의 개입으로서 매우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동아시아 발전국가들의 성취를 가능하게 했던 당시의 특수한 세계체제적 환경을 강조한 점 역시 옳다. 그러나 (1) 발전국가론을 ‘유교자본주의’론과 함께 “한국 자본주의 성격에 대한 ‘우파’의 종별 규정”(312쪽)으로 바라보는 것은 발전국가론에 대한 “지나치게 독창적인 오해”이다. 더구나 양자를 이데올로기적으로 한 통속으로 취급하는 것은 둘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2) 그의 주된 비판대상으로서 등장하는 발전국가론 문헌은 발전국가론의 기초를 닦았다 할 수 있는 찰머스 존슨(일본)이나 앨리스 앰스덴(남한), 로버트 웨이드(대만)의 대표적 저작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상이한 이데올로기적 구성을 보이는 저작들을 발전국가'론'으로 동질화하여 취급하는 것 또한 성급해 보인다. 게다가, 90년대말 경제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대한 방어의 성격을 띠고 있는 웨이드와 베네로소의 글을 단순히 발전주의 옹호론으로 독해하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된다.  (3) 또한 발전국가론에 대한 비판의 준거도 좌에서 우로 오락가락 진동한다. 한 번은 전형적인 IMF의 논리를 들이대며 발전국가가 ‘연고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의 온실이었다(322쪽)는 우파적 비판을 하다가, 또 다른 곳에서는 발전국가 속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요소를 찾기란 불가능하다(327-8, 329쪽)는 좌파적 비판을 하기도 한다. (4)또 아시아 경제 위기에 대한 웨이드와 베네로소의 논문을 음모론 정도로 격하하고 있는데(329쪽), 도대체 이 글의 저자 신용옥 선생의 내공이 얼마나 대단한 지 궁금하다. 정치경제학 연구는 보통 특정 행위자의 행위가 구조에 미친 영향이 보다 강조될 경우 음모론처럼 보이는 반면, 개별 행위에 대한 전체 구조의 제약이 강조될 경우나 개별 행위가 전체 구조의 재생산에 어떻게 기여하는 지가 강조되면 기능주의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정치경제학 연구는 음모론과 기능주의라는 양극단의 유혹에 언제나 맞서야 한다. 그러나 아시아 경제 위기는 ‘월가-미국 재무부-IMF 복합체’의 정책행위의 결과로서 드러난 것이라는 웨이드와 베네로소의 주장은 정당하다. 물론 이 복합체가 한국 경제를 말아먹으려고 음모를 꾸민 것도 아니며, 웨이드와 베네로소가 그런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강력한 행위자(‘월가-미국 재무부-IMF 복합체’)의 행위 결과가 어떻게 구조의 약한 부분(경제위기에 노출된 동아시아 국가들)을 통해 드러났는 지를 훌륭하게 설명하였을 뿐이다. 이것이 어떻게 음모론인가?

 

할 말은 더 있는데, 이 쯤에서 접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래도 이 책은 한국 근현대 경제사를 이해하는 첫 걸음으로서 손색이 없다. 보론은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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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동아시아 역사상의 재구성
나카무라 사토루 지음, 정안기 옮김 / 혜안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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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가을을 맞이하며 읽은 책이다. 간단하게 책의 미덕과 단점을 추려보자.

 

책의 첫째 미덕은 오래 돕과 스위지에 의해 주도된 자본주의 이행 논쟁이나 국내의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간의 대립 등이 기반하고 있는 하나의 허위적 대립을 지양하고 있다는 것이다. 허위적 대립은 맑스가 {자본} 3권의 말미에서 구분한 초기 자본주의 발전의 가지 길이다. 구분을 통해 맑스는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질곡으로 작용하게 기존 생산관계가 모순을 잉태, 발전시킴으로써 자본주의가 내적 모순의 작동 결과로 등장하게 되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 외부에 이미 성립되어 있던 자본주의적 시장 세력에 의해 기존의 전자본주의적 관계가 잠식되는 경로 가지를 설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베버적인 의미에서의 이념형이다. 현실에서 초기 자본주의 발전의 경로는 양극단 사이의 어디 쯤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양자 하나로 clear-cut하게 나누어질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만일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역사적 사례들이 양자 하나로 범주화될 있다고 믿는다면이는 이론과 현실을 혼동하는 것이며, 추상의 폭력으로 현실을 재단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자본주의 이행 논쟁이나 식민지 근대화 / 내재적 발전 논쟁은 사실상 이러한 추상의 폭력을 재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나카무라 사토루는 자본주의의 일국내재적 발전 경로는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조선 뿐만 아니라 식민본국인 일본 역시 외부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와의 접촉을 통해 자본주의화가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경제로 편입되는 지역이 편입 이전에는 마치 진공상태나 처녀지였던 것처럼 취급되어서는 된다. 지역에 독특한 자본주의 경제를 형성하게 만드는 고유하게 존재해온 역사적 조건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내재적 발전론자들이 얘기해온 자본주의 맹아란 바로 이런 자본주의 세계경제와의 접촉 없이 체제의 한계 내에서 발전해온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관계의 상품화가 아닐까?

 

책의 번째 미덕은 동아시아 자본주의 발전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이다. 특수성은 다양한 수준에서의 비교 - 동북아시아와 북서유럽 간의 비교, 동북아시아와 다른 주변부 지역 간의 비교, 그리고 동북아시아 내부 국가들 간의 비교 - 통해 도출된다. 예컨대, 동북아시아의 소농경영의 발달은 북서유럽과의 비교 속에서, 화교와 인교에 의해 매개된 동아시아 역내 무역의 급증은 라틴 아메리카와의 비교를 통해서 (cf. 스기하라 가오루), 그리고 조선, 중국, 일본의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자본주의 발전경로는 고립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상호작용하는 지역적 전체의 입장에서 해명된다. 이러한 지역간, 지역내 비교의 결합은 고립적으로 상정된 단위 국가들의 비교를 통해 제시되는 차이들의 나열을 넘어 차이 간의 연결을 보여준다. A B라는 국가의 공업 발전 경로에 차이가 존재한다면, 차이는 나라 내부의 조건만으로 설명될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개별 차이들은 보다 과정의 계기를 이루는 것으로 조망된다. 

 

번째 미덕은 셋째 미덕으로 연결된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대한 동아시아의 관점을 구성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이다. 일국적 분석단위에 대한 거부는 일찍이 세계체제 분석에 의해서 주장되었으며, 널리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월러스틴의 작업을 위시한 세계체제 분석 역시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유럽중심주의라는 틀에서 벗어날 없었다는 지적은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자넷 아부룩호드, 에릭 울프 등과 같은 주변부 전공 연구자들에 의해 선구적으로 제기되어 왔으며, 너무 나가기는 했지만 얼마 작고한 안드레 군더 프랭크도 마찬가지였다 (프랭크는 '자본주의' 개념의 폐기를 주장하면서 브로델, 월러스틴이 넘어서고자 했던 랑케의 실증주의적 역사서술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우를 범한다). 최근에는 멕시코의 철학자인 엔리케 두쎌도 여기에 동참한 있다. 이러한 주장들의 함의는 분석단위로서 세계체제를 채택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서구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책의 저자 나카무라 사토루 역시 이러한 비판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번째 미덕으로는, 대가의 세계경제에 관한 전망 귀담아들어야 부분을 꼽고 싶다. 무엇보다 공업화를 통한 경제발전의 성취라는 기존 후발국들의 전략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핵심부의 사양산업이 ()주변부로 재배치되는 기본 메커니즘의 존재 (데이빗 하비나 베벌리 실버가 말하는 spatial fix) 인해 공업화 자체는 용이해졌지만, 그를 통해 발전을 이루는 것은 NIEs 성공 이후로는 후발국간의 국제경쟁 심화와 선진국의 견제로 인하여 갈수록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cf. 지오바니 아리기). 이러한 공업의 세계적 발전과 대조적으로 농업은 정체 상태에 있다. "더구나 문제는 식량수출국이 대부분 선진국이고, 수입국은 모두 개발도상국이라는 점이다. , 국가별 농업생산력의 격차가 공업생산력 격차 이상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219). 이러한 가지 현실, (1) 후발국에게 공업화는 쉬워졌으나 공업화 자체가 경제발전과 등치될 없다는 , 그리고 (2) 선진국이 식량수출국이라는 점은 UN ECLA 이후 과거 라틴아메리카에서 "종속" "저발전" 관한 논의가 한창일 때의 상황과 작금의 상황이 얼마나 다른 지를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최선진국과 최후진국 간의 소득 격차는 산업혁명 이전에는 3, 1870 경에는 15-20배에 이르던 것이 현재에는 500 (실질소득격차는 대략 50 정도) 확대일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229-300). 따라서 종속 분석의 기본적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문제의식이 옳다는 것과 분석이 옳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것이 변화한 시대 상황에 걸맞는 종속 연구가 수행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책의 다섯 번째 미덕으로는 일본 경제사 연구의 진행상황에 대한 소개를 들고 싶다. 일본의 경제사 연구는 나름대로는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자칭타칭 식민지근대화론 진영에 속하는 국내 학자들에 의해 소개되어 왔다. 전에 스기하라 가오루나 호리 가즈오의 책을 재미있게 보았고, 많은 것을 배울 있었다. 일본의 학자들은 세계의 관점에서 일본을 바라봄으로써 세계를 일본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학문적 발전의 길을 가고 있다. 이들의 연구가 일본의 경제사 연구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자기들의 성에 차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논거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기각되는 것은 저열한 민족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실제로 위의 저자들이나 책을 지은 나카무라 사토루는 한국 내부의 민족주의 사관이 끼친 영향을 알고 있으며, 자신들의 연구가 (마치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만을 끼친 것으로) 오독되는 것에 대해 독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또한 지은이 나카무라 사토루는 구미숭배주의를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일본 민족주의 역시 경계하고 있다. 이는 그가 하마시타 다케시의 조공무역체제론을 실증적으로 근거가 박약하다는 이유로 비판하고 있는 점에서 나타나고 있다 (44-46). <90년대 이후 하마시타는 일본의 입장에서 수정된 세계체제 관점에 입각하여 16세기 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조공체제로 파악하면서, 일본에 갔던 조선통신사를 조공을 바치러 갔던 사신으로 해석하여 조선이 중국과 일본에 조공을 바치는 이중적 주변부였다는 주장을 해왔다.>

 

칭찬할 점들은 있겠지만, 일단 생각나는 것은 정도였다. 단점들도 정리해보자.

첫째,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집필된 다섯 개의 원고를 편집한 책이라 중언부언하며 겹치는 주장이 많이 있다. 둘째, 대가의 글이라 선이 굵고 명료하며 통찰력이 돋보이지만 세밀한 논리 전개는 보이지 않는다. 셋째, 민족해방운동의 능동성은 경시하며 식민지 경제발전의 능동성만을 강조한다 (200). 넷째, 선진-중진-후진 자본주의 / 본격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전체구조를 상정함으로써 일국단위의 진화론적 발전사관을 극복하는 보이지만, 발전사관을 강화된 형태로 재도입하고 있다. 개별 국가의 발전경로에 방점이 찍히지, 세계경제의 위계구조에 방점이 찍히지는 않는다. 다섯째, 놀랍게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의가 없다. 여섯째, 번역의 문제다. 문장은 깔끔하게 번역되었다. ( 점에서 전통과 현대에서 출판된 스기하라 가오루의 책은 정말 거지같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한국말 어휘에 없는 "비지적 공업화 (飛地的 工業化 )" 다른 곳에서 소개되지 않는 나와 도이치의 "일본무역 3관절론" 같은 개념들은 옮긴이의 주가 필요한 개념들일 것이다.

 

남한 사회에서는 비록 식민지근대화론의 수괴 정도로 적대시되고 있지만, 지은이 나카무라 사토루의 목소리는 비분강개의 대상이기에는 너무도 이성적이다. 동아시아의 눈으로 한국을 보고, 세계의 눈으로 한국을 볼 때에야만, 한국의 눈으로 동아시아와 세계를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나카무라 사토루의 {근대 동아시아 역사상의 재구성}은 그 길을 처음 떠날 때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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