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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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서 반 정도 읽다가 기간이 다 되어서 재대출하려니까 예약이 돼 있다며 안된단다.

그래서 반납하고는 나중에 사서나 읽어야겠다 싶었는데, 다른 책 빌리러 가서 혹시나 해서 서가에 가 보니 2,3,4권은 없고 1권만 꽂혀 있더라. 하여 냉큼 뽑아 대출했다.

책 내용과 아무 관련도 없는 대출과 반납 얘기를 왜 시시콜콜 하느냐면,

대선 이후 때가 때이니만큼 이 책 읽기 열풍이 불었다던데 과연 그렇다는 걸 몸으로 겪었기 때문이다.

 

 

근데 다 읽고 나니 이런 정도 책이라면 책장에 꽂아두고 아이들한테 물려줘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 시대의 여러 단면들에 대해 아무 관점도 느낌도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태극기를 처음 고안한 이는 중국인이란 사실, 단일민족 신념의 허상,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때 자행된 학살 문제, 명분도 자존도 없는 수구꼴통들의 편가르기 수법, 반미 문제와 병역 문제 등에 대한 명쾌하고 깊이 있는 서술이 돋보인다.

 

 

평소에 내막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부분들도 사실은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였다.

예를 들면 병역 기피는 과거 양반층에서 거의 관습적으로 반복되었던 구태였지만, 나는 막연히 그러진 않았으리라 짐작만 했었다.

하지만 실상은 양반은 물론이요, 평민들까지도 향교에 입교하거나 승려가 되어 병역을 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승려의 지위는 고려시대와는 달리 천인에 속하는데, 양인인 농민이 사회적 신분을 낮춰 승려가 되는 데는 불심의 발동보다 군역의 무서움을 피하기 위한 것이 더 중요한 요인이었다. 농민들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 승려가 되는 일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승려들은 국가에서 토목공사에 동원하는 요역 대상이 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승병이 출현한 것도 호국불교의 전통보다 국가가 승려집단이 군역기피자의 소굴이라는 인식을 가졌던 사실과 더 관련이 깊다. 이도저도 안 되는 농민들은 도망을 쳐서 군역을 모면했다. 또 당시에는 대립(代立)이 공공연히 인정되어 돈 있는 사람은 자기가 번상해야 할 차례에 돈을 주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현역 근무를 하게 했다.

양인들 가운데서 그래도 여건이 좋은 사람들은 향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군역을 피했다. 해방 이후 대학생에게 징집을 연기해준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는 향교에 입학해 교생(校生)이 되면 군역을 면제해주었다. 여기서 특기해야 할 점은 서양과는 달리 유교문명권에서는 평민도 여건이 허락되면 교육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평민 가운데도 드물기는 하지만 문과나 생원, 진사과에 합격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향교의 교육 기능은 매우 취약했다. 이미 중종대에 이르면 당대의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향교는 군역을 피하려는 자의 소굴이라고 개탄했을 정도로 향교는 교육적 기능을 상실했다. 더구나 군역면제의 특권이 있는 양반들은 평민들이 군역을 피하려고 득시글대는 향교에 자제들을 보내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17세기 이후 사교육기관인 서원이 발달하고, 공교육기관인 향교의 교육 기능이 붕괴한 것도 군역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292-293)

 

 

다행이 요즘 들어 군대 안 가거나 못 간 인간들이 정치판에서 어깨 제대로 못 펴는 분위기로 바뀌는 것 같긴 하다.

신의 아들은 더 이상 신의 아들이 아닌 것이다.

 

 

아래는 서슬 퍼렇던 칠팔십 년대 운동 좀 하다가 공안기관에서 고문 받던 이들이 없는 사실까지 뱉어내야만 했던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마흔이 넘고 이런저런 세상일을 겪다 보니 무척 공감이 되는 말이다.

 

 

정말 그랬다. 공안기관원들이야 상부의 지시가 있어 움직이고, 또 그런 일을 하면 돈이 나오고 진급도 하고 상도 받는데,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상 받는 것도 아니고 뻔히 감옥갈 일을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했다는 말을 그들은 믿어주지 않았다. 그러니 없는 배후를 만들어내야 했고, 광주 시민의 항쟁은 고정간첩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야 자신과 상급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화해할 수 없는 세계관의 차이였다. 양심이라는 것을, 자발성이라는 것을, 자기 희생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그것들을 소중히 간직한 사람들 간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251)

 

 

 

누가 한홍구 교수를 빨갱이라 했던가? 내가 보니 기껏해야 중도진보가 될까말까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책에서는 이건창, 황현 등 구한말의 건강하고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에 대한 존경에 가까운 찬사들이 이어진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들이 설 땅이 일제 말기의 친일행위로 인해 사라졌다면, 진보적 지식인들은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의 와중에 철저히 이 땅에서 사라졌다. 새가 하늘을 나는 데 필요한 좌우의 두 날개가 모두 꺾인 것이다. 그리고 이남에서 정권은 백범 김구 선생처럼 너무나 보수적인 분을 여순반란 사건의 배후조종자인 빨갱이로 몬 사람들의 손에 넘어갔다. 그들은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의 덕목인 도덕성, 일관성, 책임감, 지혜 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가당치 않은' 족속들이다. 그들은 한번도 정녕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린 적도 없고, 희생한 적도 없다. 한국전쟁 때 마오쩌둥도, 미8군 사령관 벤플리트도 아들을 바쳤지만 그들은 한강 다리를 끊고 가장 먼저 도망갔다가 돌아와 남은 사람들을 부역자로 몰았다. 러일전쟁 때 너무 큰 희생으로 일본 시민들이 노기 사령관에게 항의하러 부두에 나갔다가 아들 셋의 유골을 안고 배에서 내리는 노기 앞에서 같이 울었다는 일화가 있으나 자칭 우리의 보수파는 그런 신화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대로"는 수구파의 구호다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당했을 때 일부 부유층은 오히려 훨씬 살기 좋아졌다면서 "이대로!"를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냉전과 민족대립을 넘어 화해로 가는 마당에 이들은 또 "이대로!"를 외치며 길을 막는다. "이대로!"는 수구파의 구호지, 보수주의자들이 입에 담을 말이 아니다. 똑같은 콩으로 똥을 만들 수도 있고 된장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재질도 색깔도 비슷해 보이지만 수구와 보수의 차이는 똥과 된장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수구로 매도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보수적 지식인이라면 시민단체들을 홍위병이라고 욕할 것이 아니다. 장엄한 최후를 맞은 한말 보수주의자들의 엄정한 전통은 일제의 간지에 의해 온건하고 합리적인 지식인들이 더럽혀짐으로 인해, 그리고 친일잔재 청산의 좌절로 인해 계승되지 못했다. 군사독재에 의해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이 유린당할 때 보수주의자들이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운 사람들은 오히려 진보주의자들이었다. 진보와 보수의 편가르기에 앞서 보수세력이 먼저 수구세력과 스스로 결별해야 하지 않을까? (152-153)

 

 

 

시간이 되는 대로 나머지 3권도 마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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