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반까지, 알라딘 편집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내맘대로 좋은 책이 잠시 연재를 중단(?)한 사이, 신입 편집직원 두 분이 오셨습니다. (누구일까요, 찾아보세요^^;) 편집장님도 바뀌었구요. 여러분들도 모두 별고 없으셨길 바라며, 새로 꾸린 편집팀에서 2008년 내맘대로 좋은 책 첫번째 소식을 보내드립니다.

"만원 지하철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건조하고 팍팍한 날들입니다. 책도 안 읽히고요. 12월에 읽은 책을 꼽아보니 일곱 권 정도 되는데 기억에 남는 책이 별로 없네요. 내맘대로 좋은책을 오랜만에 쓰니, 이런 얘길 해도 되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말입니다, 그 팍팍한 책읽기 라이프에 한 줄기 빛이 있었으니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시리즈입니다. 심심해서 들췄다가 푹 빠져서 읽었습니다. 출퇴근 길에 한 권씩 읽으니 시간이 어찌 빨리 흐르는지 만원 지하철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사실 '실록'이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신념과 투쟁, 성공과 실패의 기록인가요. 그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일컬어 다만 '재미었다'고 말하는 게 실은 조금 불편합니다. 그러니 너무너무 재밌다는 말은 이만 접겠습니다.

"어디까지가 정사에 기록된 것이고 어느 부분이 야사에 소개된 이야기인지 모호했다. 이 대목에서 결심이 섰던 것 같다. 조선 정치사를 만화로 그리자, 그것도 철저히 <실록>에 기록된 정사를 그리자. 곧이어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조선왕조실록> CD를 구입하였다. 돌이켜보면 참 무모한 결심이었다. 특정한 출판사와 계약한 상태도 아니었고 실록의 한 페이지를 직접 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작업에 전념한다는 미명 아래 회사부터 그만두었으니, 내 구상만듣고 이런 대책 없는 결정에 동의해준 아내에게도 뭔가가 씌웠던 모양이다. 궁궐을 찾아 사진을 찍고 화보 자료를 찾아 헌책방도 기웃거렸다."
 
"포부는 거창하였고, 노력 또한 부끄럽지 않을 만큼 하였으나 독자 여러분께 재밌고 유익할지는 자신이 없어 사랑을 고백할 때와 같은 떨림으로 삼가 이 책을 내놓습니다."

 
어찌보면 평범한 머리말인데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거창한 포부와 용기와 엄청난 노력 덕분에 읽고 웃고 배우며 살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박시백 씨 고맙습니다. 앞으로 나올 아홉 권도 부디 건필하세요.

 



"옥토끼가 동편에 서서 맑은 기운을 마시고 있..."

신년 계획을 세워 본다. 신년 계획을 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경건함과 굳은 의지 그렇지만 열린 마음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니까,


 

 

 

 

검은 몰스킨의 경건함과 파버카스텔 UFO 캡의 아름다운 단단함, 지워짐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HB 연필의 열린 마음 같은 것. (저축은 신년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다. 경박하지 않기는 물론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하얀 노트의 첫 장에 무언가를 끼적이는 것은 언제나 죄스럽고 부끄러운 일. 하여 그 네댓 줄의 문장을 이곳에 옮길 수는 없고, 그저 몇 권의 책으로 대신해 본다.


 

 


 

그러니까 경건함, 굳은 의지, 열린 마음 같은 것. 그러니까 어쩌면 치유, 같은 것.
 
작년 1월, '옥토끼가 달을 보고 노래할 궤'라는 제목으로 이 글을 썼다. 올해 신년사주는 '옥토끼가 동편에 서서 맑은 기운을 마시고 있'단다. 이런 걸 융의 표현대로 '동시성'이라고 해야 할지, 쿤데라적인 의미에서의 '운명'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다. 어쩐지 쓸쓸한 새해다.






"과학이 인간의 모든 기초를 설명해준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만..."

한마디로 속이 다 후련한 책이다. 이전의 과학 서적들이 보여주지 못한 답답한 부분을 깨끗이 정리하는 멋진 책이었다. 통섭, 과학과 인문학의 조화 이런 말은 많이도 떠들지만 이 책만큼 완벽하게, 아름답게 보여주는 책은 없지 않을까.

사실 한동안 생물학, 좁게는 진화생물학 쪽 책을 많이 봤었다. 과학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내게 진화생물학이 알려주는 새로운 사실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내겐 정말 다윈이 말한 것처럼 ‘도덕과 철학이 새로운 기초를 갖게 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일단 인간의 모든 건 진화과정에서 나왔다라는 명제에 완전히 동의하고 나니, 나머지 다른 이야기들은 하나마나한 이야기로 들렸다. 게다가 많은 과학자들이 은근히 표현하고 있는 자신감, 이제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인문학자이며 그전의 인문학과 예술은 과학적 근거를 가지지 못한 구닥다리라는 그런 자신감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아닌데, 그런 걸로는 부족한데.

하지만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는 이런 답답함을 해결해주었다. ‘아하, 역시 과학만이 진리를 발견하는 게 아니야. 이들 예술가들은 당시 과학자들이 모르고 있을 때도 이미 진리를 알고 있었잖아.’ 프루스트의 소설이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것은 그의 기억에 관한 통찰이 정말 진실이라고 내가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과학적으로도 사실이라고 하지 않는가! 난 이제껏 설렁탕이나 사골 국물이 왜 맛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건 짠맛도, 쓴맛도, 단맛도, 신맛도 아닌데 대체 왜 맛있지? 그런데 정말 그런 ‘고기맛’이라고 할 만한 맛이 있단다. 요리사들은 몇천 년 전부터 알고 있던 것을 과학은 이제야 알아냈다고 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처음에는 청중들에게 최악의 평가를 받다가 차차 걸작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건 그의 음악이 그전의 음악과는 너무 달랐지만 과학적으로 봤을 때는 조화로운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조화로운 음악에는 귀를 열게 되어 있다. 아, 그래 나는 이런 설명을 원했어! 과학과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설명, 예술이 왜 아름다운지를 설명하는 과학을 말이야! 

과학이 인간의 모든 기초를 설명해준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기초만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가? 과학적 사실을 아무리 나열해도 감동을 주진 못한다(물론 아름다운 수학이나 물리학에 어떤 감동을 느끼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진짜 감동을 주는 것은 과학적으로 올바른 사실(시적으로 말하자면 진실)을 도구로 삼아 엮어내는 예술이다. 이 책은 예술이 과학만큼이나 현실을 잘 보여준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감동을 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과학과 인문학의 진정한 통섭이라면 이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그런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케세라세라"

이따금 생각한다. ‘말’이란 어쩜 이렇게 따분할까. 세상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만한 것들이 너무 많이 떠돌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언어’만큼 아름다운 것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찬 순간에, 어쩔 수 없이 늘어놓은 그 모든 말들, 그 어딘가에 스며든 '아름다움'의 흔적이 비치는 드문 순간들. 그것은 소위 폐부를 찌르곤 한다는 명쾌한 발언일 수도, 비가 그쳐갈 즈음 나뭇잎에 튕겨 오른 물방울 같은 ‘명랑’일 수도 있다. 신기하게도, 바라만 봐도 눈물이 복받칠 것 같은 문자들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것이다. 비록 지금이 새벽 두 시에 가까워지고 있고, 마감 시간은 이미 넘겨버린 탓에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지만. 각설하고, 기억에 남는 몇 개의 말(이 담긴 책)을 담는다.

<리스본行 야간열차>는 근래 읽은 시집 중 가장 좋았다. 물론 나는 시집을 잘 읽지 않는다. 담당 분야가 바뀌고 나서도 별로 변한 것은 없다. +고양이도 좋아하지만, 기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말하라, 기억이여>는 근래 읽은 책 중 가장 인상적인 도입부를 지녔다. 물론 나는 이런 장황하고 탐미적인 문체에 굴복하는 편이며, 그래서 <토지>도 좋아하지만, <토지>를 끝까지 읽지는 않았다. <대성당>은 올해 읽은 책 중에 거의 최고였다. 하지만 막상 리뷰를 쓰자니 쓸 말이 없었고, 미뤄둔 상태다. 이 작품집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는 것이 과연 필요한 일이려나 싶었기 때문이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도 좋게 읽었다. 그런데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심지어는 그의 글 솜씨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라고 느끼기까지 했다. (오만� 寗朗纛�용서하시라) 스냅 사진의 참맛을 알려면 아직 몇 십년이 더 필요한 것일까?

 

 

 




<하늘의 뿌리>와 <새벽의 약속>은 근래 가장 기대하는 책이지만, 아직 각각 네 페이지만 읽었을 뿐이다. <자살의 이해>는 적어도 <한낮의 우울>보다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서 반사회적인 경향을 발견하고 있거나, 용기가 필요한 분들에게 권한다. <잠자는 거리, 가라앉은 지층>은 감수성 풍부했던 군인 시절부터 눈여겨보던 시집이지만, 조금 실망했다. 기대는 컸는데, 이렇게 올곧은 작풍일 줄은 몰랐다. <월광 게임>은 그나마 소득이었다. 에이토 대학 추리소설연구회의 이야기가 아직 두 편 더 남았다니,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인지도 모르겠다. <회복하는 인간>은 최고는 아니되 감동적 책읽기가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지만, 나는 이미 그의 팬이다. 어찌할 것인가.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일 뿐. 어쨌거나 즐! 겁게 읽었거나, 즐겁게 읽기 시작했거나, 즐겁게 읽고 있는 책들. 신년이고 해서 10권. 새해에는 좀 더 성실하길, 새해니까 멋대로 목표 삼아 본다.








 







"행복은 과정이다."

2007년에서 2008년으로 달력의 숫자가 바뀌었는데도 별반 느낌이 없다. 주변을 둘러봐도 비슷하다. 다가오는 새해를 반기고 새로운 희망을 품고 이야기하기에는 우리들 사는 게 너무 바쁘다. 여유가 없다. 아둥바둥 열심히는 살지만 가끔씩은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일까 행복의 의미를 다루고 있는 책들이 평소와는 다르게 의미 있게 읽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행복'은 진부하거나 혹은 사치스러운 단어다. 늘 노력은 하지만 잡을 수는 없는 존재. 손에 쥐고 있지만 조금만 잘못해도 깨지기 쉬운 유리병과 같다. 그래서일까 행복은 언젠가는 가져야겠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여유가 없는 나중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들이 지금 행복한가 아닌가만 생각해서는 항상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대신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지속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꿈꾸는 합격, 취업, 집장만이 이루어진다면 당연히 날듯이 행복하겠지만 그렇다고 그때까지 불만족하고 불행하게 살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때도 행복해야겠지만 오늘도 분명 행복해야 한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모레는 내일보다 더 행복해야 한다. 행복은 과정이기 때문이다.






"고맙습니다."

10대의 사춘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들 한다. 어른이 되기 전에 겪는 신체적, 정신적 홍역..하지만 그런 시기가 살면서 꼭 한 번으로 끝나는 건 아닌 것 같다. 어느 덧 서른이라는 나이가 훌쩍 다가와 있는데도, 아직도 갖가지 고민들과 선택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니 말이다.
때때로, 성장통을 겪게 될 때에 나보다 먼저 이 시기를 살아낸 이들에게서 조언을 구하곤 하는데, 산다는 것은 그냥 사는 일일뿐이라고,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 준 이 글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강금실- 여성 최초 법무부 장관으로 우리에게 유명한, 글 좀 쓴다는 그녀의 책을 들추면서 나는 단정짓듯 대부분 유명인의 자서전에 등장하는 잘난척(?) 또는 대단한 길로 가는 멘토링을 기대했나 보다.

뜻밖에도 인간적인 면모를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는 글들은 대단한 그녀의 타이틀에 대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참 솔직담백하고 친근했다.

종교든, 영화나 무용이든 여러 방면에 대한 풍부한 감수성을 담은 글들, 혹은 소신있는 생각들을 비추는 글들이나, 그녀 주변의 소소한 일상과 가치관에 대한 고민을 느낄 수 있는 글들은 대단한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사는구나 하는 묘한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어찌 생각해보면 살아가는데 기본적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 할 수 있는 인생의 의미나 가치 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니, 가르침을 받은 것 또한 확실하다.
 
지나고 나면 또 소멸되어 버릴 것들에 대한 고민은 이제 날리라고 말하는,..여전사의 면모보다는 보라색 스카프의 감성이 떠오르는 그녀의 조곤조곤한 얘기를 들어보시길.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본문 중에서)..

내 청춘의 흔들림을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음과 동시에, 나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연륜에서 나오는 지혜들을 젊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하는..나이들어감이 나에게 안겨줄 마음의 충만함을 살짝 기대해 본다.

표지를 보시라..활짝 웃고 있는 아빠, 미소를 머금은 두 아들..모두 힘겨운 듯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아래로 향한 엄마에게 엎혀 있다. 엄마의 소중함은 잊은 채, 매일 밥주고 청소해 주는 사람인냥 부려먹기만 하던. 세 부자에게 'You are Pigs'라는 간단한 메모 한 장을 남긴 채 떠나버린 엄마..그 뒤에 세 부자의 일상은 알 만하다. 
 
문장의 반복에서 오는 리듬감과, 곳곳에서 등장하는 귀여운 돼지그림, 남녀 역할에는 구분이 없다는 교훈 등등 재미있고 좋은 책인것만은 확실하나. 그 점은 간과하더라도 또 하나 떠오르는 건 어머니의 얼굴.. 부끄러움과 죄송함을 느낄 이들은 비단 나뿐만은 아니리라.
 
이 책 속의 세 부자와 다름없이 매일 엄마 뭐해줘 뭐해줘 외쳐대던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엄마 죄송해요.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나에게 이 책은 요리책이었을까?

그제와 어제와 겹치지 않는 점심 메뉴를 궁리한다. 퇴근 후에 텅 비어 있는 밥통을 보고 백미고압으로 설정하면 15분 만에 밥을 지을 수 있다는 용기를 얻는다. 아침 점심은 부실의 극치를 달리다가도 저녁이면 이를 보상받겠다는 심리인지 폭식에 빠지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그리고 남는 것은 탄식이다. ‘선두가 필요해!’
* 선두란, 만화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이 먹는 알약 형태의 간단한 식품.

시장기와 따뜻한 음식, 그리고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시간 앞에 행복을 느끼는 것이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의 음식행복지수는 얼마일까. 먹는다는 것이 행복이라기보다는 의무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탄식에 빠져 있다 용기를 주는 책을 만났다.

신선한 제철재료를 준비하고, 잘 정리된 레시피를 따라 음식을 완성한다. 그리고 맛있게 먹으려면 이 책은 적당하지 않을 수 있다. 그도 그럴것이 이 책의 베이스는 즉석식품이다. 하지만 이점이 내게는 더할나위 없는 강점이었다. 요리, 음식하면 떠오르는 준비된 재료, 30분 이상 소요되는 조리시간 같은 부담스러운 요소를 털어버리고 싶었으니까. 즉석식품 하면 떠오르는 차가움, 정성 결여 같은 편견을 사하여 주었으며 함께 음식을 먹을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먹는다는 것이 여전히 행복한 일임을 다시금 긍정하게 해준, 그래서 몹시 고마운 책. 




"I don't have time to go round."

문득 생각해보니 이맘 때면 늘 듣던 이야기가 영 뜸하다. "XX씨, 올해 계획은 뭐예요?" 하지만 나는 과거 어딘가에 묶어 둔 매듭도 풀지 못한 채였고 닥쳐오는 시간을 외면하느라 급했다. 무엇이고 밀면 밀려나오는 복숭아뼈 각질이나 마찬가지라는 건데.

물 밑에 내 몸을 적응시키기 위해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거나, 죽어가는 뇌세포를 살리기 위해 물구나무서기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to do thing' 리스트에 더 이상 적지 않기로 한다. 해 내면 기쁨, 못 해도 그만인 것은 그저 기억만 해 두기로 한다. 그보다는 내 몸과 마음을 감싸고 놓아주지 않을 공기와도 같은 무언가가 필요하니까.

'곁가지 쳐내기', 'SImplifying'이라고 하던가.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올해 소원이자 계획이다. 관계, 계발, 문제, 숙고, 과제가 거듭되었으며 나는 점점 희석되어 틀이 나인지, 내가 틀인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I'm still mad as hell, and I don't have time to go round and round and round. - Dixie Chicks 'Shut up and sing' 중

딕시칙스 언니들이 기꺼이 외친 것처럼 '돌아버릴 것 같은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이제 이래저래 허비할 시간이 없으니까', 직격타가 필요하다. 남은 시간은 길지만 또는 짧고, 사람은 약하지만 또는 강하지 말입니다.

1월 초순까지 격하지만 아름다운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애초 '아, 이들에 비하자면 나는...' 해보자는 불순한 의도에서였지만, 뼛 속부터 북러버인지라 대뜸 문장에 감탄하고 작가에 반하고...이러고 있다.

에밀 졸라, 엔도 슈사쿠, 산도르 마라이. 오래 된 돌멩이처럼 단단하고 익숙한 이름들. 구질구질하고 견딜 가치 없는 오늘의 사건사고 하나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라 비엥 로즈, 그럼에도 인생은 아름다워'로 만드는 이들이다. 욕을 퍼붓고, 불을 지르고, 죽이고 죽고 싶어하면서도 살아가는 <테레즈 라깽>에서, 혹은 도처에서 신을 찾다가 파문당하는 <깊은 강>의 신부 견습생에서, 형제같은 친구에게 아내를 빼앗긴 <열정>의 장군에서, 이생에서 즐거움을 느낄 의무 또는 이쑤시개같은 희망을 발견한다. 그러니까 2008년은 'Simplify everything'.





 

 






"간절하고도 무모한 희망에 대하여"

난독증에 시달렸다, 오래. 내 인생 최고의 단편들이 실려있는 <대성당>을 다시 읽었을 때조차 심드렁했고, 현미경처럼 지독한 디테일로 독자를 몰아가는 이언 매큐언의 작품들을 대했을 때도 큰 감흥을 받지 못했다. (물론 <대성당>과 <암스테르담>, <토요일>은 대단히 멋진 책들이다.) 책들이 예전만 못한 것인지 내 상태가 별로인 것인지 그후로 뒤적인 책들도 다 그냥저냥... 그러다 오래 미뤄두었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집어들었다. '---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찬사가 오히려 책에서 나를 밀어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이 그랬다. 머리맡에 쌓아두고 오래 방치되어 있던 상태. 기대감 없이 읽기 시작했다. 조금 읽다가 아니다 싶으면 바로 다음 책으로 넘어가야지.... 570여페이지가 넘는 장편 아닌가.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바로 그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어내렸고, 심지어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사실 굉장히 보편/통속적이고 예상하기 쉬운 이야기이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아프가니스탄의 두 여자가 어떻게 그 세월을 견뎌내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에게 구원이 되었는지에 대한... 마리암과 라일라-두 여자의 성장사와 첫사랑, 남편의 학대와 지독한 결혼생활, 하루하루 격변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정세가 간명한 필치로 지루할 틈 없이 그려진다.

매일매일 폭탄이 쏟아지고 여자라는 이유로 삶의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그 불모의 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희망의 꽃이 피어오를 수 있다는 '뻔한' 이야기에 감명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책에 진정한 고통이 배어있으며, 또한 슬프도록 간절하면서도 무모한 희망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어쩌면 '부서지고, 쳐다봐야 아름다울 것도 없지만, 아직도 저렇게 서있는' 벽 같은 존재가 아닐까. 모든 사람은 '자식'으로 태어나, 누군가의 벗이자 친구, 연인, 보호자로 죽는다. 바로 거기에 삶의 모든 의미가 존재한다. 지나치게 영리하게 씌여진 감이 있지만,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이야기가 미국에서 최고의 책으로 꼽혔다는 사실이 책의 외피에 어떤 혐의를 덧씌우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누군가에게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 두 여자, 아니 두 어머니의 이름을 정말 오래도록 잊지 못할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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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초 2008-01-18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은 책이 많네요.^ㅁ^

2008-01-18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까마귀소년 2008-01-19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기다렸어요~~

legows 2008-01-19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맹 가리 신간은 엄청나게 구미가 당깁니다.

dada 2008-01-20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성당은 두 분이나 추천했네요. 저도 이번 카버 신간은 김연수 작가의 호흡 때문일까, 카버가 꼽은 최고의 단편이 있어서 그런 걸까, 간만에 좋은 책 후회없이 읽고 감사한 마음까지 든 책입니다.

digitalwave 2008-01-21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2008년 신년 내맘대로 책읽기라기보다는 2007년 마지막 내맘대로 책읽기 같은 느낌이 납니다. 뭔가 신나고 흥분되고 두근거리는게 아니라, 버석버석하고 자기반성적이거나 한듯한... 모두들 혼돈의 오춘기쯤을 한참 지나고 있는듯한 말이죠. 읽는데 어질어질하네요. 다들 화이팅하시고 으쌰으쌰하세요! ^^ 그리고 새 편집장님도 빨리 첫 글 올리시기를~~~~~

돌돌 2008-01-25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맹가리의 새책에 앞서 새벽의 약속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자서전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급 호감 반전입니다. 이 시니컬하고 유쾌한 어조. 기대됩니다. 좋은 책들 많아서 좋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