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방법론
로리 슈나이더 애덤스 외 지음 / 서울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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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으론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학계에 미술사 연구방법론 논의가 꽤 유행이었던 것 같다. 모대학에서는 미술사 방법론 연구회가 기치를 내걸고 진행되었고, 이즈음 이러한 연구 경향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나 나름 새로운 시각의 연구가 배출되기도 했다. 새롭게 시도되는 사회·경제적 연구(미술품 후원자), 문화적 연구(문학관련, 의례·의식 관련), 전기적 연구(작가 연구) 등은 기존의 양식사와 도상학(도상해석학)적 방법에다 더욱 폭넓은 시각을 더해주었다.


그런데 이런 ‘방법론’은 결국 기존의 연구방법을 분석하고 정리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적용되는 예가 없이 방법론 자체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천이 없다면 의미가 없는 이론이라는 말이다. 결국 실천하면서 이론을 적용하면 될 것을 굳이 그 이론을 규정하고 논의하는 것은 쓸모없는 시간낭비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예전에 은사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방법론이란 건) 논문 쓰면서 그냥 하면 된다”는 얘기다.
나도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희의적으로 볼 필요까진 없지 않을까 싶다. 방법을 생각하면서 방법에 대한 성찰과 비판도 가능할 터. 실제로 이 책을 보면서 새롭고 색다른 연구 방법이 있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같은 작품을 참 여러 가지 시선과 해석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형식과 도상, 사회맥락 연구, 전기적 방법까지는 그나마 익숙하고 실천도 많이 되고 있는 방법론들이지만 기호학과 정신분석은 내용도 매우 어려웠고, 내 전공 분야에서는 거의 적용하기 힘든 방법론인 듯하다. 다만 정신분석과 미술을 논한 부분에서 위니코트의 ‘전이 대상(transitinal object)’을 종교미술(장례미술)에 적용하여 해석한 부분은 꽤 참조가 되었다.

 

방법론은 결국 미술사 연구자들이 유물을 보고 해석하면서 더욱 정교하게 다듬고, 필요한 경우 새로이 계발해야 하는 것이다. 예전에 이 책을 페미니즘 부분까지만 읽고 방치했던 이후 일종의 미련 같은 것이 남아있었는데 이번에 작정하고 다 읽었다. 이제 미련은 없으나 어려웠던 뒷부분은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조금 남았다.  

 

2009년에 재판이 되었나 본데, 내가 읽은 것은 가지고 있던 초판이다.

5장 페미니즘 부분에서 소개된 그림 <Charlotte du Val d'Ognes>은 최근에 Marie-Denise Villers의 작품으로 밝혀졌다고 하니 이런 내용들이 수정되었는지는 확인해 보지 못해서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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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크는 인문학 2 : 아름다움 - 못생긴 백설공주도 왕자의 키스를 받았을까? 생각이 크는 인문학 2
한기호 지음, 이진아 그림 / 을파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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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사람이라면 아름다움이 지니는 힘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게 아니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깊이 성찰할 수 있어야한다. 아름다움이란 객관적인 것인가, 아니면 주관적인 것인가. 시대와 장소와 무관한 보편적인 아름다움이 있는가. 피타고라스가 말하듯 아름다움이란 ‘조화’와 ‘질서’ 같은 사물의 존재 방식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아니면 데이비드 흄이 말하듯 “아름다움은 사물 그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오로지 사물을 응시하는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며, 모든 사람은 아름다움을 서로 다르게 느끼는” 것일까.

 

피타고라스-플라톤-아퀴나스 등이 아름다움을 유발하는 보편적(객관적)인 요소들에 대해 언급했다면, 인간의 문화 속에서 만들어지는 (주관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 학자들도 있다.

 

 

과학자 울리히 렌츠는 《아름다움의 과학》이라는 책에서 아름다움의 원리를 두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하나는 자연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으로 그 뿌리가 자연에 있는 것입니다. 비례가 맞는 몸매의 아름다움이나 황금 비율을 지킨 그림이나 조각 등의 조화와 균형을 갖춘 아름다움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문화에 의해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으로 그 뿌리는 인간 공동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문화는 인류가 만든 것이지만 인류 정신을 지배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자연적인 조화와 비례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 심지어 기괴하다고 생각되는 모습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71)

 

 

캐나다의 심리학자 주디 앤더슨은 세계 각지의 다양한 문화를 연구했는데, 날씬한 몸매를 아름답다고 여기는 곳은 식량 걱정이 없는 지역이었으며 풍만한 몸매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곳은 식량이 부족한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식량이 부족해 먹지 못한 사람들이 보기에 풍만한 몸매는 아름답고 동경하고 싶은 몸매였던 것이죠. 즉, 아름다움이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처지와 문화, 마음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끌림의 과학》을 쓴 애드리언 펀햄과 바이런 스와미도 비슷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18~19세기 유럽 제국주의 국가의 귀족과 왕족 여성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으므로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여성들의 피부는 유난히 백옥처럼 희었고 흰 피부는 아름다움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실내에서 일을 하며 보내야 했고, 햇빛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 이상 하얀 피부는 아름다움의 상징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가난과 병약함의 상징이 되었죠.

다양한 연구 결과를 통해서 아름다움은 단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인간들에게만 존재하는 문화라는 것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보는 또 다른 눈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인간은 자연에 몸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문화를 가진 독특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이중적인 입장이 바로 아름다움을 객관적이면서 주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74-77)

 

 

아름다운 사람은 남다른 힘을 가지지만, 질투와 편견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그에 따라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4장의 얘기는 누구나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부하 직원이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 매력적이지 않은 부하 직원의 경우에는 단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매력적인 부하 직원이 업무를 완수하지 못한다면 노력이 부족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93)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사람이 유리할 때도 있지만, 불리할 때도 있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에게는 선망이라는 감정도, 질투라는 감정도 있기 때문에.

 

 

1970년대에 미국에서 행해진 한 실험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여러 남녀 대학생이 방을 구하라는 임무를 받았는데 결국 방을 구하지 못한 사람은 빼어난 미인들이었다고 합니다. (94)

 

 

5장 <예술 작품은 모두 아름다워야 하나요?> 에서는 피카소, 뒤샹, 존 케이지 등이 만들어낸 ‘아름답지 않은 예술작품들’을 예로 들면서 이제는 예술이 더 이상 옛날처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기술’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질되었다는 결론을 던져놓고 황급히 마무리되었다. 하기야 본격적으로 예술론을 논하는 책은 아니니까 일단 “과연 예술이란 무엇일까요?” 정도의 질문으로 끝내는 게 현명할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뭔가 아쉬운 건 사실이다.

 

6장에서 동물들도 아름다움을 안다는 것과, 아름다움은 좋은 유전자의 증거라는 논의가 과학자들 사이에서 나왔다고 소개한다. 갓난쟁이도 예쁜 얼굴 모니터만 바라본다지 않아? 인간이 느끼는 아름다움이 남성적인 면보다는 여성적인 면에 더 치우쳐 있고, 이것은 인간의 생존과 진화와 직접 관계가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었다. 다른 동물에 비해 인간의 여성은 자녀를 오랜 기간 돌보아야 하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남성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아름다운 외모는 남성의 도움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겉모습의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끝에서는 역시 모범적이고 무난한 결론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되고 있다.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다양한 단어는 아름다움의 다양한 성질들을 생각해 보게 합니다. 만일 아름다움이라는 성질이 한 가지라면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표현이 그렇게 다양할 수 있을까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다양한 단어는 사물이 가진 여러 가지 종류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도와줍니다. 어떤 것은 색깔이 진해서 아름답고 어떤 것은 색깔이 연해서 아름답죠. 어떤 것은 커서 아름답고 또 어떤 것은 작기 때문에 아름다워요. 선이 굵어서 아름다운 것도 있고, 선이 가늘어서 아름다운 것도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성질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다양한 성질들이 결합해 만들어 낸 것이죠. 마치 훌륭한 음식을 먹으면서 ‘맛있다’고 말할 때, 그 말 속에 담긴 ‘맛’은 하나의 맛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쓰고, 맵고, 달고, 고소하고, 짠맛이 절묘하게 결합해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것처럼, 사물의 다양한 성질 중에서 어떤 사람은 색깔에 주목해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어떤 사람은 모양에 주목해 아름답지 않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146)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미학 입문서로 보면 되겠다.

하지만 본격적인 미학 탐구서라고 하기엔 약간 부족함이 있다.

‘못생긴 백설공주도 왕자의 키스를 받았을까?’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청소년들이 관심이 많을) ‘외모의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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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er's Game (Mass Market Paperback, Revised)
올슨 스콧 카드 지음 / Tor Science Fiction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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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개봉하기 전에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오늘 겨우 허겁지겁 (뒤로 가면서 모르는 단어는 찾지도 않고) 다 읽었다.

70년대에 쓴 소설로선 매우 획기적인 설정이었겠다.

 

뒤로 가면서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도대체 진짜 버거들은 언제 나오는 거냐 하면서 짜증을 냈었는데, 뒤통수를 맞았다.

텔레비전에서, 인터넷에서, 여기저기에서 봤던 영화 엔더스게임 예고편에 비친 이미지에 자꾸 소설 내용을 대입하게 되니까 때론 해석에 방해도 됐고 어쩔 때는 도움도 되었다.

 

8살 난 어린애가 애늙은이처럼 말하는 게 좀 적응이 안됐지만 탁월한 천재들은 공감이 간다고 하더라.

군사 훈련 장면들은 예비역인 내가 보기에도(공군은 아니었지만) 꽤 실감나게 묘사한 거 같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영화가 소설보다 재미있을 거 같진 않다.

 

 

Mazer Rackham이 엔더에게 한 말이 인상 깊었다.

 

"An enemy, Ender Wiggin, I am your enemy, the first one you've ever had who was smarter than you. There is no teacher but the enemy. No one but the enemy will tell you what the enemy is going to do. No one but the enemy will ever teach you how to destroy and conquer. Only the enemy shows you where you are weak. Only the enemy tells you where he is strong. And the rules of the game are what you can do to him and what you can stop him from doing to you. I am your enemy from now on. From now on I am your teacher." (262-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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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할 땐 아리스토텔레스 땐 시리즈
다미앵 클레르제-귀르노 지음, 김정훈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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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책이란 게 처음에는 적응이 잘 안된다.

일단 쓰이는 단어들이 일상 생활과 거리가 있는 편이고, 문장들도 개념적이어서 짱돌을 마구 굴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글 맥락에 익숙해지면 또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있기는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만 읽어봤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아하는 철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철학(윤리학) 전반을 이 책을 통해 파악하면서 더 좋아졌다.

내가 살면서 생각해왔던 문제들,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민하게 되는 삶의 질문들과 그 해법이 제시되어 있다.

리처드 세넷 <장인>을 읽으며 크게 공감했던 논조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나서 재미있었는데, 알고 보니 세넷의 스승인 한나 아렌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계승하고 있단다.

 

결국은 행동하라는 얘기다.

욕망과 쾌락을 위해 종사하는 행동을 하지말고, 행동 자체가 즐거움이 되는 경지에 이르라는 말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즐겁게 실천하라는 것이다.

말이 쉽지 이게 사실 어려운 경지다.

하지만 "무엇을 할지 알 때까지 기다라는 것은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기 위해서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기다리는 격이다.(143)"

지금 바로 움직이고, 좋은 습관을 들이고, 자신을 성찰하라,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말라는 가르침은 늘 마음 속에 새겨둘 만하다.

 

그래서 정말 사는 게 다 지겹고 '무력할 땐' 아주 괜찮은 책인 거 같다.

 

 

#

아래에 인용하는 구절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위 책, 그러니까 다미앵 클레르제 귀르노 책의 구절들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재인용도 있다. 이 경우 글자색을 다르게 했다.

 

 

그러나 '최고로 좋은 것'을 이상적으로 좋은 것으로 변형시키는 일은 건강한 욕망을 포기하는 일이 되기 쉽다. 이렇게 지나친 엄격함 때문에 우리는 완벽한 모델만을 따라 맹렬하게 달려가면서 다른 것들은 그것의 창백한 모방일 뿐이라고 여기고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다가 진정 좋은 것들을 잃게 되는 것이다. 행복을 위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는데 말이다. 아아! 더 완벽하고 더 크고 더 위대한 다른 것을 향해 가야 한다고 믿은 나머지, 지나친 열의 때문에 우리는 기회를 놓쳐버리고 불행을 위해 노력을 하고 만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이가 진정한 사랑을 기다리고 있다는 핑계를 대며 사랑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가? 노래하는 내일의 약속을 만족시키려고 얼마나 많은 행복한 시간을 단념했던가? 저 대단한 것들을 쫓으려는 갈망은 우리를 세상에 대한 혐오 속에 빠뜨리고, 그렇게 하여 좋은 것들 하나하나가 주변의 평범함과 시시함 속에 둘러싸인다. (50)

 

그러나 그 반대 또한 진실이다. 때로 행복의 추구는 만일 우리가 강박 때문에 눈이 멀지 않았더라면 결코 탐내지 않았을 것들을 욕망하게 만든다. 어떤 사이클 선수는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 스테로이드를 사용하자는 제안에 동의한다. 자신의 전 생애의 성과가 그 승리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혁명가는 자신의 정적을 가차 없이 제거한다. 그들은 완벽한 사회를 만드는 일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날씬해지려고 하다가 병에 걸리는 소녀도 있다. 예뻐지는 것이 좋은 것 중에 최고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열망 가운데 어떤 것도, 이런 욕망 가운데 어떤 것도 그 자체로 비난을 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는 그저 자신에게 맞는 가장 좋은 것, 다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최고로 좋은 것'의 자리에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50-51)

 

"즐거운 것들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사람, 혹은 즐거운 것들을 지나치게 추구하되 선택을 통해 추구하는 사람, 그것도 즐거움으로부터 나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즐거움 자체 때문에 추구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무절제한 사람이다." (『윤리학』, Ⅶ, 1150a 19-21) (62)

 

가장 굳건한 우정은 그러니까 오랜 만남을 먹고 자라나는 것이다. 우리가 사실에 따라서 다른 사람을 평가하면 갑작스레 실망을 한다거나 갑자기 싫증을 느낀다거나 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그래도 매일 아침 같은 얼굴을 다시 보는 일에 익숙해지고 그게 습관이 되면 즐거움이 고갈된다. 즐거움은 모자람을 먹고사는 법이다. 그래서 더 이상 모자람이 없는 사람을 오래 사랑하기가 힘든 것이다. (66)

 

만일 어린아이가 스스로 자기를 평가하는 것을 아주 어려워한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몹시 필요로 한다면("엄마, 이것 좀 봐요!"), 이는 그가 아직은 많은 부분에서 미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미완성의 느낌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삶이 아직 그에게 완성의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아이에게 유효한 것이 여전히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자신의 삶이 불만스러운데, 지금 자신의 모습이 우리에게 예정되어 있다고 느끼던 모습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불만족은 언제나 끈질기게 찾아드는 이런 미완성의 인상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살게 될 것이라고 믿던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기에 불쾌한 느낌이 더욱 오래도록 이어지는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는 우리가 행동을 통하여 자신을 펼치고 장애물이 있더라도 자신을 표현하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자신의 현재 모습이 우리가 될 수 있는 모습과 아직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이다. (84-85)

 

"포부가 작은 사람은 본인이 좋은 일들을 할 만한 사람임에도 자신이 할 만한 것들을 스스로 박탈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 좋은 일들을 할 만하지 않다고 평가함으로써 어떤 나쁨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실제로 좋은 것이었으며, 자신이 할 만했던 그것들을 추구했을 테니까. 그래도 이들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기보다는 위축된 사람으로 생각된다." (『윤리학』, Ⅳ, 1125a 20-24)

그러므로 이런 열등감은 자기 자신을 제 가치로 평가하지 못하는 무능력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자기 비하는 다른 사람에게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우리는 모든 것을 내어주면서 자신을 숨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자비와 호의를 불러일으켜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우리를 더욱 사랑하도록 만들기를 소망한다. 친절은 결코 공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남에게 모든 좋은 것을 바쳤으니 남도 우리를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하는 어떤 방식이라는 점에서 스스로 속죄소가 되고자 한다. 우리는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되찾아달라는, 자신에 대한 저평가를 그의 사랑으로 회복시켜달라는 무거운 부담을 그에게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96-97)

 

"포부가 큰 사람은 (……) 다른 사람에 의존해서 살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노예 같은 일이니까. 그런 까닭에 모든 아첨꾼은 고용된 일꾼이며 비천한 사람들은 아첨꾼인 것이다. 포부가 큰 사람은 쉽게 경탄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에게는 어떤 것도 대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또 나쁜 일들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도 아니다. 지난 일들을 기억해서 불편해하는 것, 특히 나쁜 일들에 대해 그러는 것은 포부가 큰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니까. 차라리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이 포부가 큰 사람의 특징이다. 그는 또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자도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타인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칭찬을 받는 일에도 다른 사람이 비난을 받는 일에도 모두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칭찬하는 사람도 아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험담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심지어 적이라 하더라도, 오만 때문이 아니라면 그는 험담하는 사람이 아니다." (『윤리학』Ⅳ, 1125a 1-9) (98-99)

 

당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떠올려서 곰곰이 생각해보라. 당신이 아무런 관심도 없는 누군가를 싫어하기는 아주 어렵다는 사실을 알겠는가? 미움은 뭔가 모숩된 사랑을 많이 닮았다. 싫어하는 것도 일종의 관심이다.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고 악착같이 뒤쫓는 것, 이것은 상대로 하여금 자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일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이 우리에게 몹시 심하게 대한다면, 이는 그가 우리를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104)

 

만일 탁월성이 이기적인 것이라면, 이는 탁월성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우리가 시도한 일이 거둔 성공 속에서, 우리 안의 무언가를 자유로이 펼쳐서 이루어낸 행동의 즐거움에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하기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으로 충분한데 왜 쾌락을 위해서 행동을 해야 하겠는가? (107)

 

그러므로 실천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태도이다. 실천에는 행위 전체에 외적인 목적으로 부가될 즐거움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실천은 우리의 타고난 무절제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즐거움은 행위 자체에 있고, 그 자체로 충분하며, 그것 이외의 다른 목표나 외적인 목적은 없다. 바로 이것이 실천이다. 춤추는 즐거움, 헤엄치는 즐거움, 글 쓰는 즐거움, 기도하는 즐거움, 그러니까 행동하는 즐거움.

"제작은 그것 자체와는 다른 목적을 갖지만, 실천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실천의 목적은 바로 잘 실천하는 것 자체이니까." (『윤리학』, 1140b 6-7) (110)

 

우리가 활동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집중력을 생기게 하고 주의가 흐트러지는 것을 막아주기에 한층 더 일이 잘 진척되도록 해준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실제로 산만한 경향을 보인다. 날아다니는 파리만 봐도 눈이 돌아가고 틈만 있으면 일에서 벗어날 구실을 찾는다. 그러고서는 뭔가 도락가 근성 같은 것이 생겨나더니 구상 단계에만 즐거움을 주었던 많은 계획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행동을 시작하자마자 지겨움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우리가 사실 아주 좋아했던 계획인데도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실행하려는 행동이 길어지자마자 갑자기 그 매력이 사라져버린다. 음악가가 되거나 6개 국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다면 누구나 좋아할 것이다. 이는 잘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연습은 금세 지겨워지고 매일 훈련하기도 지친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맘먹고 산 기타는 한구석에 처박혀 있고 교본은 책장 깊숙이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 기다렸던 즐거움이지만 너무 오래 기다렸던 것이다.

만일 엉터리로 기타를 치거나 외국어를 더듬거리는 일에서 처음부터 즐거움을 느낀다면, 결과는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언어를 가장 잘 배우는 사람은 몇 마디 말을 배우자마자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것을 겁내지 않고 배운 것을 써보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즐겁게 들이대고, 구문이나 문법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단계를 기다리지 않고 대화를 시도한다. 그는 서툰 아마추어 음악가가 소품곡 연주를 기대하며 오랫동안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면서 좋아라 하듯이 그렇게 즐거워한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이미 즐거움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넘어갈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주의가 흐트러질 일이 없으니 실력도 빠르게 향상된다. (113-114)

 

… 그리하여 인정을 받고자 하는 강박적인 욕구로 일을 하는 공인公人은 명성을 얻을 수만 있으면 됐지 그 명성이 어디서 오는지 잘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의 눈에는 텔레비전에 나와 한심한 미사여구를 연발하며 허세를 부리는 즐거움이 교양 있고 성숙한 대중을 만나는 더 까다로운 즐거움과 동등한 것으로 보인다. 더 나쁘게는 만일 재주가 모자라 더 어려운 형태의 인정을 바랄 수 없게 된다면, 그는 주목을 얻기 위해 기꺼이 사악한 명성으로 자신을 만족시키려고 할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무명의 그늘 속에 머물러 있느니 차라리 강경한 사람으로 통해서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에게는 더 나은 일인 것이다. (116)

 

…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시간 동안 그 삶을 통해서 행동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것이 무엇이건 우리가 결정을 내리자마자 행위의 자리가 생겨난다. 아침에 빵집에 빵을 사러 가겠다는 결정이나 결혼을 하겠다는 결정, 세차를 하거나 텔레비전을 끄겠다는 결정, 이 모든 것 또한 행위이다. 그 속에서 우리의 탁월성을 나타낼 수 있는 행위인 것이다. 행위라고 해서 뭔가 위대하고 놀라운 것을 상상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우리 일상이 수많은 행동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행동하는 것은 단순한 결정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활동 덕분에 얻을 수 있는 다른 뭔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해서 활동을 하기로 결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해내는 일을 행동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제공된 기회로 여기자. 간단히 말해 우리는 외적인 목표의 신임장을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시도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고유한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118-119)

 

인정하자. 행위는 어떤 위험, 우리 자신에 대한 기대가 착각이었음을 발견하게 될 위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열망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될 위험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위험인가? 그래 좋다. 우리가 하는 행위는 우리가 지닌 열망의 묘비이다. 그러나 행위는 놀라운 계시자이기도 하다! 실패에는 많은 가르침이 들어 있다. 우리는 시련을 겪으면서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훨씬 효과적으로 자신에 대해 알게 된다. 우리가 행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행위를 하면서 자신을 노출할 위험을 무릅쓰기 때문이다. 행위의 패는 언제나 승리한다. 서슴없이 감행한다면.

행동하는 수고를 감행하기 위해 무엇을 할지 알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기 위해서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기다리는 격이다. 그러나 우리의 성향을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하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더 분명히 알기 위해서 이 성향을 수정하는 일은 먼저 행동하기를 요구한다. 자신의 탁월성을 발견하기를 원한다면 행동으로 시작해야 하지 탁월성을 지닐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금 행동해보겠다는 식이어서는 안된다.

구체적으로 말해 이는 행동의 기회는 모두 붙잡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많은 활동은 스스로 선택했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선택했다고 해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충 순응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살다 보면 눈에 띄는 대로 일을 맡게 되고 일이 요구하는 대로 응하게 된다. 직업도 그렇고 가정생활의 이런저런 요구에서도 그렇다. 비록 그것들이 꼭 자기에게 딱 맞는 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행동의 계기는 자신을 시험할 소중한 기회이다. 탁월한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닌 탁월성의 시험대다. 행동을 하는 덕분에 우리는 마침내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진정으로 알게 된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행위에서 얼굴을 돌리게 만들고 지금 맡아서 하는 활동에 쉽게 전력을 다하지 못하게 하는 많은 장애물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 아주 작은 행동 하나에도 차고 넘치게 마음을 쏟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일이다. (142-144)

 

… 아마도 똑같은 모습을 바라보는 습관은 마침내 그 모습을 지겨운 것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보는 습관은 바라보는 일을 분명 그만두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잘 보도록 도와주기도, 오랫동안 눈에 띄지 않았던 세부사항과 결함으로 보였던 것에서 갑자기 새로운 매력을 찾아내 즐거워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처음에는 추해 보였는데 익숙해지면서 점점 진정한 깊이를 지닌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 눈길을 사로잡은 표면적인 아름다움을 지나 점점 그 사람의 존재에 깃들어 있는 매력을 바라보는 일에 빠져드는 것,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150-151)

 

당신이 갖고 있는 새로운 습관을 하나 생각해보고 활기찬 계획을 세워보라. 모호한 결심만 해두고서 만족하지 마라. 정확하게 계획을 세워두면 당신이 열망하는 것에 그만큼 더 애착을 갖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운동 습관을 들이고 싶다면, 먼저 일주일에 몇 차례 그것을 할 예정인지를 스스로 물어보자. 그런 뒤에 달력 위에 표시해두고 일정표를 조정하여 바꾸지 마라. 습관이 되지 않은 일은 강한 규칙 위에다 받쳐놓아야 한다. 어떤 행위가 습관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 행위를 의식으로 만드는 법을 알아야 한다. (157-158)

 

당신이 버리고 싶은 습관을 생각해보라. 그것이 또 다른 습관과 연결되어 있는가? 때로 나쁜 습관을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습관과 슬그머니 연결되어 있는 다른 습관을 공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계속 군것질을 하는 습관은 텔레비전을 보는 습관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후자를 먼저 떨쳐내지 않는다면 전자를 떨쳐내기가 아주 어려울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전략적으로 잘 고른 한 가지 습관을 끊으면 다른 많은 습관도 없앨 수 있다. (158)

 

그러므로 우리가 길러야 하는 감성은 요컨대 심미적인 감성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을 부단히 접하는 것을 가장 효과적인 수양의 수단으로 보았다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윤곽, 선, 형태, 색깔을 느낄 수 있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그림 연습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세상을 보고, 정말로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너무 바쁜 행인처럼 눈이 대상의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는데 그치지 않으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마찬가지로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살아가면서 겪지도 못할 많은 상황이 눈앞에 지나가는 것을 본다. 이렇게 해서 그는 오래도록 도움이 될 일련의 삶의 정경을 축적하고, 이는 인간관계의 한없는 복잡성을 성급한 판단으로 빈약하게 만들어버리는 유혹으로부터 그를 지켜줄 것이다. 문학은 경험을 주지는 않는다. 문학에서 미성숙의 치유책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위험할 것이다. 문학은 우리가 해보지 않은 어떠한 경험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이미 해본 모든 경험을 훨씬 잘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그리고 우리가 나중에 겪을 경험도 더 잘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 그것은 역시 손을 써서 눈을 기르는 것이다. 그저 감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몸소 그림을 그리면서 우리는 능동적으로 보는 법을 배운다. 어떤 형식의 예술에서든 작품을 가장 잘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실제로 해봐서 아는 사람이다. 평가를 할 수 있으려면 만들어봐야 한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의 균형을 더 잘 느끼기 위해 시도하는 글쓰기,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리의 조화로 귀를 교육하기 위해 해보는 악기 연주, 무용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을 다르게 볼 수 있기 위해 추는 춤. (165-167)

 

우리가 내려야 하는 결정은 긴급히 내려야 하는 결정이다. 최선의 결정이라고 해서 언제나 절대적으로 가장 좋은 결정은 아니다. 더 많은 시간을 들였으며 아마도 더 잘 숙고했을 테고 최종적으로 결심했던 것과는 다른 쪽을 택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서 후회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결정을 오래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일 때에는 너무 꼼꼼하게 따지면서 망설이다가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행동해야 한다면 확실해지기를 기다라는 것은 최선의 선택지가 아니다. 적절한 순간을 놓쳐버릴 위험이, 행동의 기회가 눈앞에서 사라져버릴 위험이 있다. 행동에는 제 때가 있다. 이는 언제나 완벽하게 무르익은 숙고에 알맞은 그런 때는 아니다. 이런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것, 실수를 저지를 위험을 무릅쓰는 것, 저 '행동하기'란 이런 것이기도 한다. (183)

 

습관의 도움을 받으면 행동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점점 더 수월해진다. 생각이 행동을 앞서는 대신에 생각이 마침내 행동에 합류하고, 생각의 선율이 행동에 깃든다. 처음에는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는 데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고 나면 조금씩 우리의 감정적 성향이 버릇을 들인다. 이성의 노력에 더욱 너그러워지고 이성에 반대하는 대신 이성을 보조한다……. 바로 이것이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의 커다란 장점이다. (207-208)

 

굳이 헤아려보지 않아도 얼마나 많은 결점이 사실은 탁월성이 과하게 된 결과인가? 비겁함은 결점이지만 아무 싸움에나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무모함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색함은 결점이지만 돈을 물 쓰듯 하는 낭비벽이 더 권할 만한 것도 아니다. 우둔함은 결점이지만 거드름을 피게 만드는 거만함은 그에 못지않은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종종 어떻게 하기를 너무 바라던 나머지 아무것도 안 하기로 결정했을 때 못지않게 우스운 꼴이 되고 만다. 얌전함이 보기에도 딱한 심한 수줍음이 되고 경건함이 광신으로 변하고, 문예에 대한 사랑이 속물 교양이 되고 지나친 친절이 천한 아첨을 닮아간다.

"함께 삶을 통해서, 또 말과 행위를 서로 나눔으로써 이루어지는 교제에서, 즐거움을 위해 모든 것을 칭찬하고 반대는 절대로 하지 않으면서 누구를 만나든 괴로움을 주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속없이 친해지려는 사람'들로 보인다." (『윤리학』Ⅳ, 1126b 12-14) (219)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이 멋지게 합격하려는 야심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보기에 딱한 일이다. 좀더 소박한 야심을 가졌다면 크게 고생하지 않고 확실히 합격했을 텐데 말이다. 당신은 어떤가? 그저 잘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최고가 되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지는 않은가? 절도를 지키는 것, 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분명하게 평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더 잘하려는 열망을 가져야 하겠지만 그 열망만큼 능력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227)

 

탁월성의 원동력은 우리가 준수해야 하는 이름 없는 법이 아니라 우리가 모방하고 싶어 하는 영웅이다. '의무'도 '복종'도 전혀 없다. 공손함은 잊어라! 탁월성은 우리의 눈에 뛰어남과 아름다움의 모델로 나타나는 이에게 필적하려는 열망이다. 그것은 정복의 기백과 열정이 넘치는 신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자기도 모르게 영화나 소설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할 때 느끼는 것과 똑같은 열정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완성의 모델이라고 말하는 실천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연구실에 틀어박힌 현자와는 전혀 다르다. 그는 어린 시절 우리가 선망한 영웅을 훨씬 더 많이 닮았다. 규측을 부과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의 규칙이 되는 자이다. "만일 그가 나라면 그는 어떻게 행동할까?" 부디 우리의 모델이 되는 사람에게 필적하고 싶게 만드는 이런 감탄의 능력을 우리가 온전히 간직하게 되기를. (236)

 

 

 

좀 많았지만 힘써 옮겨보았다.

덕분에 조금 무기력에서 벗어난 것처럼 느낀다.

이런 게 바로 '행동하는 미덕'일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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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2 - 아스카.나라 아스카 들판에 백제꽃이 피었습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영화 <건축학 개론>을 보면 수지가 나중에 지어달라며 이제훈에게 집 설계도를 하나 그려 준다. 이 어설픈 도면을 남주인공이 책상에 있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에다 꽂아두었다가 빼보는 모습이 나온다. 깨알같은 고증이다. 90년대 초중반 쯤 대학생들 책상에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한 권 정도는 있었으니까. 게다가 건축학도라면 그 책에 나오는 유홍준 교수의 저 감은사지 석탑에 대한 격정적인 감상(아, 감은사 탑이여, 아, 감은사 탑이여를 되뇌이던)을 아주 인상 깊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전에 어떤 책에서도 경주 촌구석 들판에 서있는 쌍탑에 대해 그 정도 파토스를 드러내며 비평한 예가 없었으니까.

 

나도 학창 시절에 이 답사기들을 읽었다. 답사 가기 전에 유홍준 교수는 뭐라고 했나 궁금해서 읽었던 거 같다. 공감되는 것도 많았고, 마치 희대의 만담가가 답사 현장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풀어놓듯이 써내려간 필력에 많이 놀랐다. 무엇보다도 문화사의 시각에서 유물들을 설명하고 있는 점이나, 미술사 논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작품에 미학적 가치들을 부여하는 태도'에 속이 다 시원했었다. 때때로 적당한 문학작품과 시가 인용되었고, 곳곳에 적절하면서도 위트 있는 비유가 사용되었다. 이런 글쓰기는 보통 내공이 없고서는 거의 가능하지 않은 것이고, 어설프게 시도했다가는 비웃음만 살 게 뻔한 방법들이다. 그런데 그는 이것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이 때문인지 답사기는 많은 이들의 공감과 환영을 받았고, 지금까지 시리즈책을 출판할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것이다.

 

나도 유홍준의 답사기를 3권까지는 가지고 있고, 나머지 책도 통독은 못했지만 조금씩은 읽어 보았다. 최근에 나온 제주도편은 나 역시 잘 모르는 곳이라서 오랜만에 구입해서 완독했다. 아마 제주도편이 내가 읽었던 유교수의 답사기 가운데 가장 재밌게 본 책일 것이다. 제주도는, 유홍준 스타일의 저술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런 곳이다. 유물들이 제주도라는 땅과 자연과 인간과 함께 어우러지며 갖가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유물들만 따로 보아서는 알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가치와 상징들이 저자의 능숙한 스토리텔링으로 모양을 갖추었다. 나로서는 다 읽고 나서 제주도를 다시 가고 싶었던 그런 책이었다. 답사와 기행책에 이만한 찬사는 없을 것이다. "가고 싶게 만드는 책"

 

그리고 올 여름 일본편 답사기가 나왔다길래 내심 궁금하던 차에 도서관에 새로 들어온 걸 보고 2편만 빌려서 쭉 읽어 보았다. 일본의 교토와 나라, 오사카를 가본 게 벌써 옛날이다. 그때의 기억들이 되살아나더라. 기행문으로서 일본 아스카·나라편 답사기는 또 다른 스테디셀러가 될 것이다. 아스카와 나라의 문화유산들을 이만큼 '감상'이 아닌 '해설'로 소개한 기행문은 드물기 때문이다.

저자는 나라시대까지 일본 고대의 역사를 제법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딱딱한 역사서를 보는 것보다는 훨씬 빨리 그 대략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요한 부분에서는 되도록 상세히 서술하여 일본의 고대사. 아스카~나라시대까지 역사를 일람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교양서로서 매우 큰 장점이다. 어차피 세세한 내용들은 전문서나 논문을 참고해야 하겠지만 웬만한 교양인들의 지적 허영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이만한 책도 없다.

다른 답사기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글쓴이는 아스카와 나라의 문화유산들의 겉모습만을 말하지 않는다. 이들을 담고 있는 지리와 역사를 배경으로 삼아서 건축과 미술품을 설명하고, 나아가 문학과 인간을 이야기하며, 오다가다 지나는 자연까지 탐미한다. 마치 작정하고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장소를 보고 인간을 본다. 학술적인 글에서는 쓰기 힘든 심미적인 감상이 적극 쓰여졌고 지루해질 때쯤이면 흥미로운 야사나 개인적인 여담을 가미하였다. 이런 매력적인 글쓰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타고난 감각이 있어야 한다. 솔직히 눌변에 글도 빨리 잘 못쓰는 나는 이렇게 할 수 있는 저자가 부러워 죽겠다.

 

저자는 글 속에서 걸핏하면 미술사학자, 미술사가라고 말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미학과(학부)와 동양철학과(박사)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거 같다. 유물과 예술을 보는 그의 시각은 미술사학자라기보다는 미학자나 철학자에 가까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자의 책에서 작품의 치밀하고 정교한 분석보다는 직관적, 심미적, 문화사적, 사상적 해석이 더 자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똑같은 설명을 해도 지루하지가 않고 금방 몰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있어 보이는' 문체에 쉽사리 경도되면서 비판 정신이 수그러드는 단점도 있다. 하지만 전공자들이야 빠순이가 아니니까 너무 나간 이야기나 헛점들을 잡아내는 게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닐 듯하다.

기본적으로 좋은 책이다. 정말 거의 다 좋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새삼 우리 자신을 다시 보게 해주었고, 일본도 물론 다시 보게 해 준다. 하지만 옥의 티 몇 가지만 지적하자면

 

아스카 지역의 <선악의 이면석> 등 돌조각과 연관시켜볼 만한 게 없다고 하는데(109) 미륵사지에서 발굴된 석상이 아스카 지역의 돌조각들과 유사하다고 일본인 스스로 지적한 바가 있다(가종수·기무라시게노부, 『한국석상의 원류를 찾아서』, 2011). 또 일본과 한국의 정원을 비교하며 이야기한 부분에서 우리더러 좀 '정리하면서' 살자고 권고하는 건(182) 괜한 오지랖이다. 한국인은 한국인답게 살다가 죽으면 된다. 이른바 '막사발'을 일본인들이 '다완'으로 재발견하여 숭배해 마지않는 건 참 재미있는 현상이긴 하다. 한국인들은 그것을 만들어서 썼다. 그리고 그것을 '버렸다' 그네들은 거기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완들은 스님들이 썼던 그릇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는 이런 행태야말로 진정한 선승의 태도 아닌가. 일본인들은 그릇에 이름 붙이고 의미부여하기에 급급했다면(그릇 하나와 성을 바꿨다는 얘기도 있다) 한국인들은 한낱 물건인 것에 초연했을 뿐이다.

<몽유도원도> 설명에서는 이상한 연극이론을 갖다 붙이던데(198),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몽유도원도는 두루마리 형태로 (오른쪽부터) 펼쳐 보는 그림이다. 돌돌 감겨 있던 두루마리를 펼치기 시작하면 '몽유도원도'라는 안평대군의 글씨와 찬문이 나오고 이어 역동적인 기암괴석 한 가운데 도원이 그려진 장면이 처음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안평대군이 꾼 꿈을 화원 안견이 그림으로 그릴 때 시간순으로 그린다면 오른쪽에 속세에서 산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먼저 그리고 맨 왼쪽에 도원이 그려져야 한다. 이걸 반대로 도원을 먼저 오른쪽에 그린 것은 안견이 그림을 펴자마자 이야기의 절정이자 핵심 부분이 나타나기를 의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와 그림은 다른 것이다. 이야기를 시각으로 구현해 낼 때 화가의 응용력과 창의력은 이렇게 발현된다. <몽유도원도> 화면 구성에 굳이 도망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면서 잡히게 하라는 연출 이론을 적용하는 건 매우 이상하다. 한번에 보는 그림이 아니라 두루마리로 펼치면서 보는 그림이다.

흥복사 팔부중상 설명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이라는 해설은 이제는 촌스럽고 너무 관습적인 설명이다(224). 불교에 나오는 호법신들의 범위가 너무 넓고 막연하다.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그렇게 수호들을 한다는 건가? 팔부중상과 제자들과 보살들이 모두 등장하는 장면이 누군가로부터 불법을 수호해야만 하는 장면인가? 그렇다고 이들이 경전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인상이 험악하고 무기라도 잡고 있다고 해도 다 호법신은 아니다. 합장하고 기도하고, 깨달음에 희열하고, 눈 감고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으로 표현되어도 갑옷 하나만 입으면 무조건 수호신인가? 

 

성급하고 근거가 없는 판단과 최근의 연구 성과들을 반영하지 못한 서술들은 앞으로 보완을 더 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해도 읽어서는 안되는 책은 아니다. 몇몇 오탈자는 편집자와 교정자의 실수니까 그냥 넘어가자. 책을 서둘러 만들었나 보다.

 

나머지 일본편 답사기도 어서 찾아 읽어야겠다.

방사능 화염을 내뿜는 고질라가 또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겠지만 가보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2015. 2. 20. 덧붙임.

위에 아스카 지역 '선악의 이면석'을 한 일본인이 미륵사지 석상과 비교한 바가 있다고 했는데, 최근 이 미륵사지 석상은 절 건립 당시에 만든 것이 아니라 후대에 제작한 것임을 밝힌 논문이 발표되었다. 따라서 아스카 석상과 미륵사지 석상의 영향 관계를 논하기에 앞서 이들의 정확한 조성연대에 관한 사실부터 검증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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