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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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이 쓴 <내 젊은 날의 숲>을 한 달 째 가방에 넣고 다니다 이제야 겨우 다 읽었다. 서사의 골격이 그리 튼실하지 않은 그의 소설은 띄엄띄엄 읽어도 좋고, 중간에 서사의 흐름을 까먹어도 읽기의 흐름이 방해받지 않는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김훈은 더 이상 장편소설을 써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런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으나 말하자면 그는, 드넓은 채마밭을 어떤 기계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호미 한 자루로 일구고 있는 가난한 농부다. 그에게 어울리는 경작지는 뒤꼍의 작은 텃밭이지 너른 들판이 아니다. 생래적으로 단편의 호흡인, 단편의 문장을 가진 그가 부실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문장의 힘만으로 장편을 써내려가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다. 그걸 읽어내는 독자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김훈이 고유의 문장을 만들어낸 보기 드문 소설가인 것은 분명하다. 나로서는 저 먼 옛날의 <문학기행>으로부터 이 소설에 이르기까지 김훈의 문장을 오랫동안 보아 온 셈인데, 이젠 좀 지겹다. 이 ‘지겨움’은 그의 문장이 실어나르는 ‘숙명적 현실주의’(라고 명명하고 싶다.)라 할만한 김훈식의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그는 정밀한 관찰력과 세심한 독해력으로 풍경의 ‘안쪽’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이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아니 본래 풍경의 안쪽으로 스미고자 하는 관찰자의 시도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는 허무적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안으로 스미지도 못하고 자신의 내부로 침잠하지도 못할 때, 그에게 남은 길은 이 엄정한 우주만물의 질서를 숙명적으로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길 외에는 없다. 그는 가진 것이 닳고 닳은 한자루 호미 밖에 없으므로, 뙤약볕에도, 눈보라에도 제 목숨의 연명을 위하여 땅을 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안쓰럽다기보다는 엄중한 삶의 리얼리즘이므로, 차라리 엄숙하다.

김훈이 “사내의 할 일이란 모름지기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 혹자는 그의 남근주의를 탓하고 성별분업의 차별적 질서를 옹호한다라며 비난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자연의 질서”로 인식하는 김훈에게는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못한다. 한 개별자가 운명적으로 감당해 내야할 삶의 몫은 그날 하루 식구들의 입으로 넘어갈 ‘밥’을 만드는 일이며, 그 밥을 목으로 넘길 때의 비릿한 질감을 맛볼 때, 그 삶의 리얼리즘은 추상성에서 벗어나 구체적 일상성이 된다. 자신에게 부과된 목숨의 값을 맨 몸으로 버텨내며 “겨우겨우”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는 김훈식의 인생론. 어떤 초월의 의지에도 의혹어린 시선을 보내며, 거짓 선지자들의 목소리에도 현혹되지 않는 이런 시각. 개발바닥의 굳은 살을 만지며, 그 개가 맨발로 버텨왔을 삶의 리얼리즘에 경의를 표하는 것. 이런 인식은 수긍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동어반복에 이르러서는 더이상 세속적 트임의 각성도 던져주지 못하며, 아유, 정말 지겹다. <내 젊은 날의 숲> 어딜 펴도 이런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김훈식의 문장과 만난다.

“강은 자유사행으로 남류했다. 강이 지평선을 넘어올 때, 먼 상류쪽에 저녁 햇살이 닿으면 강은 수면위로 붉은 노을을 이끌고 저무는 고원을 건너왔다. 강은 비무장 지대를 빠져나오면서 서쪽으로 굽이쳤고, 그 굽이의 언저리에서 일어서는 산맥을 따라서 동부전선은 잇달린 봉우리들을 넘어갔다.” “두루미들은 갑자기 외마다 비명을 지르며 일제히 날아올랐다. 두루미들의 비명소리는 탁했고, 속이 비어서 들판의 저쪽 가장자리에까지 닿았다. 가까이서 울부짖는 두루미 소리도 멀리서 울부짖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것들은 작은 불결이나 훼손도 묵과하지 않았다.” “그 닮은 꼴 부자의 결핍은 생명으로 태어난 것들의 근원적인 결핍이어서, 본래부터 결핍속에서 태어나서 거기에 익숙해진 사람은 그 결핍에 젖어서 살수는 있지만, 그것을 감지할 수는 없었고, 그들 부자의 결핍은 그 결핍을 인식하는 능력조차 결여된 결핍이었다.”

이런 식의 밀도가 높은 문장들이 겹겹이 쌓인 한권의 소설을 읽는 것은 매우 난감한 일이다. 그건 <자전거 여행>이거나 <내가 읽은 책과 세상>과 같은 김훈의 다른 에세이보다 더 버겁게 읽힌다. 이미 산문에서 충분히 말해진 담론을 굳이 소설로 반복해야 하나.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 <남한산성>이 그나마 읽히는 까닭은, 이들 소설에는 ‘서사’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서사는 김훈이 만들어낸 게 아니다. 역사적 사실이 김훈의 빈곤한 서사적 상상력을 대신했을 뿐이다. 이 소설에서 그나마 읽을 만 했던 것은 그의 세심한 주의력과 관찰력이 ‘풍경’을 향할 때다. 자등령 언저리의 숲을 묘사하거나, 휴전선 부근의 풍경을 말할 때 김훈의 문장은 시적으로 빛난다. 시적이므로, 시간성은 실종되어 없고, 그러니 시간성을 원리로 하는 서사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원래 그는 소설가라기보다는 외부의 ‘풍경’과 그것을 바라보는 개별자의 ‘상처’를 더듬어나가던 에세이스트가 아니었던가. 그가 풍경을 바라보고, 짧은 김훈식 문장으로 써내려갈 때, 풍경과 더불어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은 도드라지지 않고 풍경과 더불어 있다. 김훈에게 ‘인간’은 오롯한 존재가 아니라, 저 자연적 질서가 만들어낸 풍경의 일부이면서 풍경 그 자체이기도 하므로.

<내 젊은 날의 숲>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김훈도 이런 책을 써서 가계에 보탬을 도모할 만큼 궁핍하지도 않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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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2-11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배~안녕하세요 심혜리입니다~ 잘 지내시죠?
김훈의 이 책은 저도 읽으면서 '김훈의 바운더리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지만, 소설 속의 여주인공과 어쩐지 겹쳐지는 점들(스물 아홉, 아빠의 죽음, 방황..)들이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놀랍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좀 애틋하게 읽었습니다.
참,, 며칠전에 아빠 1주기에 맞춰 창비에서 유고시집이 나와서요,, 선배께도 한권 드리고 싶은데.. 조만간 만나게 되면 드릴게요.ㅎㅎ 곧 뵈어요~^^

모든사이 2011-02-12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네. 혜리씨. 원래 책 리뷰라는 건 칭찬과 주례사로 이뤄져야 마땅한데 이런 식으로 쓰니 잘 알지도 못하는 김훈선생께 미안하네..ㅎㅎ 심호택 선생의 시집이라니, 나야 고맙지 아주..더구나 '따님'이 주는 책이니..

프리즘 2011-09-28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밀도가 높은 문장들이 겹겹이 쌓인 한권의 소설"이라는 말이 와닿습니다.
점점 정형화되어가는 김훈님의 글이 조금은 안타까웠죠...
 

 

고 박완서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1951년 어느날, 서울 현저동 판자촌 비탈길에 서서 또랑또랑한 눈을 밝히고,  

전쟁이 개인에게 가한 폭력과 잔학함을 기어이 증언하리라고 다짐하던, 

어린 소녀의 결기를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온 생애 글을 쓰고, 글을 읽는 것으로 생을 다하신, 

그리하여 우리 시대에도 '대지모신의 글쓰기'가 현전함을 보여주신 분.  

문학이, 소설이, 위안과 위무의 양식임을 일깨워준 분.  

6.25도, 전후 미군 PX도, 거기서 그림을 그리던 박수근도, 개성의 인삼도,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개인사가 곧 역사였던 시대를 알지 못하는 부박한 자들이 소설을 쓰는 시대에,  

어디서 누구의 소설을 읽으며 한 밤의 불을 밝힐 것인가.  

문학의 그믐, 소설의 장렬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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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어 추운 날에는 만화를 봐야 한다. 이런 날은 일찍 집에 들어가 거실 소파에 다리 뻗고 누워 만화를 봐야 한다. 몸은 피곤하고, 온갖 잡사를 생각하느라 머리가 혼곤할 때, 만화를 보면서, 시간을 죽이고, 세월을 보내야 한다. 동네 골목마다 즐비하던 만화가게들이 없어졌으니, 이젠 ‘대여’가 아니라 사서 봐야 한다. 만화책의 지질이 갱지임에도 불구하고, 그새 만화책 값은 엄청 올랐다. 그래도 사야 한다. 한줌의 위안이 그리울 때, 만화는 가장 사랑스러운 연인이다. 불편도 투정도 않고, 딱 본 만큼의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날은 저물고 집에는 가야 하는데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던 어제, 아무 생각 없이 교보에 갔다.

가서 보니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 6권이 나와 있었다.  한권 보고 잊을 만하면 나오는 만화책의 더딘 출간 속도는 참으로 감질 맛 난다. 히로카네 겐지의 ‘시마’ 시리즈도 그러한데, 70년대 과장을 거쳐 80년대 부장이 되더니 중국의 개혁개방 시대를 맞아 이사가 되더니, 거품 붕괴 이후의 시대에는 드디어 ‘사장’이 되었다. 시마 시리즈에 비하자면, <심야식당>은 에피소드 중심이라 그나마 감질맛이 덜 하다. 어쨌건 이번에 나온 6권도 전편들과 비스무리한 스토리들이 개성적이고 간결한 그림과 더불어 보고 읽을 만 했다. 아쉬운 건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봤는데, 내릴 때 되니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다는 것. 한 시간도 못돼 이렇게 끝나다니, 허무하여라.

그러니까, 야밤에 문을 여는 식당, 누구든 먹고 싶은 것을 주문만 하면 뚝딱 만들어 주는 눈가에 흉터자국이 있는 빼빼 마른 아저씨가 하는 식당. 간단한 요기꺼리에서부터 한끼 식사, 그리고 술까지 파는 집. 이 만화는 음식에 대한 개인의 취향과 그 개인적 취향의 형성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다양해서 술집 호스티스와 게이샤부터, 트랜스 젠더, 직장인, 만화가, 할머니와 엄마와 딸, 바람난 남자와 여자들까지, 한밤의 동경 거리를 돌아다니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연작 만화라는 시트콤 드라마 형식을 빌었기 때문일 것인데, 나로서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심야식당이라는 ‘소우주’가 매우 일본스러워 보였다. 일본스럽다함은 사회학적 상상력보다는 개인의 미세한 일상사를 소소한 드라마로 그려 보이는 ‘사소설적’ 전통이 만화에서도 어김없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밥상을 마주하고는 누구나 그 소박한 ‘평화와 안식’을 경험할 것이다. 가령, 한국 사람이라면 곽재구의 ‘김치찌개 평화론’이 주는 가족주의적 아우라를 절절하게 체험한 바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퍼준 김나는 밥을 한 술 떠 먹을 때의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말이다.

김치찌개 하나 둘러앉아/저녁 식사를 하는 식구들의 모습 속에는/하루의 피곤과 침침한 불빛을 넘어서는/어떤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들어 있다/실한 비계 한 점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 주며/야근 준비는 다 되었니 어머니가 묻고/아버지가 고추잎을 닮은 딸 아이에게/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지 그렇게 얘기할 때/이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앞에서/어둠은 우리들의 마음과 함께 흔들린다/이 소박한 한국의 저녁 시간이 우리는 좋다/거기에는 부패와 좌절과/거짓 화해와 광란하는 십자가와/덥석몰이를 당한 이웃의 신음이 없다/38선도 DMZ도 사령관도 친일파도/염병헐, 시래기 한 가닥만 못한/이데올로기의 끝없는 포성도 없다/식탁 위에 시든 김치 고추무릅 동치미 대접 하나/식구들은 눈과 가슴으로 오래 이야기하고/그러한 밤 십자가에 매달린/한 유대 사내의 웃는 얼굴이 점점 커지면서/끝내는 식구들의 웃는 얼굴과 겹쳐졌다.(김치찌개 평화론, 곽재구)

그도 아니라면, 김선우가 말한 대로, 여럿 둘러 앉아 삼겹살(물론 그녀의 시는 삼겹살이 아니라 돼지고기 소금구이지만, 그거나 그거나 마찬가지지)을 상추에 싸 먹을 때의 그 생의 환희 같은 것. 산다는 것의 즐거움을 새삼 느끼게 되는 시간은 왁자하게 떠들며 삼겹살을 먹을 때가 아닐 것인가. 그런 즐거움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채식주의자들의 염결성을 나는 무척이나 싫어한다.

이상하지? 신촌 고바우집 연탄 불판 위에서 생고깃덩어리 익어갈 때, 두꺼운 비곗살로 불판을 쓱쓱 닦아가며 남루 한 얼굴 몇이 맛나게 소금구이 먹고 있을 때 /엉치뼈나 갈비뼈 안짝 어디쯤서 내밀하게 움직이던 살들과 육체의 건너편에 밀접했던 비곗살, 살아서는 절대로 서로의 살을 만져 줄 수 없던 것들이, 참 이상하지?/새끼의 등짝을 핥아주고 암내도 풍기곤 했을 처형된 욕망의 덩어리들이 자기 살로 자기 살을 닦아주면서 , 그리웠어 어쩌구 하는 것처럼 다정스레 냄새를 풍기더라니깐/훤한 알전구 주방의 큰 도마에선 붉게 상기된 아줌마들이 뭉청뭉청 돼지 한 마리 썰고 있었는데 내 살이 내 살을 닦아줄 그때처럼 신명나게 생고기를 썰고 있었는데/축제의 무희처럼 상추를 활짝 펼쳐들고 방울, 단검, 고기 몇점, 맛나게 싸서 삼키는 중에 이상하지? 산다는 게 갑자기/단순하게 경쾌해지고 화르륵 밝아지는, 안 보이던 나의 얼굴이 그때 갑자기 보이는 것이었거든.(고바우집 소금구이, 김선우)

그런데, <심야식당>이 지극히 일본스럽다함은, 삼겹살이나 김치찌개에서 보이는 그 ‘비릿한 질감의 연대감’이 느껴지질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에피소드들은 지극히 개인화되어 있으며, 주인장 또한 그들에게 별로 감정이입하지 않는다. 전국 어딜 가든 꼭 한 군데는 있게 마련인 ‘욕쟁이 할머니’ 같은 가족주의적 아우라가 없는 것이다. 그게 싫은가. 아니다, 그래서 편하고 부담 없다. 만약 한국의 <심야식당>이라면, 그리고 그곳의 주인장이라면 식당에 찾아오는 손님들의 개인사와 일상에 틈입하여 쓸데없는 카운슬러를 자청했을 것이다. 심야식당이 한밤 동경 뒷골목에서 형성된 느슨한 공동체일지언정, 서로가 서로를 감정적으로 묶어내는 질펀한 연대가 없어서 차라리 쿨한 것이다. 물론,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들은 가볍기도 하고, 가끔 눈물 찔끔 나기도 하며, 키들거리는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래도 이 만화는 주인장의 째진 얼굴처럼 쿨하다.

아베 야로의 이 만화는 일드로도 만들어진 모양인데, 케이블에서 한 두번 보다 말았다. 어째 일본의 걸작만화가 영화화되었을 때는 왜 그리 우스꽝스러운 스토리로 변하는 지 모르겠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들>도 그렇고... 어제 교보에서 산 아베 야로의 또 다른 만화는 <야마모토 귀파주는 가게>다. 야마모토에 귀를 파주는 가게가 있는데, 아주 예쁜 여자가 귀를 파주는 ‘서비스’를 하고, 한번 거기 다녀온 사람들은 모두 광적인 귀파기 매니어가 되어 버린다. 유쾌하고 재밌는 발상인데, 물론 에로틱하기도 하다. 여자들을 기형적으로 그리는 아베 야로의 그림체가 오히려 섹슈얼하게 느껴진다. 무릎을 대주고 귀파주는 여자라서 그런가. 아무튼, 이 만화가 한권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둘째권이 나올 때까지 또 감질맛 나게 기다려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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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qui 2011-01-20 0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귀파주는 가게라니~ 저는 어머니가 파주는 것도 왠지 공포스러워서 못맡기겠던데 말이죠 ㅡ.ㅡ;ㅎㅎ 만화가 영화화될때 그 원작의 아우라를 상실하게 되는건 어쩔수 없는듯; 재현에 무리가 있다는 점은 둘째로 치고-왜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그토록 상상력이 후진지 모르겠어요-일본인들 특유의 제스처가 익숙치않아서 그런지 저는 안보게 되더라구요;대표적으로 노다메 칸타빌레가 그랬다지요..

모든사이 2011-01-20 1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그런 거 같습니다. 좀더 덧붙이자면, 저는 일본 문화 특유의 어떤 폐쇄성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1억2천만명이라는 인구가 창출하는 일본의 자족적 내수시장과 불가피하게 대외의존형 개방경제(박정희 정부하에서 만들어진 발전경로)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우리와의 차이 같은 것이랄까요. 그러니까, 일본은 자신들 고유의 문화를 폐쇄적으로 고집해도 되는 조건 속에서 대중문화가 형성되었고, 그로 인해 오타쿠스러운 문화, 그리고 매니어에게 호소할 수 있는 문화가 창출되었다는 것. 그것이 가진 보편성은 우리의 개방적(그것이 헐리우드에서 '벤치마킹'한 것이든 어떻든) 문화에 비하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비단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만이 아니라, 일본 영화의 저변에 폭넓게 퍼져 있는 B급스러운 취향은 그런 폐쇄성의 결과가 아닐까라는. 아니, 어쩌면 제가 가진 문화적 감식안이 협애한 것이어서일수도.. ㅎㅎ

빵가게재습격 2011-10-06 0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든사이님 안녕하세요. 글을 읽어보니 너무 좋네요. 실례지만, 제 블로그에 옮겨 게재해도 될까요? 마침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을 읽었는데, 모든 사이님의 리뷰를 보니 꼭 옮겨놓고 싶어서요. 괜찮을지 의견 여쭤봅니다. 부탁드립니다~^^

모든사이 2011-10-06 08:26   좋아요 1 | URL
네 괜찮습니다. 출처만 밝혀주시면 어디에 써도 무방합니다. 근데, 이게 쓴 지 좀 된 리뷰인데, 심야식당은 벌써 7권이 나오지 않았나요? ㅎㅎ

빵가게재습격 2011-10-06 09:5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별하는 골짜기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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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어곡(別於谷)은 강원도 정선 부근의 간이역이다. 2005년 3월 21일 무인 간이역으로 격하된 뒤, 2009년 8월 민둥산 억새 전시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라고 임철우는 쓰고 있다.) “이별하는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이 역은, 간이역이 풍기는 쓸쓸한 낭만과 서러운 삶을 그대로 온축하고 있다. 소설가 임철우는 이 역 부근에 살았던 사람들의 인생유전을 같은 이름의 소설로 써냈다. <이별하는 골짜기>(문학과 지성사) 제목 그대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누군가와 이별을 하거나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다. 소설은 술술 잘 읽히고 등장인물들이 살아온 내력은 가슴시리다. 잘 쓴 소설이겠으나  내러티브의 밀도는 촘촘하지 않고 짓다만 건축물처럼 어딘지 허술하다.

임철우의 소설을 읽은 것은 꽤나 오래 전 일이다. <아버지의 땅>이니 <달빛 밟기>, <그 섬에 가고 싶다>같은 소설들. 그가 가장 공들여 썼다는 <봄날>은 아직 보지 않았다. 임철우의 예전 소설들이 그러했듯이, 그는 이 소설에서도 ‘역사의 서정화, 혹은 서정의 역사화’쯤으로 해석할 만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위안부로 끌려갔던 한 여인의 기구한 인생유전을 서정적인 문체로 보여주는 방식 말이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개인은 하나의 개별적 존재이되, 어느 날 닥쳐온 역사의 광기를 홀로 고스란히 감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의 전작들에서 개인에게 부과된 역사의 무게는 전쟁(6․25)이거나 광주학살이었다.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기차와 시골 간이역이 뿜어내는 향수와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남루한 시와 소설의 전통 속에서 기차와 역은 늘 그런 이미지로 재현되었다. 그것은 눈 내리는 날 시골 간이역의 풍경을 이야기하는 곽재구의 ‘사평역에서’와 같은 시에서 전형적일 것이다. 가난과 궁핍에 젖은 사람들이 대합실 톱밥난로 곁에 앉아 있는 모습.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사평역에서) 귀성열차를 탈 때마다 이 시구를 얼마나 자주 되뇌었던가. 내 손에 굴비와 사과가 없더라도 귀향의 내면은 언제나 상처와 얼룩들로 그득했었다.

귀향 열차에는 기형도의 ‘조치원’에 등장함직한 사내들도 언제나 쿨럭거리고 앉아 있었다.“간이역에서 속도를 늦추는 열차의 작은 진동에도/소스라쳐 깨어나는 사람들. 소지품마냥 펼쳐보이는/의심많은 눈빛이 다시 감기고/좀더 편안한 생을 차지하기 위하여/사투리처럼 몸을 뒤척이는 남자들/발 밑에는 몹쓸 꿈들이 빵봉지 몇 개로 뒹굴곤 하였다.”(조치원) 조치원 역의 그 허름한 역사에서 내려 버스를 탈 때마다 “견고한 지퍼의 모습”을 한 채 “가지런한 이빨을 단 한 번” 열어 보이는 사내들을 만나고, 그들이 “크고 검은 한 마리 새”가 되어 역사를 빠져나가는 것을 언제나 볼 수 있었다. 서울살이란 “내 삶에 있어서 하찮은 문장위에 찍힌 방점과도 같은 것”인 사내들. 내가 아는 그 사내들은 성수동 마찌꼬바에서 손가락이 뭉개져 귀향하거나, 지하철 공사장에서 허리를 다쳐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기차가 모더니티를 상징한다면, 곽재구나 기형도, 그리고 임철우가 보여주는 그 주변의 사람들은 모더니티가 부과하는 폭력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처와 얼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기차 그리고 역사(驛舍)는 한국적 모더니티의 슬픈 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본 것은 시골 소읍의 기차역에서 간호사로 취직이 되어 떠나는 큰 딸을 떠나보냈던 순간이었다(고 형은 내게 말했다.) 기차는 스물을 넘긴 처녀를 싣고 한국 모더니즘의 집약체인 도시로 내달릴 것이다. 제 품의 자식을 저 거친 대처로 내보내는 부성의 내면은 눈물범벅이었을 것이다. 말없이 이제 겨우 열 살을 넘긴 사내를 꽁무니에 달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내면은 한국적 모더니티가 부과한 슬픔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을까.

기차가 모더니티의 빠른 질주를 보여준다는 것은 그것이 초래하는 변화의 ‘물결’에 있을 것이다. 기차는 선으로 뻗으면서 면으로 확장한다. 비행기와 선박이 점에서 점으로 연결되는 것과는 다르다. 무슨 말인가. 기차는 철로와 철로를 둘러싼 지역을 서서히, 그리고 빠르게 모더니티의 세계로 바꾸어 놓는다. 선박과 비행기는 이차원적인 연결이 없어 그저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연결될 따름이다. 일본의 만주정복을 앞장서 이끌었던 만철은 일제의 싱크탱크이자 불모의 땅 만주에 모더니티의 신세계를 열어 젖혔다.(만철, 고바야시 히데오) 기차가 가는 어디든 이런 ‘근대의 질주’가 벌어졌는데(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박천홍), 그럼 초고속 열차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상징일 것인가.

질주하는 기차의 모더니티는 홀로 선 근대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겁다. 기차와 역사 주변을 다룬 시와 소설들에 등장하는 개인들이 한결같이 상처와 얼룩으로 번들거리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임철우의 이 소설에서처럼, 퇴락한 시골 역사에서 시를 쓰는 젊은 시인이거나, 업무상 과실로 사람을 죽게 만들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늙은 역무원이거나, 위안부로 한많은 생애를 살다가 들어온 노파이거나, 유년의 트라우마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중년 아낙이거나 죄다 기차와 역사 주변에 살아갈 인물들로는 딱 들어맞는 것이다.

어쩌면 기차가 주는 사비유(死比喩)적 인물들과 내러티브 때문에 이 책이 덜 재미있는 지도 모르겠다. 시골의 간이역은 퇴행성 낭만주의에나 어울릴 법한 배경이고, 개인이 감당하는 역사적 상처도 한국소설에서 모래알만큼이나 흔하다. 임철우의 서정의 역사화, 역사의 서정화는 그리 성공적이질 못했다고 봐야 한다. 한나절 집중해서 읽으면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는 이 소설을 후다닥 읽고도 못내 영 찜찜했던 것은 낭만이 끝간 데까지 간 것도 아니고, 낭만이 거세된 것도 아닌 이 어정쩡한 낭만주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촌기차역은 밀리오레라는 거대한 쇼핑몰 한구석에 옛모습 그대로 처박혀 있다. 문화유산으로서 보존하기 위해서라는데, 거대 쇼핑몰에 짓눌린 옛시절의 신촌역사는 낭만도 아니고, 뭣도 아니다. 임철우의 퇴행성 낭만주의가 꼭 그 짝이다. 그래도 주말 하루를 보내게 한 소설인데, 너무 혹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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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가 틀렸다 패러독스 4
피에르 바야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여름언덕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피에르 바야르는 움베르토 에코보다 재기나 유머감각에서 훨씬 아랫길이다. 에코가 보여주는 풍자와 비아냥에 비하자면 너무 진지한 편이다. 그럼에도 서구 인문학의 계보와 이론을 종횡하며 독자를 기죽이는 다른 이론가들보다야 더 유쾌하고 발랄하다. <셜록 홈즈가 틀렸다>(백선희 옮김, 여름언덕)를 읽고 느낀 생각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되풀이 읽어야 겨우 해득할 수 있는 책과 아무 생각없이 그저 낄낄대며 읽어가는 소설의 중간쯤 되는 책이겠다. 인문학 독서에 맛을 들인 독자가 지하철에서 ‘치매방지용'으로 읽기에 딱 좋다. 충분히 지적이면서도 아주 잘 읽힌다. 적당히 사유를 부추기면서 읽는 재미도 함께 주는 책이다. 가격과 부피, 심지어 활자가 인쇄된 종이의 재활용 종이 재질까지도 이런 평가에 딱 알맞다.

이런 책들은 내 경우에 ‘대가의 외도’ 쯤으로 분류될 수 있는 범주에 속한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쓴 ‘재즈’에 관한 책,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영림카디널)이거나 후기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으로 잘 알려진 경제학자 에르네스트 만델이 쓴 범죄소설 비평서 <즐거운 살인>(이후) 같은 경우다. 자신들이 기초하고 있는 이론적 토대를 의외의 분야에 적용하면서 매니어로서의 취향과 결을 보여주는 책 말이다. 경제학 책만 쓰는 경제학자, 문학비평서만 내는 평론가, 정치학 책만 내는 정치학자, 이런 사람들은 참으로 인간적 매력이 없다. 김우창 선생이 동양화를 분석하거나(<풍경과 마음>), 김현이 만화에 대해 쓸 때(<김현 예술기행>), 나는 그들의 읽기의 폭과 깊이에 대해 경의를 표하게 된다.

바야르의 책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이어 두 번째인데, 이 책은 <바스커빌가의 개>에서 홈즈가 내린 결론이 틀렸다는 것을 주저리주저리 풀어 놓은 책이다. 바야르는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문학평론가인데, 역시 비평가들이란 참으로 쓸데없는 호사가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리소설을 읽고 비평하는 것도 모자라, 거기 나오는 탐정의 추리가 왜, 어떻게 틀렸는지 시시콜콜하게 따지며 책 한권을 쓰고 있다니 말이다. 추리소설이 소설일진대, ‘미학적 비평’을 넘어서 허구 세계의 실재성에 대해 문제 삼고 있으니 말이다. 몇 년 전 고전문학 전공 교수가 홍길동전 연구에 평생을 바친 나머지 “홍길동은 살아 있다”라며 홍길동이 실존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책을 쓴 적이 있었다. 허구와 실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그 사이의 경계를 지우려는 시도인 셈이다. 허구와 실재 사이의 경계를 지우고 그 둘이 넘나든다는 시각, 이거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 아닐까?

물론, 바야르는 그런 멍청이가 아니다. 그는 허구와 실재를 구분하는 시각을 ‘분리주의’로, 둘이 넘나든다는 시각을 ‘통합주의’로 부르고 있다. 바야르는 후자다. 그는 “허구와 실재 사이의 높은 투과성에 대한 확신”이 있으며, “어떤 허구 세계에 어느 정도 긴 시간 동안 살게 되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뿐 아니라 이 세계의 주민 역시 때때로 우리 세계와 와서 산다”고 본다. 그러니까 우리는 길거리에서 책 밖으로 걸어 나온 돈키호테를 만날 수도 있으며, 교외의 산책길에서 보봐르 부인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우리가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 모스크바 역에서 안나 카레리나를 만나 인사를 나눌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한발 더 나아가 “문학작품의 인물들이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도 그렇고 그 세계와 우리 세계를 오가는 데도 어떤 자율성을 누린다고 믿는 신념”에까지 이른다. 셜록 홈즈는 그를 창조한 코난 도일의 손에서 벗어나 작가를 배반하기도 하고, 스스로 자가발전 하여 작가가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며 자신들의 세계를 창조해나간다는 생각이다. 바야르는 정신분석학자답게 셜록 홈즈를 죽이고 나서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코난 도일의 욕망과 무의식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코난 도일은 “내가 홈즈를 죽이지 않으면 그가 나를 죽일 것이다”라며 홈즈와의 정신적 공생이 주는 불안을 토로한다. 피그말리온 신화처럼, 작가는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 질투를 느끼기도 하며 사랑을 느끼기도 한다. 텍스트와 실재를 혼동하는 이런 태도는 비정상적인 것이 아닐까? 바야르는 오히려 그것이 더 위험하다고 말한다.

“문학작품 속 인물들이 그들이 살고 있는 책 속에 갇혀 있다고 상상하는 건 위험한 허상이다. 홈즈의 예와 그가 자신의 창조주를 괴롭히는 방식은 인물들이 가진 자율성이 어떤 순간에는 우리 세계로 건너와서 우리와 더불어 조화롭게 지내거나 우리의 실존을 깊이 뒤흔들어 놓을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진짜 환상적 차원은 다트무어 황무지를 공포로 사로잡는 무시무시한 개보다는 작가와 독자가 문학작품 속 인물과 맺는 관계에 있다. 책의 마력을 텍스트에만 한정하는 것은 허상이다. 텍스트란 책을 가까이하는 위험을 무릅쓴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모은 집합의 핵심일 뿐이다.”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텍스트를 접할 때 인식하게 되는 어떤 ‘심리적 실재’는 확실히 존재하는 것 같다. 우리는 홈즈의 활약에 열광하기도 하며 범죄자를 증오하기도 한다. 텍스트를 읽는 순간은 지금 여기의 ‘나’를 잠시 잊고, 텍스트의 내부로 걸어 들어가는 경험이다. 그것은 비가시적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실재가 아니며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 대한 사랑도 역시 심리적 실재이며 내면의 진실일진대, 가시성 여부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우리는 텍스트로 이루어진 ‘세계체제’ 속에 사는 거주민들이며 그 세계 바깥은 없다.

그런데, 도대체 셜록 홈즈가 뭐가 틀렸다는 건가. <바스커빌가의 개>에서 범인은 유산상속을 노린 스테플턴이며 그는 바스커빌가의 전설을 기민하게 활용하여 자신의 살인을 은폐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황무지의 늪 너머로 사라져 버린다. 홈즈의 추리는 거기서 그친다. 그러나, 바야르는 이 사건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재구성하면서 범인은 그가 아니라 그의 아내 베릴이라고 주장한다. 코난 도일은 스테플턴을 범인으로 하여 소설을 써 내려 갔지만 텍스트는 그의 의도를 보기 좋게 배반하여 전혀 다른 결론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베릴이 범인임을 밝혀 나가는 바야르의 추론과 근거들은 작가의 서술보다 오히려 더 치밀하다. “무기도 협박도 상처를 주는 말도 없는 살인, 희생자가 다른 인물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스스로 죽는 살인, 범죄 역사상 이보다 더 멋진 성공을 찾기란 어려울 것이다.”

진짜 범인인 베릴은 남편인 스테플턴을 범인으로 몰아세우고, 작가 코난 도일과 홈즈의 집요한 추적을 따돌리면서 가장 성공적으로 완전범죄를 성취해냈다. 텍스트는 작가에 의해 서술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써내려가는 순간 작가의 손을 떠나 스스로의 길을 간다. “문학작품 속 인물들이 실재 세계와 허구 세계 사이를 거침없이 돌아다닌다는 우리의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허구 속에서 서로 다른 시대를 돌아다니는 일도 있다고, 문학 세계도 우리네 세계처럼 유령들로 가득하다고 가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광화문 한복판에서 애련에 몸살을 앓는 안나 카레리나를 만난들 하등 이상할 것이 없고, 21세기 디지털 TV에서 온갖 돈키호테들을 만난다하더라도 눈 비빌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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