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제15회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자 김기호 인터뷰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서

인터뷰 : 강지희 


 등단 후, 문단에서 작가들을 만날 때면 가끔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글이 사람을 닮는 걸까, 아니면 사람이 글을 닮는 걸까. 맞은편에 앉아 있는 작가의 얼굴과 몸짓, 목소리에서 그 사람이 썼던 문장들이 지나갔다. 그후로 글을 읽고 매혹을 느낄 때면, 작가가 더 궁금해졌다.

 제15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피리 부는 사나이』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한 남자가 대학에 들어서며 호된 입사식을 거치는 이야기였고, 불수의근처럼 어찌할 수 없는 사랑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였으며,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테러와 실종되는 사람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타로카드를 선택했을 때, 선택자의 질문이나 함께 뽑힌 다른 카드와의 맥락에 따라 그 카드의 의미가 무수히 달라지는 것처럼 소설은 다각도로 다가왔다.

 ‘피리 부는 사나이’에 대한 전설을 매력적으로 재해석한 21세기 판본 『피리 부는 사나이』는 얼핏 세계의 굵직한 테러의 배후를 찾아가며 이들을 문제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동안 어떤 테러에도 무감했던 우리를 질책하며 들이받는다. 어떻게 당신은 사람들이 사라져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왔지? 이 세계는 이상해. 어쩌면 당신도 이상할지 몰라. 박진감 있게 서사를 끌어나가면서도 명쾌한 결말로 쾌감을 주기보다는 피리 부는 사나이의 존재를 다시 감추기를 선택한 신중한 이 이야기가 최근에 읽었던 어떤 작품보다 더 많은 말을 걸어왔기 때문에 나는 황홀하게 어지러웠다.

 인터뷰를 하기로 한 날은 낙엽의 쓸쓸함과 단풍의 화사함이 적절하게 교차하는 11월 초였다. 약속시간은 세시였지만 그보다 빨리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 같아 버스정류장에 내리자마자 종종걸음을 쳤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구두 옆에서 낙엽이 춤을 추며 맴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휙 돌아보자 멀찍이서 멋쩍어하며 걸어오고 있는 한 남자가 왠지 그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감은 맞았다. 알고 보니 우리는 같은 버스를 타고 왔던 것이다. 약속장소에 다다르기도 전에 우연히 마주쳤다는 데서 피어난 따뜻한 공감으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문학동네소설상’이라는 커다란 관문을 통과하신 걸 축하드려요. 어릴 적부터 꿈이 소설가가 되는 것이었나요?

 그렇지는 않았구요. 오히려 중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친구들과 밴드를 하고 기타를 쳤기 때문에 음악에 대한 생각이 더 많았어요. 꽤 오랫동안 고민했던 것 같아요. 음악과 문학의 길 사이에서요.

 ―총 들고 찍은 어린 시절 사진을 보니까, 장난꾸러기였을 것 같아요. 유년 시절은 어땠어요?

 초등학교 시절에는 애들을 끌고 다니는 골목대장 스타일이었어요. 그런데 철이 들면서부터는 좀 조용해진 것 같아요. 고등학교 올라갈 때, 같은 중학교를 나온 친구들이 거의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뒤쪽에 앉아서 자는 편이 되었죠. 그래도 시험을 보면 점수는 잘 나오니까 아이들이 의아해했어요. (웃음) 아, 그냥 뒤쪽에서 같이 자던 친구들보다는 조금 더 잘 나온 거예요.


 ―대학을 들어가기 전에도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아요.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었어요. 어머니께서 책을 즐겨 읽으셔서, 가끔씩 헌책방에 가시면 당신 책 외에 제 책도 한 아름씩 사들고 오시곤 했죠. 어린이용으로 나온 명작집 같은 것들도 많이 읽고. 그런데 작가들 인터뷰 보면 고등학교 때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했다는 식의 이야기도 많잖아요?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제가 고등학교 때 읽은 걸 생각해보면 그런 것에는 한참 못 미치니까 문학에 관심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좀 부끄럽죠. 그렇다고 관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때 읽었던 책 중에서 유달리 좋아했던 작품이나 동경했던 소설가가 있었나요?

 그때 읽었던 작가는 아니고요. 대학 들어오고 나서는 동아리 밴드 활동을 하느라 매일같이 연습하고 공연 준비하고 공연하고 술 마시는 생활을 계속했어요. 그때는 아마 일 년에 책을 세 권도 안 읽었을 거예요. 수업에 내야하는 과제도 제대로 안 냈으니까. 성적도 완전 엉망이고. 그때는 당연히 이런 게 멋진 거다, 생각을 하고. (웃음) 그렇게 보내다가 스물세 살 때 공익근무를 하면서 다시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어요. 이때부터 문예지도 보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죠. 아무것도 모를 때라 오히려 뭘 읽어도 나도 이만큼은 쓸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그때 처음 보르헤스를 읽고 감탄을 넘어서 충격을 받았죠. ‘아, 이건 도저히 누구도 흉내낼 수가 없겠구나’ 생각했어요.

 ―사실 프로필을 보기 전에 작품을 먼저 읽고 있던 중이었는데, 문학이나 철학을 전공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문학과 철학을 가지고 설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지요. 대학에 들어갈 때 어떻게 전공을 선택하시게 됐나요?

 저는 경제나 경영학과에는 관심이 없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인문학부를 지원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별생각 없이 국문과를 선택한 거였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잘한 선택이더라구요. 무심코 선택했는데 제가 흥미 있어하는 분야였던 거죠. 그리고 제2전공은 원래 철학이 아니라 신문방송학이었어요. 그런데 철학수업을 듣다보니 국문학이나 신문방송학에서 나오는 얘기들이 상당 부분 철학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실용학문인 신문방송학에 비해 철학이 좀더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얘기한다고 느꼈죠. 그게 좋아서 제2전공을 철학으로 바꿨어요.

 ―문학과 철학을 전공하면서 제일 크게 느꼈던 즐거움은 어떤 것이었나요?

 누구나 내가 왜,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을 하잖아요. 그리고 삶의 자세나 가치관을 가질 때, 그것을 설정하기 위해서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하구요. 그 근거를 찾기 위해서는 뭔가 알아야 하는데, 그 앎에 가까이 갈 수 있게 도와줬던 것 같아요.

 ―그런 즐거움 이면에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가지는 고민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예. 저 자신은 수업을 들으면서 즐거웠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해주더라구요. 지희씨도 그러지 않았어요? (함께 격하게 동감) 하나 정도는 실용적인 전공을 하라는 충고도 많이 하고. 그래도 별로 그런 말들이 신경쓰이진 않았어요. 부모님도 속으로는 걱정을 하셨을지 모르지만,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저를 신뢰해주셨고.

 ―작품 속에 미디어 아트 전시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에 대해서도 여러 번 언급됩니다. 미술에 대해 평소에 관심이 많으신가요.

 오히려 미학 쪽에 관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것은 왜 아름다운 것이고, 이건 아닐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고, 그래서 책을 읽고 수업을 듣기도 했죠. 그 미디어 아트 전시는 당시에 실제로 보러 가서 경험했던 거예요. 고흐는 다들 좋아하는 화가고……

 ―기존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자들과 비교해보면 어린 나이에 등단한 편이신데, 등단작이 천 매가 넘는 장편소설이라는 것이 놀랍습니다. 아주 긴 호흡이 필요한 일이었을 텐데요.

 학생일 때는 수업도 있고 과제다 시험이다 해서 흐름이 끊길 때가 많았죠. 몇 달 방치해놨다가 나중에 다시 보면 이건 뭐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그럼 지우고 다시 쓰고, 뭐 그랬죠. 졸업하면 좀 나아질까 했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더라구요. 그래도 이 작품을 마무리해야 뭐든 다른 작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작년 말부터 올해 8월 말까지는 계속 여기에만 매달렸어요. 그런데 제가 한번 꽂히면 끝까지 가는 버릇이 있어서……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도 앞뒤 줄거리가 궁금할 정도로 흥미로우면 찾아서 처음부터 다 봐야 되거든요. 그런 게 소설 쓰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하죠.

 ―주로 어디에서 글 쓰는 동력을 얻으시나요?

 글 쓰는 일이 즐거울 때는 별로 많지 않아요. 오히려 도망치고 싶을 때가 훨씬 많아요.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좋은 반응을 듣거나, 드물게 스스로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면 힘이 나죠.

 ―소설을 쓸 때 제일 신경쓰는 것은 어떤 부분인가요?

 독자로 하여금 그럴듯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현실을 그리든 환상을 그리든. 그러기 위해서는 디테일한 요소들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사건의 인과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나, 인물에게 일관된 성격을 부여하는 것, 등등. 말로 하자면, ‘이건 말이 안 되잖아’라든가 ‘얘 갑자기 왜 이래’ 같은 말을 피하고 싶은 거죠.

 ―사실 작품의 주인공이 저와 같은 04학번이라, 2004년에 대학에 입학하며 벌어지는 일들을 이야기할 때 그 당시를 떠올리며 감정이입이 많이 됐었어요. 이 소설 속에서 특별히 애착이 가는 인물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읽어본 주위 친구들은 소설의 주인공에 저를 많이 대입시키려고 하는데, 저는 소설 속 인물들 대부분에 제 모습이 조금씩 투영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주인공이나 우진은 물론, 이반, 수연, 정현 같은 인물들 속에도 모두 저의 일부가 존재해요. 그래서인지 특별히 애착이 가는 인물 하나를 꼽기는 어렵군요.

 ―소설을 읽으면서 예기치 않게 오해를 사거나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강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도덕의 차원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제가 생각하는 건 굉장히 상식적인 거예요. 내가 상처를 받고 싶지 않은 만큼, 다른 존재에게도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 그런데 이 세계에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이 생기잖아요. 그걸 깨달았다가도 잊어버리고. 그러기를 반복하면서 회의를 느끼고…… 아마 그런 고민들이 무심결에 많이 표현됐던 것 같아요. 하지만 결국 요즘도 마찬가지예요. 깨닫고 잊어버리고, 또 후회하고……

 ―그런데 실제로는 00학번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소설에서는 2004년으로 시간을 옮겨놓으신 건가요.

 9·11테러 이후 제일 크고 중요한 테러 사건이 마드리드 열차 테러와 런던 지하철 테러 사건이에요. 그중에서도 런던 지하철 테러 사건은 9·11 테러 이후 자본주의의 중심이라고 할 만한 도시가 또 한번 대규모 자살 테러의 표적이 된 사건이었고, 범인들이 같은 영국 시민이었다는 사실 또한 큰 충격을 주었죠. 소설의 시간적 배경을 2004년부터 2005년으로 설정한 것은 주인공이 런던에서 이 사건을 겪게 하기 위해서, 라는 이유가 커요. 2004년은 우리나라에서도 충격적인 사건이 많이 벌어진 해이기도 했고요. 실제 런던 지하철 테러는 2005년 7월에 일어났는데, 소설상의 날짜는 조금 달라요. 마드리드 열차 테러도 그렇구요.

 ―소설 속에도 나오지만 2004년에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탄핵소추안 가결이 있었고, 유영철 연쇄살인사건을 비롯한 강력범죄들이 난무했지요. 악의에 찬 광기와 분노 그리고 공포와 의심이 도시의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던 시기라고 쓰셨는데요. 이 사건들에 대한 충격도 있지만, 그것보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게 진행되는 일상에 대해 일종의 괴리감과 분노를 느끼셨던 것처럼 느꼈어요.

 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2004년이 다른 해보다 특별히 문제가 많았던 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모르는 동안에도 사건들은 끊임없이 발생하니까요. 어쩌면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을 수도 있고……

 ―조금 조심스러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200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들은 고통스러운 역사를 직접적으로 경험한 세대는 아닌 것 같아요. 전쟁이나, 민주화투쟁과 같이 한 시대를 묶어주는 깊은 상처를 체감했다고 보기는 힘들죠. 실제로 젊은 작가들 중에는 극도로 추상적인 세계를 구현하며 실험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도 있고요. 이번 당선작을 읽으면서 사회역사적인 맥락을 재현하겠다는 욕구가 뚜렷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글을 쓰면서 그런 고민을 많이 하셨나요.

 작가도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인 이상 현실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죠. 표현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아까 말씀드렸던 9·11테러나 런던 지하철 테러 같은 것들은 먼 곳에서 발생했지만 전 세계가 동시적으로 충격을 경험한 사건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사건이 언제라도 이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 규모는 다르지만 유사한 폭력들이 지금 바로 옆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요즘 관심을 갖고 바라보고 있는 문제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논리로 사람을 설득하는 것의 어려움, 불가능성 이런 걸 많이 생각해요.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아무리 이성적으로 근거를 대서 이야기해도, 누군가를 설득하기란 굉장히 힘들다고 느꼈어요. TV에서 하는 <100분 토론> 같은 것들을 봐도, 사실 나와서 각자 자기 이야기만 하다 끝나잖아요. 그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고, 친구들과 모여서 이야기할 때도 밤새 어떤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도 결국 서로 다르다는 것만을 확인하고 끝날 때가 많죠. 그러니까 논리가 아니라 감정, 마음에 와 닿는 뭔가를 통해서만 사람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고민이 프롤로그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아요. 어느 날부터 귀마개를 하지 않았을 때도 소리가 사라지기 시작하는데, 그때 주인공은 사람들이 내게 들려주기 위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떠들고 싶기 때문에 이야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하잖아요.

 그렇죠. 지금 말한 설득의 문제,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소통에 대한 문제겠죠. 소통에 대한 문제도 그렇고, 소설 속에서 피리 부는 사나이를 찾으려는 것도 그 가능성이 열려 있을 뿐 그것이 정말 이루어질지 어떨지는 확신할 수 없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것을 하려는 의지라고 생각해요. 물론 의지와 결과는 대개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그에 대한 의지나 희망마저 없다면 우리 인생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잖아요.

 ―친구가 축제에 초대해줘서, 제가 일학년 때 실제로 서강대 축제에 가서 타로카드점을 본 적이 있었어요. 작품에서 주인공 ‘나’와 수연이 학교 축제 때 타로카드점을 보는 장면은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으로 나오죠. 타로카드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셨나요?

 사실 타로카드를 잘 알거나, 거기에 특별히 관심이 많은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점이라든가 꿈 같은 초현실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재미있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순 속에서 살아가죠. 예를 들어 기독교를 믿으면서도 점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저 자신도 소설 속에 나오는 말처럼 논리와 과학을 더 신뢰하면서도 꿈을 꾸면 그 꿈의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하거든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럴 거예요. 그렇게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막연한 모순 속에서 살아가다가도, 때때로 지극한 우연의 일치나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선명한 깨달음이 올 때가 있잖아요. 그 꿈이 이런 뜻이었구나, 그 점이 이런 의미였구나 하고 말이에요. 물론 실제로 그런 의미가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죠. 그 역시 의미 부여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만으로도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인생에 드물게 찾아오는 순간이니까.

 ―그럼 운명 같은 것에 대해서 믿는 편이신가요?

 기본적으로 절대자나 신에 대한 믿음은 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과연 내가 누구에게 기도를 하는 것인가’ ‘내가 운명을 믿는다면 이 운명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하는 생각도 해요. 엄밀히 말하면 믿을 수 없으면서도 믿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작품 속에서 인물이 런던에 가는데, 왠지 작가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영국으로 여행이나 어학연수를 가신 적이 있나요?

 그렇게 느끼셨다니까 굉장히 기분이 좋은데, 사실 가본 적은 없어요. 여행도 많이 다녀보진 않은 편이에요.

 ―작품명이 ‘피리 부는 사나이’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독일 전설에서 모티프를 따오신 건가요?

 피리 부는 사나이 자체가 굉장히 기묘한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이 피리 부는 사나이 전설에 대해서 아베 긴야라는 사학자가 연구한 책이 있어요. 그 책을 보면 이 전설이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이야기이며 사료도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사료들을 가지고 여러 학자들이 각기 다른 학설들을 내놓은 걸 정리해놓았더군요. 전설 자체보다, 거기에 대해 사람들이 다양한 추측을 하는 것이 흥미로웠어요. 그래서 저도 생각해보게 된 거죠. 사라진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다음에는 이렇게 생각이 연결되는 거죠. 오늘날 도시에서 실종된 사람들 중에 끝내 찾아내지 못하는 실종자 수가 적지 않다는데, 그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1212년 수천 명의 독일 어린이들을 이끌고 어린이 십자군에 참가했던 인물인 니콜라스를 ‘피리 부는 사나이’에 비유했다는 주장이 있더라구요. 소설 속 ‘니콜라스’도 혹시 이런 맥락에서 가지고 오신 건가요?

 맞아요. 만나기 전에 조사를 많이 하셨구나. (웃음)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구원이자 재앙이었잖아요. 소설에서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모든 테러와 사건 들이 ‘파괴’로 나아갈 것인지 새로운 ‘창조’가 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어떻게 보면 작가의 세계관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도 있는 부분이었는데요.

 예.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그 마을의 구원이자 재앙이었다면 소설 속의 피리 부는 사나이는 구원인지 재앙인지 알 수 없는 존재죠. 피리 부는 사나이를 바라보는 각기 다른 시각들만 존재하고 그것들 또한 어느 편이 옳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어요. 결국 명확한 판단은 유보되고 그것을 찾기 위한 의지만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게 어쩌면 작가의 세계관일지도 모르겠네요.

 ―주인공의 경우에는 결국 런던에서 발생한 테러로 인해서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게 되잖아요. 그리고 주인공이나 친구나 전혀 테러의 원인이 될 수 없는 무관한 사람들이구요. 그 부분에서는 테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거든요.

 우선 그 말이 중요할 것 같아요. 그들이 전혀 테러의 원인이 될 수 없는 무관한 사람들이라는 것. 테러뿐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폭력 사건들은 대부분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죠. 즉 누구라도 희생자가 될 수 있고 그것이 무차별범죄의 무서운 점이잖아요. 그런데 니콜라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근본적인 폭력이 존재하며, 폭력을 통해서 폭력으로 가득 찬 세계를 바꾸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죠. 주인공은 그 이야기에 어느 정도 감화되었다가, 눈앞에서 친구를 잃자 다시 혼란에 빠진 거라고 생각해요. 머릿속으로는 니콜라스의 생각을 이해하지만, 가슴속에는 친구를 잃은 슬픔이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고 어떤 느낌이나 반응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시나요?

 기본적으로는 재미있다는 말을 듣고 싶죠.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이 소설로 인해 독자들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면 좋겠고, 그들의 삶에 어떤 작은 영향이라도 미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작품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증명하는 것들’과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들’에 대해 쓴 부분이 있었어요. 요즘 본인의 시간의 흐름을 증명하는 것들에 대해서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무래도 육체적인 변화에서 그런 걸 많이 느끼죠. 똑같은 일에 예전보다 더 피곤함을 느낀다든가. 초췌한 얼굴, 늘어나는 뱃살…… (함께 폭소)

 ―사실 조금 추상적인 이야기를 들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럼 질문을 좀 바꿔서, 요즘 어떤 책들을 읽으세요?

 독서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서 얼마 전에 나름대로 읽어야 할 세계문학작품 리스트를 작성했어요. 그걸 따라서 하나씩 읽어나가고 있죠. 가장 최근에 읽은 건 조지프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이었어요. 다음으로 존 쿠체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조금 읽었는데 연락이 와서 아직 그 상태예요.

 ―이십대를 너무나 멋있게 마무리하시게 됐는데, 삼십대에 꼭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이십대 때는 좋아하는 몇 가지 것들에 몰두하느라, 다양한 것들을 경험해보지 못한 것 같아요. 삼십대 때는 좀더 많은 것을 보고, 겪고, 그러면서 분명한 인식이나 시각을 가지고 스스로의 삶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과정을 통해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죠. 저는 이제 시작하는 소설가니까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지만, 적어도 소설을 쓸 때마다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글과 삶이 하나가 됐으면 좋겠구요.

 ―상금 받으신 걸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어디론가 여행을 가신다거나.

 아직 계획은 못 세웠는데, 여행이라면 크레타 섬을 언젠가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어요.

 ―와, 멋져요. 안 그래도 무인도에 갈 때 가지고 갈 세 가지를 물어보고 싶었는데, 크레타 섬이 무인도는 아니지만 슬쩍 물어봐도 되죠?

 일단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할 것 같은데…… (웃음) 그걸 제외한다면, 오랫동안 읽을 수 있도록 아주 길고 이상한 책 한 권과, 뭔가 쓸 수 있는 도구,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나를 이해해주고 나 역시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같이 있다면 좋겠죠. 사실 이런 사람은 무인도에 가지 않는다 해도 절실히 필요해요. 만나기 쉽지 않다는 게 문제죠. 


  사실 직접 만나기 전에 그의 수상 소감에서 ‘나는 이미 해놓은 말들을 자주 후회하는 사람이다.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을 후회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보고 지레 겁을 먹었다. 인터뷰어에게 가장 무서운 사람은 말을 아끼는 사람이 아닐까. 하지만 실제로 만나본 그는 지적일 뿐만 아니라 푸근하기까지 했다. 인터뷰 후에 식사를 하면서 그는 ‘낮술의 효용론(밤늦게 술을 마시면 다음날 하루를 날리게 되지만, 낮에 술을 마시면 저녁때 깨서 하루를 번 것 같은 기분이 된다는)’을 설파해 우리를 정신없이 웃게 만들었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에게서 잘못 온 문자에도 친절한 답장을 해주어 생긴 일화들도 이야기해주었다. 어떤 질문에도 차분하고 조리 있게 말을 잘하는 그가 말을 후회한 적이 많다면, 그것은 아마도 소통에 대한 회의 때문이 아니라 소통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였을 것이다.

 만나기 전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나는 그의 걸음걸이가 무엇보다 궁금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처음에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 되도록 발소리를 내지 않으며, 팔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좁은 보폭으로’ 걷지만, 나중에 어느 순간부터는 ‘거리의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둘러보며 성큼성큼’ 걷는다. 그는 걸음걸이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었다. “그것은 몸이 기억하고 있는 역사였다. 걸음걸이에는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걸어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렇게 걸어갈 것이다.” 내가 훔쳐봤을 때 그는 천천히 사뿐사뿐 걸었다. 세상에 절대로 서둘러서 해결될 일이란 없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세렝게티 초원의 평화로운 기린들처럼 그렇게 걸었다. 그래서 어쩐지 그 걸음을 믿고 따라가고 싶어졌다. 피리를 부는 대신 기타를 치는 이 작가가 한 발자국씩 걸으면서 우리를 홀려 모르는 세계로 데려간다면, 기꺼이 매혹되어 그 길을 따라가고 싶었다. 그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리듬과 우연과 소통을 사랑하는 그가 데려갈 곳은 어쩐지 따뜻한 곳일 것만 같아서. 


* 김기홍 :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강대에서 국문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 강지희 :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 석사과정 재학중.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평론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 자료제공 : 문학동네 출판사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aufheben9 2009-12-26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터뷰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자는 김기홍인데 오타가 있네요. 김기호.
이건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소설상과 작가상이 동일한 것인가요? ^^'
 

제 13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이 결정되었습니다. 알라딘에서는 문학동네와 함께 수상작가 김진규씨의 인터뷰를 최초로 공개합니다. 중학생 딸을 둔 주부이자 작년 10월 이전에는 소설을 써 본적이 없다는 작가와 지난 해 <캐비닛>으로 제 12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한 김언수 작가와의 '고요하고 낯선'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고요하고 낯선 화단

 

제 13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 <달을 먹다>의 작가 김진규 인터뷰 (진행 : 김언수)

 



 
 

 

이 소설을 읽고 내가 처음 한 일은 동네 이발소로 머리를 깎으러 간 것이었다. 갑자기 단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그래, 아주 단정한 모습으로 만나러 가는 거야.’ 이발소를 향해 걸어가면서 나는 나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그러니 이 소설은 내게 이발 충동을 불러일으킨 최초의 소설인 셈이다.

“어떻게 깎아드릴까요?” 시골 이발사가 물었다.

“최대한 단정하게 보이도록 깎아주세요.” 내가 말했다.

“짧게 깎아달라는 말씀인가요?”

“네? 그게 그런 뜻인가요?”

“그럼요.” 시골 이발사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네, 그럼, 그렇게.”

이발이 끝났을 때 나는 하사관 스타일의 군인이 되어 있었다. ‘아니 아저씨. 그래도 이 스타일은 정말, 너무해요’ 항변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시골 이발사가 “아주 단정하죠?” 하고 흡족한 듯 물었기에 그냥 꾸벅 인사를 하고 이발소를 나왔다. ‘이게 단정한 게 맞을 거야. 내가 단정함에 대해서 뭘 안다고.’ 스스로 위안을 하면서.

인생 자체가 단정치 못한 내가, 게다가 단정하게 살아보자는 결심도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왜 갑자기 단정해지고 싶어졌을까. 그것은 아마 이 소설의 작가가 가지고 있을 저수지 바닥 같은 적요가 두려웠기 때문일 거다. 저수지 바닥. 그것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그린 작가의 이미지였다. 그것은 또한 소설 속에 나오는 ‘너무 말이 없기로 작정한’ 묘연과 닮아 있다. 사대부가의 며느리로 한평생을 살면서 그 누구에게도 심중을 토해놓지 않았던 그토록 무서운 침묵. 나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사람들이 항상 두려웠다. 인터뷰어로서 나의 임무는 한 번도 동요한 적 없는 고요한 저수지 바닥을 흔들어 부유하는 갖가지 먼지들과 그 동안 쌓였던 퇴적물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일 텐데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헤어스타일마저 하사관이다. 아이, 정말.

문학동네 회의실로 들어선 그녀의 얼굴은 중학생 딸을 가진 엄마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동안이었다. 그러나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단단해 보였고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모습은 단호해 보이기까지 했다. 인터뷰를 위해 문학동네 회의실에 단둘만 남았을 때 나는 약간 떨고 있었다. 아마 그녀도 약간은 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몇 개의 싱거운 농담과 건조한 질문을 던졌고 그녀는 단답형의 몇 마디 말을 내뱉었다. 서먹서먹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최대한 양해를 구하고 맥주 두 캔을 마셨다. 그리고 겉으로는 씩씩해 보이지만 사실 기분장애환자여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굉장히 떤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러자 그녀는 처음으로 경계를 풀고 나를 향해 따뜻하게 웃어주면서 자신에게 우울증 병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웃음이 고마웠다. 문을 열고 상대방을 따뜻하게 받아주는 그런 웃음이 나는 항상 고맙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예전엔 우울증으로 아주 힘든 시절들이 있었죠.”

―혹시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이라는 책 읽어보셨어요? 저는 그 책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어머! 『한낮의 우울』은 제 바이블이에요. 그처럼 많은 줄을 그어가며 읽은 책은 여태 없었어요. 거의 외우도록 읽었죠. 그리고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책을 꼭 추천했어요.”

나도 그랬다. 나도 그 책을 몇 번이나 읽었고 지금까지 정서적으로 위험해 보이는(?) 네 명의 사람에게 그 책을 선물했다. 그 책은 내게 책이라는 것이 의학적인 측면에서 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 최초의 책이었다.

“책 속에서 우울증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의 사연들을 읽으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어떻게 내 맘을 이렇게 잘 표현할까. 어떻게 내 맘과 이렇게 똑같을까.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나와 같은 이유로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만 아픈 게 아니라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되었어요.”

―혹시 겪으셨던 우울증 삽화 중에 하나만 들려주실 수 있나요?

“한동안 미친 듯이 전자오락실을 드나들었어요. 거기서 테트리스니, 1945니, 갤러그니, 틀린그림찾기니, 보글보글이니 하는 게임들을 했어요. 그중에선 틀린그림찾기가 제일 재미있어요. 동전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죠. (웃음) 이상하게도 정신을 빼놓을 만큼 시끄러운 그곳이 아주 편안했어요. 한 일 년 정도 그랬던 것 같아요. 물론 지금은 돈 주면서 가라고 해도 못 가겠지만.”

앤드류 솔로몬에 따르면 우울은 사랑의 결여상태다. 우울증은 자신과 타인과 일과 생활에서 사랑이 사라져버린 삶이며, 그 무엇에서도 기쁨을 얻지 못하는 무의미함과 황폐함으로 가득 찬 쓸쓸한 내면이다. 그리고 건강한 삶을 회복할 에너지를 상실한 상태를 뜻한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생활에 대한 무의미한 감정과 외로움이다. 그러므로 우울증 환자에게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프로작이나 리튬 같은 약이 아니라 황폐해진 내면을 다독거려줄 사랑이다.

그런데 우울증 환자들이 느끼는 가장 큰 공포는 누군가에게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은 사실 굉장하다. 그들은 열렬하게 외롭지만 사람들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뜨겁게 사랑을 갈구하면서 동시에 사랑으로부터 맹렬하게 도망가는 것. 이 모순적인 삶을 그들은 견뎌야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광대가 되어 살며, 어떤 사람은 광인이 되어 떠돈다. 그러나 침묵하는 자는 이해받을 수 없고 광대는 오해받으며 광인은 배제되므로, 이 소설 속에서 얽히고설킨 많은 관계들처럼 문 앞에서의 머뭇거림은 죽음까지 지속되고 오해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 중증 우울증 환자였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속 인물들이 우울증에 감염되어 있듯이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도 그렇다. 침묵하는 묘연과 김희우에게서, 사람들의 온갖 비웃음과 모멸 속에 광대로 살아가는 류호에게서, 광인으로 떠도는 여문과 향이에게서 나는 우울이라는 비극적인 병을 본다. 그래서 아마 작가는 이 소설의 인물들 중에 누구와 닮은 것 같냐는 나의 질문에 모두와 조금씩 닮아 있다고 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원래 이 소설을 쓸 때 제목은 ‘푼’이었어요. 푼은 아주 적은 양을 의미하는 거잖아요. 저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항상 푼 단위만큼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간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는 오해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고 항상 외로운 거죠. 소설 속에서 향이는 여문이 자신을 사랑하는지를 모르죠. 여문은 향이가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은 그렇게 모르는 채로 죽어갑니다.

―속내를 잘 안 드러내는 스타일이시죠?

“네, 말이 별로 없는 편이에요.”

―그럼 인터뷰 어떻게 하죠? (웃음)

“사실 저는 말을 잘 못하는 편이라 상대방에게 아무리 화가 나도 할말을 또박또박 다 하지 못하고 대충 얼버무리는 타입이에요. 답답함이 습관이 되어 있죠. 그런데 편지를 쓰거나 글을 쓰면 이상하게 내용이 점점 독해져요. 걱정입니다.”

―저랑 정반대군요. 저는 글을 쓰면 유순해지는데 말을 하면 독설이 되거든요.

 

―문학동네소설상으로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나셔서 작가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독자들은 작가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또 뭐 하고 살았는지 이런 걸 더 궁금해하더라고요. 사실은 소설을 읽다보니까 제가 더 궁금해진 거지만.

“경기도 오산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어요. 아주 시골이었죠.”

―소설을 보면 한옥에서 자랐을 것 같은데요?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엄청난 한옥은 절대 아니고요. (웃음) 아주 작은 한옥이었어요. 지붕도 낮고, 덩달아 담도 낮고, 작은 뜰이 있는 시골 한옥이었죠. 문을 열면 바로 흙길이 있고, 그 앞에 논이 있는 그런 집 말이에요. 집 주위로 국화가 아주 많아서 사람들이 우리 집을 ‘국화집’이라고 불렀대요. 그런데 어쩐지 제가 자라면서부터는 그 많던 국화들이 다 사라지고 그 자리에 채송화며 나팔꽃 같은 풀꽃들이 자라기 시작했어요.” 

―소설에 보면 발뒤꿈치로 밟아 누룩을 만들고 명주천으로 닦은 풀잎에 이슬을 모아서 만든 국화주가 나오던데 정말 한잔 얻어먹고 싶은 술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게 다 연유가 있는 거군요.

“그런데 저는 사실 술을 못 마셔요. 국화주를 담가본 적도 없고요.”

―엥?

“대신 국화주 빛깔은 아주 좋아해요. 사실 국화과의 꽃들이 굉장히 다양하거든요. 특히나 가을엔 웬만하면 국화라고 해도 아주 틀리지 않을 정도니까요. 그러니 당연히 국화주 담그는 방법도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한 번도 담가본 적은 없어요.”

―대가족이었을 것 같은데 가족관계는?

“이남 사녀 중에 막내인데 굉장히 늦둥이에요. 아버지가 쉰 살에 저를 낳았어요. 바로 위의 언니하고 아홉 살 차이가 나고요. 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다니면 시골 어른들이 손녀냐고 항상 물어볼 정도였죠. 아버지는 공무원이셨는데, 몸이 아프셔서 일찍 퇴임을 했어요. 그후로 아버지는 대서소를 하시면서 소일하셨어요. 아버지가 글씨를 아주 잘 쓰셨거든요. 붓글씨도 잘 쓰시고 펜글씨도 잘 쓰셨죠. 어쨌든 그때부터 가족의 생계는 언니, 오빠들이 책임지게 되었어요.”

 

―소설을 보면 아버지에 대해 애증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아버지로 인해 항상 그늘이 있었어요. 어린 마음에 늙고 아픈 아버지가 속상했거든요. ‘효’라는 것이 원래 타고나는 건가봐요. 그런 면에서 저는 참 못된 딸이었죠.”

 

이 소설 속에는 ‘너는 나로 인해 죽는다’라는 부채의식이 많은 인물에게서 보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런 위험한 부채의식을 가진 사람을 별로 만나본 적이 없어요. 보통은 ‘너 때문에 내가 못 산다’라는 식 아닌가요?

“아무래도 가족사에서 출발한 것이겠죠. 엄마는 마흔에 저를 낳으시고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 하셨어요. 그래서 늘 아프셨죠. 엄마가 아프실 때마다 혹시 나를 낳아서 엄마가 아프게 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저희 언니와 오빠들은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었는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일찍 일을 시작했어요. 집에서 저 혼자 누린 호사가 얼마나 큰지 몰라요. 게다가 언니, 오빠들이 돌아가면서 한 번씩 제 학비를 내야 했어요. 거의 저를 키우다시피 했죠. 저는 사는 게 늘 미안했어요. 엄마가 아픈 것도 미안하고, 언니, 오빠들이 고생하는 것도 미안하고, 공부를 못하는 것도 미안하고, 약하고 비리비리한 것도 미안하고, 상업고등학교에 가지 않고 멀리 수원까지 가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닌 것도 미안하고, 대학을 졸업했으면 일도 좀 하고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한 것도 미안하고, 그리고 결혼한 다음해에 바로 애기 낳고 그뒤부터는 육아에 신경쓴다고, 참……

 

―한국외대 이란어과를 나오셨는데, 이란어과를 나온 소설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굉장히 낯선 느낌이 들었어요. 왜 이란어를 전공할 생각을 하셨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떠밀려 들어간 느낌이 들어요. 선지원후시험 제도의 희생양이랄까. 붙고도 남는다, 하는 곳에만 원서를 낼 수 있었으니까요. 안 그러면 담임선생님이 원서를 안 써주셨거든요.”

―그럼 원래는 무슨 과를 가고 싶었나요?

“꼭 가고 싶었다기보다는 그냥 호기심에 문예창작과를 알아보기는 했어요. 하지만 이런 거 저런 거 따질 형편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대학 시절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시간이었어요. 사실 이슬람세계가 굉장히 매력적이거든요.

―소설은 언제부터 쓰기 시작하셨죠?

“작년 10월부터요.”

―네? 그전에는 쓰신 적이 없고요?

“네. 그전에는 단편소설도 시도 써본 적이 없어요.”

―이런 얘기 들을 때마다 참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보통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한 십 년 우울한 문학청년 시절 보내고, 신춘문예 때문에 또 몇 년 우울한 크리스마스 보내고, 그러면서 잔뜩 패배의식에 절어 있다가 겨우 나오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처럼 어느 날 갑자기 필받아서 한 방에 나오시면…… (웃음)

“우울한 크리스마스요?”

―신춘문예 당선통보가 보통 크리스마스 전에 나거든요.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어요. 그런데 글을 잘 못 썼어요. 중고등학교 때도 별 소질이 없었어요. 작가들을 보면 벌써 중고등학교 때 두각을 나타내잖아요. 그게 아니라도 백일장에서 상을 타오거나 하다못해 국어선생님에게 칭찬을 받거나.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저는 그런 것도 없었어요. 어쩌다가 선생님에게 글을 내면 빨간 펜으로 줄만 잔뜩 그어져서 돌아오곤 했죠. 어릴 때 저희 집 다락에 책이 아주 많았어요. 깨알 같은 작은 글씨에 세로줄로 활판인쇄되어 있는 책들이었는데 법전에서부터 난중일기니 조선왕비열전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불문한 책들이었죠. 나중에 이사를 할 때 보니까 종이가 부스러질 정도로 낡은 책들이었는데, 구석에 앉아 그 책들을 이해도 못 하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읽으면서 나도 작가가 되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죠. 하지만 글쓰기에는 별로 소질이 없는 것 같아서……”

그럼 작년 10월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왜 갑자기 소설을, 그것도 단편도 아니고 장편을?

“단편을 쓸 생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에요. 근데 도저히 진행이 안 되더군요. 남편이 언젠가 그런 말을 했어요. 제가 매일 책만 붙들고 사니까, 쏟아내지 않고 그렇게 계속 구겨넣기만 하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고. 정말 그랬나봐요. 할말이 많아서 단편으로는 부족했다, 뭐 그런. 그리고 갑자기 글을 쓰기 시작한 건, 표면장력의 끝을 보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한 방울만 더 얹으면 바로 터질 것 같은 위태로움을 제 안에서 느꼈던 거죠.”

 

―저는 틈틈이 쓰는 장편소설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어쩐지 장편소설은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휘몰아쳐서 써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한 아이의 엄마이고 또 주부이니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썼을까 궁금했습니다.

“말 그대로 대중없이 써요. 아침에도 쓰고, 밤에도 쓰고, 설거지 끝내고 쓰고, 드라마 보다가도 쓰고, 정말 틈나는 대로 써요. 가끔 컴퓨터를 한 번도 못 켜는 날도 있거든요. 그런 날에는 주로 수첩에다 정리를 해두지요. 아무래도 남편과 딸에게 피해가 좀 있었을 거예요. 대중없이 틈나는 대로 쓴다지만 그 틈을 일부러 만들기도 했으니까요.”

―소설에는 조선시대 풍속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런 쪽으로 관심이 많으셨던가봐요?

“예전부터 그런 군내나는 책들을 좋아했어요. 체질이죠. 고등학교를 수원에서 다녔는데 정조가 세운 화성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거든요. 게다가 국사선생님이 얼마나 재미있고 좋으셨는지 역사에 대한 관심이 그때 많이 생겼어요. 그리고 『조선의 뒷골목 풍경』이라는 책 이후로 기죽지 않으면서 읽을 수 있는 역사 관련 책들이 굉장히 많이 쏟아져나왔어요. 그 한 권, 한 권이 다 소설의 자료가 되었지요.”

 

조선시대를 소설의 시대적 배경으로 설정한 이유가 있다면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조선시대라 하면 온갖 제약과 규약이 여러모로 가해졌던 시대 아니겠어요? 신분의 차이만 해도 그렇고 후기 쪽으로 접어들면 남녀의 차별도 갈수록 심해지니까요. 그러니 그 시대 사람들은 사회에서 학습된 방식으로 살아야 했겠죠. 당연히 차마 하지 못한 말이며 감히 하지 못한 행동들이 많았겠죠. 그 시대에 비한다면 오늘날은 훨씬 자유로워진 것 같지만 소통이라는 측면에선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아요. 소통의 부재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별다를 게 없다는 걸 보여주려고 옛 시절을 빌려왔죠. 그래서 사실 처음에 이 소설을 쓸 때는 퓨전을 생각했어요. 시대를 구분하지 않고 넘나들며 양쪽을 다 아우르는 소설을 쓸 계획이었어요. 하지만 어쭙잖은 시도가 되어버렸죠. 한쪽에도 충실하지 못하면서 양쪽을 다 품는다는 건 말이 안 됐으니까요. 그래서 수정하는 데 어마어마한 시간을 들여야 했어요. 이중의 고통이었죠.”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이 작가는 묘연과 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묘연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도 자주 받았고요.

“네, 아무래도.”

―묘연을 빼고 나면 누구와 가장 많이 닮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여기 나오는 인물들 모두와 조금씩 닮아 있겠죠. (웃음) 그런데 굳이 꼽으라면 후인과 설희를 반반씩 닮은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제가 한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에 자식을 버리고 사랑을 찾아 떠나는 후인 같은 여자에게 깊게 동의해줄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후인의 삶을 끝까지 따라갈 수 없었죠.”

―누군가는 소설이 그 시대의 도덕과 싸우는 일이라고 하던데요. 그러니까 후인에게 조금 더……

“그런 면에서 제가 좀 소심한가봐요. CCTV를 놓고 시민의 안전과 사생활 보호가 첨예하게 대립하면 저는 안전 쪽에 손을 들어주는 편이거든요. 그 말은 제 인물이 도덕과 금기의 경계에 서 있다면 저는 아마 도덕을 선택할 거라는 뜻이겠죠. 이거 어째 동문서답의 느낌이 오는데요?” 

독자들에게 『달을 먹다』가 의미하는 바를 들려주신다면?

이해와 오해 사이의 간격이라고 하면 될까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진실을 가지고 살아가죠. 한 가지 사실을 놓고도 입장과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 누구도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이 될 수는 없는 거거든요. 저는 그 진실의 개별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영향받은 작가가 있었다면 누구를 꼽고 싶습니까?

“영향은 무수히 받았죠. 그러면서 제 능력에 절망했고요. 어쨌든 제게 충격을 준 작품들은 분명히 있어요. 우리나라 작가들의 경우, 우선은 최명희의 『혼불』이 그랬고, 제 정서를 들었다 놨다 한 작품은 김훈의 『칼의 노래』죠.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는 학창 시절에 구라에 대한 하나의 교과서가 되어주었고, 단편집으로는 이문구의 『나는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하고 김형경의 『단종은 키가 작다』가 인상 깊었어요. 그리고 외국작품으로는 알바니아 작가인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하고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그리고 쥘리앙 그라크의 『시르트의 바닷가』를 들고 싶네요. A.J.크로닌도 말해야 할 것 같기는 한데 그의 소설 내용이 기억이 안 나서……”

―작가들에게는 대체로 소설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소설을 들려주신다면?

독립운동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내 안에 쟁여진 무수한 감정들이 글자 한 자 한 자의 등에 업혀 나로부터 독립을 하는…… 그게 잘되면 만세를 부르는 거구요.

앞으로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가요?

글 잘 쓰는 작가요. (웃음) 영화를 보면 감독들마다 스타일이라는 게 있잖아요. 드라마도 그렇구요. 그 스타일 때문에 마니아도 생기고 안티도 생기고…… 그런 저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싶어요. 보편적이고 무난해서 편안하기보다는 무언가를 건드려서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스타일.   

 

―저는 소설가가 21세기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시대에 소설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겠지만 저는 소설가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개념으로 봅니다. 하지만 될 수 있다면 소비자의 호불호에 휘둘리는 수동적인 작가가 아니라 오히려 소비자가 눈치를 봐야 할 정도의 주체성을 가진 작가가 되고 싶어요. 물론 그러려면 그만한 힘을 갖춰야겠죠.

 

이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사랑은 대부분 치명적입니다. 죽거나 불구가 되거나 하는 식이죠. 원래 사랑이 이렇게 무서운 건가요?

저는 사랑은 치명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치명적이지 않으면?

“사랑이 아닌 거죠.”

―이렇게 위험한 정서를 가지고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결혼이라든가.

“그것은 생활이겠죠. 사랑이 우리를 흔들고 간 다음에 남아 있는 것. 자신이 가진 성격대로 살아가야 하는……”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으셨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조금 무섭네요. 작년에 어떠셨나요?”

―벌벌 떨었죠. 무섭잖아요. 갑자기 세상에 나가는 거.

“그 기분 정말 이해가 될 것 같아요.”

인터뷰를 정리하는 며칠 동안 나는 밤마다 그녀의 블로그에 들어가 이것저것을 둘러보고 나왔다. 물론 도둑처럼 살금살금 들어가서 흔적도 없이 나온다. 그녀의 집엔 인형을 껴안고 잠을 자는 왈왈양이라는 앙증맞은 강아지가 있고, 그녀가 키우는 꽃과 새싹채소들이 있고, 전업주부의 하소연과 푸념이 있다. 나는 그곳에서 꽃기린, 제비꽃, 석류꽃, 능소화 같은 꽃들을 본다. 나는 웰빙과 청결을 삶의 모토로 삼고 있어 더러운 이불에서는 결코 잠을 자지 않고 몸에 좋다면 냄새 지독한 한약도 마다하지 않는 왈왈양의 일기를 읽고, 밥心이라는 폴더 속에서 요리의 실패사들을 읽으면서 ‘음 저 타이밍에 저걸 집어넣으면 확실히 실패하는군’ 하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리고 소설에서 건축학까지 두서없이 읽어대는 활자중독자의 독서일기를 읽는다. 블로그 속 그녀의 글들은 센스 만점이다. 그녀는 홈쇼핑에서 만난 상품에게 ‘솔직하게 말해봐, 내가 너로 인해 적어도 상식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지’를 묻고, 전업주부의 가사노동 임금이 월 백육십칠만원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잊을 만하면 신문에서 떠들어대는 것에 정부 차원의 음모가 있는 것이 아닐까 갸우뚱거린다. 확실히 그녀의 블로그는 내가 읽은 그녀의 소설과 다르고 내가 만난 그녀와도 다르다. 그래서인지 어째서인지 나는 깔깔거리면서 블로그를 빠져나올 때마다 그녀의 다음 소설은 『365일 반찬 백과의 비극』이나 『웰빙 강아지 왈왈양의 투쟁사』같이 엉뚱하고 기발한 소설일지도 모른다고 혼자 중얼거리곤 한다. 


* 인터뷰 및 정리 : 김언수

1972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02년 진주신문 가을문예공모에 단편 「참 쉽게 배우는 글짓기 교실」과 「단발장 스트리트」가,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캐비닛>으로 제 12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목련 2007-11-23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을 먹다.. 제목이 인상적이네요. 궁금하네요.

러블리아련 2007-11-25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동네수상작들은 하나같이 독특한 시선의 글들이 많은 것 같아요.기대됩니다.

진달래 2007-12-06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상 받는 글 중에 '달'이 많네요. ^^;;
꼭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이 작품. ^^
성함과 얼굴이 좀 안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글로 풀어낸 대화가 참 이름답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따귀가 아니라 정말 뽀뽀를 해주고 싶었던 김언수 작가님,
절대 하사관 같지 않으세요~!
<캐비닛>에 나왔던 사진에 비하면 정말 더 여유있어 보이시는데요. ^^
김진규 작가, 앞으로도 눈여겨 볼게요. ^^
근데 김언수 작가님, 다음 작품 기다리고 있어요~ 언제 나와요? ^^;;

모리 2007-12-12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시네요. 작년 10월부터 글을 써서 화려하게 등단하다니...작가 자체가 흥미진진한 소설 같습니다. 인터뷰 재미있게 읽었어요~!

상그레 2008-12-21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작가의 뒷이야기를 듣는 재미는 정말 쏠쏠합니다.
작가의 얼굴이 책에 중첩되는 느낌이 들어요.
 



"좋은 책이 많아 행복한 가을"
바람의 열두 방향 어슐러 K. 르 귄 지음 / 시공사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10월의 수확은 <바람의 열두 방향>과 <최순덕 성령충만기>였다. 르 귄의 열성 팬은 아니지만, 또 책에 실린 몇 개의 단편은 이미 읽은 것이지만, 그래도 확실히 멋진 책이다. (표지 색감과 판형도 맘에 든다.) 특히 인상적인 건 각 단편 앞머리에 르 귄 자신이 해당 작품에 대해 짧게 술회한 부분. 작품의 발단, 출판의 뒷얘기, 소설에 대한 작가 자신의 해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의 소장가치는 충분하다. 번역도 매끄럽고 깔끔하다.
 
<최순덕 성령 충만기>는 간만에 재미있게 읽은 한국소설이다. 또다른 이야기꾼의 등장을 조심스레 점쳐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랩'으로 서술되는 '버니'부터 전/성경의 형식을 빌려쓴 '최순덕 성령충만기'(에, 종교소설이 아니다.;)까지. 책에 실린 작품 모두가 일정 수준 이상 재미있고 완성도 있다. 이기호란 이름을 기억해두자.
 
그러나 많은 문학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10월에 나를 쓰러뜨린 작품은 <엄마 마중>이다. 알라딘에서 일하면서 좋은 것 중 하나는 어린이책을 조금이나마 접하게 되었다는 것. 아니었으면 조카도 친구 딸내미도 옆집 아기조차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내가 어린이 책을 접할 일이 없을 테니까. 이태준의 짧은 동시를 그림으로 풀어낸 이 책 <엄마 마중>. 대여섯 살 먹은 어린 아가가 버스 정류장으로 엄마를 마중나간다. 이영차 보도에 올라서서 '우리 엄마 안와요' 기웃기웃. 그림 한장 한장이 너무 가슴에 와닿아서 눈가가 순간 화끈해졌다. 알라딘 편집팀이 10월에 반한 책은 뭐니뭐니 해도 <엄마 마중>이 아니었을까.
 
문학담당 박하영
(zooey@aladin.co.kr)
 
 
"은행잔고 35원, 그래도 만화는 계속 나온다"
데스 노트 Death Note 1 오바 츠구미 + 오바타 다케시 / 대원씨아이
환월루기담 이마 이치코 / 대원씨아이
후르츠 바스켓 14 타카야 나츠키 / 서울문화사
더 이상 말하지마 요시나가 후미 / 서울문화사
 
이번 달에는 일반 단행본은 거의 보지 못했다. 경이로운 1권을 선보이는 만화, 흥미로운 2, 3권을 선보이는 만화들로 인해 하루하루를 위태롭게 보냈다. 이달의 선봉은 뭐니뭐니해도 <데스 노트>. 오바 츠구미라는 가명을 내세운 작가는 과연 누구인지 친구와 연일 토론을 하느라 메신저는 언제나 ON 상태였다. 원서판매 사이트에서 미리 주문해서 내용을 살짝 엿볼 수도 있겠지만, 훗날의 재미를 위해 꾹 참고 있는 중이다. (사신 류크가 너무 귀엽다!고 말했더니 친구가 '싸이코'라고 한다.)
 
다음을 차지한 것은 오랜만에 등장한 이마 이치코, <환월루기담>으로 <백귀야행> 못지 않은 찬란한 만화를 선보였다. <문조님과 나>로 잠시 동물만화로 나가는가 싶더니, "나, 아직 건재하다구!"라고 조용히 외친다. 으레 그렇듯, 나는 그녀의 만화를 읽다보면 전병과 귤, 담요가 그리워진다.
 
편애하는 캐릭터인 링이 많이 아파보여 마음이 무거웠던 <후르츠 바스켓 14>, 요시나가 후미의 <더 이상 말하지마>(나이제한 표시가 안되어있어 덜컥 구입했더니 15세 미만 불가, 소프트 '야오이'였다!) 등도 주말에 탐독한 만화. 고양이의 주인된 도리로 다시 한 번 봐줘야겠다는 생각에 보기 시작한 <나비의 일상>, <묘한 고양이 쿠로>도 요즘 내 손을 타고 있는 책들.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이 겨울에 쏟아질 만화들도 빵빵하다고 하니 기대백배! :)
 
외국어.실용담당 김세진
(sarah2002@aladin.co.kr)
 
 
"엄마가 돌아왔다!"
엄마 마중
김동성 그림, 이태준 글 / 한길사
 
눈이 쌓인 추운 겨울날, 전차 정류장으로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갑니다. 아이는 "낑"하고 안전지대에 올라서서는 전차가 설 때마다 고개를 내밀며 엄마를 찾습니다. "우리 엄마 안 와요?" 차장 아저씨가 말해줍니다. "너희 엄마 오시도록 가만히 서 있어라." "아기는 바람이 불어도 꼼짝 안하고, 전차가 와도 다시는 묻지도 않고, 코만 새빨개서 가만히 서 있습니다."
 
30쪽 분량의 그림책이 기다림이란 정서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가슴 깊은 곳을 '툭' 건드리는 이야기, 이 책에 덧붙여야 할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마지막 그림이 말해주는 깜찍한 결말, 그런데도 마음 한켠이 여전히 먹먹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다림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원래 가슴이 아픈 거니까... 하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산다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고, 그래서 가슴이 아픈 것이고, 그래서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결론은 엉뚱하게 튀었습니다만, 어쨌든, 기다릴 무엇이 있어 다행스러운 오늘, 지금입니다.
 
사회.역사담당 김현주
(realsea@aladin.co.kr)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학생이다
왕멍 지음, 임국웅 옮김 / 들녘
 
대장정에서부터 천안문 사태까지, 중국의 현대사를 헤쳐온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늘 사람을 각성시키는 무엇인가가 있다. 삶이란 저런 것인가를 생각하면 솔직히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인생이 즐거운 것도, 슬픈 것도, 아름다운 것도, 처연한 것도 아닌 그 무엇이 아닐까 자꾸 생각하게 된다.
 
왕멍은 인생은 '배움'이라고 말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부딪치게 될 모순과 함정, 그 안에서 어떻게 스스로의 해답을 구하고 살아가야 할 것인지 계속 배우고 공부해야 한단다. 인생=배움. 하기사 인생에 단 한 가지의 정답이 있겠는가. 다만 나는 이 책에서 또 하나의 답을 얻었다.
 
아 그리고 나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이 책, <엄마 마중>!!! 내가 이 책에서 느낀 애달픔과 기쁨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구체적으로 적을 도리가 없다.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책을 만날 수 있다니 역시 인생은 행복한 것이라고.
 
인문.예술담당 이예린
(yerin@aladin.co.kr)
 
 
"한국경제가 정말 어렵긴 어렵나 보다"
한국을 버려라
이성용 지음 / 청림출판
 
시대가 뒤숭숭하고 먹고 사는 게 어렵다 보니 한국 경제에 대한 비판서가 많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당장 2년, 3년 앞이 보이지 않는 어려운 상황이다 보니 독자들로서는 '10년 후, 3년 후'가 붙은 책에 관심을 안 가질 수 없고, 출판사로서도 팔릴 책이니 안 낼 수 없는 거겠죠.
 
<한국을 버려라>라는 그런 저런 책들 사이에서 비교적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무엇보다 정치적 성향에 치우치지 않은 공정한 시각, 한국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과 이해를 가지고 썼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저자는 왜 한국이 100점의 실력을 가지고도 70점 밖에 대접을 못 받는지, 그 해답을 15가지 사례를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것처럼 역시나 읽으면서 기분 좋은 내용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내 일처럼 집중해서 읽게 되는 건 경제에 대한 불안감이 다른 어느 때보다도 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경제.컴퓨터담당 윤성화
(rain@aladin.co.kr)
 
 
"다시듣는 그 노래, 감동은 여전하구나. 보고싶다 친구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그 시절. 난 소중한 친구와 이 앨범을 들었다. 비록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설픈 반항이나 부당한 대우를 속으로 삭이는 것 뿐이었지만 이 앨범은, 이 노래들은 작지만 큰 울림으로 지금이 아닌 세상을 언젠가는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해주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바꾸고 있는 중이라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내게 이들은 소리없이 다시 다가왔다. 다 늘어난 테이프 속에 꼭꼭 묻어두었던 한 때의 이야기들을 다시 살려준 앨범. 성진아. 너도 이 앨범을 듣고있니. 우리 그때 참 좋았는데... 보고 싶구나.
 
음반.DVD담당 서현
(mirinae@aladin.co.kr)
 
 
"올해 본 최고로 감동적인 한국그림책"
엄마 마중 
김동성 그림, 이태준 글 / 한길사
 
너무 상투적이라 쓰고 싶지 않은 표현들이 있다. 콧날이 시큰해졌다, 가슴이 뻐근해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얼마나 맥빠진 표현들인가. 아무도 감동하지 않을, 아무도에게도 그 본래 뜻이 전달되지 않는 표현이다. 적어도 서점 편집자라면 이런 표현으로 독자를 유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그림책을 읽으면서 정말 콧날이 시큰거리고, 가슴이 뻐근했다. 아기의 코끝이 발개지도록 엄마가 오지 않는 장면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군더더기 없는 날씬한 글과 담백한 그림. 누구에게라도 읽히고 싶을만큼 아름다운 우리 그림책이다.
 
어린이담당 류화선
(yukineco@aladin.co.kr)
 
 
"다큐멘터리가 꼭 카메라로만 찍히는가"
신의 괴물
데이비드 쾀멘 지음, 이충호 옮김 / 푸른숲
 
그야말로 다큐멘터리. 사진 한 장 없고 도표 하나 없어도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이런 책을 위해 몇년씩 취재여행을 다니고, 사람을 만나고, 자료를 정리하고, 마침내 책상 앞에 앉아 써내는 과정을 상상해보았다. 과연 그것은 지금 멸종해가는 시베리아 호랑이를 밀렵꾼으로부터 지키는 육체적 활동보다 가치있는 것일까? 쾀멘만큼만 쓸 수 있다면 골백번도 'Yes'일 것이다. 글의 장점을 새삼 발견했다. 영상보다 은근하고 개인적이며 그래서 더 살갗에 와닿는다.
 
실은 <엄마 마중>을 꼽고 싶었는데 앞서 많이 등장했으니... 완벽한 글의 아름다움이 댕댕댕 울려퍼지고 절제된 그림의 힘이 따스하게 번져가는 숨막히는 그림책이다. 이 글을 쓰느라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묘하게 조여온다.
 
편집장 김명남
(starla@aladin.co.kr)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digitalwave 2004-11-11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크크 저도 <엄마 마중>에는 홀딱 반해버리긴 했지만, 정말 엄청난 몰표군요.
 



"비로소 마음에 와닿은 무엇"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현대사
김성보, 기광서, 이신철 지음,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 웅진닷컴
 
"파종은 전선이다. 한치의 땅도 묵히지 말자"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 "모두다 속도전 앞으로" "천리마를 탄 기세로 달리자"... 현대사의 한장 한장을 구호의 연속이라 해도 될만큼 구호에 매달려 살아온 사람들. 삶의 순간순간을 체제를 위해, 아니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죽을 각오로 매달리며 살았을 사람들. 그들의 절박함. 읽는 내내 '구호 아래서' 또는 '구호에 의지해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생각했다. 그들이 말하는 정치며, 사상이 그들 각자에게 무엇일지를 헤아려보면서.
 
사실 완성도보다 출간 자체의 의의가 더 큰 책이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또는 '주체의 나라'로 보는 극단을 경계하고 균형을 잡는데 초점을 두고 있어, 뚜렷한 시각이 드러나지 않는 아쉬움도 있다. 그럼에도 여기에 이 책을 가져온 이유는, 이 책에는 북한을, 북한 사람들의 삶을 헤아려보게 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 다닐 때 북한정치사나 한국정치사 같은 과목을 수 차례 들었지만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북한 사람들의 절박한 삶'이 비로서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 숱한 어려움을 겪고도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라니... 국제정치니 경제니 하는 말보다 먼저 그 구호를 절박하게 외치고 있을 누군가가 떠오른다. 그래서 아프고, 화나고... 미안하다.
 
사회.역사담당 김현주
(realsea@aladin.co.kr)
 
 
"비밀과 거짓말"
 
폭스 이블
미네트 월터스 지음, 권성환 옮김 / 영림카디널
 
논스톱으로 새벽 4시까지 읽었다. 다음날이 휴가이기도 했고 쉬이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다. 확실히 영국 여성 추리작가들의 작품은 디테일과 묘사가 훌륭하다. "영국의 시골에선 세상의 모든 일이 다 벌어질 수 있을 거 같아요, 아, 마플 할머니 때문인지 영국 시골마을은 범죄소굴 같아요." 이런 잡담을 잠시 하기도.;;
 
2001년 영국 셴스테드, 서너 가족만이 상주하고 도시 사람들의 주말 별장만 빼곡한 작은 시골마을이다. 어느날 한 저택의 안뜰에서 제임스 로키어-폭스 대령의 부인 에일사가 얼어죽은 채 발견된다. 이 죽음을 계기로 로키어-폭스 가문의 어두운 가족사와 감춰왔던 비밀이 차례로 드러난다. 한편 폭스 이블이라는 사내가 이끄는 부랑자 한 무리가 마을 빈터를 무단으로 점유,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이 소설은 결국 '사냥감과 사냥꾼'의 이야기이다. 사냥하는 자의 심리, 사냥당하는 자의 심리, 그 주변의 경직/고조된 공기에 저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사람들. 인물들끼리 주고받는 대화가 썩 멋지고 플롯과 캐릭터의 묘사는 치밀하고 설득력 있다. 독자를 서서히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구성도 일품. 어느 출판사에서 '골든대거 상'(영국 추리작가협회 상) 시리즈를 계속 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문학담당 박하영
(zooey@aladin.co.kr)
 
 
"인용으로 감상을 대신하렵니다"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소담
 
정말 나는 몰랐으니까. 남자란 존재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도. 연인과 함께 지내는 밤의 달콤한 친밀감이 아니라, 그저 함께 자는 남자의 팔이 얼마나 편안한 것인지. 남자의 단순함, 남자의 복잡함, 남자의 관용, 남자의 안심.
 
...색깔 있는 세계란 아마도 의존과 관계가 있으리라. 어른만이 할 수 있는 의존도 있다는 것을, 남편을 만나고서야 처음 알았다. --본문 55~57쪽
 
집안에 있어도 비슷하다. 우리는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다. 남편은 텔레비전을, 나는 남편의 머리를, 남편은 현재를, 나는 미래를, 남편은 하늘을, 나는 컵을.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그야 물론 때로는 답답해서 전부 같으면 좋을텐데 하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마음속 가장 깨끗한 장소에서는 그런 바람이 일시적인 변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오늘도 우리는 같은 장소에서 전혀 다른 풍경을 보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다른 풍경이기에 멋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났을 때, 서로가 지니고 있는 다른 풍경에 끌리는 것이다. 그때까지 혼자서 쌓아올린 풍경에. --본문 61쪽
 
예를 들어 함께 살기 전에는, 남편이 만나러 와주면 무척 기뻤다. 만나러 온다는 것은 나를 보고 싶어한다는 뜻이었으므로. 그런데 막상 함께 살기 시작하니 남편이 매일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보고 싶지 않아도 돌아온다. 그게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어리석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도무지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보고 싶었어?"
 
회사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그렇게 물으면 응, 하고 고개는 끄덕이는데,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것 같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신혼이라지만 그런 질문을 매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만사가 그 모양이라 그 한 해는 정말 진이 빠졌다. --본문 94쪽
 
인문.예술담당 이예린
(yerin@aladin.co.kr)
 
 
"무제(10월)"
 
20년 벌어 50년 먹고 사는 인생설계
오종윤 지음 / 더난출판사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힘든 하루를 마치고 퇴근길 인천행 지하철에 오르면서, 아 스무 살에 회사 다니는 것도 이렇게 빡빡한데 나이 마흔 먹어 다니기는 얼마나 힘들까 라는 생각이 들 때. 또 하나는 지하철에 힘들게 타고 내리시는 어르신을 뵐 때.
 
은퇴를 생각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느냐는 소리를 들을지 모르지만 '은퇴 이후의 삶'에 주목하는 이유는 역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생의 결론을 미리 생각한 사람이 중간부분인 지금을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와, 또 하나는 노년이라는 것은 힘들게 달려온 인생의 보답이라는 생각 때문에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에게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서 상기시켜 준 좋은 기회였다. 사오십년이 흐른 후 인생을 되돌아보며 '참, 열심히 살았다. 훌륭한, 성공한 인생이었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평범했던 그 친구는 어떻게 성공했을까
토마스 A. 슈웨이크 지음, 서현정 옮김 / 위즈덤하우스
 
과연 누구 말이 맞는가. 이 책처럼 두리뭉실하게 목표 없이 사는 사람이 더 성공하는가? 아니면 숱한 자기계발서처럼 목표를 위해 치밀하게 달려가는 사람이 더 성공할 확률이 높은가? 결론이 난 건 아니지만 확실한 건 하나다. 두리뭉실하든 치밀하든 결론만이 아니라 중간의 과정을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성공에 골인할 확률이 높다는 점. 야심만만처럼 '성공한 사람 100인에게 물었습니다'라는 독특한 구성을 가지고 있는 자기계발서. 따라하지 않을 사람이라도 보면 재미있다.
 
경제.컴퓨터담당 윤성화
(rain@aladin.co.kr)
 
 
"가을이라면 여행, 젊은이라면 도쿄"
 
현태준 이우일의 도쿄 여행기
이우일, 현태준 지음 / 시공사
 
뽈랄라 아저씨랑 두건사나이 이우일씨가 손을 잡고 도쿄로 떠났다. 이 둘이 탐방할 곳은 눈에 훤하다. 보나마나 장난감 가게겠지. '보나마나' 장난감 가게다. 그것도 온갖 장난감 가게는 다 등장한다. 숍 형태의 가게부터 천엔샵, 프리마켓의 장난감 가게까지. 언제나 그렇듯 두 분 모두 이러쿵저러쿵 불평불만도 많으시고, 가끔 기분좋게 아부도 해주신다. 장난감에 별반 관심없는 나조차 오색찬란한 사진 앞에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들여다보느라 눈이 아플 지경. "저건 뭐지, 마징가 아니야!" "오오, 건담이다!"
 
술이 빠지면 또 섭하지. 편의점 맥주부터 시작, 도쿄 모퉁이 할머니의 술집까지 어쩌면 그렇게 기가 막히게도 찾아내는지 원. <어시장 삼대째> 만화에 나온 전설의 '시샤모'(은어구이와 맛이 비슷하다고 함, 포장마차에서 구워 통째로 안주삼아 먹는다고)구이 사진을 보는 순간, 침이 꼴깍 넘어갔다.
 
절대로 말해두는데, 이 책은 일반적인 도쿄여행기는 아니다. 이 두 분께 여행사 코스에 나온 '도깨비 무박 2일 여행'이나, '하코다 4박 5일'같은 정직하고 착한 코스를 기대하신 분들은 없으리라 믿지만 말이다. 술, 만화, 장난감, 마구잡이 여행, 이우일, 현태준, 뜬금없는 칭찬과 불평. 이 중 한 가지라도 마음에 드신다면 이 책을 잡으시라.
 
외국어.실용담당 김세진
(sarah2002@aladin.co.kr)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재미있게 놀 것을 권함"
 
조약돌과 휘파람 노래
에일런 스피넬리 지음, S.D. 쉰들러 그림, 강미라 옮김 / 봄봄
 
현재는 항상 미래의 담보물입니다. 초등학교 때는 중학교를, 중학교 때는 고등학교를, 고등학교 때는 대학교를, 대학교 때는 취직을, 미혼일 때는 결혼을, 젊었을 때는 노후를 말이죠. 하지만, 가끔은 걸음을 멈추고 '지금 나는 행복한가? 너무 바쁘지 않은가? 나의 다른 부분을 너무 심심하게 방치해두지 않았는가?'를 생각할 필요도 있습니다. <조약돌과 휘파람 노래>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은 항상 준비해야 할 미래가 '삶'의 한 부분이지만, 언젠가는 내 인생도 -별탈없이 흘러가기만 한다면- 겨울을 맞이할 겁니다. 그때 정말 필요한 것은 '현재의 행복'과 '과거의 추억'이 아닐까 합니다. 보잘 것 없는 조약돌과 바람이 가르쳐 준 춤과 노래가 들쥐 가족의 겨울을 행복하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쉽게, 미래에게 현재의 주도권을 넘겨줘서는 안되죠. 마스터 키튼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인생을 허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에일린 스피넬리는 책의 내용을 몇번씩 반추하게 하는 매력을 갖춘 작가입니다. 그녀의 또다른 그림책 <소피의 달빛 담요>도 강추!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은 삶의 애잔함과 고단함, 그 속에서 건져낼 수 있는 작은 아름다움을 영롱하게 그려내지요. 소리없이 눈물이 흐르지만 입가에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그런 느낌입니다. 남편 제리 스피넬리도 <스타 걸>과 <난 열 살이 되고 싶지 않아>로 예술성과 대중성을 골고루 갖춘 동화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정말 '부부만세'라고 할까요?
 
어린이담당 류화선
(yukineco@aladin.co.kr)
 
 
"당신은 평생을 걸 수 있는 열정이 있는가"
 
4의 규칙 1, 2 
이안 콜드웰 외 지음, 정영문 옮김 / 중앙M&B
 
사실대로 말하면 이 책의 초반부는 무척이나 지루하다. 100 페이지를 넘기기가 쉽지 않아 몇번이고 책을 다시 꺼내 처음부터 읽어야 했다. 하지만 거기만 지나고 나면 20대 초반의 패기만만한 네 친구의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책은 추리의 탈을 쓰고는 있지만 이야기 전체를 아우르는 단어는 '열정'과 '우정' 이 아닌가 싶다. 등장인물 모두 놀라울 정도의 집중과 열정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믿음과 틀에 도전하며 희망과 미래를 향해 달려간다.
 
책을 읽으면서 대학교 때의 내 모습을 많이 돌아보았다. 그때 나에게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앞으로의 인생, 지금의 삶에 대해 열정이 있었고 꿈이 있었다. 평생을 걸 수 있는 무엇이 있을 거라고 매일 밤을 마음 맞는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호기있게 외쳐대곤 했었다. 잊지는 않았지만 잠시 제쳐두었던 스무 살의 내 모습을 책을 덮으며 겹쳐보았다. 늦지 않게 다시 앞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책.
 
친구들에게 한 권씩 선물로 보낼 생각이다. 야, 그때 우리가 했던 말 아직 기억하지? 우리, 한 번 다시 뭉쳐볼까.
 
음반.DVD담당 서현
(mirinae@aladin.co.kr)
 
 
"어려운 책이 많아서 재미있는 세상"
 
기계 속의 생명
클라우스 에메케 지음, 오은아 옮김 / 이제이북스
 
<벌거벗은 여자>, <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완역본 Vol. 1> 등 한번씩 짚고 넘어가주어야 할 좋은 대중과학서가 많이 나온 9월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일이라면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를 완역하리라는 집념을 가진 출판사 승산의 그간의 노력이 이처럼 결실을 맺는 걸 본 일이다. 내로라하는 과학책 번역가들이 여럿 달라붙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책이 완성되어 가고 있는데, 과연 의미있는 일이 되려면 널리 읽히는 수밖에 없겠도다.
 
<기계 속의 생명>은 도저히 일반대중을 위한 책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원제는 <The Garden in the Machine>이고 인공생명(Artificail Life)의 연구현황과 제문제를 다룬 책이다. "어려워 어려워"하면서 읽었고 읽고나서도 제대로 이해한 건 별로 없다. 그래도 자꾸 흥미가 가는 건 인공생명을 통해서 생명의 개념을 새로 정립하고 생물학의 영역도 재정의하게 되리라는 전망이 벌써 이처럼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기 때문이다. 미래에,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의 단어가 될까? 지금처럼 여전히, 유한해서 아름다운 것으로 이해될까?
 
편집장 김명남
(starla@aladin.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요츠바와 함께라면 오늘도 쾌청!"
 
요츠바랑!
아즈마 키요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
 
열심히 찾아본 적이 없기 때문인지 여직껏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이번 달,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행운 만땅의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네 잎'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는 만화 <요츠바랑!>. (요츠바 = 행운의 네 잎 클로버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의적 해석 -_-;;)
 
<아즈망가 대왕>이 키드키득 푸하하 웃게 만드는 즐거운 책이었다면, <요츠바랑>은 보기 드물게 즐거운 만화인 한편 마음 따뜻한 데까지 있어 더욱 행복했다. 대체 이 수상쩍은 인물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갈지는 앞으로 한참을 읽어야 알 수 있겠지만, 그 한참동안 나는 요츠바 때문에 나날이 행복해질 것을 확신한다.
 
* 덧붙임 : 이번 달 <요츠바랑>이 가장 큰 의지가 되었다면 <노다메 칸타빌레 9>는 내게 상상 못할 시련을 가져다 주었다. 대체 치아키 님에게 무슨 일이!!! '그것은 축구에서 동료 선수가 골을 넣었을 때 포옹하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치아키 님의 말씀에 300% 신뢰를 보내며, 작가 토모코 니노미야는 10권 이후의 행보에서 더이상 나에게 시련을 안겨주지 말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ㅜ.ㅜ (일본에서는 10권이 9월 13일에 발매된다고 합니다 ;;;)
 
인문.예술담당 이예린
(yerin@aladin.co.kr)
 
 
"올해 최고의 앨범 중 하나라 감히 단언할 수 있는..."
 
네눈박이 나무밑 쑤시기 - Nenoon
네눈박이 나무밑 쑤시기 / Beatball(비트볼뮤직)
 
'네눈박이 나무밑 쑤시기' 라니... 처음 앨범을 받아들었을 때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 느낌이었다. 뭔가 낯설고 기묘하며 잘 와닿지 않는 기분. '술과 춤, 몽환의 디오니소스적 총천연 만화경 사운드' 라는 헤드카피는 또 얼마나 이상한가. 예전부터 활동하던 그룹이라는 건 어찌어찌 거쳐서 알고 있었지만, 내가 아는 건 그게 다였다.
 
하지만 이 앨범은 '대박'이다. 말 그대로 버릴 거 하나 없는 진짜 '대박' 이다. 첫 곡 'Eye... Piece' 에서 들려주는 꽉 짜인 연주는 느슨한 자세로 건방지게 음악을 듣던 나를 단번에 빡 기합이 들게 만들었다. 그 다음 곡 'Chordless' 부터는... 뭐라 쓸 말이 없다. 오만 가지 느낌이 듣는 내내 머릿속에 나타났다 사라지고 심장의 두근거림이 잠깐씩 귀에 걸리는 드럼 소리, 기타 소리에 빨라졌다 느려진다. 잊을 수 없는 보컬의 강력한 마력은 또 어떻고.
 
이 앨범을 듣는 1시간 남짓은 일하는 내 자리 좌우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CD들이 푹 고개를 숙이는 시간이다. 어디 작고 어두운 골방에서 맥주캔 하나 두고 끝없이 플레이 켰으면 싶다. 아... 또 일이 손에 안잡히네... 이제 해체한 그룹으로 다시 새로운 녹음이 나오기는 힘들다고 한다. 얼마 찍지 않은 이거 단 한 장 뿐이다.
 
* 사실 이쪽 일을 하지 않았으면 이런 앨범을 알기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새삼 세상에는 내가 아직 모르는 대가들이 많고 접하지 못한 앨범이 많구나 하는 걸 느낀 한 달이었다. 더 많은 앨범을 찾고 소개하는 일에 대한 짜릿한 흥분이 이 글을 쓰며 새삼 느껴진다. (Very Very Special Thanks To Beatball Music)
 
음반.DVD담당 서현
(mirinae@aladin.co.kr)
 
 
"상처없이 피어나는 꽃은 없다."
 
동방박사의 선물
에밀리오 파스쿠알 지음, 배상희 옮김 / 파랑새어린이
 
이 달에 나온 신간 중에서는 유난히 소년들의 성장담이 많았다. 시게마츠 기요시의 <소년, 세상을 만나다>, 로버트 코마이어의 <초콜릿 전쟁>. 그리고 에밀리오 파스쿠알이라는 낯선 스페인 작가의 작품 <동방박사의 선물>이 그 책들이다. 세 권 다 성장으로 고통받지만 꿋꿋하게 그 고통을 이겨내는 씩씩한 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래도 세상을 긍정하는 소년들의 이야기를 담아서, 모두 내 마음대로 좋은 책들이지만 특히 <동방박사의 선물>이 마음에 든다.
 
<동방박사의 선물>은 책으로 성장기를 치유하는 이야기다. 이야기도 감동적이었지만, 이야기와 함께 한 책 순례(<오디세이아>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 그리고 <돈키호테>에서 한국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다른 스페인 문학 작품까지) 덕에 더 즐거운 여행이었다. 그리고 세상과 끝내 타협하지 못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남긴 '유산'에서는 눈물을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해 눈을 깜빡였다.
 
p.s. 책 속의 주인공들과 동갑인 남동생에게 이 세 권의 책들의 내용을 말해주면서 권했지만 한 마디로 거절당했다. '즐!'이라나. 동생의 말을 빌자면, 지 이야기를 굳이 책으로 보는 바보가 어디에 있냐고 하는데,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책에서까지 현실과 마주하게 하려고 한 내가 나쁜 누나다. 그래도 나는 <데미안>이나 <토니오 크뢰거>를 읽으며 위안을 받은 세대였는데... 쯔읍. 그래도 동생아, 시게마츠 기요시와 로버트 코마이어, 에밀리오 파스쿠알은 너 같은 소년이 이 책들을 읽어주길 바랐단다.
 
어린이담당 류화선
(yukineco@aladin.co.kr)
 
 
"여름의 끝,  내 마음을 움직인 두 권의 책"
 
달려라! 하루우라라
시게마츠 키요시 지음, 최영혁 옮김 / 청조사
 
1. 사실 <달려라! 하루우라라>는 두 가지 이유에서 내게 외면받을 뻔 했다. 첫째, 일본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말 이야기라고, 그게 무슨 상관이람 하는 삐딱한 생각. 둘째,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감동적 이야기란 말이지, 아아, 난 눈물을 쥐어짜는 휴먼스토리 별로 안 좋아하는데(이건 말 얘기긴 하지만;). 그런데 무심코 읽게 된 신문기사 한줄에 순간 눈가가 젖어들었다.
 
경주마는 네 살을 전성기로 치니 여덟 살인 하루우라라는 은퇴할 나이. 하루우라라는 애초에 '달리기는 틀린 말'이었다. 발목이 가늘어 몸집이 작을 수 밖에 없었고 폐활량도 떨어졌다. 예민한 성격 탓에 레이스 전에는 여물을 먹일 수 없어 정작 경주에서 힘을 못 썼다. 1998년 데뷔전에서 하루우라라는 꼴찌인 5등을 했다. 하루우라라는 이후 6년 동안 내리, 꾸준히, 줄기차게 졌다. 99연패가 될 때까지 최고기록은 3등.
 
하지만 월평균 2회 꼴로 레이스에 참가한 하루우라라는 성실하다. 뒷심이 딸려 우승은 못해도 반드시 중간에 한 번은 치고 나간다. 온 힘을 다해 뛴다는 얘기다. 기수들은 안다. "기분이 나쁘면 기수를 떨어뜨리려 하거나 우물쭈물 달리는 말들도 있죠. 하지만 하루우라라는 늘 전력 질주를 합니다." - 동아일보
 
책은 이야기의 화제성에 비해 의외로 담담하게 서술된다. 집단 따돌림, 말더듬, 가장의 외로움... 언제나 주변부에 놓인 인물들에 집중했던 시게마쯔 키요시(<비타민 F>, <안녕, 기요시코>)가 지은이라는 점도 이 책의 호감도를 증폭시켰다. 심드렁하고 의미없어 보이는 일상 속에 영차, 다시 힘을 내게 해주는 희망의 존재 하루우라라.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흔하지만 필요한 감동'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2. 제목만 보고 아무 정보도 모른 채 침 흘리고 있는 책들이 몇 권 있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도 그중 한 권. 야구 팬이기도 한데다가 또 저렇게 멋진 제목이라니! 그 작가의 다른 작품이 나왔길래 얼른 집어들고 퇴근. 단 몇 장을 넘겼을 뿐인데 생각했다. 아,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라니! 사실, 이 책은 아무나에게 권해주기 참으로 곤란하다. 문장은 뚝뚝 끊어지고 특별한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소설읽기에 익숙한 독자가 아니라면 당황할 수도 있다. 또 작가의 감수성에 어느 정도 '싱크로'하지 못한다면 영 재미없는 작품일 수도. 그러나 내게는 충분히 전작 읽기 리스트에 이름을 넣을 만한 작가로 낙점. 편집장께 빌린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가 기다리고 있어 너무 기쁘다. ^^
 
문학담당 박하영
(zooey@aladin.co.kr)
 
 
"천년이 걸려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 치요코"
 
천년여우(Millennium Actress)
콘 사토시 감독 / 대원DVD
 
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유일한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상영된 바 있는 [천년여우]를 꼽겠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함께 제5회 일본 미디어 예술제 애니메이션 부문 대상 수상, 2002년 도쿄 애니메이션 어워드 극장영화부문 최우수 작품상. 이런저런 수상경력을 줄줄 읊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틀림없이 알아볼 수작이다.
 
관동대지진 때 찾아온 한 남자, 그가 전해준 "평화가 찾아오면 내 고향의 하늘을 보여줄께"라는 말과 '가장 소중한 것'을 열 수 있다는 열쇠. 그것을 간직하고 평생에 걸쳐 그를 쫓는 소녀가 영화의 중심에 있다. 단 한 번 찰나의 만남을 평생의 운명으로 여기고 살아간다는 모습은 어리석게도, 아름답게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나는 이제 그를 쫓는 나의 모습을 사랑해요"라고 말했을 때 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영화의 복잡한 흐름과 줄거리 자체를 받아들이기 싫었던 관객도 모든 것을 하나로 녹인 이 대사 앞에서는 무너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뒤를 잇는 대성이라는 곤 사토시 감독의 과거와 현실을 넘나드는 환상적인 영상도 비할 데 없이 아름답고, 그에 어우러지는 음악 또한 기가 막히다. 국내에 미개봉(단편영화제가 자주 열리는 중X시네마에서 그나마 잠깐 상영), 삐리리 DVD라도 구해볼 양으로 애써보던 찰나, 다행히도 정식으로 출시되었다. 이런 저런 거장의 찬사를 덧붙이는 마음을 알아주길! (보세요보세요보세요, 라는 레이저빔이 담겨 있다.)
 

* 캐릭터 디자인, 작화감독 -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혼다 타케시, [메모리즈], [인랑]의 이노우에 토시유키
* [천년여우]는 영상으로 이야기하는 시이며, 올해 내가 본 가장 영상이 아름다웠던 영화이다. - 빈센조 나탈리, [큐브] 영화감독
* '짝사랑의 환상과 광기를 그린 자극적인 작품. 나는 이 영화에 진심으로 감동했다, - 대런 애로노브스키, [레퀴엠 포 드림], [The Fountain] 영화감독
 
외국어.실용담당 김세진
(sarah2002@aladin.co.kr)
 
 
"당신, 청춘을 잃어버린 건 아니신가요?"
 
너, 외롭구나
김형태 지음 / 예담
 
술자리에서 선배 이야기가 나왔다. 타의 모범이 되는 방정한 생활과 4.5에 가까운 학점에도 토익점수가 안 돼 S전자 시험에 미끄러졌다는 선배는 기나긴 한숨과 함께 그냥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해야겠다고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러지 않아도 우울하던 술자리는 더욱 우울해졌고. 나는 왜 대학까지 나온 우리 청년들이 이렇게 취직, 공무원 시험 빼고는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고 해야 하는 일도 없는지 더욱 우울해졌다.
 
제목부터도 허전했던 가슴 저 한구석을 후비는 이 책은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직업만 없는 것이 아니라 싸가지도, 희망도, 미래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도, 진짜 인생 이야기를 해 줄 선배도, 학교도 없는 불운한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바치는 따끔한 충고다.
 
그냥 위안이나 좀 받을까 해서 펼쳐본 사람들은 먼저 종아리부터 맞는다. 변명이나 좀 하고,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 매만 더 맞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책이 좋단다. 아파도, 기분 나빠도, 서러워도 좋은 건 이런 말 한번 해 준 어른들이 없어서가 아닐까.
 
경제.컴퓨터담당 윤성화
(rain@aladin.co.kr)
 
 
"당신은 '왜'를 알고 계신가요?"
 
예술 담당자인 예린씨의 휴가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만나기 힘들었을 책. 예린씨께 감사를! 아니, 예린씨 여름휴가에 감사를! 8월에 감사를! 인생에 감사를! 좋은 책을 만나면 이렇듯 고마운 마음 전할 데가 많아지는 것을!
 
건축 사유의 기호
승효상 지음 / 돌베개
 
책의 서문에는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다. 영화 [토탈 이클립스]의 한 장면. 시를 두고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던 랭보와 베를렌이 '시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격론을 벌인다. 그 때 랭보가 상징주의 시단의 거장이던 베를렌에게 건낸 한 마디, "당신은 시를 어떻게 쓰는지를 알지만 나는 시를 왜 쓰는지를 안다!"
 
지은이는 '왜'라는 본질을 잃고 언어를 유희하는 방법에만 의존하는 베를렌에 랭보가 가했던 질책이 자신에게는 '당신은 기술에만 의지하면서 건축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당신은 건축을 왜 하는지 아는가'라는 물음으로 다가왔다고 고백한다. 사실 서문만으로도 제 몫을 톡톡히 하는 이 책은 이 질문에 마주서서 스스로가 찾아낸 답이라 할 만하다. 건축물을 만나러 나선 여행길에서, 건축에 새로운 정신 새로운 삶을 담아낸 20세기의 건축가에게서 힌트를 얻으면서.
 
"당신은 건축을 왜 하는지 아는가"라는 화두가 어디 지은이만의 것이랴! 읽다보면 건축 대신에 저마다의 단어를 넣어 이해하게 되고, 답을 찾아보게 된다. 당장에 손에 잡히는 답이 없으면 또 어떤가, 화두를 잡고 생각해본다는 것, 이 같은 질문에 먼저 마주서 답을 찾은 선배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경험이다. 게다가 한 세기를 빛낸 건축물을 만나는 즐거움까지 가득한 것을.
 
사회.역사담당 김현주
(realsea@aladin.co.kr)
 
 
"겐이치로와 나와 알라딘의 추억"
 
사요나라, 갱들이여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이승진 옮김 / 향연
 
1999년, 인터넷 서점이라는 것을 발견한 내가 처음으로 알라딘에 주문했던 책은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외 3권이었다. 당시에도 이미 시중에서는 구하기 어려웠던 책이라 알라딘과 여러 차례 통화를 거쳐 어렵사리 사게 되었다. 내가 구입한 후 알라딘에서도 바로 품절된 도서, 친구들에게 빌려주면서 의기양양해하는 책(^^;). 앞으로 알라딘에 입사를 하리란 예감 같은 건 전혀 없었던 그 때였지만 왠지 인연이다, 하는 기분은 있었다.
 
<사요나라, 갱들이여>를 읽으며 5년 전 알라딘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당시의 나를 회상했다. 지금의 나를 돌아보았다. 지금의 알라딘도 돌아보았다. <...일본야구>도 다시 꺼내 읽었다. 유명한 서문을 읽었다. 책을 권했던 친구도 궁금해했다. 역시 인연이 묻은 책의 향취란, 아, 당할 수가 없다.
 
예전에 <FBI 심리분석관>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었으나 이 달에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라는 이름으로 다시 선보인 레슬러의 책도 내맘대로 좋은 책. "대체 왜, 끔찍하고 흔하지도 않은 연쇄살인범의 심리에 신경을 쓰느냐?"는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대해서. 답은 몇 가지 있다. 도시의 인간은 범죄를 업고 산다. 범죄=도시인 측면이 상당히 크다. 반면 극도의 스트레스를 안은 정신병자=살인자인 것은 결코 아니다. 정신분열자에 대한 부당한 배척이나 살인자에 대한 부당한 공감은 이 점을 헷갈리는 것에서 비롯하는 바가 크다. 인간의 극한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해서 알고 싶기 때문이다.
 
편집팀장 김명남
(starla@aladin.co.kr)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물만두 2004-09-01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인자들과의 인터뷰... 이 책은 반드시 사고 말거야요...

starla 2004-09-01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무서운 장면 묘사가 나오지만 재미 있습니다. 프로파일링이란 것에 대해서 좀 실망할 수도 있지만 ^^

zooey 2004-09-05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예린씨. 치아키님은 이미 단단히 발목 잡혔다구요. 현실을 부정하려 하지 마세요. 흐흐. 노다메 파이팅!

방긋 2004-09-05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반갑다!!! 'FBI 심리분석관'!!!
그 당시에 꽤나 재밌게 읽었는데, 지금은 CSI다 뭐다 해서 너무 흔한 이야기가 돼 버렸다.
그래도 이 책 덕분에 프로파일링은 쪼금 알게 됐다고 자부한다. ^-^

플레져 2004-09-06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성화님, 얼마전에 신문 기사에서 뵜어요.
음음 그러셨군요...부럽습니다! ^^
(뜬금없지만...) 화이팅!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