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2 - 아스카.나라 아스카 들판에 백제꽃이 피었습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 <건축학 개론>을 보면 수지가 나중에 지어달라며 이제훈에게 집 설계도를 하나 그려 준다. 이 어설픈 도면을 남주인공이 책상에 있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에다 꽂아두었다가 빼보는 모습이 나온다. 깨알같은 고증이다. 90년대 초중반 쯤 대학생들 책상에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한 권 정도는 있었으니까. 게다가 건축학도라면 그 책에 나오는 유홍준 교수의 저 감은사지 석탑에 대한 격정적인 감상(아, 감은사 탑이여, 아, 감은사 탑이여를 되뇌이던)을 아주 인상 깊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전에 어떤 책에서도 경주 촌구석 들판에 서있는 쌍탑에 대해 그 정도 파토스를 드러내며 비평한 예가 없었으니까.

 

나도 학창 시절에 이 답사기들을 읽었다. 답사 가기 전에 유홍준 교수는 뭐라고 했나 궁금해서 읽었던 거 같다. 공감되는 것도 많았고, 마치 희대의 만담가가 답사 현장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풀어놓듯이 써내려간 필력에 많이 놀랐다. 무엇보다도 문화사의 시각에서 유물들을 설명하고 있는 점이나, 미술사 논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작품에 미학적 가치들을 부여하는 태도'에 속이 다 시원했었다. 때때로 적당한 문학작품과 시가 인용되었고, 곳곳에 적절하면서도 위트 있는 비유가 사용되었다. 이런 글쓰기는 보통 내공이 없고서는 거의 가능하지 않은 것이고, 어설프게 시도했다가는 비웃음만 살 게 뻔한 방법들이다. 그런데 그는 이것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이 때문인지 답사기는 많은 이들의 공감과 환영을 받았고, 지금까지 시리즈책을 출판할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것이다.

 

나도 유홍준의 답사기를 3권까지는 가지고 있고, 나머지 책도 통독은 못했지만 조금씩은 읽어 보았다. 최근에 나온 제주도편은 나 역시 잘 모르는 곳이라서 오랜만에 구입해서 완독했다. 아마 제주도편이 내가 읽었던 유교수의 답사기 가운데 가장 재밌게 본 책일 것이다. 제주도는, 유홍준 스타일의 저술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런 곳이다. 유물들이 제주도라는 땅과 자연과 인간과 함께 어우러지며 갖가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유물들만 따로 보아서는 알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가치와 상징들이 저자의 능숙한 스토리텔링으로 모양을 갖추었다. 나로서는 다 읽고 나서 제주도를 다시 가고 싶었던 그런 책이었다. 답사와 기행책에 이만한 찬사는 없을 것이다. "가고 싶게 만드는 책"

 

그리고 올 여름 일본편 답사기가 나왔다길래 내심 궁금하던 차에 도서관에 새로 들어온 걸 보고 2편만 빌려서 쭉 읽어 보았다. 일본의 교토와 나라, 오사카를 가본 게 벌써 옛날이다. 그때의 기억들이 되살아나더라. 기행문으로서 일본 아스카·나라편 답사기는 또 다른 스테디셀러가 될 것이다. 아스카와 나라의 문화유산들을 이만큼 '감상'이 아닌 '해설'로 소개한 기행문은 드물기 때문이다.

저자는 나라시대까지 일본 고대의 역사를 제법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딱딱한 역사서를 보는 것보다는 훨씬 빨리 그 대략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요한 부분에서는 되도록 상세히 서술하여 일본의 고대사. 아스카~나라시대까지 역사를 일람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교양서로서 매우 큰 장점이다. 어차피 세세한 내용들은 전문서나 논문을 참고해야 하겠지만 웬만한 교양인들의 지적 허영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이만한 책도 없다.

다른 답사기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글쓴이는 아스카와 나라의 문화유산들의 겉모습만을 말하지 않는다. 이들을 담고 있는 지리와 역사를 배경으로 삼아서 건축과 미술품을 설명하고, 나아가 문학과 인간을 이야기하며, 오다가다 지나는 자연까지 탐미한다. 마치 작정하고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장소를 보고 인간을 본다. 학술적인 글에서는 쓰기 힘든 심미적인 감상이 적극 쓰여졌고 지루해질 때쯤이면 흥미로운 야사나 개인적인 여담을 가미하였다. 이런 매력적인 글쓰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타고난 감각이 있어야 한다. 솔직히 눌변에 글도 빨리 잘 못쓰는 나는 이렇게 할 수 있는 저자가 부러워 죽겠다.

 

저자는 글 속에서 걸핏하면 미술사학자, 미술사가라고 말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미학과(학부)와 동양철학과(박사)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거 같다. 유물과 예술을 보는 그의 시각은 미술사학자라기보다는 미학자나 철학자에 가까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자의 책에서 작품의 치밀하고 정교한 분석보다는 직관적, 심미적, 문화사적, 사상적 해석이 더 자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똑같은 설명을 해도 지루하지가 않고 금방 몰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있어 보이는' 문체에 쉽사리 경도되면서 비판 정신이 수그러드는 단점도 있다. 하지만 전공자들이야 빠순이가 아니니까 너무 나간 이야기나 헛점들을 잡아내는 게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닐 듯하다.

기본적으로 좋은 책이다. 정말 거의 다 좋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새삼 우리 자신을 다시 보게 해주었고, 일본도 물론 다시 보게 해 준다. 하지만 옥의 티 몇 가지만 지적하자면

 

아스카 지역의 <선악의 이면석> 등 돌조각과 연관시켜볼 만한 게 없다고 하는데(109) 미륵사지에서 발굴된 석상이 아스카 지역의 돌조각들과 유사하다고 일본인 스스로 지적한 바가 있다(가종수·기무라시게노부, 『한국석상의 원류를 찾아서』, 2011). 또 일본과 한국의 정원을 비교하며 이야기한 부분에서 우리더러 좀 '정리하면서' 살자고 권고하는 건(182) 괜한 오지랖이다. 한국인은 한국인답게 살다가 죽으면 된다. 이른바 '막사발'을 일본인들이 '다완'으로 재발견하여 숭배해 마지않는 건 참 재미있는 현상이긴 하다. 한국인들은 그것을 만들어서 썼다. 그리고 그것을 '버렸다' 그네들은 거기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완들은 스님들이 썼던 그릇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는 이런 행태야말로 진정한 선승의 태도 아닌가. 일본인들은 그릇에 이름 붙이고 의미부여하기에 급급했다면(그릇 하나와 성을 바꿨다는 얘기도 있다) 한국인들은 한낱 물건인 것에 초연했을 뿐이다.

<몽유도원도> 설명에서는 이상한 연극이론을 갖다 붙이던데(198),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몽유도원도는 두루마리 형태로 (오른쪽부터) 펼쳐 보는 그림이다. 돌돌 감겨 있던 두루마리를 펼치기 시작하면 '몽유도원도'라는 안평대군의 글씨와 찬문이 나오고 이어 역동적인 기암괴석 한 가운데 도원이 그려진 장면이 처음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안평대군이 꾼 꿈을 화원 안견이 그림으로 그릴 때 시간순으로 그린다면 오른쪽에 속세에서 산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먼저 그리고 맨 왼쪽에 도원이 그려져야 한다. 이걸 반대로 도원을 먼저 오른쪽에 그린 것은 안견이 그림을 펴자마자 이야기의 절정이자 핵심 부분이 나타나기를 의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와 그림은 다른 것이다. 이야기를 시각으로 구현해 낼 때 화가의 응용력과 창의력은 이렇게 발현된다. <몽유도원도> 화면 구성에 굳이 도망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면서 잡히게 하라는 연출 이론을 적용하는 건 매우 이상하다. 한번에 보는 그림이 아니라 두루마리로 펼치면서 보는 그림이다.

흥복사 팔부중상 설명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이라는 해설은 이제는 촌스럽고 너무 관습적인 설명이다(224). 불교에 나오는 호법신들의 범위가 너무 넓고 막연하다.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그렇게 수호들을 한다는 건가? 팔부중상과 제자들과 보살들이 모두 등장하는 장면이 누군가로부터 불법을 수호해야만 하는 장면인가? 그렇다고 이들이 경전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인상이 험악하고 무기라도 잡고 있다고 해도 다 호법신은 아니다. 합장하고 기도하고, 깨달음에 희열하고, 눈 감고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으로 표현되어도 갑옷 하나만 입으면 무조건 수호신인가? 

 

성급하고 근거가 없는 판단과 최근의 연구 성과들을 반영하지 못한 서술들은 앞으로 보완을 더 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해도 읽어서는 안되는 책은 아니다. 몇몇 오탈자는 편집자와 교정자의 실수니까 그냥 넘어가자. 책을 서둘러 만들었나 보다.

 

나머지 일본편 답사기도 어서 찾아 읽어야겠다.

방사능 화염을 내뿜는 고질라가 또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겠지만 가보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2015. 2. 20. 덧붙임.

위에 아스카 지역 '선악의 이면석'을 한 일본인이 미륵사지 석상과 비교한 바가 있다고 했는데, 최근 이 미륵사지 석상은 절 건립 당시에 만든 것이 아니라 후대에 제작한 것임을 밝힌 논문이 발표되었다. 따라서 아스카 석상과 미륵사지 석상의 영향 관계를 논하기에 앞서 이들의 정확한 조성연대에 관한 사실부터 검증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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