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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사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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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서 반 정도 읽다가 기간이 다 되어서 재대출하려니까 예약이 돼 있다며 안된단다.

그래서 반납하고는 나중에 사서나 읽어야겠다 싶었는데, 다른 책 빌리러 가서 혹시나 해서 서가에 가 보니 2,3,4권은 없고 1권만 꽂혀 있더라. 하여 냉큼 뽑아 대출했다.

책 내용과 아무 관련도 없는 대출과 반납 얘기를 왜 시시콜콜 하느냐면,

대선 이후 때가 때이니만큼 이 책 읽기 열풍이 불었다던데 과연 그렇다는 걸 몸으로 겪었기 때문이다.

 

 

근데 다 읽고 나니 이런 정도 책이라면 책장에 꽂아두고 아이들한테 물려줘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 시대의 여러 단면들에 대해 아무 관점도 느낌도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태극기를 처음 고안한 이는 중국인이란 사실, 단일민족 신념의 허상,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때 자행된 학살 문제, 명분도 자존도 없는 수구꼴통들의 편가르기 수법, 반미 문제와 병역 문제 등에 대한 명쾌하고 깊이 있는 서술이 돋보인다.

 

 

평소에 내막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부분들도 사실은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였다.

예를 들면 병역 기피는 과거 양반층에서 거의 관습적으로 반복되었던 구태였지만, 나는 막연히 그러진 않았으리라 짐작만 했었다.

하지만 실상은 양반은 물론이요, 평민들까지도 향교에 입교하거나 승려가 되어 병역을 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승려의 지위는 고려시대와는 달리 천인에 속하는데, 양인인 농민이 사회적 신분을 낮춰 승려가 되는 데는 불심의 발동보다 군역의 무서움을 피하기 위한 것이 더 중요한 요인이었다. 농민들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 승려가 되는 일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승려들은 국가에서 토목공사에 동원하는 요역 대상이 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승병이 출현한 것도 호국불교의 전통보다 국가가 승려집단이 군역기피자의 소굴이라는 인식을 가졌던 사실과 더 관련이 깊다. 이도저도 안 되는 농민들은 도망을 쳐서 군역을 모면했다. 또 당시에는 대립(代立)이 공공연히 인정되어 돈 있는 사람은 자기가 번상해야 할 차례에 돈을 주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현역 근무를 하게 했다.

양인들 가운데서 그래도 여건이 좋은 사람들은 향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군역을 피했다. 해방 이후 대학생에게 징집을 연기해준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는 향교에 입학해 교생(校生)이 되면 군역을 면제해주었다. 여기서 특기해야 할 점은 서양과는 달리 유교문명권에서는 평민도 여건이 허락되면 교육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평민 가운데도 드물기는 하지만 문과나 생원, 진사과에 합격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향교의 교육 기능은 매우 취약했다. 이미 중종대에 이르면 당대의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향교는 군역을 피하려는 자의 소굴이라고 개탄했을 정도로 향교는 교육적 기능을 상실했다. 더구나 군역면제의 특권이 있는 양반들은 평민들이 군역을 피하려고 득시글대는 향교에 자제들을 보내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17세기 이후 사교육기관인 서원이 발달하고, 공교육기관인 향교의 교육 기능이 붕괴한 것도 군역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292-293)

 

 

다행이 요즘 들어 군대 안 가거나 못 간 인간들이 정치판에서 어깨 제대로 못 펴는 분위기로 바뀌는 것 같긴 하다.

신의 아들은 더 이상 신의 아들이 아닌 것이다.

 

 

아래는 서슬 퍼렇던 칠팔십 년대 운동 좀 하다가 공안기관에서 고문 받던 이들이 없는 사실까지 뱉어내야만 했던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마흔이 넘고 이런저런 세상일을 겪다 보니 무척 공감이 되는 말이다.

 

 

정말 그랬다. 공안기관원들이야 상부의 지시가 있어 움직이고, 또 그런 일을 하면 돈이 나오고 진급도 하고 상도 받는데,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상 받는 것도 아니고 뻔히 감옥갈 일을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했다는 말을 그들은 믿어주지 않았다. 그러니 없는 배후를 만들어내야 했고, 광주 시민의 항쟁은 고정간첩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야 자신과 상급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화해할 수 없는 세계관의 차이였다. 양심이라는 것을, 자발성이라는 것을, 자기 희생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그것들을 소중히 간직한 사람들 간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251)

 

 

 

누가 한홍구 교수를 빨갱이라 했던가? 내가 보니 기껏해야 중도진보가 될까말까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책에서는 이건창, 황현 등 구한말의 건강하고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에 대한 존경에 가까운 찬사들이 이어진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들이 설 땅이 일제 말기의 친일행위로 인해 사라졌다면, 진보적 지식인들은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의 와중에 철저히 이 땅에서 사라졌다. 새가 하늘을 나는 데 필요한 좌우의 두 날개가 모두 꺾인 것이다. 그리고 이남에서 정권은 백범 김구 선생처럼 너무나 보수적인 분을 여순반란 사건의 배후조종자인 빨갱이로 몬 사람들의 손에 넘어갔다. 그들은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의 덕목인 도덕성, 일관성, 책임감, 지혜 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가당치 않은' 족속들이다. 그들은 한번도 정녕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린 적도 없고, 희생한 적도 없다. 한국전쟁 때 마오쩌둥도, 미8군 사령관 벤플리트도 아들을 바쳤지만 그들은 한강 다리를 끊고 가장 먼저 도망갔다가 돌아와 남은 사람들을 부역자로 몰았다. 러일전쟁 때 너무 큰 희생으로 일본 시민들이 노기 사령관에게 항의하러 부두에 나갔다가 아들 셋의 유골을 안고 배에서 내리는 노기 앞에서 같이 울었다는 일화가 있으나 자칭 우리의 보수파는 그런 신화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대로"는 수구파의 구호다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당했을 때 일부 부유층은 오히려 훨씬 살기 좋아졌다면서 "이대로!"를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냉전과 민족대립을 넘어 화해로 가는 마당에 이들은 또 "이대로!"를 외치며 길을 막는다. "이대로!"는 수구파의 구호지, 보수주의자들이 입에 담을 말이 아니다. 똑같은 콩으로 똥을 만들 수도 있고 된장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재질도 색깔도 비슷해 보이지만 수구와 보수의 차이는 똥과 된장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수구로 매도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보수적 지식인이라면 시민단체들을 홍위병이라고 욕할 것이 아니다. 장엄한 최후를 맞은 한말 보수주의자들의 엄정한 전통은 일제의 간지에 의해 온건하고 합리적인 지식인들이 더럽혀짐으로 인해, 그리고 친일잔재 청산의 좌절로 인해 계승되지 못했다. 군사독재에 의해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이 유린당할 때 보수주의자들이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운 사람들은 오히려 진보주의자들이었다. 진보와 보수의 편가르기에 앞서 보수세력이 먼저 수구세력과 스스로 결별해야 하지 않을까? (152-153)

 

 

 

시간이 되는 대로 나머지 3권도 마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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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iver (Mass Market Paperback)
로이스 로리 지음 / Dell Laurel-Leaf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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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읽고 나서, 그것도 원서를 읽고 나서 독후감을 쓰기란 난감할 때가 있다.

언어들이 내 어설픈 해독과 막연한 감정 때문에 뭔가 완전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꾸 반복해서 읽다보면 좀 나아질까.

문장은 역시 매우 간결하고 함축적이어서 처음으로 오디오북을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읽는 동안 360여 개의 단어를 찾았고, 찾았던 단어를 또 찾아서 봤다.

카페에선가 어디선가 이 저자가 일부러 낱말을 반복한다는 얘길 들었는데,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사실 번역본 <기억 전달자>는 몇 년 전에 읽은 적이 있다.

조나스가 커뮤니티에서 누군가를 데리고 탈출하는 건 기억이 났지만 그게 가브리엘이었단 걸 다시 읽으면서 깨달았다.

마지막에 조나스가 모든 힘을 다한 끝에 오른 눈 쌓인 언덕을 내려가면서 본 불빛은, 사람들의 노랫소리는, 실제인가 환상인가 긴가민가했다.

기억 속에서 끌어낸 썰매를 타고 내려가는 걸 미루어보면 조나스가 의식을 잃으면서 생긴 환상인 거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너무 처절하고 비극적인 결말 아닌가.

확실한 이해를 위해서 번역본도 다시 읽어야겠지만, 원서도 다시 읽어야겠다.

가브리엘을 안은 채 언덕에서 쓰러져 아래로 내려가는 장면은 매우 인상 깊은 문장이었다.

 

Jonas felt himself losing consciousness and with his whole being willed himself to stay upright atop the sled, clutching Gabriel, keeping him safe. The runners sliced through the snow and the wind whipped at his face as they sped in a straight line through an incision that seemed to lead to the final destination, the place that he had always felt was waiting, the Elsewhere that held their future and their past.

He forced his eyes open as they went downward, downward, sliding, and all at once he could see lights, and he recognized them now. He knew they were shining through the windows of rooms, that they were the red, blue, and yellow lights that twinkled from trees in places where families created and kept memories, where they celebrated love.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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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한국불교
이이화 지음 / 역사비평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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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김영태 선생의 <한국 불교사>를 읽었는데,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강의 노트식 맥락 없는 정보의 나열이었던 탓도 있겠지만(의미없는 스님들의 저작 나열 같은) 역사 속에서 인물들이 어떤 위치에 있었고, 그 시대 사상과 문화에 어떤 구실을 했는지 자세하게 알려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책에서도 느끼는 바지만 이이화 선생은 민중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유산에 대해 애정이 많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도 만민의 평등과 민중들의 복지와 이익을 설파한 스님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국 불교사 속 인물들의 '간판'만 설명하지 않고 그들의 처세와 신념, 사상까지 이야기하기 때문에 불교라는 종교의 흐름을 통해 우리 역사를 한 번 더 훑어보는 듯했다.

저자가 사상사에 집중하지 않고 역사적 실체에 치중했다고는 하지만 필요한 곳에서는 사상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했다.

 

불교 승려나 신봉자라고 해서 모두 옳고 신성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남들은 다 욕하고 저평가하는 인물이라고 해서 무조건 얕잡아 보거나 그 가치를 비하하지 않았다.

또 남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인물이라고 해서 맹목적으로 감싸주지 않는다.

비판할 부분은 가차없이 비판하고 위대한 것은 아낌없이 위대하다고 말해야 한다.

가치와 한계를 다 말하는 것. 이것은 지식인이라면 늘 가슴에 신조로 삼고 있어야 하니까.

 

승려들은 중생과 떨어져서 수행을 하거나 국가의 이익과 발전을 위해 어용승려로 활약하기도 했다.

꽤 많은 중들이 어용승려였다. 여기서 '어용'이란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스님들은 시대의 큰 스승 역할을 했고, 국가에 정치적으로 많은 기여도 했기에.

가진 자들의 이익과 극락왕생만을 말하지 않고(물론 없잖아 그런 예도 있다),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민중들의 편에서 그들의 이익과 평등을 주장해 온 것이 불교의 미덕이 아니었던가.

일제 시대에 친일행위를 한 경우가 어용 승려의 나쁜 예일 것이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권상로, 방한암은 친일 승려였으며, 송만공, 한용운은 끝까지 자존을 지킨 승려였다고 한다.

 

컴퓨터로 책 내용을 입력하고 있다.

제대로 정리하려면 인물과 사건 위주로 노트정리도 필요하다.

일전에 훑어만 봤던 <조계종사>도 다시 읽어야겠다.

 

머리가 나쁘니 손발이 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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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 때려라! - 뇌가 휴식하고 재정비하는 바로 그 시간
신동원 지음 / 센추리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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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의 폐해가 점점 심각해지는 요즘 사람들에게 적절한 책인 거 같다.

멀티태스킹을 멈추고 머리를 비워라, 모니터가 아니라 사람의 눈을 봐라, 접속이 아닌 접촉을 해라, 단순하고 간결한 삶을 추구하고, 하이퍼링크가 가득한 웹페이지 말고 불필요한 자극이 없는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뇌와 인간심리를 연구하는 정신과 전문의가 쓴 책이라 과학적 근거를 들어가며 왜 우리는 '멍 때릴 시간'이 필요한가를 말한다.

1부와 2부가 거의 핵심이고, 3부에는 뇌의 시냅스 단련 문제, 몰입, 전두엽의 기능 등 뇌의 긍정적 사용법을 언급한다.

4부는 인간관계와 잡념을 비울 수 있는 생활 습관에 대한 조언을 하고 있는데 정신 없이 사는 현대인들에겐 매우 적절한 충고들이다.

아래는 책에서 인용.

이제 그 누구도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사색을 즐기거나, 책을 읽으며 친구를 기다리지 않는다. 창밖의 거리 풍경을 바라보는 대신 스마트폰 창을 통해 더 많은 사람, 더 큰 세상과의 접속을 선택한다. 덕분에 굳이 누군가와 관계를 맺지 않더라도 외롭거나 심심할 틈이 없다. 스마트폰과 대화하고, 스마트폰과 영화를 보고, 스마트폰과 게임을 하는 등 혼자 있어도 할 일이 차고 넘친다. 여유로움은 사라지고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정보들만 가득하다. (16)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프레임과 인식, 경험과 욕구에 따라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다르게 사고하고 다르게 행동한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논리나 이성보다 인정과 배려에 기초한 공감이 훨씬 중요하다. (74)

세 살 된 아이를 데리고 진료실을 찾은 엄마가 있었다. 동갑내기 옆집 아이는 벌써 한문과 영어를 배우는데 자기 아들은 말이 너무 늦는 게 아니냐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이는 또래에 비해 말이 늦은 편이었다. 검사 결과 두뇌에는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 다른 데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선 나는 엄마와 아이의 평소 모습을 관찰하기 위해 모자를 놀이방으로 안내했다. 신기한 장난감이 가득 찬 방에 들어서자 아이는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이가 방을 제대로 살펴보기도 전에 엄마가 먼저 장난감을 집어들었다.

"이 빨간 자동차는 뭐지? 이렇게 하면 앞으로 가네. 신기하지 않아? 한번 해봐."

"여기 원격 비행기도 있네. 엄마가 움직여줄까?"

엄마는 아이가 무엇을 보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전혀 개의치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장난감을 들이댔다. 그러자 호기심이 가득했던 아이의 얼굴은 짜증으로 뒤덮이더니 갑자기 모든 것을 거부한 채 바닥에 엎드려버렸다. 지나친 자극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어기제가 발현된 것이다. 나는 그제야 멀쩡한 아이의 언어 능력이 왜 또래에 비해 떨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어느 개그 코너의 유행어처럼 자극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85-86)

사람들은 연일 새로운, 더 새로운 스마트폰을 기다리며 그것이 가진 첨단 기능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스마트한 피조물은 바로 인간의 두뇌다. (88)

책이 가진 네 가지 힘

첫째, 책은 정보의 우선순위를 제공해준다. 웹페이지에는 모든 정보가 무작위로 나와 있다. 만약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치료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를 검색하면, 의사인 나조차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많은 양의 정보가 쏟아진다. 하지만 좋은 책을 사서 읽으면 ADHD에 대해 가장 확실하고 중요한 치료법을 알 수 있다.

둘째, 쓸모없는 정보를 미리 걸러준다. 방금 말했듯이 인터넷에는 온갖 정보가 넘쳐난다. 그중에는 유용한 정보도 있지만 전혀 필요하지 않거나 엉터리 정보도 많다. 요즘 의사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 중 하나가 인터넷에서 찾은 지식을 정답처럼 여기는 환자를 대하는 일이다.

책에는 정제된 좋은 지식이 가득 차 있다. 수천 년에 걸쳐 검증된 고전들은 더욱 그렇다. 알짜배기 정보가 가득 차 있으므로 쓸모없는 정보를 걸러내기 위해 뇌를 혹사시킬 필요가 없다.

셋째, 불필요한 자극이 없다. 웹 페이지에는 시각적·청각적 자극이 가득한 내용이 돌아다닌다. 요즘에는 움직이는 광고까지 등장했다. 이런 자극은 단 하나도 빠짐없이 인지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뇌의 과부하를 불러온다. 하지만 선형적인Linear 읽기는 그저 책의 안내대로 따라 읽으면 되기 때문에 내용에 몰두하고 내적 성찰을 할 여유가 많아진다.

넷째, 독자의 관심사 혹은 지식 수준에 따라 취사선택이 가능하다. 처음 런던에 갔을 때 가지고 간 몇 장의 지도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런던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지도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당시 인터넷을 찾아보았다면 내 혼란스러움은 더욱 가중되었을 것이다.

한국판 구글에 런던을 치면 무려 20억 개가 넘는 검색 결과가 뜬다. 정보가 너무 많아서 런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진짜 필요한 정보를 선별해내기가 쉽지 않다. 키워드를 좁혀보면 어떨까?

런던이 아닌 런던 여행을 검색하면 나오는 페이지 수가 3,500여 개가 된다. 이것 역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억"하는 소리가 절로 터져나오는 정보의 바다에서 헉헉거리고 있느니 런던 초보자인 내 눈높이에 맞춘 알짜배기 정보가 가득한 여행서 한 권을 사서 읽는 것이 낫다. 시간은 물론이고 감정적·육체적 에너지 낭비도 줄어들 것이다. (122-124)

시냅스 형성에 힘을 기울여라

"습관이 만들어질 때는 눈에 안 보이는 실과 같지만 그 행동을 반복할 때마다 그 끈이 차츰 강화되고, 거기에 또 한 가닥씩 더해지면 마침내 굵은 밧줄이 된다. 습관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든다."

미국의 소설가 오리슨 스웨트 마든의 말이다. 19세기에 살던 사람이 두뇌의 메커니즘을 이토록 정확히 표현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흔히들 "습관은 의지의 문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행동이 변했다는 것은 단순하게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시냅스가 생성되어 두뇌 구조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인간이 자신의 습관을 통제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의식에 가까운 비언어적 기억, 비선언적 기억에 저장된 경우가 많아서다. 그래서 강제적 습관으로 뇌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다. 가느다란 실이 한 가닥씩 더해져 굵은 밧줄이 되듯 꾸준한 노력으로 반복된 학습만이 우리의 습관과 행동을 변화시킨다. 행복한 표정으로 성취감을 맛보는 자신을 발견하고 싶다면 지금부터라도 새로운 시냅스를 형성하는 데 힘을 기울여라. (168-169)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학의 화학과 교수였던 멘델레예프 교수는 63개의 원소를 정렬할 일련의 규칙을 발견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했다. 원자량과 특성에 대해 진이 빠지도록 연구에 몰두했던 그가 지쳐 잠든 어느 날 모두의 예상대로 꿈을 꿨다. 그 꿈 속에서 모든 원소가 조건에 맞게 정렬된 모습을 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원소주기율표다. (174)

멍 때리지 못할 거면 잠이라도 제대로 자란 말이다.

나도 언젠가 퍼자다가 꿈 속에서 색다른 아이디어를 얻은 적이 있지 않은가.

인간이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타인을 도와주고 배려하는 이유는 바로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면, 손해를 감수하며 타인에게 협조하는 것은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올 장기적 보상을 염두에 둔 행위다.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는 대가를 바라고 오늘 선행을 하는 거라고 말하면 조금 치사한 느낌이 들지만, 실제로 인간의 뇌에는 그런 장치가 숨겨져 있다.

18세기 후반에 조현병(정신분열증), 우울증, 간질 등 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전두엽 절제술을 시행했다. 그런데 이 수술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분노나 충동을 참지 못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일 뿐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게 되었다. 더불어 자신의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겪을지 생각하지 못하는 심각한 도덕 불감증을 드러냈다. 한 가지 예로 수술에 들어가기 전 환자한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당신이 친구에게 빌린 가방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음..... 가장 먼저 친구에게 사정을 말한 뒤 미안하다고 사과해야겠죠. 그리고 같은 가방을 사주거나 돈으로 보상해야죠."

그런데 전두엽 절제술을 받고 나서 동일한 질문을 하면 전혀 다른 대답이 나온다.

"뭘 어떻게 해요. 다른 가방을 빌리면 되지." (195)

약간 밀도가 떨어지고 급하게 마무리한 듯한 꼭지도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필독할 만하다.

지금도 사람과 마주하고 있으면서, 일을 하면서 스마트폰 화면에 시도때도 없이 눈과 손이 가는 사람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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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 대한민국 부모님과 선생님께 드리는 글
편해문 지음 / 소나무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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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쯤은 읽고 내가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고 있나 되돌아보면 좋을 것 같다.

늘 생각해 왔던 이야기들이다. 놀이가 아이들을 치유해주고 앞으로 살아갈 힘과 지혜를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너도나도 아이들을 억압하여 그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그들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

거기에 아무도 저항하지 않고 '대 어린이 사기극'과 '대 어린이 잔혹극'에 동참하고 있다는 거다.

놀이터에 나오는 애들이 하나도 없다는 탓은 그만 하고, 나부터 애들 데리고 나가 놀라는 것이다.

단호한 의지와 뚜렷한 철학이 필요한 행위다.

 

 

아래는 책에서 인용.

 

이런저런 놀이를 이끄는 사람을 본다. 한두 사람이 이끌어서는 놀이라 보기 어렵다. 그것은 레크리에이션이다. 놀이 속에 있는 모든 아이가 주인 노릇을 할 때 그것이 놀이다. 놀이라는 것은 대부분 혼자 할 수 없고 함께 한다. 잘 노는 사람은 노래방 가서 마이크 잡고 분위기를 신들린듯 이끄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따뜻한 공간과 시간을 가꿔주고 그 속에 자신이 공부했거나 아는 놀이를 공공의 것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흔쾌히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22-23)

 

돈이다. 세상이 돈에 미쳐가니 아이들도 돈에 미쳐간다. 결국, 일진도 돈이다. 왕따 놀이는 일진들의 소비 놀이를 떠받친다. 그렇다면 왜 아이들은 '소비' 놀이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까? 사지 않고는 아이들 또한 세상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쇼핑 중독에 빠진 어른들의 상태와 다를 바 없다. 만약 '닭장'의 닭들에게 쇼핑이 허용되었다면 그 속이 좀 더 견딜 만한 곳이 되었을지 모른다. (38)

 

갓 아기를 낳은 엄마의 전화번호를 빼내 수백만 원 하는 책과 장난감을 꼭 사야 당신 아기가 앞으로 뒤처지지 않는다고 전화를 해대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아이들 영혼은 기업 상품 마케팅의 먹이가 되었다. 소유 그 자체가 놀이의 동기와 과정과 목표가 된 이 씁쓸한 풍경은 어른들의 내면과 크게 다른지 않다. 유희왕이나 포켓몬스터 딱지를 보라. 놀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 모으기 위해 산다. 어쩌면 이렇게 아이들 놀이가 어른들의 욕망을 닮았단 말인가. 놀이감을 가지고 놀 때보다 놀이감을 많이 쌓아 놓거나 많이 가져야 행복하다. 옛날에는 공기놀이를 잘하거나 비석치기를 잘하거나 고무줄을 잘하는 것이 동무들 사이에서 자랑거리였는데, 지금은 오로지 무엇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느냐가 자랑이다. (43-44)

 

아이들은 친구와 놀이로 세상을 만나야지 책이 세상과 만나는 통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책 말고 재미있는 것이 세상에는 많다는 것을 아이들이 몸으로 먼저 만나야 한다. 어디까지나 놀고 나서 그래도 시간이 남을 때 읽는 것이 책이라는 순리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너무 많은 책을 읽어 관계에 서툴고 그것 때문에 고통받는 아이들이 꽤 많다. 이른바 독서영재라 불리는 아이들의 자폐 성향은 자주 보고되고 있음을 우리는 매우 주의해야 한다. (76)

 

어려서부터 밖에서 놀면서 '놀이밥'을 꼬박꼬박 하루에 서너 시간씩 먹던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을 2시간 이상 못 한다. 왜? 좀이 쑤시고 몸이 근질거려 못한다. 그렇지만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문 앞에서부터 빼돌렸던 아이들은 이틀을 컴퓨터 앞에 앉혀놔도 아무런 불편을 모른다. 왜냐하면, 몸이 아무런 답답함을 느끼지 못하는 죽은 목숨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죽은 목숨'으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게임을 하다가도 좀이 쑤셔 인라인스케이트를 신고 친구라도 불러내는 '산 목숨'으로 만들 것인지는 부모와 교사인 우리한테 달려 있다. 부모는 아이들이 평생 쓸 몸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쥐가 나면 움직이고 좀이 쑤시면 벌떡 일어나는 살아 있는 몸 말이다.

 

밖에 나갔더니 우리 아이와 함께 놀 아이들이 없다고 하지 말고 먼저 내 아이를 밖에 내놓자. 그렇게 누군가 나와서 놀고 있다면 다른 집 부모도 자기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올 것이다. 같은 또래 아이들을 키우는 옆집 부모와도 손을 잡지 못하게 만드는 이 자본의 분열에 맞서는 용기가 진정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싸움 자체가 우리의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본에 가장 모질게 저항하는 길 또한 우리 어른도 아이도 재미있게 노는 것이다. 만약 우리 스스로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못 놀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자본에 먹힌 존재라 해도 좋다. 지금도 놀 수 없고 앞으로도 놀 수 없다면 삶은 끝나는 거다. 앞서 놀아야 이긴다고 했다. 더불어 안 사야 이긴다. 그리고 마침내 자본에 이기려면 외로워야 한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지는 거다. (215-216)

 

91-92쪽에는 또 이런 글이 있다.

 

 

사주지 마시라

아이들은 엄마아빠와 놀고 싶은데

아이들은 동무들끼리 놀고 싶은데

아이들은 밖에 나가 놀고 싶은데

장난감을 사서 손에 쥐어주고

한꺼번에 책을 사주고

물건을 사주고 게임기를 사주고

어디를 자꾸 보내다

사지 마시라

사주지 마시라

사주면 아이들은 놀지 못한다

사주면 아이들 놀이는 멈춘다

사주면 아이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구르는 돌보다 못한

값비싼 장난감부터 내다 버려야 한다

부모가 사다 준 물건을 손에 쥐는 순간

아이들의 자유는 그 속에 갇히고

아이들의 퍼덕거리던 몸짓은 잦아든다

세상은 사야 한다고 날마다 떠들어대지만

아이들은 사주지 말아야

맨손과 맨발이어야 아이들로 자란다

사지 말아야 놀이는 시작한다

뭐가 없어야 놀이는 시작한다

심심해야 놀이는 시작한다

사지 않고 사주지 않고 아이를 키울 수 있어야 한다

이 돈 비린내 진동하는 화폐의 세상을 사는

참된 부모는 사지 않는 사람이다

어떻게든 사지 않고 아이와 지내는 사람이다

사지 않고 아이와 노는 사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지 않고 생활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아무 것도 사주지 말라는 얘기는 조금 지나친 듯하지만 이 땅의 부모라면 새겨 들어야 할 진심 어린 충고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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