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한 달이 지나갔습니다. 1월편을 느지막히 올리는 통에 일찍 닥쳐온 마감일로 편집팀은 분주했습니다. 구정 연휴가 참 길지요. 간만의 휴식에 몸과 마음을 맡겨버리고, 따뜻하고 평온한 2월이 되시기 바랍니다. (안 보이는 분들이 몇 분 있지요. 곧 추가될 예정입니다. 커피사기 내기를 했는데, 과연 누가 내게 될 지! :) )

"역시 대단해"

 언젠가는 읽어야겠지, 라고 생각하고 따로 보관해 둔 책들. 그 중의 한 권을 꺼내들었다. 출간되었을 때 사람들에게 소개도 하고 많이 팔기도 했지만 정작 나는 자세히 읽지 못했던 책이다. 좋은 책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아마도 '주제가 너무 진부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생각과 달리 그의 이야기는 진부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혁신이라는 주제를 이렇게 쉽게 풀어낼 수 있다니. 그가 가진 통찰력 그리고 쉽게 표현해내는 능력에 감탄할 뿐이다.
 
책을 읽다 볼펜을 찾아들고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밑줄 긋는 부분이 점점 많아진다. 책을 읽다 잠시 멈추어 선다. 생각한다. 그리고 밑줄을 긋고 또 생각한다. 멈추어 서는 시간이 길어지고 나의 생각은 점점 혁신이라는 주제를 파고들며 생각을 확장해간다. 내 업무,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 사회의 변화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어. 바꿔볼만한 것은 없을까.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없을까...
 
가끔씩 가진 능력에 비해서 과대평가 받는 사람들이 있지만 피터 드러커만은 아니다. 대가라는 말이 전혀 부족함이 없다.



 


"Why do I keep counting?"


아직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은 새해건만 문득 불안감이 엄습, 이미지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대충 이런 이미지로- 촛불이 켜진 방, 홀로 무릎 꿇은 나는 단독자로서(어쩐지 나는 ‘로써’가 어울릴 듯한 기분이 들면서) 신 앞에 기도한다. “쎄뇨르, 헤수스(Senor, Jesus)...”로 시작하는 그 기도는, 온갖 참회와 고해의 뜨거운 눈물을 지나 블루지한 기타 솔로(대략 23분)로 마무리 되는데… 그런 장면을 그릴 때면 나도 모르게 울컥, 당장이라도 스페인어 학원과 기타 학원을 등록하고, 동네교회라도 기웃거리고 싶은 마음을 참기 힘들어지지 말입니다(겨울바람이 매서워 다행이지요). 그것이 바로 내가 살면서 깨닫게 된 이미지 트레이닝의 힘이라고 하면 너무 싱거운 농이겠지만.

 

 

 

 

기타는 백날 쳐봐야 A-C-Em-G 겨우 하는 수준이고, 스페인어라고는 은지원의 ‘미 까사’ 가사를 흥얼거리는 것이 전부이지만, 기도만은 종종 하고 있다. 한 번도 신자인적은 없지만 그렇게 되었다. 완벽한 절대자에 대한 관념이 완벽하지 않은 나에게서 나올 수 없으므로…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은 것은 물론 아니고. 그것이 카뮈적인 반항이든지, 오에적인- ‘신 없는 인간의 구원’ 같은 문제이든지간에, 결국 앞서 존재하는 것은 신이었으니까. 문제는 존재증명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조건으로 (그로부터!)던져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하지만 도무지 모르겠어서 이제는 조금 대화를 시도하고 싶다는 정도? 한마디로 돌아온 탕아 되겠다.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건 분명하다)

 

 

 


그 계기는 사실 아주 사소했다. 전직 종교담당MD 김*욱 씨가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조지 뮬러의 기도 응답수첩]이란 것을 던져 주었고, 깍두기 여덟 칸에 우선순위를 긴급/작정/신유/일반으로 나누어 기도를 적고, 옆에 하나님의 응답을 적는 조금 우스운 모양새(*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주로 긴급에)의 그것을 들여다본 것이 시작이었으니까. 비웃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지난 연말, 남들보다 100년 늦게 읽었던 <파이 이야기>의 파이가 나와 같은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고, 퇴근해서 틀었던 TV에서는 [하우스 vs 신] 에피소드가 하고 있었다면? 나는 이 모든 것을 우연이라 생각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고, 그렇다고 무슨 뜻인지 알아낼 능력은 없지만, 적어도 융 선생이라면 비웃지 않았을 터. 하여 기도를 시작했다는 말이다.

설을 앞둔 월요일 새벽, 아직 응답을 받은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코헨 아저씨가 야한 목소리로 ‘할렐루야’를 불러주시는 지금, 나 역시, “낙관하고 있습니다!” 라고 씩씩하게 말해 볼까 생각중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사실 내 기도의 내용은 언제나, 브랜든 플라워스의 노래마냥, "Help me get down / I can make it / Help me get down / Help me get down / I can make it / Help me get down / If I only knew the answer / I wouldn't be bothering you" 딱 그 만큼이다. 나 역시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 저 위의 누군가를 귀찮게 해드리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그냥 조금 울며 떼써보고도 싶다고 한다면, 너무 엄살일까? 엉크, 엉크.  

 

 

 

 



"Do what you wanna do"

'단순화를 넘어 모 아니면 도로. 1월 내맘대로 존책, 에서 천명한 'simplify'는 적정선을 넘어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어째서 손에 잡히는 것이 잡히지 않는 것보다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두냐, 버리느냐'의 기로에서 기준은 매분 매초 바뀌었습니다.

당신도 그렇겠죠? 마늘은 절대로 먹지 않지만 닭과 함께 고아 삶아진 마늘은 괜찮고, 윗사람에게는 존댓말을 해야겠지만 이 사람은 나와 비슷한 사람이니까 반말을 반 섞어도 괜찮고. 마늘이 아니고 파라도 괜찮아요. 윗사람이 아니고 아랫사람이라도 상관없구요. 자꾸 완벽하라고만 이야기하는 이 세상에서라면, 조금쯤은 자신에게 관대해야 위안을 얻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저는 너무 관대했었나봐요. 정신을 차리고보니 주위에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네 귀퉁이가 비어버린 방 가운데 앉아 전화를 하면, 제 목소리가 모서리와 천장에 부딪히고 다시 전화기로 돌아와요. 바닥에 엎드려  '이 자식 너무 잘난 척하잖아'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문득 꺼내드는 <풀하우스>를, 사랑하는 M언니가 공역하신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를 읽고 있습니다. 온기를 품은 고양이 세 마리가 어느덧 가슴팍 밑으로 모여듭니다.

...연말도, 정초도 나와는 무관해. 두어 사람은 전화를 할 것도 같은데 오지 않고. TV는 괜히 없앴나, 뭘 해보겠다고. 생각만 하던 그 일 언제쯤 할 수 있을까. 부재중전화 2건이 신경쓰이지만 모르는 번호라 다시 걸고 싶지 않아. 하지만, 혹시...

그런 당신과 나를 위한 노래예요. <Mocca>의 'Do what you wanna do'. 부디, 모두 행복했으면 싶어요.

모두가 행복하다면, 모두 기분이 좋다면
하고 싶은 걸 하세요. 하고 싶은 말을 해요.
마음 편하게 먹어요. 폭풍우는 잦아들테니까요.
자신에게 진실하세요. 그럼 모든 게 잘 될 거예요.

 

 

 

 



"당신이 무서워하는 것을 말하라"

친구가 꾼 어젯밤 악몽 이야기를 시작으로, 나와 그는 자신이 아는 무서운 이야기 보따리를 주섬주섬 풀어헤친다. 그런데 서로가 느끼는 공포의 간극이 너무 크다. 내가 한 무서운 이야기를 그는 우습다고 했고, 그가 한 무서운 이야기를 나는 짜증스럽다고 했다.

우리의 접점 없는 무서운 이야기 배틀 후, 나는 오랫동안 공포의 정체에 대해 생각했다.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
소꿉친구에게 살해당한 아홉살짜리 여자아이가 자신을 살해한 친구와 그 오빠가 자신의 시체를 숨기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죽은 소녀의 시점, 반전의 반전 그런 요소들 말고 이 소설의 공포를 지탱하는 가장 커다란 줄기는 이 모든 것들이 아이들에게서 일어난 일이란 사실이다.

<태평양 특급>
그로테스크한 공간에 대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스퀘어 댄스'. 외계 생명체의 공간에서 사지가 뒤틀린 채 내 멋대로 움직이는 인간의 몸.

<어리석은 농부와 귀신들의 합창>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불러오는 파멸의 변주곡. 귀신들이 하는 말에 대답하면 안 된다는 할머니 말씀이 떠오르는 동화다.

그림 형제의 '두려움을 배우러 간 사나이'라는 동화를 보면 온갖 기괴한 상황에서도 공포를 느끼지 못하던 사나이가 가장 무서워한 것은 잠결에 뒤집어쓴 물세례였다.

당신이 무서워하는 것을 말하라. 그러면 당신을 조금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번만 읽어도 상위 1%로 간다"

3-4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친한 후배에게서 자기 직장 상사 중에 점심시간이면 ‘수학의 정석’을 푸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뇌 구조가 독특한 사람이거나 얼마나 심심했으면.. 네가 세상사는 이야기 좀 해주고 그러렴. 하고는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 기억이 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런 비슷한 증상을 앓고 있다는 ‘어딘가 수상한 사람’ 이야기를 몇 명이 더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30대가 넘어서 수학책을 보다니.. 그것도 휴일에.. 일주일 동안 수고한 자기 몸을 일으켜 머리에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다니...  다행히 나와 직접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중에는 그런 적잖이 수상한 자가 지금까지는 없었고, 계속 없을 것으로 보인다.

우연하게 손에 들어온 수학책 하나. 부제가 ‘한번만 읽어도 상위 1%로 간다’이다. 남들 일주일 일할 분량을 하루에 다하고 간다고 착각하면서 복잡한 머리를 지하철에 싣고 퇴근 하는 길에 손에 있었던 책이 왜 이 책이었을까.  한번만 읽고 대한민국 1%로 가서 렉써썬을 타고 싶다는 독특한 생각을 하면서 펼쳐 들었다.

얼마 후, 난 수학공식을 읽으면서 지하철을 타고 그렇게 집으로 가고 있었다. 수학을 취미로 하기는 쉽지 않겠고, 수험생은 더더욱 아니지만, 가끔은 단행본보다 지하철퇴근길에 ‘수학의 발견’을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겠다.  30대 넘어서 수학책을 읽어보자! 그리고, <수학의 비결>은 고등학교 참고서라는 사실을 밝혀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만의 리듬.."

삶이란 게 원래가 하루하루 선택의 연속이고,  결국에 인생은 혼자 살아내는 것이라고.. 철없던 고등학생 시절에도 이미 달관이나 한 듯 떠들어대던 기억이 난다. 살다보면 많은 부분 그러하기도 하고, 버겁다 느껴지는 날엔 더욱 냉소적으로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어디서부터 어긋나 있는지 모르게 점점 균형을 잃어간다거나, 고민에 휩싸이게 되는 날에,
 
모리 에토의'리듬'은 쉽고 경쾌하게, 존 러벅의 '성찰'은 경건하고 깊이있게,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언제인가 두껍고 약간은 지루한 책을 읽다 슬슬 지겨워지던 찰나에 머리나 식힐 겸 집어들었던 이 책. 어느 새인가 박자를 놓쳐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조바심이 나던 때에 본연의 내 '리듬'을 되새기게 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어른들의 눈엔 문제아일 뿐이지만, 사유키의 작은 우상 신지오빠는 신주쿠로 가기 전, 사유키에게 '나만의 리듬'을 잃지 말라고 얘기한다.
 
'이제부터 주위의 잡음이 신경쓰이고...네가 생각한 대로 움직이거나 웃지 못할 때, 이 스틱으로 리듬을 맞춰봐. 너에게는 너만의 리듬이 있으니까.'
 
'그것을 소중히 여기면 주위가 아무리 변해도 너는 너인채로 있을 수 있어.'

 
나름의 기준과 소신으로 행하는 것들에 때때로 내가 지치고, 그저 남들이 지나가듯 내뱉는 말들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할 때면, '신지오빠'의 나지막한 얘기를 떠올리며,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여 본다. 온전히 나로 있을 수 있는 그 리듬을..다시 내가 원하는대로 노래할 수 있을 때까지..

존 러벅의 '성찰'은 여러 학자와 작가들의 언행을 담아 이루어진 책이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줄 긋고 기억하고 싶은, 또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문구들이 참으로 많다. 꼭지마다 인생의 중요 요소들을 고맙게도 잘 정리해 일러주고 있으니, 흔히 FAQ 항목에서 내가 원하는 유사 질문을 뒤져 보듯, 그날 그날 인생의 처방이 필요한 부분들에 집중해서 들춰보았더랬다.

서두르지 말라, 생각없는 행동이
정신의 속도를 망쳐 놓지 않도록 하라.
숙고하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라.
그러한 바탕 위에서 할 일을 결정하라.
서두르지 말라. 세월은 무모한 행동을
덮어주지 못한다.
쉬지 말라, 인생은 흘러간다.


순간순간 온전히 '나'인채로 살아가되, 주위에 귀기울일 줄 알고, 서두름 없이 의미없는 쉼도 없이, 한 번 뿐인 내 삶을 충만되게 채워갈 수 있길 빌어본다.
 


"2008년 1월 22일, 히스 레저가 죽었다."

2008년 1월 22일, 히스 레저가 죽었다. 에니스 델 마가 죽은 것이다. 며칠 뒤 새벽, 그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진 나는 가슴 떨리는 기차 소리와 기타 연주로 시작되던 [브로크백 마운틴]의 트레일러 동영상을 연신 돌려보고 있었으며, 문득 몇 개의 진실을 깨달아 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나간다는 평범한 진리와, 마초 같은 인생 때문에 편견으로 시작된 한 배우와의 만남, 그리고 그처럼 편견으로 시작된 모든 관계들이 꼭 상상했던 방식으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 등등을.
 
'내가 좋아하지만 곧 죽게 될' 사람들의 목록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오에 겐자부로는 <회복하는 인간>에서 시인 개리 스나이더의 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적는다. '원한다면 구원은 온다 / 그러나 결코 네가 몰랐던 방식으로', 그러나 구원이 오기는 온답니까, 라고 되묻고 싶은 심정으로 살아가는 범인들에게 전도유망한 청년의 죽음은 그러한 구원의 가능성을 몰수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아쉽게도, 헐리웃 배우 하나 죽었다고 삶의 고삐는 늦춰지지 않는 법. 무던하게 지루한 일상을 헐떡이며 주파하던 나는 <브로크백 마운틴>의 선례처럼 소설과 영화의 완성도가 경이로운 균형을 이루는 예를 찾고 싶어진다. 가슴 벅찬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여 집어든 것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였다.
 
총기와 마약, 돈다발이 들어찬 서류가방, 국경과 보안관과 범죄자. 너무 빤한 건 아닌가. 그러나 사막을 건너는 낡은 트럭, 그 트럭에서 새어나오는 불길한 삐걱거림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이제까지 우리가 경험한 비극의 한계를 한 단계 넘어선 장면을 보여준다. 차마 마주하기 힘들 정도로 안타까운 비극의 순간이 이 과장하지 않는, 현실같은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시거' 역을 맡은 배우가 왜 유수의 시상식에서 유력한 후보자로 지칭되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나 우리의 에니스는 돌아오지 않겠지. 편견과 편애를 넘어 온갖 아름다움에 휩싸여 죽는 것. 다만 아름다웠을 (것이라 추측되는) 그의 넋에 평온이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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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5 1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春) 2008-02-07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o what do wanna do라는 말이 참 와닿네요. 요즘 그걸 위해 뭔가 벌이는 중인데... 커피 사실 분은 1명만 당첨되는 건가요? ㅋㅋㅋ
 



올해 초반까지, 알라딘 편집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내맘대로 좋은 책이 잠시 연재를 중단(?)한 사이, 신입 편집직원 두 분이 오셨습니다. (누구일까요, 찾아보세요^^;) 편집장님도 바뀌었구요. 여러분들도 모두 별고 없으셨길 바라며, 새로 꾸린 편집팀에서 2008년 내맘대로 좋은 책 첫번째 소식을 보내드립니다.

"만원 지하철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건조하고 팍팍한 날들입니다. 책도 안 읽히고요. 12월에 읽은 책을 꼽아보니 일곱 권 정도 되는데 기억에 남는 책이 별로 없네요. 내맘대로 좋은책을 오랜만에 쓰니, 이런 얘길 해도 되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말입니다, 그 팍팍한 책읽기 라이프에 한 줄기 빛이 있었으니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시리즈입니다. 심심해서 들췄다가 푹 빠져서 읽었습니다. 출퇴근 길에 한 권씩 읽으니 시간이 어찌 빨리 흐르는지 만원 지하철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사실 '실록'이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신념과 투쟁, 성공과 실패의 기록인가요. 그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일컬어 다만 '재미었다'고 말하는 게 실은 조금 불편합니다. 그러니 너무너무 재밌다는 말은 이만 접겠습니다.

"어디까지가 정사에 기록된 것이고 어느 부분이 야사에 소개된 이야기인지 모호했다. 이 대목에서 결심이 섰던 것 같다. 조선 정치사를 만화로 그리자, 그것도 철저히 <실록>에 기록된 정사를 그리자. 곧이어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조선왕조실록> CD를 구입하였다. 돌이켜보면 참 무모한 결심이었다. 특정한 출판사와 계약한 상태도 아니었고 실록의 한 페이지를 직접 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작업에 전념한다는 미명 아래 회사부터 그만두었으니, 내 구상만듣고 이런 대책 없는 결정에 동의해준 아내에게도 뭔가가 씌웠던 모양이다. 궁궐을 찾아 사진을 찍고 화보 자료를 찾아 헌책방도 기웃거렸다."
 
"포부는 거창하였고, 노력 또한 부끄럽지 않을 만큼 하였으나 독자 여러분께 재밌고 유익할지는 자신이 없어 사랑을 고백할 때와 같은 떨림으로 삼가 이 책을 내놓습니다."

 
어찌보면 평범한 머리말인데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거창한 포부와 용기와 엄청난 노력 덕분에 읽고 웃고 배우며 살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박시백 씨 고맙습니다. 앞으로 나올 아홉 권도 부디 건필하세요.

 



"옥토끼가 동편에 서서 맑은 기운을 마시고 있..."

신년 계획을 세워 본다. 신년 계획을 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경건함과 굳은 의지 그렇지만 열린 마음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니까,


 

 

 

 

검은 몰스킨의 경건함과 파버카스텔 UFO 캡의 아름다운 단단함, 지워짐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HB 연필의 열린 마음 같은 것. (저축은 신년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다. 경박하지 않기는 물론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하얀 노트의 첫 장에 무언가를 끼적이는 것은 언제나 죄스럽고 부끄러운 일. 하여 그 네댓 줄의 문장을 이곳에 옮길 수는 없고, 그저 몇 권의 책으로 대신해 본다.


 

 


 

그러니까 경건함, 굳은 의지, 열린 마음 같은 것. 그러니까 어쩌면 치유, 같은 것.
 
작년 1월, '옥토끼가 달을 보고 노래할 궤'라는 제목으로 이 글을 썼다. 올해 신년사주는 '옥토끼가 동편에 서서 맑은 기운을 마시고 있'단다. 이런 걸 융의 표현대로 '동시성'이라고 해야 할지, 쿤데라적인 의미에서의 '운명'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다. 어쩐지 쓸쓸한 새해다.






"과학이 인간의 모든 기초를 설명해준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만..."

한마디로 속이 다 후련한 책이다. 이전의 과학 서적들이 보여주지 못한 답답한 부분을 깨끗이 정리하는 멋진 책이었다. 통섭, 과학과 인문학의 조화 이런 말은 많이도 떠들지만 이 책만큼 완벽하게, 아름답게 보여주는 책은 없지 않을까.

사실 한동안 생물학, 좁게는 진화생물학 쪽 책을 많이 봤었다. 과학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내게 진화생물학이 알려주는 새로운 사실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내겐 정말 다윈이 말한 것처럼 ‘도덕과 철학이 새로운 기초를 갖게 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일단 인간의 모든 건 진화과정에서 나왔다라는 명제에 완전히 동의하고 나니, 나머지 다른 이야기들은 하나마나한 이야기로 들렸다. 게다가 많은 과학자들이 은근히 표현하고 있는 자신감, 이제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인문학자이며 그전의 인문학과 예술은 과학적 근거를 가지지 못한 구닥다리라는 그런 자신감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아닌데, 그런 걸로는 부족한데.

하지만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는 이런 답답함을 해결해주었다. ‘아하, 역시 과학만이 진리를 발견하는 게 아니야. 이들 예술가들은 당시 과학자들이 모르고 있을 때도 이미 진리를 알고 있었잖아.’ 프루스트의 소설이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것은 그의 기억에 관한 통찰이 정말 진실이라고 내가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과학적으로도 사실이라고 하지 않는가! 난 이제껏 설렁탕이나 사골 국물이 왜 맛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건 짠맛도, 쓴맛도, 단맛도, 신맛도 아닌데 대체 왜 맛있지? 그런데 정말 그런 ‘고기맛’이라고 할 만한 맛이 있단다. 요리사들은 몇천 년 전부터 알고 있던 것을 과학은 이제야 알아냈다고 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처음에는 청중들에게 최악의 평가를 받다가 차차 걸작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건 그의 음악이 그전의 음악과는 너무 달랐지만 과학적으로 봤을 때는 조화로운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조화로운 음악에는 귀를 열게 되어 있다. 아, 그래 나는 이런 설명을 원했어! 과학과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설명, 예술이 왜 아름다운지를 설명하는 과학을 말이야! 

과학이 인간의 모든 기초를 설명해준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기초만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가? 과학적 사실을 아무리 나열해도 감동을 주진 못한다(물론 아름다운 수학이나 물리학에 어떤 감동을 느끼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진짜 감동을 주는 것은 과학적으로 올바른 사실(시적으로 말하자면 진실)을 도구로 삼아 엮어내는 예술이다. 이 책은 예술이 과학만큼이나 현실을 잘 보여준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감동을 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과학과 인문학의 진정한 통섭이라면 이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그런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케세라세라"

이따금 생각한다. ‘말’이란 어쩜 이렇게 따분할까. 세상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만한 것들이 너무 많이 떠돌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언어’만큼 아름다운 것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찬 순간에, 어쩔 수 없이 늘어놓은 그 모든 말들, 그 어딘가에 스며든 '아름다움'의 흔적이 비치는 드문 순간들. 그것은 소위 폐부를 찌르곤 한다는 명쾌한 발언일 수도, 비가 그쳐갈 즈음 나뭇잎에 튕겨 오른 물방울 같은 ‘명랑’일 수도 있다. 신기하게도, 바라만 봐도 눈물이 복받칠 것 같은 문자들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것이다. 비록 지금이 새벽 두 시에 가까워지고 있고, 마감 시간은 이미 넘겨버린 탓에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지만. 각설하고, 기억에 남는 몇 개의 말(이 담긴 책)을 담는다.

<리스본行 야간열차>는 근래 읽은 시집 중 가장 좋았다. 물론 나는 시집을 잘 읽지 않는다. 담당 분야가 바뀌고 나서도 별로 변한 것은 없다. +고양이도 좋아하지만, 기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말하라, 기억이여>는 근래 읽은 책 중 가장 인상적인 도입부를 지녔다. 물론 나는 이런 장황하고 탐미적인 문체에 굴복하는 편이며, 그래서 <토지>도 좋아하지만, <토지>를 끝까지 읽지는 않았다. <대성당>은 올해 읽은 책 중에 거의 최고였다. 하지만 막상 리뷰를 쓰자니 쓸 말이 없었고, 미뤄둔 상태다. 이 작품집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는 것이 과연 필요한 일이려나 싶었기 때문이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도 좋게 읽었다. 그런데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심지어는 그의 글 솜씨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라고 느끼기까지 했다. (오만� 寗朗纛�용서하시라) 스냅 사진의 참맛을 알려면 아직 몇 십년이 더 필요한 것일까?

 

 

 




<하늘의 뿌리>와 <새벽의 약속>은 근래 가장 기대하는 책이지만, 아직 각각 네 페이지만 읽었을 뿐이다. <자살의 이해>는 적어도 <한낮의 우울>보다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서 반사회적인 경향을 발견하고 있거나, 용기가 필요한 분들에게 권한다. <잠자는 거리, 가라앉은 지층>은 감수성 풍부했던 군인 시절부터 눈여겨보던 시집이지만, 조금 실망했다. 기대는 컸는데, 이렇게 올곧은 작풍일 줄은 몰랐다. <월광 게임>은 그나마 소득이었다. 에이토 대학 추리소설연구회의 이야기가 아직 두 편 더 남았다니,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인지도 모르겠다. <회복하는 인간>은 최고는 아니되 감동적 책읽기가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지만, 나는 이미 그의 팬이다. 어찌할 것인가.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일 뿐. 어쨌거나 즐! 겁게 읽었거나, 즐겁게 읽기 시작했거나, 즐겁게 읽고 있는 책들. 신년이고 해서 10권. 새해에는 좀 더 성실하길, 새해니까 멋대로 목표 삼아 본다.








 







"행복은 과정이다."

2007년에서 2008년으로 달력의 숫자가 바뀌었는데도 별반 느낌이 없다. 주변을 둘러봐도 비슷하다. 다가오는 새해를 반기고 새로운 희망을 품고 이야기하기에는 우리들 사는 게 너무 바쁘다. 여유가 없다. 아둥바둥 열심히는 살지만 가끔씩은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일까 행복의 의미를 다루고 있는 책들이 평소와는 다르게 의미 있게 읽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행복'은 진부하거나 혹은 사치스러운 단어다. 늘 노력은 하지만 잡을 수는 없는 존재. 손에 쥐고 있지만 조금만 잘못해도 깨지기 쉬운 유리병과 같다. 그래서일까 행복은 언젠가는 가져야겠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여유가 없는 나중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들이 지금 행복한가 아닌가만 생각해서는 항상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대신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지속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꿈꾸는 합격, 취업, 집장만이 이루어진다면 당연히 날듯이 행복하겠지만 그렇다고 그때까지 불만족하고 불행하게 살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때도 행복해야겠지만 오늘도 분명 행복해야 한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모레는 내일보다 더 행복해야 한다. 행복은 과정이기 때문이다.






"고맙습니다."

10대의 사춘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들 한다. 어른이 되기 전에 겪는 신체적, 정신적 홍역..하지만 그런 시기가 살면서 꼭 한 번으로 끝나는 건 아닌 것 같다. 어느 덧 서른이라는 나이가 훌쩍 다가와 있는데도, 아직도 갖가지 고민들과 선택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니 말이다.
때때로, 성장통을 겪게 될 때에 나보다 먼저 이 시기를 살아낸 이들에게서 조언을 구하곤 하는데, 산다는 것은 그냥 사는 일일뿐이라고,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 준 이 글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강금실- 여성 최초 법무부 장관으로 우리에게 유명한, 글 좀 쓴다는 그녀의 책을 들추면서 나는 단정짓듯 대부분 유명인의 자서전에 등장하는 잘난척(?) 또는 대단한 길로 가는 멘토링을 기대했나 보다.

뜻밖에도 인간적인 면모를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는 글들은 대단한 그녀의 타이틀에 대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참 솔직담백하고 친근했다.

종교든, 영화나 무용이든 여러 방면에 대한 풍부한 감수성을 담은 글들, 혹은 소신있는 생각들을 비추는 글들이나, 그녀 주변의 소소한 일상과 가치관에 대한 고민을 느낄 수 있는 글들은 대단한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사는구나 하는 묘한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어찌 생각해보면 살아가는데 기본적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 할 수 있는 인생의 의미나 가치 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니, 가르침을 받은 것 또한 확실하다.
 
지나고 나면 또 소멸되어 버릴 것들에 대한 고민은 이제 날리라고 말하는,..여전사의 면모보다는 보라색 스카프의 감성이 떠오르는 그녀의 조곤조곤한 얘기를 들어보시길.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본문 중에서)..

내 청춘의 흔들림을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음과 동시에, 나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연륜에서 나오는 지혜들을 젊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하는..나이들어감이 나에게 안겨줄 마음의 충만함을 살짝 기대해 본다.

표지를 보시라..활짝 웃고 있는 아빠, 미소를 머금은 두 아들..모두 힘겨운 듯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아래로 향한 엄마에게 엎혀 있다. 엄마의 소중함은 잊은 채, 매일 밥주고 청소해 주는 사람인냥 부려먹기만 하던. 세 부자에게 'You are Pigs'라는 간단한 메모 한 장을 남긴 채 떠나버린 엄마..그 뒤에 세 부자의 일상은 알 만하다. 
 
문장의 반복에서 오는 리듬감과, 곳곳에서 등장하는 귀여운 돼지그림, 남녀 역할에는 구분이 없다는 교훈 등등 재미있고 좋은 책인것만은 확실하나. 그 점은 간과하더라도 또 하나 떠오르는 건 어머니의 얼굴.. 부끄러움과 죄송함을 느낄 이들은 비단 나뿐만은 아니리라.
 
이 책 속의 세 부자와 다름없이 매일 엄마 뭐해줘 뭐해줘 외쳐대던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엄마 죄송해요.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나에게 이 책은 요리책이었을까?

그제와 어제와 겹치지 않는 점심 메뉴를 궁리한다. 퇴근 후에 텅 비어 있는 밥통을 보고 백미고압으로 설정하면 15분 만에 밥을 지을 수 있다는 용기를 얻는다. 아침 점심은 부실의 극치를 달리다가도 저녁이면 이를 보상받겠다는 심리인지 폭식에 빠지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그리고 남는 것은 탄식이다. ‘선두가 필요해!’
* 선두란, 만화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이 먹는 알약 형태의 간단한 식품.

시장기와 따뜻한 음식, 그리고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시간 앞에 행복을 느끼는 것이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의 음식행복지수는 얼마일까. 먹는다는 것이 행복이라기보다는 의무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탄식에 빠져 있다 용기를 주는 책을 만났다.

신선한 제철재료를 준비하고, 잘 정리된 레시피를 따라 음식을 완성한다. 그리고 맛있게 먹으려면 이 책은 적당하지 않을 수 있다. 그도 그럴것이 이 책의 베이스는 즉석식품이다. 하지만 이점이 내게는 더할나위 없는 강점이었다. 요리, 음식하면 떠오르는 준비된 재료, 30분 이상 소요되는 조리시간 같은 부담스러운 요소를 털어버리고 싶었으니까. 즉석식품 하면 떠오르는 차가움, 정성 결여 같은 편견을 사하여 주었으며 함께 음식을 먹을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먹는다는 것이 여전히 행복한 일임을 다시금 긍정하게 해준, 그래서 몹시 고마운 책. 




"I don't have time to go round."

문득 생각해보니 이맘 때면 늘 듣던 이야기가 영 뜸하다. "XX씨, 올해 계획은 뭐예요?" 하지만 나는 과거 어딘가에 묶어 둔 매듭도 풀지 못한 채였고 닥쳐오는 시간을 외면하느라 급했다. 무엇이고 밀면 밀려나오는 복숭아뼈 각질이나 마찬가지라는 건데.

물 밑에 내 몸을 적응시키기 위해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거나, 죽어가는 뇌세포를 살리기 위해 물구나무서기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to do thing' 리스트에 더 이상 적지 않기로 한다. 해 내면 기쁨, 못 해도 그만인 것은 그저 기억만 해 두기로 한다. 그보다는 내 몸과 마음을 감싸고 놓아주지 않을 공기와도 같은 무언가가 필요하니까.

'곁가지 쳐내기', 'SImplifying'이라고 하던가.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올해 소원이자 계획이다. 관계, 계발, 문제, 숙고, 과제가 거듭되었으며 나는 점점 희석되어 틀이 나인지, 내가 틀인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I'm still mad as hell, and I don't have time to go round and round and round. - Dixie Chicks 'Shut up and sing' 중

딕시칙스 언니들이 기꺼이 외친 것처럼 '돌아버릴 것 같은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이제 이래저래 허비할 시간이 없으니까', 직격타가 필요하다. 남은 시간은 길지만 또는 짧고, 사람은 약하지만 또는 강하지 말입니다.

1월 초순까지 격하지만 아름다운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애초 '아, 이들에 비하자면 나는...' 해보자는 불순한 의도에서였지만, 뼛 속부터 북러버인지라 대뜸 문장에 감탄하고 작가에 반하고...이러고 있다.

에밀 졸라, 엔도 슈사쿠, 산도르 마라이. 오래 된 돌멩이처럼 단단하고 익숙한 이름들. 구질구질하고 견딜 가치 없는 오늘의 사건사고 하나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라 비엥 로즈, 그럼에도 인생은 아름다워'로 만드는 이들이다. 욕을 퍼붓고, 불을 지르고, 죽이고 죽고 싶어하면서도 살아가는 <테레즈 라깽>에서, 혹은 도처에서 신을 찾다가 파문당하는 <깊은 강>의 신부 견습생에서, 형제같은 친구에게 아내를 빼앗긴 <열정>의 장군에서, 이생에서 즐거움을 느낄 의무 또는 이쑤시개같은 희망을 발견한다. 그러니까 2008년은 'Simplify everything'.





 

 






"간절하고도 무모한 희망에 대하여"

난독증에 시달렸다, 오래. 내 인생 최고의 단편들이 실려있는 <대성당>을 다시 읽었을 때조차 심드렁했고, 현미경처럼 지독한 디테일로 독자를 몰아가는 이언 매큐언의 작품들을 대했을 때도 큰 감흥을 받지 못했다. (물론 <대성당>과 <암스테르담>, <토요일>은 대단히 멋진 책들이다.) 책들이 예전만 못한 것인지 내 상태가 별로인 것인지 그후로 뒤적인 책들도 다 그냥저냥... 그러다 오래 미뤄두었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집어들었다. '---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찬사가 오히려 책에서 나를 밀어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이 그랬다. 머리맡에 쌓아두고 오래 방치되어 있던 상태. 기대감 없이 읽기 시작했다. 조금 읽다가 아니다 싶으면 바로 다음 책으로 넘어가야지.... 570여페이지가 넘는 장편 아닌가.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바로 그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어내렸고, 심지어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사실 굉장히 보편/통속적이고 예상하기 쉬운 이야기이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아프가니스탄의 두 여자가 어떻게 그 세월을 견뎌내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에게 구원이 되었는지에 대한... 마리암과 라일라-두 여자의 성장사와 첫사랑, 남편의 학대와 지독한 결혼생활, 하루하루 격변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정세가 간명한 필치로 지루할 틈 없이 그려진다.

매일매일 폭탄이 쏟아지고 여자라는 이유로 삶의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그 불모의 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희망의 꽃이 피어오를 수 있다는 '뻔한' 이야기에 감명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책에 진정한 고통이 배어있으며, 또한 슬프도록 간절하면서도 무모한 희망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어쩌면 '부서지고, 쳐다봐야 아름다울 것도 없지만, 아직도 저렇게 서있는' 벽 같은 존재가 아닐까. 모든 사람은 '자식'으로 태어나, 누군가의 벗이자 친구, 연인, 보호자로 죽는다. 바로 거기에 삶의 모든 의미가 존재한다. 지나치게 영리하게 씌여진 감이 있지만,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이야기가 미국에서 최고의 책으로 꼽혔다는 사실이 책의 외피에 어떤 혐의를 덧씌우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누군가에게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 두 여자, 아니 두 어머니의 이름을 정말 오래도록 잊지 못할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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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초 2008-01-18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은 책이 많네요.^ㅁ^

2008-01-18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까마귀소년 2008-01-19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기다렸어요~~

legows 2008-01-19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맹 가리 신간은 엄청나게 구미가 당깁니다.

dada 2008-01-20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성당은 두 분이나 추천했네요. 저도 이번 카버 신간은 김연수 작가의 호흡 때문일까, 카버가 꼽은 최고의 단편이 있어서 그런 걸까, 간만에 좋은 책 후회없이 읽고 감사한 마음까지 든 책입니다.

digitalwave 2008-01-21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2008년 신년 내맘대로 책읽기라기보다는 2007년 마지막 내맘대로 책읽기 같은 느낌이 납니다. 뭔가 신나고 흥분되고 두근거리는게 아니라, 버석버석하고 자기반성적이거나 한듯한... 모두들 혼돈의 오춘기쯤을 한참 지나고 있는듯한 말이죠. 읽는데 어질어질하네요. 다들 화이팅하시고 으쌰으쌰하세요! ^^ 그리고 새 편집장님도 빨리 첫 글 올리시기를~~~~~

돌돌 2008-01-25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맹가리의 새책에 앞서 새벽의 약속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자서전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급 호감 반전입니다. 이 시니컬하고 유쾌한 어조. 기대됩니다. 좋은 책들 많아서 좋은데요~
 

KBS 프로그램 'TV 책을 말하다'의 자문위원들이 선정한 2007년 올해의 책 리스트입니다. 김갑수(문화평론가), 김화성(동아일보 기자), 박경철(외과전문의. 경제평론가), 장석주(시인), 정재승(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 정끝별 (명지대 국문과 교수)-6명의 자문위원들이 올해가 가기 전 꼭 읽어보기를 권하는 책 6권을 만나보세요!


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2007년 12월 18일에 저장
구판절판
<사다리 걷어차기>, <쾌도난마 한국경제>의 장하준 교수가 처음으로 보통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집필한 본격 교양 경제서. 자유 무역이 진정 개발도상국에게도 도움이 되는지, 경제를 개방하면 외국인 투자가 정말 늘어나는지 등 우리 시대의 현안들에 대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책이나 영화 등을 소재로 유쾌하면서도 신랄하게 답해 준다.
만들어진 신-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29,000원 → 26,1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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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7년 12월 18일에 저장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이자 현대 지적知的 논쟁의 최전선에 서 있는 리처드 도킨스의 2006년 작. 출간과 동시에 과학계와 종교계에 파란을 일으킨 이 책은 2007년 현재도 뉴욕타임스 연속 베스트셀러를 차지하고 있다. 자연적 지성이 있다는 신 가설에서 신이 만들었다는 태초 우주까지, 창조론의 주요 쟁점들에 대해 지은이는 자연선택을 근거로 한 반박 이론을 제시하며 창조론의 허울과 실상을 예리하게 밝혀낸다.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2007년 12월 18일에 저장
구판절판
소설가 김훈이 <현의 노래> 이후 3년 만에 발표한 신작 장편.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갇힌 무기력한 인조 앞에서 벌어진 주전파와 주화파의 다툼, 그리고 꺼져가는 조국의 운명 앞에서 고통 받는 민초들의 삶이 소설의 씨줄과 날줄을 이룬다.
닥터스 씽킹
제롬 그루프먼 지음, 이문희 옮김 / 해냄 / 2007년 10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7월 1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7년 12월 18일에 저장

하버드 의대 교수이자 암전문의인 제롬 그루프먼 박사가 각 전공분야 최고의 의사들과 인터뷰한 자료를 토대로 하고, 자신의 환자 경험까지 덧붙여 만든 논픽션. 환자들이 직접 느끼는 증상보다 자신이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통증을 과대포장해 설명하는 이 시대에 어떻게 오진의 함정을 피해 나아갈 것인지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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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이 결정되었습니다. 알라딘에서는 문학동네와 함께 수상작가 김진규씨의 인터뷰를 최초로 공개합니다. 중학생 딸을 둔 주부이자 작년 10월 이전에는 소설을 써 본적이 없다는 작가와 지난 해 <캐비닛>으로 제 12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한 김언수 작가와의 '고요하고 낯선'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고요하고 낯선 화단

 

제 13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 <달을 먹다>의 작가 김진규 인터뷰 (진행 : 김언수)

 



 
 

 

이 소설을 읽고 내가 처음 한 일은 동네 이발소로 머리를 깎으러 간 것이었다. 갑자기 단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그래, 아주 단정한 모습으로 만나러 가는 거야.’ 이발소를 향해 걸어가면서 나는 나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그러니 이 소설은 내게 이발 충동을 불러일으킨 최초의 소설인 셈이다.

“어떻게 깎아드릴까요?” 시골 이발사가 물었다.

“최대한 단정하게 보이도록 깎아주세요.” 내가 말했다.

“짧게 깎아달라는 말씀인가요?”

“네? 그게 그런 뜻인가요?”

“그럼요.” 시골 이발사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네, 그럼, 그렇게.”

이발이 끝났을 때 나는 하사관 스타일의 군인이 되어 있었다. ‘아니 아저씨. 그래도 이 스타일은 정말, 너무해요’ 항변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시골 이발사가 “아주 단정하죠?” 하고 흡족한 듯 물었기에 그냥 꾸벅 인사를 하고 이발소를 나왔다. ‘이게 단정한 게 맞을 거야. 내가 단정함에 대해서 뭘 안다고.’ 스스로 위안을 하면서.

인생 자체가 단정치 못한 내가, 게다가 단정하게 살아보자는 결심도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왜 갑자기 단정해지고 싶어졌을까. 그것은 아마 이 소설의 작가가 가지고 있을 저수지 바닥 같은 적요가 두려웠기 때문일 거다. 저수지 바닥. 그것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그린 작가의 이미지였다. 그것은 또한 소설 속에 나오는 ‘너무 말이 없기로 작정한’ 묘연과 닮아 있다. 사대부가의 며느리로 한평생을 살면서 그 누구에게도 심중을 토해놓지 않았던 그토록 무서운 침묵. 나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사람들이 항상 두려웠다. 인터뷰어로서 나의 임무는 한 번도 동요한 적 없는 고요한 저수지 바닥을 흔들어 부유하는 갖가지 먼지들과 그 동안 쌓였던 퇴적물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일 텐데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헤어스타일마저 하사관이다. 아이, 정말.

문학동네 회의실로 들어선 그녀의 얼굴은 중학생 딸을 가진 엄마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동안이었다. 그러나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단단해 보였고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모습은 단호해 보이기까지 했다. 인터뷰를 위해 문학동네 회의실에 단둘만 남았을 때 나는 약간 떨고 있었다. 아마 그녀도 약간은 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몇 개의 싱거운 농담과 건조한 질문을 던졌고 그녀는 단답형의 몇 마디 말을 내뱉었다. 서먹서먹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최대한 양해를 구하고 맥주 두 캔을 마셨다. 그리고 겉으로는 씩씩해 보이지만 사실 기분장애환자여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굉장히 떤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러자 그녀는 처음으로 경계를 풀고 나를 향해 따뜻하게 웃어주면서 자신에게 우울증 병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웃음이 고마웠다. 문을 열고 상대방을 따뜻하게 받아주는 그런 웃음이 나는 항상 고맙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예전엔 우울증으로 아주 힘든 시절들이 있었죠.”

―혹시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이라는 책 읽어보셨어요? 저는 그 책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어머! 『한낮의 우울』은 제 바이블이에요. 그처럼 많은 줄을 그어가며 읽은 책은 여태 없었어요. 거의 외우도록 읽었죠. 그리고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책을 꼭 추천했어요.”

나도 그랬다. 나도 그 책을 몇 번이나 읽었고 지금까지 정서적으로 위험해 보이는(?) 네 명의 사람에게 그 책을 선물했다. 그 책은 내게 책이라는 것이 의학적인 측면에서 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 최초의 책이었다.

“책 속에서 우울증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의 사연들을 읽으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어떻게 내 맘을 이렇게 잘 표현할까. 어떻게 내 맘과 이렇게 똑같을까.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나와 같은 이유로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만 아픈 게 아니라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되었어요.”

―혹시 겪으셨던 우울증 삽화 중에 하나만 들려주실 수 있나요?

“한동안 미친 듯이 전자오락실을 드나들었어요. 거기서 테트리스니, 1945니, 갤러그니, 틀린그림찾기니, 보글보글이니 하는 게임들을 했어요. 그중에선 틀린그림찾기가 제일 재미있어요. 동전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죠. (웃음) 이상하게도 정신을 빼놓을 만큼 시끄러운 그곳이 아주 편안했어요. 한 일 년 정도 그랬던 것 같아요. 물론 지금은 돈 주면서 가라고 해도 못 가겠지만.”

앤드류 솔로몬에 따르면 우울은 사랑의 결여상태다. 우울증은 자신과 타인과 일과 생활에서 사랑이 사라져버린 삶이며, 그 무엇에서도 기쁨을 얻지 못하는 무의미함과 황폐함으로 가득 찬 쓸쓸한 내면이다. 그리고 건강한 삶을 회복할 에너지를 상실한 상태를 뜻한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생활에 대한 무의미한 감정과 외로움이다. 그러므로 우울증 환자에게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프로작이나 리튬 같은 약이 아니라 황폐해진 내면을 다독거려줄 사랑이다.

그런데 우울증 환자들이 느끼는 가장 큰 공포는 누군가에게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은 사실 굉장하다. 그들은 열렬하게 외롭지만 사람들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뜨겁게 사랑을 갈구하면서 동시에 사랑으로부터 맹렬하게 도망가는 것. 이 모순적인 삶을 그들은 견뎌야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광대가 되어 살며, 어떤 사람은 광인이 되어 떠돈다. 그러나 침묵하는 자는 이해받을 수 없고 광대는 오해받으며 광인은 배제되므로, 이 소설 속에서 얽히고설킨 많은 관계들처럼 문 앞에서의 머뭇거림은 죽음까지 지속되고 오해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 중증 우울증 환자였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속 인물들이 우울증에 감염되어 있듯이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도 그렇다. 침묵하는 묘연과 김희우에게서, 사람들의 온갖 비웃음과 모멸 속에 광대로 살아가는 류호에게서, 광인으로 떠도는 여문과 향이에게서 나는 우울이라는 비극적인 병을 본다. 그래서 아마 작가는 이 소설의 인물들 중에 누구와 닮은 것 같냐는 나의 질문에 모두와 조금씩 닮아 있다고 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원래 이 소설을 쓸 때 제목은 ‘푼’이었어요. 푼은 아주 적은 양을 의미하는 거잖아요. 저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항상 푼 단위만큼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간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는 오해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고 항상 외로운 거죠. 소설 속에서 향이는 여문이 자신을 사랑하는지를 모르죠. 여문은 향이가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은 그렇게 모르는 채로 죽어갑니다.

―속내를 잘 안 드러내는 스타일이시죠?

“네, 말이 별로 없는 편이에요.”

―그럼 인터뷰 어떻게 하죠? (웃음)

“사실 저는 말을 잘 못하는 편이라 상대방에게 아무리 화가 나도 할말을 또박또박 다 하지 못하고 대충 얼버무리는 타입이에요. 답답함이 습관이 되어 있죠. 그런데 편지를 쓰거나 글을 쓰면 이상하게 내용이 점점 독해져요. 걱정입니다.”

―저랑 정반대군요. 저는 글을 쓰면 유순해지는데 말을 하면 독설이 되거든요.

 

―문학동네소설상으로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나셔서 작가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독자들은 작가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또 뭐 하고 살았는지 이런 걸 더 궁금해하더라고요. 사실은 소설을 읽다보니까 제가 더 궁금해진 거지만.

“경기도 오산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어요. 아주 시골이었죠.”

―소설을 보면 한옥에서 자랐을 것 같은데요?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엄청난 한옥은 절대 아니고요. (웃음) 아주 작은 한옥이었어요. 지붕도 낮고, 덩달아 담도 낮고, 작은 뜰이 있는 시골 한옥이었죠. 문을 열면 바로 흙길이 있고, 그 앞에 논이 있는 그런 집 말이에요. 집 주위로 국화가 아주 많아서 사람들이 우리 집을 ‘국화집’이라고 불렀대요. 그런데 어쩐지 제가 자라면서부터는 그 많던 국화들이 다 사라지고 그 자리에 채송화며 나팔꽃 같은 풀꽃들이 자라기 시작했어요.” 

―소설에 보면 발뒤꿈치로 밟아 누룩을 만들고 명주천으로 닦은 풀잎에 이슬을 모아서 만든 국화주가 나오던데 정말 한잔 얻어먹고 싶은 술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게 다 연유가 있는 거군요.

“그런데 저는 사실 술을 못 마셔요. 국화주를 담가본 적도 없고요.”

―엥?

“대신 국화주 빛깔은 아주 좋아해요. 사실 국화과의 꽃들이 굉장히 다양하거든요. 특히나 가을엔 웬만하면 국화라고 해도 아주 틀리지 않을 정도니까요. 그러니 당연히 국화주 담그는 방법도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한 번도 담가본 적은 없어요.”

―대가족이었을 것 같은데 가족관계는?

“이남 사녀 중에 막내인데 굉장히 늦둥이에요. 아버지가 쉰 살에 저를 낳았어요. 바로 위의 언니하고 아홉 살 차이가 나고요. 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다니면 시골 어른들이 손녀냐고 항상 물어볼 정도였죠. 아버지는 공무원이셨는데, 몸이 아프셔서 일찍 퇴임을 했어요. 그후로 아버지는 대서소를 하시면서 소일하셨어요. 아버지가 글씨를 아주 잘 쓰셨거든요. 붓글씨도 잘 쓰시고 펜글씨도 잘 쓰셨죠. 어쨌든 그때부터 가족의 생계는 언니, 오빠들이 책임지게 되었어요.”

 

―소설을 보면 아버지에 대해 애증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아버지로 인해 항상 그늘이 있었어요. 어린 마음에 늙고 아픈 아버지가 속상했거든요. ‘효’라는 것이 원래 타고나는 건가봐요. 그런 면에서 저는 참 못된 딸이었죠.”

 

이 소설 속에는 ‘너는 나로 인해 죽는다’라는 부채의식이 많은 인물에게서 보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런 위험한 부채의식을 가진 사람을 별로 만나본 적이 없어요. 보통은 ‘너 때문에 내가 못 산다’라는 식 아닌가요?

“아무래도 가족사에서 출발한 것이겠죠. 엄마는 마흔에 저를 낳으시고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 하셨어요. 그래서 늘 아프셨죠. 엄마가 아프실 때마다 혹시 나를 낳아서 엄마가 아프게 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저희 언니와 오빠들은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었는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일찍 일을 시작했어요. 집에서 저 혼자 누린 호사가 얼마나 큰지 몰라요. 게다가 언니, 오빠들이 돌아가면서 한 번씩 제 학비를 내야 했어요. 거의 저를 키우다시피 했죠. 저는 사는 게 늘 미안했어요. 엄마가 아픈 것도 미안하고, 언니, 오빠들이 고생하는 것도 미안하고, 공부를 못하는 것도 미안하고, 약하고 비리비리한 것도 미안하고, 상업고등학교에 가지 않고 멀리 수원까지 가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닌 것도 미안하고, 대학을 졸업했으면 일도 좀 하고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한 것도 미안하고, 그리고 결혼한 다음해에 바로 애기 낳고 그뒤부터는 육아에 신경쓴다고, 참……

 

―한국외대 이란어과를 나오셨는데, 이란어과를 나온 소설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굉장히 낯선 느낌이 들었어요. 왜 이란어를 전공할 생각을 하셨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떠밀려 들어간 느낌이 들어요. 선지원후시험 제도의 희생양이랄까. 붙고도 남는다, 하는 곳에만 원서를 낼 수 있었으니까요. 안 그러면 담임선생님이 원서를 안 써주셨거든요.”

―그럼 원래는 무슨 과를 가고 싶었나요?

“꼭 가고 싶었다기보다는 그냥 호기심에 문예창작과를 알아보기는 했어요. 하지만 이런 거 저런 거 따질 형편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대학 시절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시간이었어요. 사실 이슬람세계가 굉장히 매력적이거든요.

―소설은 언제부터 쓰기 시작하셨죠?

“작년 10월부터요.”

―네? 그전에는 쓰신 적이 없고요?

“네. 그전에는 단편소설도 시도 써본 적이 없어요.”

―이런 얘기 들을 때마다 참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보통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한 십 년 우울한 문학청년 시절 보내고, 신춘문예 때문에 또 몇 년 우울한 크리스마스 보내고, 그러면서 잔뜩 패배의식에 절어 있다가 겨우 나오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처럼 어느 날 갑자기 필받아서 한 방에 나오시면…… (웃음)

“우울한 크리스마스요?”

―신춘문예 당선통보가 보통 크리스마스 전에 나거든요.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어요. 그런데 글을 잘 못 썼어요. 중고등학교 때도 별 소질이 없었어요. 작가들을 보면 벌써 중고등학교 때 두각을 나타내잖아요. 그게 아니라도 백일장에서 상을 타오거나 하다못해 국어선생님에게 칭찬을 받거나.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저는 그런 것도 없었어요. 어쩌다가 선생님에게 글을 내면 빨간 펜으로 줄만 잔뜩 그어져서 돌아오곤 했죠. 어릴 때 저희 집 다락에 책이 아주 많았어요. 깨알 같은 작은 글씨에 세로줄로 활판인쇄되어 있는 책들이었는데 법전에서부터 난중일기니 조선왕비열전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불문한 책들이었죠. 나중에 이사를 할 때 보니까 종이가 부스러질 정도로 낡은 책들이었는데, 구석에 앉아 그 책들을 이해도 못 하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읽으면서 나도 작가가 되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죠. 하지만 글쓰기에는 별로 소질이 없는 것 같아서……”

그럼 작년 10월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왜 갑자기 소설을, 그것도 단편도 아니고 장편을?

“단편을 쓸 생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에요. 근데 도저히 진행이 안 되더군요. 남편이 언젠가 그런 말을 했어요. 제가 매일 책만 붙들고 사니까, 쏟아내지 않고 그렇게 계속 구겨넣기만 하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고. 정말 그랬나봐요. 할말이 많아서 단편으로는 부족했다, 뭐 그런. 그리고 갑자기 글을 쓰기 시작한 건, 표면장력의 끝을 보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한 방울만 더 얹으면 바로 터질 것 같은 위태로움을 제 안에서 느꼈던 거죠.”

 

―저는 틈틈이 쓰는 장편소설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어쩐지 장편소설은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휘몰아쳐서 써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한 아이의 엄마이고 또 주부이니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썼을까 궁금했습니다.

“말 그대로 대중없이 써요. 아침에도 쓰고, 밤에도 쓰고, 설거지 끝내고 쓰고, 드라마 보다가도 쓰고, 정말 틈나는 대로 써요. 가끔 컴퓨터를 한 번도 못 켜는 날도 있거든요. 그런 날에는 주로 수첩에다 정리를 해두지요. 아무래도 남편과 딸에게 피해가 좀 있었을 거예요. 대중없이 틈나는 대로 쓴다지만 그 틈을 일부러 만들기도 했으니까요.”

―소설에는 조선시대 풍속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런 쪽으로 관심이 많으셨던가봐요?

“예전부터 그런 군내나는 책들을 좋아했어요. 체질이죠. 고등학교를 수원에서 다녔는데 정조가 세운 화성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거든요. 게다가 국사선생님이 얼마나 재미있고 좋으셨는지 역사에 대한 관심이 그때 많이 생겼어요. 그리고 『조선의 뒷골목 풍경』이라는 책 이후로 기죽지 않으면서 읽을 수 있는 역사 관련 책들이 굉장히 많이 쏟아져나왔어요. 그 한 권, 한 권이 다 소설의 자료가 되었지요.”

 

조선시대를 소설의 시대적 배경으로 설정한 이유가 있다면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조선시대라 하면 온갖 제약과 규약이 여러모로 가해졌던 시대 아니겠어요? 신분의 차이만 해도 그렇고 후기 쪽으로 접어들면 남녀의 차별도 갈수록 심해지니까요. 그러니 그 시대 사람들은 사회에서 학습된 방식으로 살아야 했겠죠. 당연히 차마 하지 못한 말이며 감히 하지 못한 행동들이 많았겠죠. 그 시대에 비한다면 오늘날은 훨씬 자유로워진 것 같지만 소통이라는 측면에선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아요. 소통의 부재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별다를 게 없다는 걸 보여주려고 옛 시절을 빌려왔죠. 그래서 사실 처음에 이 소설을 쓸 때는 퓨전을 생각했어요. 시대를 구분하지 않고 넘나들며 양쪽을 다 아우르는 소설을 쓸 계획이었어요. 하지만 어쭙잖은 시도가 되어버렸죠. 한쪽에도 충실하지 못하면서 양쪽을 다 품는다는 건 말이 안 됐으니까요. 그래서 수정하는 데 어마어마한 시간을 들여야 했어요. 이중의 고통이었죠.”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이 작가는 묘연과 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묘연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도 자주 받았고요.

“네, 아무래도.”

―묘연을 빼고 나면 누구와 가장 많이 닮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여기 나오는 인물들 모두와 조금씩 닮아 있겠죠. (웃음) 그런데 굳이 꼽으라면 후인과 설희를 반반씩 닮은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제가 한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에 자식을 버리고 사랑을 찾아 떠나는 후인 같은 여자에게 깊게 동의해줄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후인의 삶을 끝까지 따라갈 수 없었죠.”

―누군가는 소설이 그 시대의 도덕과 싸우는 일이라고 하던데요. 그러니까 후인에게 조금 더……

“그런 면에서 제가 좀 소심한가봐요. CCTV를 놓고 시민의 안전과 사생활 보호가 첨예하게 대립하면 저는 안전 쪽에 손을 들어주는 편이거든요. 그 말은 제 인물이 도덕과 금기의 경계에 서 있다면 저는 아마 도덕을 선택할 거라는 뜻이겠죠. 이거 어째 동문서답의 느낌이 오는데요?” 

독자들에게 『달을 먹다』가 의미하는 바를 들려주신다면?

이해와 오해 사이의 간격이라고 하면 될까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진실을 가지고 살아가죠. 한 가지 사실을 놓고도 입장과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 누구도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이 될 수는 없는 거거든요. 저는 그 진실의 개별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영향받은 작가가 있었다면 누구를 꼽고 싶습니까?

“영향은 무수히 받았죠. 그러면서 제 능력에 절망했고요. 어쨌든 제게 충격을 준 작품들은 분명히 있어요. 우리나라 작가들의 경우, 우선은 최명희의 『혼불』이 그랬고, 제 정서를 들었다 놨다 한 작품은 김훈의 『칼의 노래』죠.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는 학창 시절에 구라에 대한 하나의 교과서가 되어주었고, 단편집으로는 이문구의 『나는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하고 김형경의 『단종은 키가 작다』가 인상 깊었어요. 그리고 외국작품으로는 알바니아 작가인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하고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그리고 쥘리앙 그라크의 『시르트의 바닷가』를 들고 싶네요. A.J.크로닌도 말해야 할 것 같기는 한데 그의 소설 내용이 기억이 안 나서……”

―작가들에게는 대체로 소설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소설을 들려주신다면?

독립운동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내 안에 쟁여진 무수한 감정들이 글자 한 자 한 자의 등에 업혀 나로부터 독립을 하는…… 그게 잘되면 만세를 부르는 거구요.

앞으로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가요?

글 잘 쓰는 작가요. (웃음) 영화를 보면 감독들마다 스타일이라는 게 있잖아요. 드라마도 그렇구요. 그 스타일 때문에 마니아도 생기고 안티도 생기고…… 그런 저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싶어요. 보편적이고 무난해서 편안하기보다는 무언가를 건드려서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스타일.   

 

―저는 소설가가 21세기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시대에 소설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겠지만 저는 소설가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개념으로 봅니다. 하지만 될 수 있다면 소비자의 호불호에 휘둘리는 수동적인 작가가 아니라 오히려 소비자가 눈치를 봐야 할 정도의 주체성을 가진 작가가 되고 싶어요. 물론 그러려면 그만한 힘을 갖춰야겠죠.

 

이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사랑은 대부분 치명적입니다. 죽거나 불구가 되거나 하는 식이죠. 원래 사랑이 이렇게 무서운 건가요?

저는 사랑은 치명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치명적이지 않으면?

“사랑이 아닌 거죠.”

―이렇게 위험한 정서를 가지고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결혼이라든가.

“그것은 생활이겠죠. 사랑이 우리를 흔들고 간 다음에 남아 있는 것. 자신이 가진 성격대로 살아가야 하는……”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으셨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조금 무섭네요. 작년에 어떠셨나요?”

―벌벌 떨었죠. 무섭잖아요. 갑자기 세상에 나가는 거.

“그 기분 정말 이해가 될 것 같아요.”

인터뷰를 정리하는 며칠 동안 나는 밤마다 그녀의 블로그에 들어가 이것저것을 둘러보고 나왔다. 물론 도둑처럼 살금살금 들어가서 흔적도 없이 나온다. 그녀의 집엔 인형을 껴안고 잠을 자는 왈왈양이라는 앙증맞은 강아지가 있고, 그녀가 키우는 꽃과 새싹채소들이 있고, 전업주부의 하소연과 푸념이 있다. 나는 그곳에서 꽃기린, 제비꽃, 석류꽃, 능소화 같은 꽃들을 본다. 나는 웰빙과 청결을 삶의 모토로 삼고 있어 더러운 이불에서는 결코 잠을 자지 않고 몸에 좋다면 냄새 지독한 한약도 마다하지 않는 왈왈양의 일기를 읽고, 밥心이라는 폴더 속에서 요리의 실패사들을 읽으면서 ‘음 저 타이밍에 저걸 집어넣으면 확실히 실패하는군’ 하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리고 소설에서 건축학까지 두서없이 읽어대는 활자중독자의 독서일기를 읽는다. 블로그 속 그녀의 글들은 센스 만점이다. 그녀는 홈쇼핑에서 만난 상품에게 ‘솔직하게 말해봐, 내가 너로 인해 적어도 상식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지’를 묻고, 전업주부의 가사노동 임금이 월 백육십칠만원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잊을 만하면 신문에서 떠들어대는 것에 정부 차원의 음모가 있는 것이 아닐까 갸우뚱거린다. 확실히 그녀의 블로그는 내가 읽은 그녀의 소설과 다르고 내가 만난 그녀와도 다르다. 그래서인지 어째서인지 나는 깔깔거리면서 블로그를 빠져나올 때마다 그녀의 다음 소설은 『365일 반찬 백과의 비극』이나 『웰빙 강아지 왈왈양의 투쟁사』같이 엉뚱하고 기발한 소설일지도 모른다고 혼자 중얼거리곤 한다. 


* 인터뷰 및 정리 : 김언수

1972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02년 진주신문 가을문예공모에 단편 「참 쉽게 배우는 글짓기 교실」과 「단발장 스트리트」가,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캐비닛>으로 제 12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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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07-11-23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을 먹다.. 제목이 인상적이네요. 궁금하네요.

러블리아련 2007-11-25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동네수상작들은 하나같이 독특한 시선의 글들이 많은 것 같아요.기대됩니다.

진달래 2007-12-06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상 받는 글 중에 '달'이 많네요. ^^;;
꼭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이 작품. ^^
성함과 얼굴이 좀 안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글로 풀어낸 대화가 참 이름답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따귀가 아니라 정말 뽀뽀를 해주고 싶었던 김언수 작가님,
절대 하사관 같지 않으세요~!
<캐비닛>에 나왔던 사진에 비하면 정말 더 여유있어 보이시는데요. ^^
김진규 작가, 앞으로도 눈여겨 볼게요. ^^
근데 김언수 작가님, 다음 작품 기다리고 있어요~ 언제 나와요? ^^;;

모리 2007-12-12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시네요. 작년 10월부터 글을 써서 화려하게 등단하다니...작가 자체가 흥미진진한 소설 같습니다. 인터뷰 재미있게 읽었어요~!

상그레 2008-12-21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작가의 뒷이야기를 듣는 재미는 정말 쏠쏠합니다.
작가의 얼굴이 책에 중첩되는 느낌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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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7-11-09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라인드 스팟... 눈에 띄네요 :-)

달팽이 2007-11-18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중에 한 권이라도 읽어 봐야 겠네여. 추천 감사합니다. ^^

미야 2007-12-01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책도 몇 권 보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