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 상처 입은 뇌가 세상을 보는 법
엘리에저 J. 스턴버그 지음, 조성숙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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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시각계는 빛의 패턴을 그냥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수십억 개의 신경을 계산한 결과를 바탕으로 해석을 보여준다. 뇌는 과거 우리가 보았던 것을 바탕으로 앞으로 보게 될 사물의 형태를 예상한다. 우리의 숱한 판단 착오부터 귀신이나 UFO를 봤다는 착각도 이에 기인한다. 자세한 얘기는 차차하게 될 테지만 뇌는 최선을 다해 이야기를 만든다.

 

「뇌의 무의식계는 인식한 조각을 모두 모아 패턴을 예상하고 필요할 때는 빈틈도 알아서 메운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의미 있는 해석을 하게 된다. 무의식계는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의식계도 같은 이야기를 경험하되 곰곰이 되풀이해 생각해보고, 심지어는 맞는지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뇌의 다른 영역은 멀쩡히 작동하지만 이마앞엽겉질만 손상된 환자들이 만들어내는 시나리오에서는 자기숙고라는 이마앞엽겉질의 인지 능력이 발휘되지 못한다. 의식의 감독을 받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의 빈틈 메우기 과정은 중간 점검 없이 예측하고, 경험 조각을 모으며, 심하면 말도 안 되는 해석과 기괴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뇌가 손상되었을 때에만 이런 시나리오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사고, 기억, 두려움, 바람 등에 맞춰 무의식이 이은 조각보가 우리의 정신을 차지하고 은유적인 이야기까지 탄생한다. 우리의 꿈이 대체로 기괴한 이유이다. 또한 고차원적인 의사결정이나 자기숙고에 개입하는 이마앞옆겉질이 밤에 휴먼 상태에 빠지는 것도 그에 일조한다. 케테 콜비츠와 루이스 캐럴의 기록을 보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증후군을 앓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들 작품에서 그러한 증상을 감지할 수 있다. 살바도르 달리 같은 초현실주의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듯 우리가 예술과 문학에서 추앙하는 상상력과 표현력의 큰 근거는 흔히 연결짓는 ‘광기’가 아니라 뇌의 여러 증상이 발현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환각’이라고 하면 정신질환, 신경질환, 불법 약물 등을 떠올리기 쉽지만 시각적 환각 증상이 많이 생기는 찰스보닛증후군 환자에게는 신경학적 문제가 아니라 시각적 문제 때문이다. 안톤증후군 환자는 시각계와 그것을 감독하는 상위 계층의 감각 영역 사이의 연결이 끊어져 있어 시각겉질이 타협하는 순간을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시각에 문제가 없다고 착각한다. 찰스보닛증후군 환자처럼 방출 환각이 생기면 뇌는 진짜 시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만든 이미지를 진짜로 본 것이라고 착각한다. “찰스보닛증후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증후군, 대뇌다리환각증의 환각은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겹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그리고 이런 겹침 현상은 무의식 회로가 만든 꿈이 잠들지 않은 의식에 침입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생겨난다.”

뇌는 감각 경로의 상호 교차를 허용하고 감각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을 때 입 모양을 보면 그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하다.” 요즘처럼 코로나19로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는 상황에서 대화할 때 답답함을 느낄 텐데 바로 이 때문이다. “시야를 이루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눈을 통한 시각적 탐지가 아니라 그런 시각적 탐지와 관련된 의식적 경험일지도 모른다.”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 습관인지, 의식인지에 따라 선수의 성적이 바뀐다는 사실은 뇌에는 행동을 지배하는 두 개의 평행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개념을 뒷받침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충분히 많이 연습하면 습관 체계에 통제권이 넘어가 무의식적으로 그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의식의 비습관 체계는 그 행동에서 해방되어 다른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멀티태스킹 존재지만 이 시스템이 항상 잘 돌아가는 건 아니다.

 

「뇌에 정보를 저장하고 검색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기억을 절차기억(procedural memory)과 사건기억(episodic memory)으로 나누는 것이다. 절차기억은 방법에 대한 기억으로 자전거 타는 방법, 매듭 묶는 방법, 키보드 치는 방법, 운전하는 방법 등이 해당된다. 행동 절차를 많이 연습할수록 절차기억도 강해진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건기억은 과거의 경험, 감정, 장소, 집에 오는 길에 우유를 사오기로 하는 일과 같은 생각 등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 평생 일어난 여러 사건을 기억하는 방법이다. 절차기억과 사건기억은 저장하는 정보 유형도 다르지만 일어나는 뇌의 영역도 서로 다르다. 사건기억은 뇌 안쪽 깊숙이 관자엽 옆에 위치한 해마에 저장된다. 사건기억은 습관화되지 않은 행동을 할 때 활성화되고 십자형 미로 속의 생쥐처럼 습관적 행동을 할 때는 잠잠하다. 반대로 절차기억은 바깥줄무늬체에서 일어난다. 이곳이 습관 형성을 책임지는 영역과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습관적 행동은 바깥줄무늬체의 담당이고, 해마는 습관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해마를 비활성화시켜도 실험쥐가 무의식적으로 길을 찾아 움직이는 데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습관 체계를 이용해 행동하면 그 행동에 대한 기억은 사건기억을 이용하는 해마에는 저장되지 않는다. 출근길 운전자가 그날 아침 운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행동은 사건기억에 저장되지 않으면 그 행동과 관련된 이미지(옥외광고판 등), 소리, 감정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렇게 이루어진 행동은 습관적 절차를 조용히 강화한다. 그것이 전부다. 습관은 사건기억에 정보를 기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건기억에서 정보를 가져오지도 못한다. 사건기억에는 접근조차 불가능하다.” 우리가 많은 것들을 깜빡 깜빡 하는 이유다.

상상과 움직임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 심상 훈련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믿을만한 연습 시뮬레이션이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밝혀졌다. 단 조건이 있다. 저자는 뇌과학자였던 질 테일러가 뇌질환을 앓고 회복하며 도움된 기법을 담은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에서의 오류도 지적한다. “심상 훈련이 뇌중풍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질 테일러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 효과가 없는 것일까? 부상 선수와 뇌중풍 환자 모두 근육이 약해진 것은 똑같은데, 왜 심상 훈련이 선수에게는 효과가 있고 뇌중풍 환자에게는 효과가 없는가? 이쯤에서 심상 훈련이 운동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심상 훈련이 자극하는 뇌 영역은 신체 동작에 영향을 미치는 뇌 영역과 똑같다. 심상 훈련이 성공하려면 먼저 운동겉질에서 근육까지의 신경 경로가 온전해야 한다.”

뇌가 손상되면 정체성의 여러 부분, 즉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을 알아보는 능력, 자신의 개인사에 대한 기억, 인격의 일관성, 자신과 다른 사람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는 능력, 사고와 행동에 대한 통제감 등이 파괴되는 걸 볼 수 있다. 뇌는 우리가 ‘인간’이자 ‘나’일 수 있는 시스템이다.

 

「거울신경은 하품 전염과 관련 있다고 여겨진다. 게다가 사회적 친밀함도 하품의 전염성을 높인다면 사회적 친밀함과 거울신경의 활동에 서로 연관이 있음을 나타낸다. 오늘날 많은 신경과학자는 거울신경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행동을 머릿속으로 흉내내는 것이 그 순간의 경험을 체감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주위 사람을 이해해야 할 때 흔히 하는 말처럼 거울신경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기억은 우리라는 사람을 결정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우리의 개인사는 우리의 자아상을 만들고 저장된 지식을 모은다. 무의식계는 기억을 암호화하면서 우리의 인격도 형성한다. 무의식은 비디오카메라처럼 경험을 있는 그대로 담지 않는다. 대신 무의식은 그 이야기에서 우리 자신이 맡은 역할에,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에 집중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오면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그 순간의 감정은 무엇인지, 무엇을 기대하고 두려워하는지, 그 순간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맥락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맥락을 바탕으로 뇌는 초고를 쓰기 시작한다.」

                                      

「우리는 감정을 발산한 순간을 기억한다. 9/11 테러 공격 뉴스를 들었을 때 카푸치노를 마시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 세계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장본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세계를 격동시킨 뉴스를 들었을 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그의 인생사에 한 축을 차지했다. 그날 그의 하루에서 스타벅스에 있었던 것은 중요한 요소였던 반면, 세계무역센터가 정확히 몇 시에 공격당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뇌는 개인사를 담은 스냅사진을 배열할 때 자아를 보호하는 방식을 자주 따른다. 뇌의 무의식을 뉴스 채널이라고 한다면 이는 한쪽으로 치우친 뉴스 채널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당원이 진보 성향의 텔레비전을 자주 시청하고 공화당원이 보수 성향의 라디오 대담을 청취할 때가 많은 것처럼 뇌의 무의식계는 우리의 자아인식과 세계관에 들어맞는 경험을 합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뇌는 우리의 관점이 유지되게 도와준다. 뇌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가 중요시하는 것을 담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가끔은 시간 순서를 조금씩 뒤섞거나 우리가 믿고 싶은 이야기와 맞지 않는 사소한 세부 사항을 멋대로 생략한다. 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의식적 사고와 결정 능력을 보호하기 위한 매우 건강하고 적응적인 기제다. 기억억제는 뇌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생략 오차를 사용하는지 알려주는 극단적 예라고 할 수 있다.」

                             

「기억억제가 감정적 트라우마에서 자아를 보호하듯이 말짓기증은 기억 손상이나 혼동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경학적으로도 이치에 맞는 추론이다. 말짓기증은 보통 자기중심 사고를 책임지는 안쪽관자엽의 손상으로 생긴다. 안쪽관자엽은 열혈 대학 농구팬이 경기를 보면서 선수와 자신을 동일시할 때 점화되는 영역이다. 안쪽관자엽이 손상되면 자아의식에 위협을 느낀다. 어쩌면 말짓기증은 뇌가 그런 자아의식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기제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느끼는 신체적 증상들은 곧장 현실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외계인에 납치되어 생체 실험이나 강간을 당했다는 주장이 비슷비슷한 것은 ‘수면마비’ 증상으로 보인다. “수면마비는 종종 환시와 환청도 함께 가져온다. 수면마비가 왔을 때 이상한 소리를 내지만 나중에 그게 무슨 소리였는지 선뜻 알아내지 못한다. 방에서 섬뜩한 존재가 보이거나 낯선 존재가 들어왔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환각은 으레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고, 심하게는 복잡한 이야기 구조까지 갖는다. 그러면서 수면마비의 환각 경험은 의식이 있는 상태의 악몽으로 변한다.”

‘영적 체험’도 신경학적으로는 다르게 본다. “신경과 의사는 관자엽 뇌전증을 앓는 환자들이 겪는 증상을 “과종교증(hyperreligiosity)”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관자엽 뇌전증 환자 100명 가운데 한 명에서 네 명은 로버트가 본 것 같은 하늘의 존재가 등장하는 종교적 허상이나 각성 상태를 경험한다. 어떤 환자는 발작의 영향이 이마엽까지 미쳐 행동방식이 영원히 변하게 된다. 종교의 가르침을 독실하게 실천하는 신도가 되는 것이다. 심리학자 마이클 가자니가의 설명에 따르면 어떤 사람은 관자엽 뇌전증이 원인이 되어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빈센트 반 고흐도 관자엽 뇌전증 증상을 많이 보였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등 여러 번 종교적 환상에 빠졌다. 마이클 가자니가는 모세, 마호메트, 부처 등 종교적 상징 인물도 그들의 행동으로 판단하건대 같은 질병을 앓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밝은 빛을 보았고, 환희를 느꼈으며, 우주의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는 ‘임사 체험’도 심장마비 생존자나 전투기 조종사가 뇌의 산소 결핍에서 겪은 환상이나 뇌와 눈으로 향하는 혈류가 줄어들어서 겪는 렘방해 상태와 유사했다.

‘카프그라증후군’은 주변인 모두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한 가짜로 바꿔치기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감정적으로 강렬한 기억은 더 확신하며 떠올리고 이야기에 구멍이 있다는 생각은 거부한다.” 외계인이나 신을 만났다거나 사후세계를 봤다는 사람들에게 위와 같은 지적을 했을 때 화내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기이한 경험에는 기이한 해석이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뇌는 외계인 납치 같은 해석을 생각해낸다. 정말로 이상하지만 그것이 딱 맞는 설명이다. 이런 해석에는 감정적 경험을 풀이할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사건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무의식계의 성향이 반영되어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왜 조현병 환자들이 이상한 기술(광선총이나 헬륨 전류)이나 종교적 존재(성령이나 악마)가 자신을 조종하고 있다고 말하는지, 왜 그들이 텔레비전 등장인물(패트릭 더피)이나 가상 인물(존스 씨)과 소통한다고 주장하는지, 왜 자신이 아닌 다른 불가사의한 힘이 머릿속에서 혼란을 조장한다고 주장하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뇌는 그 사람의 인격이나 믿고 싶은 것에 알맞은 해석을 만들어낸다. 종교적 믿음이 강한 사람은 머릿속 목소리가 신성한 존재의 목소리라 주장하고, 스릴러 소설 애독자는 FBI나 CIA 요원에게 감시당한다고 걱정한다.” 음모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간혹 자신의 예측이 맞았을 때 “거 봐라.” 하지만 더 많은 예측 오류는 눈 감는다. 우리는 진정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하지만 다르게 볼 수 있고 이용할 수도 있다. 진정 나를 위해서라도.

 

「왜 무의식계는 완전한 서사를 유지하려 하는가? 왜 무의식계는 혼란스럽거나 모순된 경험을 억지로 이어 붙이는 해석을 만들어내는가? 이유는 우리의 자아의식을 지키기 위해서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주변 세상의 질서와 체계를, 그리고 그 세상 안에서 우리가 처한 위치를 이해하려는 욕구가 있다. 욕구와 욕망을 고민하고,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려면 자신의 개인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개인사를 되돌아보면서 스스로를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기억 상실, 인지나 사고의 빈틈, 모순된 경험, 외적 파괴 등은 뇌가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우리 개인의 서사에 위협을 가한다. 무의식계는 자아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유지해야 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극단적 행동도 일삼는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 뇌는 자아를 유지한다는 목표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자아를 분열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의식계 덕분에 뇌가 만드는 이야기를 실행에 옮길 수 있다.

그러면 무의식계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무의식계는 그런 이야기를 만든다. 무의식계는 단편으로 끊어진 경험 조각들을 끌어와 필요하면 빈틈을 메우고 우리의 인생사를 순서대로 배열한다. 무의식계는 우리의 자아의식을 구축한다. 또한 자아의식을 보호하고 유지하며, 심지어는 분열까지 이용해 나쁜 생각과 기억을 몰아낸다.

왜 그러는가? 정체성을 그토록 신성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화적 관점에서 말하면 자기숙고를 하는 유기체일수록 생존 확률이 높다. 우리는 생존을 중요시하며, 자신과 후손을 보호하는 데 투자를 마다하지 않는다. 뇌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온전히 유지해주기에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통찰할 수 있다. 뇌의 도움으로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고, 곰곰이 추론하고, 결정을 심사숙고하고, 목표와 욕구에 딱 들어맞는 행동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정체성을 파악할 때 자신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하고 세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뇌가 건강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유지하는 일에 특히 중점을 두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깨어 있는 매 순간마다 뇌의 바탕에 깔린 논리 회로는 쌓아온 경험을 흡수하고 빈틈없이 조사한다. 인간의 정체성을 성숙하게 만들고 개선하기 위해서다. 깨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매일 밤 꿈을 꾸는 동안에도 무의식이 골몰하는 목표는 같을 수 있다. 일부 신경학자들은 꿈에 자아의식 발달을 돕는 기능이 있다는 가설을 말한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꿈이 항상 1인칭 시점인 것일지도 모른다. 꿈은 행동을 하고 직접 관찰을 하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미리 알아보는 예행연습이다. 꿈은 자아의식 발달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종합해보면 이 책은 뇌를 의식계와 무의식계라는 두 평행 시스템으로 본 개념, 정체성이나 자아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 이론을 계승 발전시켰고(《워싱턴 포스트》 수석 편집장 메리엔 세게디의 평), 감각 지각부터 습관, 최면, 언어, 학습에 이르기까지 뇌의 작동방식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뇌과학 백과사전(V. S. 라마찬드란,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등의 평)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 뇌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인간의 판단과 행동이 비논리적인 이유를 또 한 번 밝히며(마이클 셔머의 평), ‘올리버 색스의 발자취를 좇으면서도 그만의 새롭고 참신한 호소력으로 새로운 신경과학 교양서’(예일의학대학 교수 할 블루먼펠드의 평)의 모범을 보여줬다. 내게도 지금껏 읽었던 신경과학 책의 종합이었다. 뇌과학이 궁금하다면 이 책은 분명 필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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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3-11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무의식>을 읽었었는데 흥미로웠죠. 이 책으로 제가 발견한 건 인간의 어리석음과 비논리적임, 이에요.
뇌와 관련한 것들은 인간을 알게 해 줘서 늘 관심이 갑니다. 소개하신 책을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AgalmA 2020-03-16 16:38   좋아요 0 | URL
어떤 책을 읽든 인간의 어리석음을 발견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 책 읽고나니 뇌과학 책은 더 새로운 정보가 나오기 전까지 당분간 안 읽어도 되겠다 싶더군요.
어수선한 날들 평안하시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 알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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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란 무엇보다 육체적인 것이다.’ - 프로이트

 

 

훌륭한 품성과 재능, 좋은 스승을 알아보는 능력까지 있다면 이런 책이 나오게 된다. 올리버 색스의 신경과학 책은 알렉산드르 R. 루리야의 영향이 매우 컸다. 휴링스 잭슨, 쿠르트 골드슈타인, 헨리 헤드와 함께 알렉산드르 루리야는 신경학의 아버지로 평가된다. 이 책에서는 그들의 여러 면모가 비판 비교되었는데 색스는 알렉산드르 R. 루리야를 특히 존경해 활발히 서신 교환을 하며 교류했다. 루리야는 신경학 분석에 있어 연구적 저작물 ‘고전적 과학’과 소설에 가까운 전기풍 이야기책 ‘낭만적 과학’이란 이중성이 있다고 보았고 그의 후기에는 후자에 더 집중했다. 고전적 과학이 담을 수 없었던 인간의 상상력과 기억을 담은 그의 후기작 『산산히 부서진 세계의 남자』(국내 제목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2008, 도솔)가 상실에 대해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2007, 갈라파고스, 품절)가 과잉에 대해 다뤘듯이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1985) 글의 줄기도 그러하고, 『깨어남』(1973)도 “엘도파를 투여하기 전의 놀라운 결핍 상태(운동불능증, 무의지증, 무력증, 무반응증 등)와 엘도파 투여 후의 무서운 과잉 상태(운동과다증, 과다의지증, 과다수축 등) 사이의 균형”을 이루려 했다. 무엇보다 이들의 공통점은 병이 아니라 인간 주체를 중심에 놓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사(이야기)가 필요했다.

 

「인간미 넘치는 임상체험을 글로 남기는 습관은 19세기에 절정을 이룬 후, 신경학이라는 객관적인 과학의 도래와 함께 쇠퇴하였다. 루리야는 이렇게 말했다. ”글로 남기는 힘, 이것은 19세기의 위대한 신경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의 보편적인 자질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 우리는 이 힘을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

 

 

루리야가 각각의 환자에 긴 세월 전념하며 책을 썼듯이 올리버 색스의 모든 책이 환자의 이야기에 더 집중했던 것도 이런 신념에 기반한다. 우리가 뇌와 정신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연구한 건 160년도 되지 않는다.

 

 

「뇌와 정신의 관계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1861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브로카가 뇌 좌반구의 특정 부위에 손상이 생기면 그에 해당하는 특정한 장애 즉 언어상실증이 반드시 뒤따른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이러한 발견은 대뇌신경학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그후 수십 년에 걸쳐 사람 뇌의 ‘지도’가 그려짐에 따라 언어, 지각 등의 능력은 각각 그에 해당하는 뇌의 특정 ‘중추’들이 관장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세기 끝 무렵이 되자, 좀더 예리한 관찰자들이 등장했는데, 그중 특히 프로이트는 자신의 책 《언어상실증》에서 기존의 뇌 지도가 지나치게 단순하며, 모든 정신활동에는 매우 복잡한 내적 구조가 있고 그와 똑같이 매우 복잡한 생리학적 원리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인지나 지각 능력에 발생하는 특정한 장애를 연구하면 그 점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인식불능증’이란 용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언어상실증이나 인식불능증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좀더 새롭고 세련된 과학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프로이트가 염두에 두었던 새로운 과학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러시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A. R. 루리야(그리고 그의 부친 R. A. 루리야), 레온체프, 아노킨, 번스틴과 그 밖의 여러 과학자들이 힘을 합쳐 새로운 분야를 창조하고, 그것에 ‘신경심리학’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새로운 과학은 루리야의 일생에 걸친 연구에 힘입어 풍부한 결실을 낳았다. 그러나 혁명적인 중요성에 비해, 신경심리학이 서유럽으로 전파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경심리학은 《인간의 상위뇌피질 기능》(영어판은 1966년)이란 기념비적인 책 안에 체계적으로 집대성되었다. 또한 일종의 전기 즉 ‘병적학’이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영어판은 1972년)에도 실렸다. 이 책들은 그 나름대로 거의 완벽하지만, 루리야가 전혀 손을 못 댄 영역도 있었다. 《인간의 상위뇌피질 기능》은 뇌의 좌반구가 관장하는 기능만을 다루었다. 그리고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의 주인공 자제츠키 역시 좌반구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사람이었다. 우반구에 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신경학과 신경심리학의 역사는 좌반구 연구의 역사라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열등한’ 반구라고 불리는 멸시를 당할 정도로 우반구에 대한 연구가 소홀하게 다루어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좌반구의 손상 부위와 그에 따른 증상을 밝혀내는 것이 비교적 쉬운 일이었던 데 반해, 우반구의 각 영역에 해당하는 증후군은 알아내기가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우반구는 좌반구보다 좀더 ‘원시적’인 것으로 비하되곤 했다. 반면 좌반구는 인간의 진화가 만들어낸 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주장이 옳다. 좀더 정교하고 전문화되어 있으며 영장류의 뇌, 특히 인간의 뇌에서는 가장 나중에 발달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을 인식하는 능력 즉 생명체가 생존하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할 능력을 담당하는 것은 우반구이다. 이 우반구에 컴퓨터가 연결되어 있고 그 컴퓨터에 해당하는 것이 좌반구이기 때문에 이쪽은 말하자면 프로그램과 도식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고전적인 신경정신학은 사실보다 도식 쪽에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우반구에 원인을 가진 증후군이 나타나면 그것을 특이하고 기묘한 현상으로 간주했다.」

 

 

색스가 생각하기에 병은 상실이나 과잉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그 자체를 비정상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신경장애를 넘어, 병에 걸린 생명체인 개인이 항상 반발하고 다시 일어서고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하며 주체성을 지키려는 현상에 주목했다. “정신의학은 훨씬 오래전부터 이러한 역동적인 활동, 즉 수단과 결과가 아무리 기묘하더라도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에 주의를 기울여왔다.” 『깨어남』은 어떤 하나의 병으로 인해 발생한 혼돈의 ‘복구와 재통합’을 묘사한 연구였고, 이후 이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병으로 인해 발생한 혼돈과 그것에서 빠져나오는 복구와 재통합을 다루려 했다.

 

 

「제1부 ‘상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극히 특수한 시각적 ‘인식불능증’의 예, 즉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일 것이다. 나는 이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임상 보고는 고전적인 신경학에서 공리처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이다. 기존의 견해에 따르면 뇌의 손상은 그것이 어떠한 손상이든 ‘추상적·범주적인 태도’(이것은 쿠르트 골드슈타인의 용어이다)를 마비, 상실시킨다. 이것이 마비 또는 상실된 인간에게 남는 것은 감정과 구체적·즉흥적인 태도뿐이라는 것이다(1860년대의 휴링스 잭슨도 이와 거의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음악가 P선생의 경우에는 정반대이다. 그는 감정, 구체성, 개인적인 것, 현실적인 것 모두를 잃어버리고 (그렇다고는 해도 이것은 시각의 세계에 대해서 뿐이지만) 추상적·범주적인 것만을 부둥켜안고 살며 극히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곤 했던 것이다.」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신경학이나 심리학은 모든 것을 다 말하지만, ‘판단’에 대해서만큼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판단력의 결함(P선생처럼 특수한 영역의 장애도, 그리고 더 일반적인 장애인 코르사코프 증후군 즉 이마엽 증후군의 증세를 보이는 환자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정체성의 문제〉와 〈예, 신부님, 예, 간호사님〉 참조)이야말로 수많은 신경심리학적 장애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나 이런 환자들의 경우에는 개별성을 인식하는 능력과 판단력이 거의 재앙 수준에 가까울 수 있는데도, 신경심리학은 그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적인(예를 들면 칸트적인) 의미에서나 혹은 경험론적·진화론적인 의미에서 볼 때 판단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능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동물의 경우 아니 인간의 경우라도 ‘추상적 경향’ 없이 살수는 있지만, 판단 능력이 없다면 당장 사멸하고 말 것이다. 판단은 고등한 생활이나 정신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능임에도, 고전적인(계량적인) 신경학에서는 무시되거나 잘못 해석되어왔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생긴 원인은 신경학 그 자체가 상정하고 있는 가정들 즉 신경학의 진화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전적인 신경학은 고전 물리학이 그랬던 것처럼 항상 기계적인 성격을 띠어왔다. 뇌를 기계에 비유한 잭슨부터 컴퓨터에 비유하는 오늘날의 신경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물론 뇌는 하나의 기계이자 컴퓨터이다. 그 점에 관한 한 고전 신경학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와 삶을 구성하는 정신 과정은 단순히 추상적 혹은 기계적인 과정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대상을 분류하고 범주화할 뿐만 아니라 판단하고 느낀다. 따라서 판단과 느낌을 배제한다면, 우리는 P선생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컴퓨터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느낌과 판단이라는 개인적인 것을 인지과학에서 배제한다면, 그 역시 P선생과 똑같은 결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무서운 비유일 수도 있지만, 현재 우리의 인지신경학과 인지심리학은 P선생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시각인식불능증이나 얼굴인식불능 증세는 망각이나 공백이라는 우물에 갇혀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끊임없이 변동할 뿐 아무 의미도 없는 순간만 사는 삶을 누가 원할 것인가. 데이비드 흄처럼 인간을 ‘무수하고 잡다한 감각의 집적 혹은 집합체’에 불과할 뿐이라 한다면 개인의 정체성은 허구에 불과하다. 색스의 지적처럼 그것은 정상적인 인간에게 적용할 수 없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기 자신의 지각을 파악’하고 ‘지속적인 개체 혹은 자아에 의한 통일을 유지하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알코올로 인한 기억 손상이 심한 코르샤코프증후군의 환자를 살펴보자. 인간은 기억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다. ‘감정, 의지, 감수성을 갖고 있는 윤리적인 존재’(알렉산드르 R. 루리야)이기도 하다. 문제는 깨달을 자신마저 잃어버릴 때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 《마스터》(2012)에 나오는 프레디 퀠(호아킨 피닉스)은 올리버 색스의 이 책에 소개되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지미(<길 잃은 뱃사람>)와 매우 유사한데 난폭한 코르샤코프증후군의 인물이지만 그들은 정신 집중에 몰두하는 행위(ex 종교)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연속성과 현실성을 되찾으려 부단히 노력한다. 색스는 자기 정체성의 극복 힘을 믿는다.

 

 

「지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어쩌면 그가 ‘흄이 말하는 식’의 거품 같은 존재, 인생의 표피 위를 아무런 의미도 없이 이리저리 떠다니는 그런 존재로 전락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일관성 즉 그가 앓고 있는 흄식의 질병을 초월하는 어떤 길이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경험과학에는 그런 길이 없다. 경험과학 즉 경험주의는 ‘영혼’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개인의 인격을 형성하고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쩌면 진료와 관련된 교훈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교훈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코르사코프 증후군이나 치매,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질병에 걸렸더라도, 혹은 심각한 기질적인 장애나 흄이 말하는 식의 용해 상태에 빠져 있더라도, 예술이나 교감, 영혼의 접촉을 통한 재통합의 가능성은 아직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채 조금이나마 남아 있지 않을까? 신경학적으로는 도저히 희망이 없는 걸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오감 외에도 자신이 자신임을 아는 ‘제육감(고유감각-근육, 힘줄, 관절 등 우리 몸의 움직이는 부분에 의해 전달되는, 연속적이면서도 의식되지 않는 감각의 흐름, 1890년대에 셔링턴에 의해 발견됨)’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누구도 제기할 수 없는 우리 몸의 이런 확실성이야말로 모든 지식과 확실성의 출발점이자 기초’라고 생각했고 『확실성에 대해서』에서는 ‘우리 몸의 확실성을 빼앗아버리는 원인, 조건, 상황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며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했다. 고유감각을 잃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드러나는 장애가 없어 종종 거짓말쟁이나 얼간이로 취급되는데, 이들이 느끼는 ‘존재 상실감’ 혹은 ‘비현실감’은 정체성을 유지해주는 것을 잃어버린 상태와 같았다. 편마비 증상으로 자신의 팔다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신체 이미지 장애’ 환자 경우 동작과 지각이 완전히 어긋나 버려 실존적 궁지에 빠진다.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도 있다. 언어상실증 환자나 음색인식불능증 환자는 인간의 목소리에 담긴 모든 표정(말투, 리듬, 박자, 음악성, 미묘한 억양, 음조의 변화, 높낮이) 등을 날카롭게 파악해 보통 사람보다 더욱 뛰어난 표정 이해를 보여주기도 한다. 결손이 마냥 장애인 것은 아닌 셈이다. 신경학에서는 기능하든지 기능하지 않든지 두 가지 가능성에 주력해 ‘결손’이라는 개념을 즐겨 사용한다. 결손의 반대 상태인 기능의 과잉이나 잉여는 엄밀히 따지면 신경학적 개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능의 과잉에서 오는 질환을 논하는 것은 신경학의 기본개념에 대한 도전이다. 자주 볼 수 있고 흥미롭기까지 한 이와 같은 질환에 당연히 기울여야 할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환도 정신의학 분야에서는 주목을 받고 있다. 정신의학에서는 흥분성 장애나 생산적인 질환(상상력 과잉, 충동 과잉, 조증燥症 등)을 질환으로 문제삼는다. 해부학과 병리학에서도 비대와 기형, 기형종과 같은 말을 사용하며 그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생리학에는 그런 말이 없다. 기형종이나 조증에 해당하는 과잉을 가리키는 말이 없는 것이다. 이것만 생각하더라도 신경계를 기계나 컴퓨터로 간주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개념과 비전은 지극히 편협하다. 따라서 좀더 유연하고 현실에 맞게 개념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

제1부에서 다룬 ‘상실’ 즉 기능적 결함에만 주목을 하는 한 그것이 지극히 편협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기능의 과잉도 있을 수 있다고 하면, 결손에만 주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기억상실증뿐 아니라 기억과다증도 있는 것이다. 인식불능증과 반대되는 인식과다증도 있다. 이 밖에도 ‘과다현상’은 얼마든지 많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신경학은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분석하고 결함에 중점을 둔 나머지, 실제 생활을 고려하지 않았다. 실생활이야말로 모든 대뇌 기능의 궁극적 표현이다. 적어도 상상 기능, 기억 기능, 지각 기능과 같은 고도의 기능이 거기에 나타난다. 기존의 신경학은 결함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정신생활 그 자체를 보지 못했다. 실제의 뇌와 정신 상태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바로 그러한 상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뇌와 정신이 고양된 상태, 과도하게 활발한 상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병은 단순히 결손적 기능 장애가 아니다. 도취나 흥분에 대한 광적인 탐님 등 과잉의 상황도 나타나는데 이때 “자아가 병과 제휴를 맺고 한 몸이 되어 독립된 존재이기를 포기하고 병의 산물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 1885년 질 드 라 투렛이 발견한 투렛 증후군은 기묘한 동작이나 생각이 과잉 현상을 보이는 신경학적 장애다. 정서, 본능, 상상에 관련된 모든 면에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수면병 환자(기면성뇌염후 증후군)이나 투렛 증후군은 기존 의학 틀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해 제대로 분석되지 못한 채 잊혔다. 두 증상이 운동과다장애 즉 과도한 흥분 증세의 공통점이 있다는 건 최근에 다시 주목되었다. 이 두 증후군에 대한 건 색스의 『깨어남』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흥분과 충동 강박을 통해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병리 상태는 역설적인 행복감이다. 발작적 회상이 주는 행복감도 있고, 마음의 평온과 순수한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간질도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기묘한 세상과 접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통상적인 상식이 뒤집히는 세계이다. 병리 상태가 곧 행복한 상태이며, 정상 상태가 곧 병리 상태일 수도 있는 세계이자, 흥분 상태가 속박인 동시에 해방일 수도 있는 세계,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몽롱하게 취해 있는 상태 속에 진실이 존재하는 세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큐피드와 디오니소스의 세계이다.」

 

 

병리 상태이든 정상 상태이든 우리가 탄 배는 ‘나는 누구인가-정체성’을 향한다.

 

「우리는 각자 오늘날까지의 역사, 다시 말해서 과거라는 것을 지니고 있으며 연속하는 ‘역사’와 ‘과거’가 각 개인의 인생을 이룬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인생 이야기, 내면적인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와 같은 이야기에는 연속성과 의미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인생이기도 하다. 그런 이야기야말로 우리 자신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기 정체성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이야기,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진실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전기傳記이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우리 자신에 의해, 우리 자신을 통해, 우리들 안에서 즉 지각・감각・사고・행동을 통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무의식중에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물론 입으로 말하는 이야기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생물학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우리는 서로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이야기의 화자로서 우리 모두는 각각 고유한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필요하다면 되살려서라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즉 지금까지의 이야기인 내면의 드라마를 재수집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한 편의 이야기 즉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그와 같은 이야기에 대한 필요성, 아마도 그것이 톰슨 씨가 장광설 만들기에 필사적인 이유를 설명해주는 단서이기도 할 것이다. 연속성, 즉 연속적인 내면의 이야기의 상실이 그를 일종의 이야기광이 되게끔 내몬 것이다. 끊임없이 말할 수밖에 없고 밑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지껄이며 몽상을 말한다. 진실한 이야기 혹은 연속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자기의 내적 세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꾸며낸 이야기를 쉬지 않고 지껄여대는 것이다. 가짜 인간들 즉 유령들이 사는 가짜 세상 속에서 그리고 가짜 연속성 속에서 가짜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내는 상태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흄이 말한 거품과도 같은 존재이다. 철학적 신학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이것은 자아가 충동에 의해 압도당하는 경우에 우리가 걸어가야 할 운명이다. 충동에 압도당한다는 점에서는 프로이트적인 운명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프로이트적인 운명의 경우에는 비극적이기는 해도 이성(의식)이 존재하는 반면에 흄적인 운명은 무의미하고 부조리할 뿐이다.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진정한 인간, 어디까지나 ‘개체’다운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충동과 싸워야 한다. 투렛 증후군 환자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을 방해하는 무시무시한 장벽에 직면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것이야말로 ‘경이’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지만, 그들은 싸움에서 승리한다. 살아가는 힘,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 ‘개체’다운 존재로서 살고 싶다는 의지력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떠한 충동이나 병보다도 강하다. 건강, 싸움을 겁내지 않는 용맹스런 건강이야말로 항상 승리를 거머쥐는 승리자인 것이다.」

 

 

색스의 표현대로라면 단순히 병이 없는 상태가 ‘건강’한 것이 아니라 병과 싸우고 이겨내는 의지력이 ‘건강’이라 하겠다. 우리는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하며 무언가에 의해 끊임없이 규제된다. 우리는 인간이 ‘신경기능과 신경계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복잡한,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사고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라고 여기지만 기질적인 병의 개입으로 변화할 때도 있다. 3부에서는 그러한 환자들이 소개되었다. “제3부의 주제는 관자엽과 변연계에 특이한 자극을 가한 결과 발생하는, 사람을 과거로 이행시키는 심상과 기억의 힘이다. 이것에 의해 우리는 뇌 속이 어떻게 될 때 환영과 꿈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았다.

 

 

「‘무의식의 기억’에 대한 훌륭한 저서를 남긴 에스더 살라만은 자신의 책에서 ‘어린 시절의 신성하고 귀중한 기억’을 간직하는 것 혹은 그것을 되살리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를 역설했다(《순간순간들》, (1970년)). 만일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다면 인생은 아주 무미건조하고 근거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고 한다. 그러한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얻는 깊은 환희와 존재감에 대해, 그녀는 도스토옙스키와 프루스트 등의 자서전에서 많은 인용문을 뽑아 논했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살 수 없는 망명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되살려야 하는 것이다.”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학창시절도, 암페타민에 찌들었던 시절도 이제는 모두 옛이야기가 되었다. 그때와 비슷한 일은 그 이후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촉망받는 젊은 내과전문의가 된 스티븐은 친구이자 동료로서 나와 함께 뉴욕에서 일하고 있다. 후회랄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그는 때때로 향수에 잠기곤 한다.

“냄새로 가득 찬 세계, 너무도 생생하고 너무도 현실적인 그런 세계였답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이었어요. 순수한 지각의 세상, 모든 게 선명하고 생기 있는, 자족적이고 충만한 그런 세상요. 그럴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그 시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개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은 든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후각에 대해 인간이 성장하고 문명화되는 과정에서 억압된 ‘희생양’이라고 쓴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는 인간이 직립을 하고 전생식기 단계의 원초적인 성욕이 억압당하는 과정에서 후각도 함께 억압당한다고 가정한 것이다. 시각이 지나치게(혹은 병리학적으로) 예민해지는 현상은 성도착증, 물품음란증의 경우에 흔히 나타나며 퇴행이나 도착倒錯과 연결된다는 사실이 실제로도 보고되어왔다. 그러나 스티븐의 예에서 보인 탈억제는 그보다는 훨씬 더 일반적으로 보이며 비록 흥분(아마도 암페타민으로 인해 유발된 흥분일 것이다)을 동반하기는 했지만 특별히 성적인 것이나 성적인 퇴행과 연관된 것도 아니다. 이와 유사한 후각과민증(때로 발작을 동반하기도 한다)은 도파민 과민 상태에서도 발생할 수 있고, 뇌염후유증 때문에 엘도파를 투여받는 환자나 투렛 증후군 환자들의 경우에도 발생한다.

어쨌든 억제가 가장 기본적인 지각단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리고 세련되고 범주화되고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식별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헤드가 ‘원시 감각’이라고 이름 붙인 아직 분화되지 않은 원초적인 느낌에 대한 억제가 필요하다.

이러한 억제의 중요성은 프로이트주의자들에게처럼 과소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4부는 지적 장애가 아니라 마음의 ‘질’을 더 헤아릴 것을 강조한다. 관념적·추상적 능력이 지능의 우위일까. 이 장에서 소개되는 지적 장애인들은 구체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을 이해하는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사례였다. 그들을 이해하고 제대로 돕지 못해 상황을 좋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웠다. 헤아리는 능력은 없지만 비상한 수리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쌍둥이 형제를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적응시키려고 억지로 조치를 취해 그들을 그저 우둔한 존재로 만든 경우라든지(<쌍둥이 형제>) 스케치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폐증 소녀에게 가차 없이 치료를 가해 예술능력을 잃게 만든 경우(<자폐증을 가진 예술가>) 등이다. 백치천재나 자폐증 천재의 재능을 창조적인 인격이나 개인으로서의 인격조차 고려하지 않고 ‘단 하나 남아 있는 능력’이라든가 ‘조각조각 난 단편적인 기술’로밖에 인정하지 않는 건 우리 입장에서의 편견일 수 있다.

 

 

「자폐증 환자는 추상적이고 범주적인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구체적인 것, 개별적인 것 하나하나가 소중할 뿐이다. 그것은 능력의 문제일지도 모르고 기질의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어떻든 자폐증 환자에게는 그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자폐증 환자들은 사물을 일반화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거나 혹은 일반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들의 세계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물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의 우주에 사는 것이 아니라 윌리엄 제임스가 말한 ‘다중 우주’ 즉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정확하고, 엄청나게 열정적인 개체들로 이루어진 우주에 살고 있다. 그것은 ‘일반화’ 혹은 과학적인 사고방식과는 완전히 정반대에 있는 마음의 상태이다. 존재 형태가 다르기는 하지만, 이것 또한 하나의 리얼한 하나의 현실적 태도이다.」

 

 

「자폐증 환자는 원래 좀처럼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고립적으로 살아갈 ‘운명’에 놓인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에게는 독창성이 있다. 우리가 만일 그들의 내면풍경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들의 독창성은 내부에서 생긴 것, 그들이 원래 지니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을 알면 알수록, 그들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완전히 내부로 향하는 존재, 독창성이 있는 불가사의한 존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일찍이 자폐증은 유아의 정신분열증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증후학적으로 볼 때 완전히 정반대이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항상 외부 세계에서 오는 영향을 호소한다. 소극적이고 타인의 영향을 받기 쉬우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한다. 반면에 자폐증 환자에게 불만을 토로하게 한다면(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의 영향을 전혀 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완전히 고립된 존재라고 호소할 것이다.

“그 누구라도 섬처럼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라고 존 던은 말했다. 그러나 자폐증 환자들은 바로 그러한 존재이다. 본토에서 떨어져 나와 고립된 섬과 같은 존재이다. ‘정통적인’ 자폐증이라면, 그 증상이 3세가 되기 전에 반드시 나타난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본토’의 기억이 전혀 없다. 반면에 호세처럼 나중에 뇌장애로 인해 야기된 ‘2차적인’ 자폐증의 경우에는 기억이 어느 정도 남는다. 그 옛날에 관계를 맺었던 본토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호세는 다른 자폐증 환자보다 영향을 받기 쉬웠고, 적어도 그의 그림에는 자신과 외부 세계와의 상호교류가 나타나 있다.」

 

  

 

이 책을 통해서도 내 리뷰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겠지만 인간과 한 인간이 그의 정체성을 이루며 만들어가는 삶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색스의 면면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다. 그의 다른 책에서도 그런 따스한 마음의 질을 느낄 수 있다. 620쪽에 달하던 벽돌책 『깨어남』이 그저 임상 분석 글이었다면 읽기 굉장히 고역이었을 텐데 그의 그런 면 때문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단순히 기이한 환자나 병에 대한 흥미가 아니라 그가 본문에서도 말했다시피 ‘우리는 그 사람의 이야기,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진실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고’ 우리를 닮은 이야기로서 삶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길 원한다. 최근 색스의 첫 저서 『편두통』(1970)이 국내 출간되었다. 보나 마나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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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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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방역 조치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 코로나19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한국을 공포에 몰아넣으면서 깜빡하고 마스크를 안 쓰고 바깥에 나가면 내 건강 걱정보다 민폐가 되는 것 같아 더 당황스러운 날도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안전 안내 문자를 받으며(이 책 리뷰를 쓰고 있는 와중에도 3번 문자를 받았다) 우리는 어떤 정의를 추구하며 살고 있는지 많은 생각을 했다. 누구에게 근본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일인가. 이런 질병 사태가 생기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인종 차별과 이기주의, 은폐와 왜곡, 책임 탓을 하는 분노로 가득한 말들의 범람을 매일 보게 되는데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나는 얼마나 정의로운가이다.

 

 

마이클 샌델은 가격 폭리 방지법, 상이군인에 대한 훈장, 구제 금융에 대한 찬반 주장을 살펴보며 정의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문제라기보다 ‘복지, 자유, 미덕’ 세 가지 항목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에 주목했다. 즉 우리가 정의를 따질 때는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지,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더 중요한지, 아니면 미덕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지에 대한 논쟁”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누가 무엇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판단하려면, 어떤 미덕에 명예와 포상을 주어야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고대의 정의론은 미덕에서 출발하는 반면, 근대의 정의론은 자유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지만 오늘날은 이 두 가지 견해가 서로 경쟁한다. “정의에 선택의 자유뿐만 아니라 미덕도 포함시키고자 하는 생각은 뿌리 깊다.” 자유를 근간으로 정의를 규정하는 접근법은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이끄는 ‘자유방임주의 진영’과 평등을 옹호하는 ‘공정성 진영’의 대결로 나뉜다.

                           

📖

“우리는 때로 도덕적 추론을 타인을 설득하는 수단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도덕적 추론은 자신의 도덕적 신념을 분별하는 수단이자, 우리가 어떤 신념을 왜 믿는지 이해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중략) 도덕적 사고가 우리의 판단과 원칙 사이에서 접점을 찾는 것이라면, 그런 사고로 정의나 도덕적 진실에 어떻게 다다를 수 있을까? 가령 도덕적 직관과 원칙에 입각해 평생을 헌신하더라도, 그것이 그저 되풀이되는 편견의 타래에 머물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도덕적 사고란 홀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노력하는 것이라고 답하고자 한다. 따라서 친구, 이웃, 전우, 시민 등의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 때로는 그 대화 상대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상상 속의 존재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과 논쟁할 때가 그렇다. 하지만 자기 성찰만으로는 정의의 의미나 최선의 삶의 방식을 찾을 수 없다.”

 

 

우리의 정의 추구는 어떤 식이었던가 . “벤담은 다음과 같은 추론을 통해 자신의 원칙에 도달한다. 우리는 누구나 고통과 쾌락의 감정에 지배된다. 이 감정은 우리의 ‘통치권자’다. 이는 우리의 모든 행위를 지배할 뿐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결정한다.” “벤담에 따르면, 공동체란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허구의 집단’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도덕적 다툼은 알고 보면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하는 공리주의 원칙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둘러싼 이견일 뿐, 원칙 그 자체에 대한 이견이 아니고, 도덕적 논증의 유일한 출발점은 바로 공리 원칙이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다. 공리주의를 좀 더 정교하게 다듬으려 했던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와 무관한 도덕적 이상(인격과 인류 번영)을 주장해서 오히려 공리주의의 한계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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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은 가장 뛰어난 사람도 “때로는 다른 영향과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고급 쾌락 대신 저급 쾌락을 택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누구나 가끔은 tv나 보면서 소파에서 빈둥거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렇다고 렘브란트와 tv 재방송 프로그램의 차이를 모른다는 의미는 아니다. 밀은 이를 지적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만족하는 돼지보다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이 낫고, 만족하는 바보보다는 만족하지 못하는 소크라테스가 낫다. 만약 바보나 돼지가 이 말에 반대한다면, 그것은 문제를 자기 시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급 능력을 신뢰하는 이 표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밀은 이 말에 기대면서, 공리주의 전제에서 벗어나고 만다. 욕구는 더 이상 무엇이 고상하고 무엇이 저급인지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아니다. 이제 그 기준은 우리의 바람과 욕구와는 별개인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이상에서 나온다. 어떤 쾌락이 고급인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더 원해서가 아니라 더 고급임을 깨닫고 좋게 보기 때문이다.”

 

안락사 허용 문제를 생각해보자. 안락사에 찬성하는 대다수는 ‘인간은 자기 목숨을 보전할 의무와 논리’가 아니라 ‘존엄과 연민’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다. 병역 문제는 어떤가. 다른 사람을 고용해 군에 입대시키고 자기 대신 목숨 걸고 전쟁에 참여하게 만든 남북전쟁 때의 대리인 고용과 현대의 모병제는 전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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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을 시민의 의무로 본 가장 유명한 발언 가운데 하나는 제네바 태생의 계몽주의 정치 이론가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1712~1778)의 말이다. 그는 『사회 계약론The Social Contract』(1762)에서 시민의 의무를 거래되는 물건으로 바꾸는 행위는 자유를 증진시키는 게 아니라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자유지상주의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을 존중해야 정의롭다고 말하지만, 대리 출산 계약은 그 문제를 철저히 고려하지 못하는 합의의 결함과 여성 출산 능력까지 사고파는 인간 존엄의 상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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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출산하거나 전쟁을 하는 것처럼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는 행위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도의 대리 출산과 앤드루 카네기가 남북 전쟁에서 자기 대신 싸울 군인을 고용한 사례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사례에서 옳고 그름을 생각하다 보면 정의에 대해 둘로 갈라져 경쟁하는 두 가지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자유 시장에서 우리가 하는 선택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세상에는 시장에서 취급하는 것이 영예롭지 못하며 돈으로 살 수 없는 미덕과 고귀한 재화가 존재할까?”

“인간의 권리가 공리에 좌우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권리의 도덕적 근거는 무엇일까? 자유지상주의자들의 대답은 이렇다. 그들은 자기 소유권이라는 기본권이 침해될지 모르기 때문에, 개인은 타인의 복지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내 생명, 내 노동, 나라는 인간은 오직 내게만 오롯이 속하며, 사회가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껏 살펴보았듯이, 자기 소유라는 개념을 일괄되게 적용해 보면, 열렬한 자유지상주의자들만이 찬성할 수 있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즉 낙오자들을 보호할 안전장치가 없는 간섭받지 않는 시장, 불평등을 해소하고 공동선을 장려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수단이 배제된 최소 국가, 합의를 완벽한 행위로 칭송하여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합의한 식인 행위나 노예 매매 등)마저 인정하는 사고방식이다.

소유권과 제한된 정부를 지지했던 영국의 위대한 이론가 존 로크John Locke(1632~1704)조차 제한 없는 자기 소유 권리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기 생명과 자유를 자기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하지만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주장하는 로크의 이론은 하느님을 끌어들이는 탓에, 종교의 논리에서 벗어나 권리의 도덕적 근거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사회적 행위의 규준을 찾으려 할 때, 그 행위의 특수한 목적 혹은 목표부터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마누엘 칸트(1724~1804)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를 인간 본성에 맞는 목적이나 선의 적합성 문제로 보며 권리보다 선을 앞에 둠으로써 ‘우리가 스스로 선을 선택할 여지를 남겨 두지 않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반대하면서,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를 그 행동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 그 행동을 유발한 동기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칸트는 의무와 권리에 대해서 “우리가 자신을 소유한다거나 우리 목숨과 자유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주장에 기반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성적 존재이기에 존중받아야 하는 존엄성을 지녔다는 생각에 근거를 둔다.” 존 롤스도 권리가 선에 앞서는 선택의 문제로 본다. 미국의 ‘소수 집단 우대 정책’에서 우리는 그런 동기를 찾아봐야 한다. ‘다양성 증대’라는 동기는 ‘입학 허가가 수혜자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사회적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이자 ‘(학교와 사회의) ’공동선‘이라는 관점이다. 이 논리에 반박하는 사람은 부당한 원칙이자 현실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어떤 논리를 대든 우리는 정의에 영예를 받을 자격을 따진다.

 

 

📖

“정치인들은 “열심히 일하고 규칙을 따르는 사람”은 앞서갈 자격이 있다고 끊임없이 외치고, 아메리칸드림을 실현한 사람들의 성공은 그들의 미덕이 반영된 결과라고 칭송한다. 이러한 확신은 좋을 수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 이 확신에 집착하면 사회 결속이 어려워진다. 성공을 자기 행동의 결과로 여길수록, 뒤처진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성공을 미덕에 대한 포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 끈질긴 믿음은 그저 오해며, 근거 없는 생각이다. 롤스는 행운의 도덕적 임의성을 지적하며 그 믿음에 강력히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롤스와 드워킨의 주장처럼 정의를 자격 논쟁으로부터 단호하게 분리하기란 정치적·철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정의는 흔히 영예의 측면을 갖고 있다. 분배 정의에 관한 논쟁은 누가 무엇을 갖는가의 문제일 뿐 아니라, 어떤 자질이 영예와 포상의 가치가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둘째, 사회 기관이 사명을 정하고 난 뒤에야 어떤 특성이 장점으로 떠오른다면 문제가 복잡해질 수 있다. 정의에 관한 논쟁에서 흔히 거론되는 각종 기관들(학교, 대학, 전문직, 공직 기관 등)은 사명을 멋대로 정할 수 없다. 이들 기관의 사명은 최소한 어느 정도는 이들이 장려하는 고유의 선에 따라 규정된다. 법학전문대학원, 군대, 오케스트라 등이 어떤 사명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시점에 따라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어떤 사명이든 괜찮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사회 기관이든 그에 적합한 선이 있으며, 역할의 배분에서 이러한 선을 무시하면 자칫 타락으로 흐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절부터 강조되었는데, 정치의 목적은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개인의 이익 추구를 위해 공정한 규칙을 제공하는 경제적 차원이 아니다. “정치의 목적은 우리의 본성을 표현하고, 좋은 삶의 본질과 인간의 능력을 펼쳐 보이는 데 있다.” 이 뜻은 2천 년 이상 지속되었는데, 미국의 노예제는 1865년에야 폐지되었고, 여성은 1920년에야 투표권을 얻었다. 이제라도 이뤄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인간이 정의와 도덕적 자격을 갖는 길은 멀고도 멀다. 많은 부분 정부가 정의의 집행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도덕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가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

“정부는 좋은 삶의 의미를 판단하지 말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고대의 정치 개념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정치의 목적은 경제 교환을 용이하게 하고 국가를 공동으로 방위하는 책임에 그치지 않는다. 정치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격을 기르게 하고 좋은 시민이 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정의에 관한 논의는 좋은 삶에 관한 논의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썼다. “이상적인 법의 본질[을 조사하기] 전에, 가장 바람직한 삶의 본질부터 밝혀내야 한다. 그것이 불분명하면, 이상적인 법의 본질 또한 불분명할 수밖에 없다.”

 

좋은 책이 대체로 그렇듯 마이클 샌델은 이 책 요약을 친절히 해주었다.

 

📖

“우리는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접근법을 탐구했다. 첫 번째 방식은 정의란 공리나 복지의 극대화,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방식은 정의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선택은 자유 시장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행하는 선택(자유지상주의의 견해)일 수도 있고, 사람들이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 있을 경우 ‘하게 될’ 가상의 선택(자유주의적 평등주의의 견해)일 수도 있다. 세 번째 방식은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쯤에서 당신도 눈치챘겠지만, 나는 세 번째 방식을 선호한다. 왜 그런지 설명해 보겠다.

공리주의 접근 방식은 두 가지 단점이 있다. 첫 번째는 정의와 권리를 원칙이 아닌 계산의 문제로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모든 선을 하나의 통일된 가치 척도로 환산해 획일화하여, 그 질적인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자유에 기초한 이론들은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하지만 두 번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 자유 이론은 권리를 중요시하며, 정의는 단순한 계산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권리가 공리주의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중시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유에 기초한 이론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지만, 몇몇 권리들은 기본적인 것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인다. 하지만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권리를 가려내는 것 이상으로, 이 이론들은 사람들의 기호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우리가 공적 삶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취향과 욕구에 의문을 가지거나 시험해 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이들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의 도덕적 가치, 우리가 영위하는 삶의 의미와 중요성,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삶의 질과 특성은 하나같이 정의를 논하는 영역을 벗어난다.

이 부분이 내게는 실수로 보인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이견을 기꺼이 수용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의 원칙이나 절차로 소득·권력·기회 등 모든 것이 정당하게 배분되길 바라겠지만, 정의는 애초에 중립적일 수도 없고 영광, 미덕, 자부심과 인정에 관해 경쟁하는 여러 개념과 복잡하게 관련되어 있다. “정의는 올바른 배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투표 행사로 정치 참여의 소임을 다한 게 아니듯이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우리 모두 해야 할 일이 많다. 관심 어린 관찰, 공동선에 헌신하는 태도 키우기(시민 의식, 희생, 봉사), 시장 논리 및 시장 친화적 사고에 대한 경계, 불평등에 반대하고 연대하며 시민의 미덕 키우기, 정치사회 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공적 참여(도덕적인 참여 정치) 등이다. 정의는 법이나 정부가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2천 년 넘게 그래왔듯이 우리 모두가 움직여야 가까스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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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2-29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흥미롭게 읽은 책입니다. 특히 좋은 방법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해 준 소중한 책이죠. 제 글에 인용을 한 책이기도 하죠.
좋은 문구가 많아 재독할 책으로 뽑습니다. 한때 끝 부분이 시시하다는 등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저는 좋은 책으로 꼽습니다.

“이상적인 법의 본질[을 조사하기] 전에, 가장 바람직한 삶의 본질부터 밝혀내야 한다. 그것이 불분명하면, 이상적인 법의 본질 또한 불분명할 수밖에 없다.” - 이런 멋진 문장이 많죠.

AgalmA 2020-03-01 11:37   좋아요 0 | URL
네, 명문 많지요^^
결국 정의는 내 도덕적 추론과 타인의 추론 사이의 간극을 조율하는 일인 거 같죠. 시대가 혼란하면 이게 참 어려운 일이 되고요.

끝을 시시하게 느낀다는 건 우리가 늘 당위로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있어서 겠지요. 사실 그게 제일 잘 안 되는 것이라 이렇게 문제인데 말이죠.

막시무스 2020-02-29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볼까하는 고민을 강하게 던져주시는 리뷰입니다!ㅎ 즐건 주말되십시요!ㅎ

AgalmA 2020-03-01 11:45   좋아요 0 | URL
베스트셀러 기피하는 습관 때문에 이 책을 너무 늦게 읽은 거 같습니다. 요즘은 좀 바뀌어서 좋은 책이란 입소문 들으면 어서 읽겠다는 욕심을 부리게 돼 더 힘드네요ㅋㅜ
좋은 책을 알아보고 읽는 이가 더 많아져야 할 테지요.
감사합니다. 막시무스님도 평안한 주말 보내십시오^^
 
관계의 과학 - 복잡한 세상의 연결고리를 읽는 통계물리학의 경이로움
김범준 지음 / 동아시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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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매일 실생활에 긴밀한 도움을 주고 있지만 사람들이 거리감을 많이 느끼는 학문이다. 어렵고 생소한 개념들이 많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사람들의 믿음을 지적하게 되는 학문 특징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정다운 인사와 음악으로 채소를 키우면 무럭무럭 자란다는 얘기는 거짓, ‘사랑’이라고 적은 물통 안에 물을 담으면 물 분자의 형태가 예뻐져 건강에도 좋다는 것도 거짓, 게르마늄 팔찌가 혈액 순환을 돕는다는 것도 거짓, 집 아래에 수맥이 있어 잠을 못 잔다는 것도 거짓, 조상 묘의 위치가 후손의 성공을 결정한다는 것도 거짓, 혈액형과 성격이 관계가 있다는 것도 거짓, 태어난 시점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사주팔자도 거짓, 뇌호흡과 텔레파시, 지구 나이 6000년이라는 창조과학도 황당한 비과학적 주장이라고 과학은 연신 비판하는 역할이다. 기술과 지식이 좇아가기 버거울 정도로 늘어가는 현대에서 과학만큼 검증과 비판으로 바쁜 학문도 없을 것이다. 미신이나 초자연적 현상, 종교 등 어느 것 하나라도 믿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을 보고, 좋은 꿈을 꾸면 로또를 사 볼까 생각하는 게 한국 사람의 흔한 심리 아니던가. 과학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과학을 꺼려 하는 사람은 오해까지 있는지도 모른다. 과학은 “지식의 총합이라기보다는 대상을 바라보는 사유의 방식”이고, “수많은 시험결과와 관찰 자료를 모아, 현재 내릴 수 있는 그나마 가장 정합적이고 합리적인 최선의 주장을 하는 것”이다. “과학은 완벽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과 검증에 열려 있기 때문에 가치 있는 거다.” 만물을 통제하는 상상적 존재(神)에게 맡기는 게 아니라, “두려운 진실의 맨얼굴을 용감하게 이성의 눈으로” 마주하자는 게 과학의 취지다. “음악이든 그림이든, 아름다움은 결국 누적된 체험의 결과”이듯이 과학도 그런 과정 속에서 성장해왔다.

 

 

생물학 공부를 하면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숫자가 있다. 우리 몸에는 1,000억 개(정확히는 860억 개)의 신경세포가 있다. 우주 관련 책이나 물리학 책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숫자가 있다. 우주에는 1,000억 개 정도의 은하가 있다. 신경세포 수를 포함해 우리 몸에 100조 개에 달하는 세포가 있듯이 각 은하는 수천억 개가 넘는 별들을 품고 있다. “지구가 우리은하 전체를 한 바퀴 도는 것을 한 해라고 하면,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것은 12월 31일 밤 11시 30분쯤이고, 우리 모두는 우리은하의 1년 중 한 4초쯤 살다 가는 셈이다. 공간적인 면에서나 시간적인 면에서나 우리는 정말로 티끌과 같다.” 존재는 별의 먼지로부터 와서 다시 먼지로 돌아가지만 이 세계는 어느 것 하나 연결되지 않은 게 없다.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을 두루 살펴보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인간은 참 대단하면서 참 하찮게도 느껴지는 양가감정이 든다. 과학을 공부하면서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는 공부’라는 점에서 기쁨과 좌절도 동시에 느낀다. 성과가 아니라 ‘알고자 함’과 ‘나누고자 함’이 인류를 성장시킨 진정한 동력이었다는 것도 깨닫는다.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대중서적 출판보다 논문 한 편 더 써서 연구비를 지원받는 쪽이 훨씬 이득일 텐데도 김범준 교수가 이 책을 쓴 것도 그런 동기에서 나왔다.

 

 

 

이 책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상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해, 현실의 빅데이터를 모으고, 이를 복잡계 과학의 다양한 방법을 통해 설명하고 이해하는 호기심-추동 연구(curiosity-driven research)’에 기반한다. 물이 얼음이 되는 온도의 문턱값이 있듯이 문턱값 예측은 지진과 같은 재난을 대비하는 방법이 된다. 과학은 ‘운’이라고 눙치는 게 아니라 ‘구라모토 모형’ 등으로 현상들이 상호작용하며 때맞음(synchronization)으로 일어나는 것을 설명한다. 정확하게 이용한다면 통계물리학은 세계를 더 명확히 볼 수 있는 지표를 제시할 수 있다. 2016년 한국의 촛불혁명처럼 “비폭력 저항운동이 폭력적인 저항운동에 비해 무려 2배 이상의 성공률을 보였다”는 것을 입증했다. 누적확률분포 도표로 소득세와 재산세를 부과하는 것이 부의 편중을 막는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광화문 광장의 촛불세기 프로젝트에서 촛불을 들지 않아 사진 분석으로는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사람을 ‘암흑물질’로 설정한 것에는 웃음이 절로 터졌다.

 

 

 

 

같은 데이터로도 방법이 달라지면 서로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고, ‘선택치우침’이 있으면 역설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과학은 경고한다. 선거 개표 시 실제 지도에 정당을 표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인구비례지도(키토그램)로 표시하면 더 명확히 상황을 볼 수 있다.

 

 

 

 

개미 한 마리가 그렇듯 인간 개인의 힘도 미미하다. 그러나 집단이 되면 개미도 인간도 놀라운 창발현상(개별 구성요소는 가지고 있지 않는 새로운 거시적인 특성을 전체가 만들어내는 것)을 보여준다. 유머가 넘치는 김범준 저자는 차은우와 본인 비교로 중력파를 설명했는데, 기생충학자 서민이 “저자가 차은우를 닮았다는 대목만 제외한다면 완벽한 책”이라는 평을 달기도 했다(ㅋㅋ). 이세돌과 알파고 승부전에서 저자가 읽어낸 의미도 좋았다.

                            

“사실 내가 이번 승부에서 느낀 것은, 인간의 직관력에 대해 가지고 있던 근거 없던 자만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인간의 위대한 직관도 결국은 프로그램으로 구현 가능한 유한한 단계의 계산으로 대치할 수 있다는 가슴 아픈 깨달음이다. 인간의 위치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그리고 인간도 진화의 연속선상에 놓여 다른 생명체 모두와 기원을 공유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경험한, 이번에는 우리가 신비롭게 여겼던 인간의 지성에서 다시 발견한, 익숙하지만 다른 연속성의 깨달음이다.

‘집중’과 ‘직관’은 우리가 지금까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만에 빠져 자랑스러워했던 인간 지성의 엄청난 능력이 아니라, 결국 어쩔 수 없이 한계 지워진 가여운 인간 지성의 두 약점의 이름이 아니었을까. 얼마든지 넓고도 깊게 볼 수 있는 지성은 ‘집중’과 ‘직관’도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집중’ 없이 한 번에 모두 다 볼 수 있다면, 그리고 ‘직관’ 없이 끝까지 계산해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인간의 ‘집중’과 ‘직관’ 없이 모든 것을 ‘계산’으로 환원해 처리할 수 있는 미래의 지성 앞에서, 사람의 연약한 가여운 지성은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한의 정보를 0으로 수렴하는 시간 안에 계산으로 처리하는 것은 인공지능에게도 당연히 불가능하겠지. 그렇다면 유한한 존재라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이런 한계에 맞서, 인공지능도 ‘집중’과 ‘직관’을 배울까. 그럼 인공지능이 갖추게 될, 인간보다 더 넓은 ‘집중’과 더 깊은 ‘직관’은 인간의 그것과 어떻게 다를까. 인공지능이 스스로를 창조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지성이 만든 지성이 만들 지성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지수함수로 한국의 성씨 분포와 카톡방의 데이터를 비교해 ‘버스트(burst, 잠잠하다가 다시 어떤 일이 후다닥 여러 번 일어나는 현상)’를 설명하는 것과 영화 생태계의 불공평을 비판하는 것도 호기심 많은 물리학자 다운 분석이었고, 분포함수를 통해 득점이나 신기록 경신이 인과적이 아니라 독립적인 사건이라는 도출, 과학책과 소설책의 판매량 비교로 “우리나라에서 출판하는 책들의 판매량의 반감기가 두 달이 채 못 된다는 결과로부터 대부분의 출판된 책들이 1년이 지나면 가장 많이 팔렸을 때에 비해 판매량이 1%에 불과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 흥미로웠다. 브라운 운동(마구잡이로 움직이는 운동)을 만취자의 이동에 비유해 설명하는 것도 재밌는 발상이었다. 영화 《컨택트》를 고전역학으로 볼 때의 해설도 유익했다.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이 미래를 보는 시각은 정반대다. 모든 입자의 위치와 속도가 주어지면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이 고전역학이라면, 양자역학은 입자의 위치와 속도가 동시에 정확히 결정될 수 없다는 ‘불확정성원리’와 아주 작은 변수로도 미래가 크게 달라질 수 있으므로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는 ‘카오스이론’으로 대치한다. 인과론과 목적론적인 고전역학이 설명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양자역학이 말하듯 우리가 정확히 입증할 수 없는 영역도 분명 이 세계에는 존재한다. 과학자들은 늘 말한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게 불가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국이 노벨상을 받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를 반어적으로 비판하는 대목은 조천호 저자가 『파란하늘 빨간지구』에서 밝힌 소회와 다르지 않았다. 학계의 문제도 개선되어야겠지만 한국인의 인식도 상전이(물질의 상이 변하는 것)가 일어나야한다. “모른다는 것을 모르면 우리는 아무것도 더 배울 수 없다.” 자본주의와 각종 카르텔로 돌아가는 세태, 황색 언론과 가짜 뉴스, 기레기 욕을 하긴 쉽지만 각자가 적극적으로 배우려 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 들지 않는다면 세상은 결코 이상적으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투명성, 합리성, 객관성을 방법으로 한 과학적 사유 방식이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내리길. “공통의 기반에 함께 동등하게 서 있어야만 합리적인 추론을 통한 합의도 가능”하고 건강하게 소통하며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제목에 ‘과학’보다 ‘관계’를 더 앞에 둔 이유이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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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1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1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딩 2019-12-31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갈마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AgalmA 2020-01-01 20:37   좋아요 0 | URL
초딩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0-01-24 0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29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하늘 빨간지구 - 기후변화와 인류세, 지구시스템에 관한 통합적 논의
조천호 지음 / 동아시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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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인류의 태동을 말하는 책의 시작은 비슷하다. 138억 년 전 빅뱅이 일어났고 태양계가 은하수의 알맞은 위치에 자리 잡아 원시 지구는 생명이 자랄 수 있는 적당한 환경이 되었다. 지구 나이를 현재 약 46억 년으로 보는데 35억 년 전 엽록소를 가지고 광합성을 하는 세균인 남세균(시아노박테리아)이 지구상에 출현해 단순 원시 생명체가 고등 생물로 진화하는 데 필수 요소인 산소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산소가 있으면 자외선으로 쪼개진 수소가 지구 중력 밖으로 달아나기 전에 붙잡아 지구의 물이 손실되지 않는다.” 또 기후 안정에는 달의 역할도 컸다. 원시 행성이 원시 지구와 충돌해 그 과정에서 달이 만들어졌다. 달은 지구 자전축의 흔들림(세차 운동)을 안정시켰고, 지구의 하루를 정하는 역할을 했다. “달이 없었다면, 지구 자전축의 변화가 지금보다 더 커서 날씨 변화가 극심했을 것”이고, “극심한 기후에서는 인류 문명이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호모사피엔스는 약 20만 년 전에 지구상에 등장했고, 인류는 1만 년 전에야 농업을 시작했으며, 7000년 전에야 문명을 탄생시켰다. 우리는 문명에 대해 지겨워하며 외우(고 뒤돌아서면 까먹)는 학습에 그쳤지만 여기서 조천호 저자의 관점이 돋보이기 시작한다. “인류가 오랫동안 문명을 탄생시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빙하기에는 혹독한 기후에 맞춰 살아야 했기에 사냥꾼이자 채집자로서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기온은 10만 년 전부터 1만 2,000년 전까지 크게 요동치다가 최근에야 평온해졌다. 유발 하라리도 깊게 헤아리지 못한 점인데,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세계로 확산된 것은 기후 요인이 크다. 7만 3,500년 전에 인도네시아 토바 화산 폭발로 지구 평균 기온이 12도나 떨어진 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해 인류는 멸종에 가깝게 갔는데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삶의 조건이 그나마 나았던 에티오피아 북부 고원에 몰려 있었다. 이후 인류는 해안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5만 년 전에 아시아와 호주에 도달했고, 약 3만 년 전에는 시베리아 동북부, 빙하기가 후퇴한 2만 년이 지나고 1만 5,000년 전에는 북미 대륙에 다다를 수 있었다. 1만 2,000년 전에 현재의 따뜻한 간빙기인 홀로세 Holocene(인류가 자연과 조화로운 ‘완전한 시대’라는 뜻)가 시작되었다. 농업이 시작되고 식량 저장과 보호를 위해 사회조직이 필요해졌고 군대도 조직했다. 재산 관리를 위해 수학, 문자가 발명되었다. 우리의 자부심과 달리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서는 거래 장부였다. 그러나 문명은 홀로세 가 들어선 후 약 5000년이 지나서야 탄생했다. 빙하기에서 간빙기로 변화하면서 해수면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해수면이 높아지는 상황에서는 강 하구에 대규모 농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해수면 높이가 안정화된 이후에야 4대 고대 문명이 꽃필 수 있었다.

 

「우리는 인류 문명이 인간 지성의 필연적 결과라고 생각하는 오만을 저지르고 있지만, 인류 역사를 보면 이 역시 좋은 기후 조건을 만난 덕에 일어난 우연한 사건일 뿐이었다. 산업 혁명 이후 인류는 수억 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화석연료를 태워 오늘날의 번영을 이뤘다. 하지만 이 번영은 과거 7,000년에 걸친 문명을 지탱해왔던 안정된 기후를 붕괴시킬 정도로 위협이 되고 있다. 이제 인류는 자연적인 기후변동에 적응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주체가 되었다. 지구 미래는 새로움이 아니라 지속에서 찾아야 한다. 홀로 세는 우리가 아는 한 인류가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홀로세를 지켜내야 할 절박하고 충분한 이유다.」

ㅡ 1장 「기후, 생명의 탄생에서 인류세까지」

 

 

기후는 고대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인류 문명의 변화 요인이다. 태양에너지 변화와 화산 활동으로 인해 14세기에서 19세기 중반까지 소빙하기가 있었다. 혹독한 날씨, 흉작과 전염병을 신이 내린 벌이라 생각하든 사회 체계의 문제로 보든 기상 이변은 언제나 인간 사회를 뒤흔들었다.

 

「“유대인이 흑사병을 퍼뜨렸다"라는 말이 돌았다. 공포와 분노에 사로잡힌 군중들이 유럽 여러 도시에서 유대인들을 수백 명씩 죽였다. 또한 사람들은 소빙하기 시기 몰아닥친 고통이 마녀 때문이라고 믿었다. 17세기까지 대략 20~50만 명의 사람이 마녀사냥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중 3분의 2가 여성이었다. 마녀사냥이 극에 달했던 때는 거의 언제나 소빙하기에서 춥고 가혹했던 기간과 일치한다.

(중략)

소빙하기에 각종 재난이 닥치고 수확량이 떨어지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합리적인 방법을 찾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영농 혁신의 선두 주자는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였다. 휴경지 농법을 고안하고 농작물 재배를 다양화했으며 기상 이변에 대비해 댐을 쌓아 간척지를 개척했다. 영국도 이를 따라 했으나 프랑스는 대혁명 전까지도 이 방법을 제대로 보급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영농 혁신에 뒤처지면서 기근에 더 시달렸다.

(중략)

1788년에서 1789년에 걸친 매우 추운 겨울, 프랑스에서는 거의 모든 경제활동이 중단되어 재정 위기가 찾아왔다. 루이 16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삼부 회의를 소집했다. 그런데 삼부 회의를 구성하는 성직자와 귀족은 특별과세를 거부하고 이를 평민에게 전가하려 했다. 평민들은 이에 반발해 국민회의를 발족했다. 국왕이 무력으로 국민회의를 해산시키려 하자 파리 시민들이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이날 곡물 가격이 가장 높았다.

계몽된 사회는 기상 이변, 흉작과 전염병의 원인을 신의 분노나 마녀의 저주에서 찾지 않고 그 사회 체계의 문제로 보았다. 즉, 기상 격변에 따른 기근은 지배 권력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 사회적·경제적 위기를 넘어 종교적·정치적 위기로 치달을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 결국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다.

(중략)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이어 1650년 이후 가뭄과 홍수를 극심하게 겪었다.…(중략)…대기근 당시 양반층은 늘고 평민·노비층은 줄어드는 인구 비율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누가 대기근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아냈는지 보여준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는 신앙이 퍼졌다. 농민들은 유민이 되어 사회안전망이 어느 정도 갖춰진 한양으로 몰렸고, 일부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중략)…영조와 정조 시대에 화려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17세기 대기근으로 빚어진 위기를 수습하면서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이루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ㅡ 1장 「기후, 생명의 탄생에서 인류세까지」

 

 

냉방과 난방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지금은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봉준호의 화제작 《기생충》(2019)을 날씨와 환경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폭우가 쏟아지자 박 사장 가족은 피크닉을 포기하고 안락한 집으로 돌아와 한우를 넣은 짜파구리를 먹으며 쉬면 그만이었지만, 기택 가족은 반지하 집이 물에 잠겨 난민 신세가 되었다. 빛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지하에 꼼짝없이 갇히게 된 기택은 모든 인간다움을 박탈당하고 만다. 물론 모든 인류는 지구에서나 인간다움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환경을 주어진 것으로만 보고 제대로 돌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말 몰랐을까. 모른 척한 게 아니라? 마크 트웨인은 “우리는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위험에 처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자연재해가 나를 비켜가기를 맘속으로 빌기만 한다면 원시 시대 인류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오늘 일용할 식량과 한 치 앞만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부터 제대로 알아보자. “‘지구온난화’는 산업혁명 이후 화석연료 배출량의 증가로 인해 20세기 초반부터, 특히 1970년 후반 이후 뚜렷한 기온 상승을 의미한다.” 공기 중에 약 0.04퍼센트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온실가스는 지구온난화의 급소다.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온실가스와 에어로졸(미세먼지)의 증가, 태양 활동 변화나 화산 폭발 같은 외부요인(기후 강제력 climate forcings)과 일어난 변화를 증폭시키거나 상쇄시키는 내부 되먹임이 함께 작용해 기후를 변화시킨다.

“산업혁명 이후 증가한 이산화탄소로 인해 1초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네 개의 폭발 에너지, 즉, 하루 동안 약 35만 개의 원폭 에너지가 대기에 방출된다. 하지만 그 에너지양에 비해서는 지구온난화가 크지 않다. 이 에너지는 바다에 90퍼센트 이상, 육지에 5퍼센트 정도 흡수되고 대기에는 2퍼센트 미만만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나타난 지구온난화는 수십 년 전 온실가스 농도에 대한 반응이다. ‘이미 저질러진 온난화’의 미래를 우리는 알 수 없으며 예방과 대비에도 미온적이다. 탄소 배출은 태풍을 강하게 만드는데, 우리나라에서 태풍은 재산 피해 규모로는 자연재해 1~2위를 차지한다. “2002년 태풍 루사는 5조 1400억 원, 2003년 태풍 매미는 4조 7,000억 원의 재산 피해를 일으켰다.” 북극 해빙도 그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북극 해빙의 변화는 먹이사슬의 붕괴뿐 아니라 해류 순환의 교란으로 지구촌 수산자원의 생산성에 불리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또 북극 해빙의 변화는 제트기류의 변화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극한 날씨 현상이 발생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다. “빙하 크기는 늘 변화했지만, 오늘날처럼 변화하진 않았다. 2만 1,000년 전에 현재보다 2.5배 큰 빙하가 육지를 뒤덮고 있었다. 여기서 간빙기로 변하는 과정이 1만 년 거렸다. 현재 인류는 빙하기에서 간빙기로 진입할 때보다 스무 배 이상 빠르게 지구를 데우고, 이에 따라 해수면을 상승시키고 있다.” 기후변화는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극지방과 지대가 낮은 섬에서 주로 일어나서 문제를 간과하거나 그 문제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후일로 미루기 쉬운데 우리는 지금껏 그래왔다. 앞으로는?

 

 

 

 

 

「‘지구위험한계 Planetary Boundaries’는 그 영향력에 따라 세 범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범주는 기후변화, 성층권 오존층의 파괴, 해양 산성화다. 이 요소들은 이구 전체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두 번째 범주는 토지 이용 변화(산림 파괴), 민물 이용, 생물 다양성 감소, 질소와 인의 과잉 공급이다. 이들은 지역 규모에 작용해서 지구 전체 규모로 영향을 미친다. 세 번째 범주는 대기 에어로졸과 신물질(화학 오염과 방사능)이다. 이는 구성 성분, 지리적 위치와 기상 조건에 따라 크게 달라지고 복잡하다. 이는 구성 성분, 지리적 위치와 기상 조건에 따라 크게 달라지고 복잡하다. 대기 에어로졸과 신물질의 위험한계는 아직 충분히 이해되지 않아 수량화하지 못했다.

(중략)

지구온난화를 1.5도 이내로 막으면 2도 상승하는 것에 비해 인류에 닥칠 기후변화 위험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해수면 상승이 10센티미터 낮아져 피해를 볼 사람이 1,000만 명이나 줄어들 것이다. 물 부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수와 열대지방의 옥수수 생산량 손실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 극심한 폭염에 노출되는 사람도 약 4억 2,000만 명 줄어들 것으로 전망한다. 그리고 세계 전체의 어획량은 2도 상승할 때 연간 약 300만 톤 감소하는데, 1.5도에서는 그 절반인 150만 톤만 감소한다.

(중략)

파리 기후변화협약에서 각국이 자발적으로 서약한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지킨다 해도 2100년에는 기온 상승이 3도가 될 예정이다. 2도 안정화 목표를 달성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1.5도로 제한하는 것은 더욱더 어렵다. IPCC 특별 보고서는 0.5도 더 낮추려는 목표는 모든 측면에서 광범위하며 전례 없는 변화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이 일은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며 향후 10~20년 이내에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2020년대가 지구의 심각한 파괴를 막을 수 있는 인류의 마지막 기회이며 그 책임이 우리 세대에 맡겨졌다.

지구 규모는 아니지만, 이미 국가 규모로 짧은 기간에 전체 시스템을 바꾸어본 역사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전시 체계가 그 성공적인 예다. 이에 견준다면 기후변화 대응 대전환에 필요한 10년은 불가능한 시간이 아니다.

(중략)

지구온난화가 일어나면 지구적으로 해양 증발량이 많아져 강수량도 증가하지만, 그보다 더 큰 영향은 대기와 해양 간의 물 순환을 더욱더 빠르게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정하게 내리는 비는 줄어들고 집중호우는 많아진다. 집중호우가 쏟아지면 하천 유출량이 커져, 물을 저장하고 사용할 수 있는 효율이 낮아지고 경작지의 토양 침식이 커진다. 반면 공기가 하강하는 지역인 건조지역은 더욱 건조해져 가뭄 가능성이 훨씬 커진다. …(중략)…세계은행은 20세기가 석유 분쟁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물 분쟁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석유는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할 수 있지만, 물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으니 더 심각한 셈이다. …(중략)…우리나라는 일본, 이탈리아, 영국, 독일에 이은, 세계 5위의 가상수(농축산물의 생산·유통·소비·폐기 과정에 간접적으로 들어가는 물) 순수입국이다. 즉, 우리의 생존은 다른 나라의 물에 달여 있다.

(중략)

식량이 부족해지면 곡물 생산국은 수출 제한 조치를 취하고 소비국은 수입 확대 노력을 기울이면서 곡물 가격이 급등하고, 이는 다시 추가 수출 제한과 수입 확대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식량 확보 경쟁이 격화되고 식량 자원 민족주의가 발발하는 것은 물론, 우리나라와 같은 식량 수입국에서는 물가 상승 압력과 정치적·사회적 불안으로 이어질 우려가 높다. 이미 지난 2010년, 러시아는 가뭄이 일어나자 밀 수출을 중단했다. 이에 따른 밀 가격 상승은 멀리 떨어진 북아프리카와 중동 국가에서 식량 폭동과 정치적 위기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중략)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은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흉년이 와도 기근을 겪지 않지만, 권위주의 체제라면 쉽게 기근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기아가 발생하는 까닭은 식량 부족보다 식량을 확보하고 통제할 능력이 부족한 데 있다. 20세기 말에 기아를 겪은 북한과 아프리카 수단은 모두 독재국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지만 지배자가 죽는 일은 없다. …(중략)…민주주의의 수준이 재난 대응의 수준을 결정한다. 이것이 기후 변화 시대에 최저 자원 빈국에 초과다 인구밀도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더욱 절박하게 필요한 이유다.

(중략)

세계 인구의 40~44퍼센트에 이르는 많은 사람이 해안 지역에 살고 있다. 해수면 상승은 저지대를 침수시키고 태풍이나 폭풍, 해일에 훨씬 더 취약하게 만든다. 세계의 강 하구 삼각주 비옥한 땅에 3억 명 이상이 거주한다. 이들 상당수는 개발도상국 사람이므로 식량과 물 부족으로 어려움이 가중될 수 있다. 이는 해수면이 상승하면 환경 대 이주가 일어날 수 있음을 뜻한다.」

ㅡ 3장 「위기, 파국은 한순간에 찾아온다」

 

 

 

 

우주를 떠도는 먼지들이 서로 뭉쳐 태양, 지구, 달도 되었다. 비유가 아니라 사람도 우주에서 날아온 먼지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바다 먹이 사슬에서 필수적인 식물성 플랑크톤 번식의 영양분 철분, 미네랄 등은 사막에서 날아온 흙먼지에 기인한다. 비를 내리는 구름도 먼지 주위에 응집한 작은 물방울의 집합체이다. “황사 같은 사막 먼지는 태양 가시광선을 막는 냉각 효과와 지구 적외선 흡수라는 가열 효과”를 함께 가지고 있다. 우리는 먼지 없는 세상을 바라지만 먼지마저도 이 세상에 훌륭한 쓸모다. 우리가 증폭시키는 오염과 무책임이 문제다.

 

「세계에서 매년 700만 명이 대기오염에 노출돼 목숨을 잃고 있다. 2015년 파리 기후변화협정에 따라 화석연료 사용을 감소시키면 기후변화를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대기오염도 줄여 매년 100만 명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다고 세계보건기구는 분석했다.

(중략)

2016년 과학 저널 《네이처》에 호주 과학자들이 「온실가스 배출량과 기후변화 피해 간의 세계적 불일치」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해 기후변화 원인을 제공했지만, 그 피해를 적게 받는 기후변화 ‘무임승차’ 국가는 일반적으로 온대와 아열대 지역에 있다. 반면 적은 온실가스를 배출했으면서도 큰 피해를 보는 ‘강제 승차’ 국가는 주로 열대지역에 위치한다. 우리나라는 기후변화 무임승차 국가에 속한다. 즉, 기후변화에 책임이 큰 나라다.

저위도 국가가 기후변화에 취약한 이유는 단지 가난 때문만은 아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 보고서는 저위도 지역에서 기후변화가 빨리 일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저위도 지역은 계절과 날씨 변동이 작아서 다른 지역보다 기후변화가 빨리 드러나기 때문이다.

(중략)

위험은 권력과 자원이 분배되는 위계와 질서에 따라 분배된다.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저소득 국가가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7퍼센트에 불과하다. 반면 G20 국가들은 세계 온실가스의 약 80퍼센트를 배출한다. 기후변화의 원인 제공자는 부유한 나라의 부유한 사람들이지만, 기후 변화로 인한 자연재난의 위험은 엉뚱하게도 가난한 자들을 덮친다.

(중략)

빈곤층을 줄이려면 경제성장과 더불어 기후변화와 불평등도 해결해야 한다.

기후변화가 자연에서 사회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정의 justice’를 고려해야 한다. 기후변화는 원인 제공자와는 다른 세대와 다른 지역 사람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중략)…기후 변화 대응은 ‘적응’과 ‘저감’을 통해 수행된다. ‘적응’은 이미 배출한 온실가스로 인해 기후변화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부정적인 결과를 줄이는 정책이다. ‘저감’은 기후변화의 원인인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정책이다. 두 대응 정책에서 지리적·세대적 불균형을 줄이기 위한 정의를 고려해야 한다.

(중략)

미국 CIA 출신들이 중심이 된 국제전략연구소 CSIS는 2007년에 「결과의 시대」라는 보고서에서, 앞으로 기후 변화 때문에 이주와 이민이 대거 증가하면서 인종과 종교, 식량 갈등이 새롭게 조성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 예로 21세기 들어 최악의 인종 청소가 자행됐던 ‘다르푸르 사태’를 최초의 ‘기후 전쟁’으로 꼽았다.

(중략)

벡은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근대사회는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의 시대였지만, 현대는 위험 앞에 누구나 평등하게 노출된 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업사회의 핵심이었던 ‘재화의 분배’를, 현대사회에서는 ‘위험의 분배’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사회에서 위험은 우연히 발생하는 ‘재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고, 원치 않았고, 또 택하지도 않았다. 결국 아무도 위험에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경제성장을 하려면 온실가스와 오염가스를 배출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라는 무책임성이 기후변화와 지구환경의 위험을 ‘외재화’한다.」

ㅡ 5장「대응, 기후변화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나비 효과는 인간 사회의 복잡계에서도 드러난다. 러시아 가뭄이 아랍의 봄을 일으키는 방아쇠가 되었고 시리아 내전과 수백만 명의 난민 발생에도 연관되는데, 즉 기후변화는 기존 갈등 요인을 더욱 증폭시킨다. 위험이 커질수록 부유하고 힘 있는 자도 위험을 벗어날 가능성이 적어진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지적했듯이 “위험은 무지가 아니라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주리라 믿었던 지식에서, 자연에 대한 불충분한 지배가 아니라 완전한 지배에서,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산업 시대에 확립된 규범과 객관적 체계에서” 일어났다. “현대의 위험은 우리가 모르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류 문명에서 비롯한다,”

저자는 ‘18세기 말, 이마누엘 칸트가 자유롭고 이성적인 시민으로부터 세계주의가 확대되는 역사 과정을 예견했지만, 정작 세계 시민으로서 함께 협력하도록 이끄는 동력은 세계 시민 의식이 아니라 기우 변화와 지구환경의 위험’이라고 말한다. 기후변화라는 주제가 인류의 문명, 세계 불평등과 분배, 민주주의를 비롯한 각종 의식 수준의 척도까지 되는 걸 망라해 보여주는 글이 아닐 수 없다.

최근 기후변화로 인한 최악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지구공학 또는 기후 공학ㅡ태양 복사에너지 조절, 이산화탄소를 없애는 ‘성층권 에어로졸 주입’, ‘이산화탄소 포집·저장’ 방법 등ㅡ이 주목받고 있기는 하나 섣부른 기후 조작이 더 큰 재앙이 될 수 있기에 실현 가능성이 현재 희박하다. 지금 최선은 “만병통치약을 찾을 게 아니라 지구를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일이다.

 

저자가 30년간 근무했던 국립기상과학원을 나오며 소회를 밝힌 글이 말미에 있다. 한국 과학기술 정책에서 창의적일 수 없는 관료적 위계 체계, 기술 개발이 아닌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의 전락, 인력 투자와 연구 여건에 인색하면서 성과만을 기대하는 심보, 정책 결정자의 실적을 위한 국가 도박이 되는 문제점을 꼬집고 있는데, 짐작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주요 실무자였던 분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정말 심각하다 싶었다. 실적을 올리기 위해 과학의 가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한국 정부의 꼴이 경제 성장을 위해 기후가 망가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던 인류의 모습과 판박이다. 우리는 나쁜 것마저 속속들이 닮아 정말 인류 공동체라 할만하다-_- 이런 인류가 과연 지구를 살리고 지킬 수 있을지. 히어로가 우릴 구원할 거라는 믿음 속에서 재난 영화를 앞다투어 보며 우리 스스로가 이미 재난이며 재난을 만들어간다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닌지 그 생각에 추운 겨울 그리고 앞으로가 더욱 오싹해졌다.

 

 

「국가 기술 시스템을 만들어본 사람은 압니다. 한 줄 공식으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과학법칙과는 달리 기술은 끝없는 시행착오, 실패의 연속, 의미 없어 보이는 단순 작업의 반복을 통해서만 겨우 조금씩 실질적인 가치를 쌓아 올릴 수 있습니다. 열역학 원리는 후진국에서도 알 수 있지만, 자동차 엔진은 아무 나라나 만들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스템적인 속성을 가진 국가 과학기술 혁신은 통합, 연결, 누적이 본질적인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국가 연구개발은 통합된 틀에서 과학기술 성과를 서로 연결하여 누적해가는 과정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관장이 바뀔 때마다 혁신을 주문합니다. 그러나 단박에 무언가를 해결할 수 있는 비책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든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을 겁니다. 연구기관의 자체 시스템으로 결정한 전략이 아니기에 통합, 연결, 누적으로 겨우 이루어놓은 시스템이 파괴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것도 없이, 항상 고만고만한 새로운 주제에 허덕이는 상황에 빠지는 것입니다, 뭔가 요란스럽게 뛰어다니지만, 항상 제자리를 맴돌 뿐입니다. 결과가 축적되지 않으면 다음 단계의 혁신은 불가능합니다.

(중략)

이것을 이상이라고 치부하면, 현실의 모든 제약이 ‘지금 이곳’을 어찌할 수 없는 불가피한 곳으로 전락시킬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는 가치를 만들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우리 스스로 냉소로 상황을 견디게 됩니다. 이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현실은 벽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 모두를 살리게 될 겁니다.」

ㅡ 나오는 말 「국가 과학기술의 연구개발은 어떠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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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12-11 2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기능을 추가한 신제품을 시장에 쏟아내고, 이를 소비하는 것을 미덕으로, 긍정적인 경제활동으로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한, 지금의 위기가 쉽게 해결되지 않을 듯 합니다. 미래의 자원을 현재 소비하려는 의식을 고쳐야 비로소 희망이 보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AgalmA 2019-12-12 06:57   좋아요 1 | URL
맞는 말씀이시죠. 근데 우린 옳은 길을 알면서도 딴길로도 새는 이상한 종족이라서ㅜㅜ
자본주의 아래 소비 지향주의가 쉽게 꺼질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