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는 언제나 술렁거린다. 아직은 한기가 남아 있는 엊그제 밤에도 그랬다. 까르르 웃으며 지나는 10대들 사이를 지나며 아침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며 읽던 한겨레를 떠올렸다. 문화면에 큼지막하게 실린 한 연극에 대한 리뷰 기사.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471318.html)기사는 홍세화는 “충격적이다. 2시간 동안 꼼짝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 연극에 감동 먹은 ‘좌파 교수’ 오세철은 “카메오로 출연하겠다”고 약속했단다. 그는 얼마 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문제를 다룬 ‘반도체 소녀’에 출연한 바 있으니 그럴 만도 할 것. 명실상부한 전방위 문화게릴라 김상수 선생의 연극 <TAXI TAXI>. 신문에는 작은 키에 매서운 눈빛의 김선생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가겠다’는 약속만 해 놓고 여태 극장을 찾지 않았다는 사실에 새삼 미안했다. 연극표는 이미 한 달여 전에 구매했다.


kimsangsoo.com
공연이 시작되기 20분 전에 대학로 KFC 지하의 극장 아울로 갔다. 김선생은 어둑한 공연장 위쪽 구석에 지치고 피곤한 기색으로 앉아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주 고집스럽게 다문 입과 형형한 눈빛, 하지만 그는 아주 지쳐 보였다. 객석이 170여개나 되지만 오늘은 20명이 채 안되는 듯 했다. 객석이 썰렁하면 아무리 좋은 연극도 썰렁하게 마련이다. 연극에서 출발해 시나리오, 드라마, 설치미술, 사진, 문화정책으로까지 나아간 그의 예술편력은 참으로 다채롭다. 이제는 그런 ‘편력시대’를 끝낼 법도 한데, 시사 칼럼에 이어 아예 프리랜서 기자로까지 나서는 걸 보면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10여년 저쪽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예리한 식견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당시에도 야인이었고 지금도 야인이다. 그 야인(野人)이 주류 질서에 대한 편입을 생래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장자연 사건’과 삼성반도체의 백혈병 노동자 사건을 다룬 이 연극은 코미디와 벗기기가 지배하는 대학로 연극씬에서 사뭇 이채로운 공연이다. 한국 연극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창작연극’이라는 점도 눈에 띤다. 이런 연극이 관객으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연극은 시대의 정신과 눈”이라는 게 김선생의 평소 지론인데, 그 시대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려는 관객이 그만큼 적다는 얘기다. 연극이 우리시대의 문제들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그저 소비될 뿐인 ‘타임킬링용’ 쾌락의 소재가 되고 있는 셈이다. 문화정책의 수장에까지 오른 한 대표적 연극인은 자신의 대표작을 ‘햄릿’과 ‘파우스트’라고 했다. 이거 참 우스운 일이다. 영국의 로얄씨어터 배우가 저 변방 ‘코리아’의 대표 배우가 자국의 연극을 대표작이라고 하면 과연 뭐라고 할 것인가. 한국 연극은 100여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저 베끼기와 흉내내기에 그치고 있다.

막이 오르기 이분 전 기자 후배가 또다른 여자 후배를 데리고 헐레벌떡 들어왔다. 블로그와 트위터계를 주름잡는 그가 이 연극의 흥행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문화적 감식안에 대한 신뢰도 그러려니와 그의 트위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수만명의 팔로워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잠시 정치부 기자로 ‘외도’아닌 외도를 했지만 그의 본령은 역시 문화다. 넘치는 재기로 트위터계를 평정하다가도 가끔 구설에 오르기도 하는 모양인데,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빗겨가는 그의 ‘멘션' 탓이다. 나로서는 그의 멘션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그의 비판자들이 가진 지나친 엄숙주의가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여간, 나가서 이 연극 볼만하다고 와장창 트윗을 날려주라, 제발 부탁이다!!

무대는 단출했다. 한 가운데에 본네트가 열린 택시가 덩그마니 놓여 있고, 그 주위로 반타원형으로 철계단이 설치돼 있었다. 조명이 켜지고 택시기사가 나와 “웰컴, 이럇사이마세, 환인꽝린, 어서오세요”를 번갈아가며 외친다. 그의 딸은 ‘샴숑전자’(아예 대놓고 모 기업을 거론하는 대신 이런 우스꽝스런 작명을 택한 모양)의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그의 택시에는 대책없는 연예인 지망생, 구사대, 선글라스를 낀 사내(선글라스는 5.16 이후의 박정희, 곧 70년대를 상징한다.)등이 번갈아가며 승차한다. 택시와 택시기사를 둘러싼 사연과 더불어, 다른 한편에서는 연예인지망생이 ‘스타’로 등극하기 위해 마담-실장과 만나고 접대하고 절망하는 스토리가 전개된다. 김선생이 극을 풀어가는 방식은 정공법이다. 이렇다 할 ‘변화구’도 없이 오로지 ‘직구’로 2시간 10분을 압도해 나간다. 이렇게 힘이 넘치는 연극도 보기 드물 것이다. 객석은 긴장된 채로 숨 죽인채 감정의 파고가 흘러넘치는 무대를 내내 주시한다. 오디션을 통해 모집했다는, 경력이 많지 않은 배우들의 연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높은 감정의 파고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 연극에 곧잘 등장하게 마련인 ‘피에로’와 같은 극의 이완을 돕는 캐릭터도 거의 없다. 홍세화의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연극은 재벌과 권력이라는 억압의 구조를 폭로하는 데 주력한다. 하지만, 그 문법은 80년대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김선생 자신이 80년대 민중극/노동극의 전통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동시에 이른바 민중미학의 유력한 코드 중의 하나였던 ‘전망’(perspective)에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전망’이란 많은 경우 문화운동 진영의 독단적 계몽주의가 반영된 것일 뿐이었다. 공허한 단결론이거나 허황한 대결의식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지사연 하는 평론가들은 곧잘 ‘전망부재’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댔다. 그런데, 김선생의 연극은 한층 더 복합적이었다. 극의 마지막 장면은 백혈병으로 결국 딸을 잃은 택시기사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웰컴, 이럇사이마세, 환인꽝린, 어서오세요”를 외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TV에서 성공하려 했던 소녀의 욕망은, 코드가 뽑힌 채 ‘내장’을 다 드러낸 텔레비전 수상기처럼, 산산히 부서져 버린다. (미디어의, 미디어에 의한, 미디어를 향한 욕망. 그러니, 그건 주체의 욕망이기는 커녕, 타자의 욕망이다.)

막힌 출구, 닫힌 전망. 그러나, 그것이 유발하는 ‘불편함’의 정도는 강렬하다. 전망 찾기에 골몰하는 대신 김선생은 등장인물들의 내면적 고통과 정신적 위기를 드러내는 데 주력한다. 구조가 아니라 개인이다. 구조의 혁파가 아니라 개인의 실존적 고통이다. 그가 도드라지게 보여주려는 한국사회의 사회적 위기는, 구조적 위기라기보다는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성과 그로 인한 고통인 셈이다. 관객들은 두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구조’에 분노하기 보다는, 그들이 겪는 고통의 무게를 함께 견딘다. 연극판을 떠난지 10여년 만에 다시 대학로로 돌아온 김상수 선생이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런 ‘고통의 연대’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세상에서 ‘당신은 안녕한가’라는 고통스런 질문. 우리가 점점 상실해가고 있는 사회학적 상상력의 회복. (한 시민단체 의하면, 국내 대표적 반도체 기업에서 현재까지 46명이 백혈병으로 죽었다. 유족들은 현재 산재를 인정해 달라며 행정소송을 하고 있는 중이다.)

백혈병 소녀의 마지막 독백 : 나는 인생이 뭔지 모릅니다. 그걸 알기에는 나는 아직 나이가 어립니다.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엄마도 아빠도 세상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힘이 들어야 하는 겁니까? 하느님,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께서도 나에게 나를, 나를 믿어주셔야 되잖아요? 나를, 나를 이 고통에서, 여기서, 벗어나게, 떠나게, 도와주세요. 아무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아빠도 엄마도 세상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를 믿어 주시지 않는 겁니까? 그럼 좋습니다. 내게 아픔을 주시겠다면, 더 가까이, 더 심하게 주세요. 언제든지 상대하겠습니다. 고통이 나를 꺾든지, 내가 고통을 꺾든지, 와! 이리 와! 모두 와!

극이 끝나자 관객들은 모두 아무말 없이 서둘러 극장을 떠났다. 더 이상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대학로의 한 술집에 모인 기자와 연출자, 여대생, 그리고 한 관객은 시시콜콜한 연극 뒷담화를 했다. 나는 이 연극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연극준비를 위해 저당 잡힌 집이 그대로 온전하기를 바랬다. 술 몇 잔 들이키고 집에 가면서 트위터를 열어 보니 기자 후배가 이런 트윗을 날렸다. “연극 'TAXI TAXI' 봤어요. 일단 무엇보다 여배우들이 예쁘구요. 삼숑 열라 씹구요. 조선일보 열라 까구요. MB 열라 비웃어요. 근데 진지하게 씹고 까고 비웃어요.” 역시, 이 친구는 예쁜 여배우가 먼저 눈에 보이는구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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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리 시편 - 심호택 유고시집
심호택 지음 / 창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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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란한 마음 둘 데가 없어 정처 없이 부유할 때에 시집을 펴든다. 어려워 몇 번을 곱씹어야 제 뜻을 아는 시 말고, 읽는 대로 주르륵 의미가 닿고 머리가 맑아지는 그런 시들. 언젠가 내 안에도 서식했을 ‘서정’의 한순간으로 문득 귀환하게 만드는 시들. 이것은 대낮에 들이키는 막걸리 맛과도 비슷한 것이어서, 김현이 정현종 시를 두고 말한 ‘술 취한 거지의 시학’ 쯤에나 해당할 마음자리로 삽시간에 유체이탈하게 만드는 시들 말이다. 가령, 언제 읽어도 마음 맑아지는 곽재구의 이런 시들,


참 맑은 물살
발가락 새 헤적이네
애기 고사리순 좀 봐
사랑해야 할 날들
지천으로 솟았네
어디까지 가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 되어 흐르는
눈물 나는 저들 연분홍 사랑 좀 봐
- 곽재구, <참 맑은 물살>

 

그래, 지금은 봄이거니, 돌돌돌 흐르는 봄 물살에도, 연분홍 진달래 한송이에도 내 안의 순정을 모조리 갖다 바칠 수 있는 때이니, ‘술취한 거지’처럼 대낮 막걸리에 취해 가물가물 뜬 눈으로 보는 세상은, 사무치도록 사랑스러운 것이리라. 돌아가신 시인 아버지의 시집을 준다던 모 양의 기별이 늦어지던 차, 동네 서점에 간 김에 심호택 선생의 시집 <원수리 시편>(창비)이 눈에 뜨이길래 냉큼 샀다. 몇 장 펼치자마자, 아하, 내가 이런 직정적인 서정, 착하고 푸근한 서정을 그리워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아마도 농촌 언저리 시골쯤에서 유년기를 보냈을 시인의 과거, 정년 퇴직을 앞두고 귀향한 지방 도시 근교의 한 농촌 마을의 풍경, 거기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의 모습이 흐뭇하게 상상되는 것이다. 

 

쌀 떨어진 딸네 집
양식 물어다 주고
쉬엄쉬엄 돌아가는 길인가
우리 할머니
부엌 창문 콕콕 두드리다
알은체해주니 오히려 날아간다
찔레 덤불 속인지
외딴 절인지
간 곳은 알 수 없어도
까마종이 두알
글썽한 눈매
남기고 가셨다
- 할미새
 

포르르 날아온 할미새 한 마리를 두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거나, 어쩌다 키우게 된 진돗개는 육친만큼이나 가까워 함께 밥술 뜨는 족속[食口]이 되기도 하고,

친구가 귀한 거라며 갖다준 어린 풍산개는 마당에 풀어 놓자 수선화 한송이를 따먹고 사흘동안 앓다가 죽었다. 이어서 임실 구수골에서 얻어온 아기 진돗개는 차에서 내리자 살아 있는 거미와 마른 지렁이를 삼키고도 멀쩡했다. 우리가 구수라고 부르면서 아직도 키우고 있는 놈이 그놈이다. 누구는 집터 탓이라지만 어차피 개고양이 같은 짐승도 자기 몫의 명을 타고나는 법이겠지. 녀석은 어릴 적 한 때 자신의 배설물을 먹는 바람에 명아주 막대기가 부러지게 매를 맞은 이력이 있다. 그러면서도 쓰다 달다 한마디 말이 없었으니 멍청한 것인지, 무던한 것인지. 제때 교육은 못 시켰으나 제 혼자 힘으로 애꿎은 족제비와 뒷산 고라니를 잡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녀석이 짖는 소리를 듣고 지나가는 행인인지 찾아온 손님인지 분별한다. 녀석이 그중 좋아하는 것은 명절 때 나타나는 동네 꼬마 녀석들이고 제일 증오하는 것은 개나 염소를 산다며 마을을 순례하는 개장수 차다. 녀석은 또 앞 뒷집을 제 집 드나들듯 하는 택배 자동차가 못내 수상쩍은 눈치다. 그게 무엇이든 집에서 물건을 내가는 꼴은 봐줄 수 없다는 것인지. 우리 식구 중에는 심지어 녀석이 밥을 안 먹으면 자기도 밥 맛이 없고 녀석이 아프면 자기도 아프다는 사람도 있다.
- 한 식구

 

배고픈 날 막걸리에 취해 하늘이 노랗고 온산이 빙글빙글 돌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거나, 

 

우리 마을은 바다도 기어들다
그만둔 마을이었다
기차를 타도 버스를 타도
또다른 십리를 걸어야 하는 곳

집에 와 목마르다 투정하면
어머니는 우물물 권했다
그건 말고 달리 목마르다 조르면
중학생 아들을 위해
할 수 없이 막걸리 받아 왔다
 

아니 그 이전부터 나는
담요를 뒤집어 쓴 아랫목 단지 속
술 괴는 소리를 사랑했다
일곱 살 때 전내기술 마시고
마루에서 굴러 떨어졌다
- 어린 날의 술

 

김민기의 노래가사마따나 “저 산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라며, 알 수 없는 도회지의 풍경을 몽상하는 어린 시절.


군산이란 데는 어떻게 생겼나
아이는 그게 궁금한데
어른들은 말했다
나중에 가보면 안다고 
 

어둑한 헛간으로 뒤안으로
혼자 하는 숨바꼭질도 시들하면
아이는 마루에 드러누워
서까래 밑 제비집 바라보았다.
- 철모르장이

이 시집을 읽는 것은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심호택 시인과 더불어 안온했던 유년의 자궁 속으로 잠시 스스로 유폐하는 경험인 것이다. 해석도 평가도 모두 다 췌사일 뿐이고, 그저 착하고 쉬운 단어들을 좇으며 모든 것이 명료했던 놀랍도록 단순했던 시절로 귀향하는 것이다. <하늘밥 도둑>과 <최대의 풍경>에 이어 이 시인의 시집을 읽은 것은 이 책까지 세권. 이 시집은 시인이 이승과 작별하기 직전에 쓴 시를 모은 유고시집이다. 모든 시집이 유고시집일진대, 이 분은 이런 착한 시 좀 더 쓰시지 ‘왜 그리 서둘러 가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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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혜리 2011-04-04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회식 가기 전 들렀는데.. 선배 글 보고 마음이 따뜻해지고 갑니다...^ㅂ^헤헤

모든사이 2011-04-05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 참 좋더구나. 그냥 읽고 말 것을, 리뷰를 쓰기 보다 그냥 읽으면 될 것을, 리뷰를 쓰고 나니 쓰잘데 없는 말만 늘어놓은 거 같아서.. 그런데, 아버지 향기가 너무 독해서 시집 펼칠 때마다 네가 눈물깨나 흘리겠구나 했는데.. 따뜻해졌다니 다행..
 
정치의 발견 -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
박상훈 지음 / 폴리테이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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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박상훈의 <정치의 발견>을 읽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최장집의 제자이자 에피고넨을 자처하는 소장 정치학자다. 최장집의 정당론, 민주주의론, 한국정치에 대한 생각 등이 이 책에서 다시 한번 반복되고 있다. 이 얇은 책에서 스승의 그림자는 아주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 책은 박상훈이 진보정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했던 강의를 정리한 것이자, “진보에게 말걸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 사회의 진보적 개혁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다른 무엇보다도, 정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봐야 한다는 지적인 셈이다. 그는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고민한다는 점에서 진보 ‘안쪽에’ 있지만, 막스 베버와 같이 전통적으로 보수적으로 분류되었던 이론가들을 끌어들여 진보 ‘밖의’ 시각을 도입해 진보정치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 책을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 한겨레 지면에서 벌어진 진중권(2.28)과 김규항(2.9)의 논쟁을 보게 되었다. B급 좌파임을 자처하는 김규항은 조국이나 오연호와 같은 “중산층 엘리트”들이 진보를 전유하는 것을 못 마땅해 한다. 스스로를 진짜 진보라고 생각하는 그는 대단히 비타협적인 태도로 진보를 전유하고, 그가 설정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담론과 사람들은 개량주의로 치부하는 듯하다. 진중권은 예의 그 신랄한 태도로 김규항을 비판하는데, 그의 레떼르 붙이기는 “철인 좌파의 딱지치기”에 불과하다는 조롱이다. 말하자면, 진중권은 척박한 진보정치의 토양위에서 연합정치를 통해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추구하고자하는 반면, 김규항은 매우 엄격한 잣대로 그것은 진보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박상훈이 보여주는 시각은 김규항이 아니라 진중권의 시각이다. 박상훈의 주장은 “과도한 확신과 비타협적 이상주의는 비정치적 사고의 산물일 때가 많으며, 결국 현실의 복잡함과 갈등 속에서 성과를 일궈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비난하는 논리를 제공하는 것 이상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고 말한다. 덧붙이기를, “운동과 이념의 논리만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조건 옳고 역사발전에 대해 모두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례하고 공격적이다”라는 것이다. 박상훈의 이 책은 진보가 ‘정치’를 외면해 왔음을, 진보가 해온 것은 스스로 진리의 담지자임을 자임한 채 현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치적 시도와 노력들을 헛된 것으로 치부하는 정치 ‘이전’의 행태라고 비판한다. 나는 박상훈의 논리에, 따라서 진중권의 논리에도 수긍하고 찬성하는 편이다.

박상훈은 이 책의 앞부분에서 막스 베버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세상의 그 어떤 윤리도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은,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경우에 도덕적으로 의심스럽거나 위태로운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정적인 부작용의 가능성 내지 개연성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치는 도덕적 선의 세계는 아닐 지라도, 그날그날의 일상적 실천을 통하여 선의 세계로 나아가는 행위일 것이다. 정치가 도덕적이지 않다하여 정치 그 자체를 부정하고 反정치로 향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 외에는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정치가란 모든 폭력성에 잠재되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기꺼이 관계를 맺기로 한 사람이다.”(베버)

마르크스주의는 한국사회에서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고, 현실로서 작동하지도 않기 때문에 오로지 ‘이데올로기’로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현실의 질서를 비판하는 규준이거나 이념형을 제공할 뿐이지 현실의 질서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사회의 상당수 좌파들은 근본주의적 시각에 사로잡힌 채 모든 문제를 ‘자본주의 구조’로 돌려버리는 허무주의적인 환원론에 경도되어 있다. 이런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들은 ‘노동해방’이니 ‘인간해방’이니 하는 도통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 담론들이고, 그들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깨기 위해서는 내 눈앞의 ‘사장님’과 싸워야 하는 것인지, 뉴욕의 월스트리트에 가서 시위를 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런 근본주의자들의 담론 속에는 “정치가 없다.”

김규항은 B급 좌파로서 “좀 더 왼쪽에서” 서 있으며, 비판적 지지론이나 연합정치론과 같은 개혁주의적 시도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입장이다.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념형적 비판에 치중하고 있는데, ‘담론상’으로 그를 지지할 수 있다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그를 지지하긴 어렵다. 그도 어린이 교양잡지인 <고래가 그랬어>를 팔아먹어야 하는 출판자본의 일원이고, 과거에도 <영화언어>와 같은 책을 만들어 팔았던 전력이 있으니 ‘자본주의에서 살아가기’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치란 서로 다른 이념과 정책, 시각과 차이들을 일상적으로 만나고 접하는 장이기에 불가피하게 그것은 “정치적 경쟁”의 과정 속에 놓일 수밖에 없다. 신학적 세계에서는 불가침의 신적 영역이 존재하겠지만, 정치의 세계에서는 진리가 독점되는 세계는 없다. 이 책에서 줄곧 박상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런 정치의 속성이다.

다시한번 역사를 따져봐야 할 문제겠으나, 레닌이 그토록 조롱했던 베른슈타인이나 카우츠키의 ‘수정주의 노선’이 과연 “배신자”로 비판받아야할 것인지는 의문이 든다. 혁명의 시대에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치의 시대/정치의 세계에서는 불가피한 수정이 존재하며, 수정 그 자체가 아니라, 수정의 내용이 문제될 수 있을 것이다.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를 과도하게 맹신하는 사람들, 정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민중의 힘을 운운하는 사람들(어쩌면 최장집의 ‘차가운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밀양의 고등학교 선생 이계삼 같은 사람까지도), 추상적 담론의 포로이자 스스로가 만든 ‘게토’속에 함몰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진보매체인 레디앙이나 진보신당 게시판 같은 데에는 이런 사람들이 득시글거린다.

좋은 민주주의는 좋은 정당을 필요로 하고, 그 좋은 정당은 한 사회내의 이익갈등을 효과적으로 수렴하고 대표할 때 가능하다는 최/박 두 사람의 주장을 나는 신뢰한다. 촛불로 표현되는 ‘거리의 정치’는 열망과 실망의 주기적 반복을 통해 정치적 패배주의만을 양산할 뿐이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말한 ‘국가란 부르주아의 정치위원회’라는 식의 규정을 아직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북한 지도부만큼이나 한국사회에 도움이 안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이 가진 근거없는 과도한 확신과 도덕적 우월감이라니. 국가는 공공성의 최후 보루로서 개혁되고, 재구성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타도해야할 대상은 아니다.

이 책에서 또하나 새겨 들어야할 대목은 진보에서 나오는 언어들이 가진 폭력성에 대한 지적이다. 진보진영에서 작은 정치적 차이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들은 많은 경우 험악한 비난으로 끝이 난다. (내가 레디앙의 댓글들을 읽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는 상종하지 못할 사람들인 것처럼 비난을 퍼붓는 일이 다반사이니, 거기서 연대의 정치니, 연합정치니 하는 것은 애시당초 기대할 게 못된다. 윤리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과거 구 주사파에서 제기된 ‘품성론’이라는 도덕적 환원론으로 귀결될 위험이 없지 않겠으나, 세련되고 품위있는 진보정치인이 잘 눈에 띄이지 않는다는 것은 곱씹어볼 대목이다. 이 책에서 박상훈이 거론하는 오바마의 연설이나 미국 빈민운동가 사울 알린스키와 관련된 대목은 두고두고 읽어볼 만하다.

“정치적 이성이란 기본적으로 불확실성에 대한 존중, 무지의 가능성에 대한 자각, 진보만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이념과 가치의 다원주의, 누구든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의 존중, 타인에 대한 인간적 정중함과 관용 등을 내용으로 한다. 그 기초 위에서 진보가 진보다워야 할 것이다. 진보적인 것을 위해 정치를 부정하면 안된다. 진보는 지금보다 더 그리고 제대로 정치적이어야할 것이다.”(174쪽)

그런데, 박상훈에게 이 책의 후속작으로 ‘보수에게 말걸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까. 진보는 말귀라도 통하지만, 보수는(특히 가스통 보수는) 말귀도 안 통하니, 훨씬 더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지만, 제발 누구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불확실하며, 무지의 가능성도 있고, 이념과 가치가 다원적이며, 누구든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초보적 상식을 가르쳐줄 사람은 없을까. 기실 이 책에서 박상훈이 비판하고 있는 “반정치”의 태도는 진보가 만들었다기보다, 해방이후 한국 정치를 좌우해온 “보수정치”가 만들어낸 유산이 아니던가.  

또하나, 진보적 사회학자에서 보수 정치인으로 변신한 어떤 분은 어느 정권을 비판하면서 정치가로서의 덕목은 "선의의 마키아벨리즘"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선의의 마키아벨리즘은 박상훈의 논지와 통하는 데가 있다. 선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때로는 악과 손잡고 마키아벨리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설파했던 선의의 마키아벨리즘의 향방이 궁금하다. '선의'는 빠져 있고, '마키아벨리즘'만 남은 것은 아닌지? 아니 그 마키아벨리즘 조차도 최악의 것만 남은 것은 아닌지, 그조차도 아니라면, 선의도 사라지고, 마키아벨리즘의 정치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퇴행만을 반복한 것은 아닌지, '국가몰락'이라는 '신화'를 비판하며, 유능한 국가를 세우리라 다짐했던 그의 요즘 생각은, 과연 어떠한지 몹시 궁금하다.
 

PS. 여기 인용된 군주론의 한 대목이 인상적이라 남겨둔다. “운명은 그에게 저항하기 위해 아무런 힘도 조직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위력을 떨치며 자신을 제지할 수 있는 제방이나 둑이 없는 곳을 덮친다.... 운명의 신은 여신이고 만약 당신이 그녀를 얻고자 한다면 그녀를 거칠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계산적인 사람보다는 과단성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명백하다. 운명은 여신이므로 그녀는 항상 젊은 사람들에게 이끌린다. 젊은 사람들은 덜 신중하고 보다 공격적이며, 그녀를 더욱 대담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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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3-02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매번 그냥 가다가 인사라도 드리고 싶어 댓글 남깁니다.^^

모든사이 2011-03-04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문 감사드립니다. 아렌트 젊을 적 사진이군요..

두괴즐 2011-08-08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김규항과 진중권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것에 전적으로 기댈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저의 지향점을 구체화 할 필요는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종종 방문하겠습니다. 건필하세요 ^.^
 


새로 나온 <창작과 비평> 봄 호를 읽다. 시 코너에 맨 처음 나오는 김선우의 시를 보다. 도정일은 시를 읽고 이해하는 일은 짧은 문장 속에 담긴 의미를 궁구하고, 진지하게 사색하는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교적 짧은 분량의 시는 거기에 담긴 의미를 캐내기에는 너무나 적은 정보를 담고 있다. 독자는 그 짧은 정보를 실마리 삼아 시의 의미를 풀어내야 한다. 정보의 조각들을 이리 꿰고 저리 기워 하나의 세계를 다시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것은 독서를 위한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지 않는 요즘의 나같은 사람에게는 딱 어울리는 일이다. 길을 가면서, 버스를 타고 가면서, 담배를 피우면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 그 정보의 조각들을 이어 붙이고 꿰매는 ‘사유의 노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점점 텅 비어가는 정신을 메꾸기 위해 김선우 시를 따라가면서 해보는 사유의 도상연습.  

"비가 내린다 오늘은(죽은 門이 피를 흘리듯)/유적에 남겨진 문장을 읽는 달빛/빗줄기는 말랐구나, 아 나는 빗소리처럼 비만하구나//오래 기다려도 차는 오지 않고/핏대를 세운 발뒤꿈치를 들며 비오는 오늘은 박물관에 갔네/세상 어디나 있는 식기들(한참 들여다보면 우스꽝스러워지는,/더 한참 들여다보면 슬픔이 자글거리는)/총기들 갑옷들 각종 서류들 인장들//목 없는 마케팅에 입혀진 화려한 씰크 드레스/아아 추워라, 우리의 고향은 정거장/오늘의 권력자에게 이 질긴 드레스를 보여주고 싶네/당신이 죽은 아주 오랜 후에도 우향우 좌향좌 기립해 있을/당신의 드레스/서성이고 서성이며 서성이는 드레스/(당신이나 나나 참)//비오는 날의 박물관 100년 간격으로 늘어선 방들/서성이다 지쳐 빗소리에 열쇠를 꽂는다/(정거장엔 빈 무덤들/100년의 정거장에서 다음 정거장으로 떠도는/텅비어 질겨진 드레스들 앞에서/윙크하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누군가)//이봐, 나 본 적 있지?/빗줄기는 저렇게 가는데/젠장, 빗소리를 왜 이리 질긴 거야./두 생애나 밀린 급료를 어디서 받으라고!//박물관 지붕으로 쏟아지는 마른 빗줄기/헤치며 헤드라이트 불빛이 잠깐 멈추었다 떠난다/투명한 두터운 슬픈 몸이 지나간다."
- 김선우, 비오는 드레스 히치하이커, 창작과 비평 

이 시의 내러티브를 재구성하면 이렇다. 1) 비오는 날 박물관에 갔다. 2) 박물관에서 식기, 갑옷, 총칼 등을 들여다 보았다. 3) 마네킹에 입혀진 실크 드레스도 봤다. 4) 박물관에는 100년 단위로 방이 도열해 있는데, 거기도 드레스들이 있다. 5) 박물관을 나오니 지붕으로 빗줄기가 내리고,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친다. 6) 박물관 밖에서 (드레스를 본 탓인지) 투명하고 슬픈 몸이 지나간다. 이렇게 찢어발기고 나면 앙상한 내러티브만 남게 되지만, 나로서는 이렇게 내러티브적 재구성을 해야 온전히 내 식대로의 독법이 가능해진다. 
 

1연. 김선우(시인 자신이 곧 화자일 터이니)는 비오는 날 집을 나서 박물관으로 향한다. 빗물은 건물 벽을 타고 흐르는데, 그 모습은 마치 문에 피가 흐르는 듯한 풍경이다. 문은, 죽은 문이니 오래된 문이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있는 문일 터이다. 비에 젖은 풍경을 두고, 낯설기 그지없는 이미지, 곧 문에 흐르는 생피를 상상해내는 능력, 그게 시인의 발상법일 것이다. 그런 돌출적인 이미지로 인해 비는 섬뜩하고 선명한 이미지를 얻게 된다. 둘째 줄의 ‘유적에 남겨진 문장을 읽는 달빛’, 이 시구는 원래 달빛이 유적을 비추고 있다, 라는 평범한 진술을 비틀어 표현한 것이리라. 주체와 객체를 도치해 달빛이 문장을 읽고 있다, 라고 진술한 것. 빗줄기는 말랐는데, 빗소리는 비만하다? 다시 말해, 빗줄기는 가늘게 내리고 있으나 내리는 소리를 요란하다, 라는 의미일 것이다. 소리가 크다, 라는 것을 ‘비만’이라는 가시적인 이미지로 바꾸어 내기.

2연. 김선우는 정거장에 서 있다. ‘핏대를 세운 발꿈치’로 보건대, 기다려도 차가 오지 않아 내심 화가 치밀었던 모양이다. 박물관에 가서는 식기들과 총칼, 갑옷 따위를 들여다 본다. 식기를 들여다보는 일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다. 과연 그럴 것이다. 박물관의 식기들은, 그 언젠가 누군가 거기에 밥을 담아 식구들과 더불어 먹었을 것인데, 그런 내력을 가진 식기가 원래의 주인과 제자리였던 밥상을 잃어버리고, 박물관에 와서 조명을 받으며 전시돼 있는 일. 이런 박물관의 ‘식기’들이 제 나름 지녔을 기구한 내력을 생각해보는 일은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일이다. (이런 대목은 20세기 초 고향 북극에서 미국으로 ‘잡혀온’ 에스키모 미닉이 미국 전역을 돌며 구경거리가 되었다가 죽은 뒤 뼈마저도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었던 비극적 내력을 생각나게 한다.)

3연. 마네킹에 실크 드레스가 입혀져 있다. 여기서 드레스는 정거장의 이미지와 겹친다. 정거장은 ‘정주’의 이미지가 아니라 ‘노마드’의 이미지이다. 정거장은 다만 거기 있을 뿐,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주 잠시 머물고 떠날 뿐이다. 박물관의 드레스도 마찬가지. 원래의 주인은 사라지고 없으나 드레스는 마네킹에 입혀져 전시돼 있다. 주인이 권력자에서 마네킹으로, 그리고 그 마네킹은 또다른 마네킹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니, 어디로 갈지 몰라 “서성이는” 게 드레스다. 주인과 마네킹은 사라질 것이나 드레스는 남는 것이자 “질긴” 것이다. 이쯤되면, 쉼보르스카의 시, ‘박물관’을 떠올릴 수 있겠다. 김선우의 질김과 쉼보르스카의 “고집이 센”의 의미와 이미지는 아주 닮아 있다. 그러면, 김선우의 박물관과 드레스에 대한 발상은 쉼보르스카에게서 훔쳐온 것인가.

“접시들은 있지만, 식욕은 없어요/결혼반지는 있지만, 이심전심은 없어요/최소한 삼백년 전부터//부채가 있어요-홍안은 어디 있나요?/검들이 있어요-노여움은 어디 있나요?/어둑어둑해질 무렵엔 루트는 현조차 튕기지 않아요.//영원의 결핍 때문에/만 개의 낡은 물건이 모였어요/진열장 위에 콧수염을 매달고/이끼 낀 문지기가 낮잠을 쿨쿨 자고 있어요./금속, 점토, 새의 깃털이 조용히 시간한테 이기고 있어요./고대 이집트의 해죽거리던 처녀의 머리핀만이 킬킬대고 있어요.//왕관은 머리보다 오래 남았어요./손바닥은 장갑에게 졌어요./오른쪽 구두는 발에게 이겼어요.//나에 관한 한, 나는 살아 있어요, 믿어 주세요./내 드레스와의 경주는 계속되고 있어요./그것이 얼마나 고집이 센지!/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살아남고 싶겠어요!”(박물관, 쉼보르스카)

4연. 그런데, 정거장=드레스의 이미지는 박물관 전체의 이미지로 확장된다. 박물관은 원래의 주인, 원래의 자리를 잃어버린 물건들이 모인 곳. 거기 가는 사람들도 잠시 머무는 곳일 뿐이다. 100년의 연대기별로 구분되어 있는 정거장 같은 박물관. 사람들은 거기서 엄지를 치켜세우고 윙크하며 사진을 찍는다. 5연. 이것은 드레스의 독백이다. 의인화된 드레스는, 자신의 두 생애에 걸친 ‘전시노동’의 급료를 받지도 못한 채, 자신의 질긴 목숨과 유사하게 질기게 내리는 빗소리를 탓한다. 어쩌면, 그것은 박물관의 방문객 김선우가 빗소리에 대해 퍼붓는 신경증적인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앞의 3연에서 김선우가 드레스에 대해 털어놓는 고백, "당신이나 나나 참"이라는 진술과 연결된다. 자기투영인 셈이다.

6연. 그러니, 차라리 의인화된 드레스라기 보다는 김선우라고 보는 것이 낫겠다. 박물관을 나오니 여전히 밖은 밤이고(헤드라이트 불빛), 지붕에는 빗줄기가 내리고, “투명한 두터운 슬픈 몸”이 지나간다. 두말할 나위없이 이것은 박물관에서 “텅비어 질겨진 드레스”를 본 탓에 떠올린 환영이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텅 비어 질겨진, 오로지 거죽(옷)으로만 남아 투명하고도, 슬프게 떠다니는 모습으로 겹쳐 보이기도 할 것이다. 비오는 날에 정거장에 옹송거리며 서 있거나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화사해 보이나 그 안은 텅비어 질겨진 드레스처럼(강시처럼?) 떠다니며 히치하이킹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정주하지 못한 채 떠도는 저 투명하고 두터운 슬픈 몸들은, 죄다 박물관의 드레스와 유사한 운명이거나 히치하이커들이 아닐 것인가. 우리는 모두 유목민 인 것처럼, 붙박이가 아닌 삶들은 모두 히치하이커가 아닐 것인가.

이 시는 좋은 시인가, 그도 아니라면 읽을 만한 시인가? 별로 읽을 만한 시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정서적 울림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읽을 때 주는 리듬감도 느껴지질 않다. 시로서 기억촉진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나로서는, 이미지를 제시하는 시인의 역량, 낯설고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연결하고, 충돌시키면서 만들어내는 시적 효과를 고려할 때 평균 점수는 줄 수 있을 것 같다. 위에서 써내려간 잡설들은 이 시를 의미론적으로 재구성한, 약간의 정신노동을 수반하는 작업일 따름이다. 잘못 읽은 것인가? 아무려나, 소설이든 시이든 작가와 독자 사이에 이뤄지는 커뮤니케이션은 (내적인) 일 대 다 커뮤니케이션이고, 그런 상황에서는 독자의 일방적 독해만이 남게 마련이다. 발신자인 작가가 항변해 봤자 소용없다. 불교경전의 첫 대목처럼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렇게 들었다)일 따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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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술자리에서 꼭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푸른 물 눈에 어리네”로 시작하는 ‘가고파’를 부르는 선배가 있었다. 경남 진주가 고향인 그는 가사에 나오는 ‘물새’를 예의 그 경상도 사투리로 “물섀”라고 발음했다. 그의 사투리로 인해 같은 영남 사투리라고 해도 고장마다 각각 제 빛깔이 있고, 조금씩 결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향’이라고 하면 바닷가 언저리에 있어야 비로소 고향이라 부를 수 있는 아우라가 생긴다는 느낌도 갖게 됐다.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에서 백화가 그토록 가려 하는 고향도 ‘포구’였고, 발레리가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고 다짐하는 곳도 지중해 푸른 바다가 보이는 해변이 아니었던가. 한창훈의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를 읽으면서, 비록 내 고향은 바닷가가 아니지만, 만약 이 팍팍한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낙향’한다면, 그곳은 아마 바닷가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은 순전히 제목 때문에 샀다. 요즘 들어 자주 찾는 동네의 조그만 단골 서점에 갔더니, 작년 9월에 나온 이 책이 신간 코너에 꽂혀 있었던 것. 도대체 미어터지도록 밥과 술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허기’를 간직한 터에, 이 책의 제목은 꽤나 유혹적이었다. 물론 마음의 허기를 채울 마음의 양식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배고파 허기가 질 때 바닷가에 가서 고기를 잡아 배를 채우라는, 그러니까 배고프면 밥 먹어라, 그것도 바다낚시로 물고기 잡아먹으면 좋더라, 라는 책이었다. 읽고 났더니 마음의 허기가 가시기는커녕 더욱 심해지는 것이어서, 퇴근 하는 동료 몇을 꼬셔 술을 마시러 갔다. 여기는 저자가 사는 거문도도 아니니 생선회는 어림도 없고, 겨우 모듬순대와 소주일 수밖에.

작가 한창훈의 작품은 몇 개의 단편, 그리고 읽다만 <홍합> 정도 밖에 본 적이 없다. 이런저런 저널에 연재되는 글을 통하여 대전 언저리 어딘가에 살았다거나, 고향인 여수 근처로 낙향하여 고기를 잡으며 글을 쓴다는 정도 외에는 다른 정보가 없었다. 늦깎이로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은 푹 익어 곰삭은 맛을 풍기기는 해도 트렌디한 맛은 없는 경우가 많다. 임영태니, 유용주니, 공선옥과 같은 작가들 말이다. 동시에 이런 작가들은 하나같이 그들이 살아온 핍진한 삶의 내력이 고스란히 작품에 구현되어 있다. 살다보니 글이 되고, 겪어보니 소설이 되는 것. 한창훈의 이 책도 그러했다.

이 책을 기존의 분류틀로 뭐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흑산도에 유배되었던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디딤돌 삼아 자신이 아는 바다 먹거리와 그에 얽힌 사연들을 줄줄이 풀어내는데, 에세이이기도 하면서 먹거리에 대한 요긴한 정보를 담은 실용서이기도 하다. 곳곳에 펼쳐진 사연들은 손바닥 장(掌)자 쓰는 장편(掌篇) 소설같기도 하다. 부제로 쓰인 ‘내 밥상위의 자산어보’는 정말 잘 뽑은 제목인데,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갈치, 삼치, 문어, 고등어, 홍합, 날치, 김, 붕장어, 성게, 우럭 등등이 밥상위에 단골로 등장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들 고기와 해산물들이 대개 밥이 아니라 술을 부르는 안주감이라는 점에서 ‘내 술상위의 자산어보’라고 슬쩍 부제를 고쳐도 무방하리라.

한창훈은 스스로 “생계형 낚시꾼”을 자처하고 있다. 고기를 잡아 시장에 내다 파는 ‘기업형/상업형 어부’가 아니라, 제 밥상위의 먹을거리를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한다는 뜻일 게다. 이것을 농촌식 용어로 바꾸면 ‘텃밭 농사꾼’ 정도가 될 듯 한데, 그의 텃밭은 거문도 주변의 그 너른 바다라는 게 다르다면 다를 것. 나는 그의 ‘텃밭’이 부러웠고, 그 비싸다는 참돔, 감성돔에서 삼치, 고등어, 때로는 모자반이나 톳같은 해조류도 씨억씨억 잘 잡아내는 그의 재주에도 질투가 났다. 일곱 살 때부터 두뼘 짜리 막대기 낚시대에 돌멩이를 매달고 낚시를 해온 그이니, 재주없는 나로서는 다만 부러워할 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바다생물들의 내력을 알고 나면 적어도 횟집에서의 술자리 ‘말[言] 안주꺼리’는 당분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그었던 문장들.

△키스는 갈치 비늘을 주고 받는 행위의 또 다른 이름이다.(갈치의 비늘은 립스틱 재료로 쓰인다고 하니) △슈베르트 피아노 5중주 ‘숭어’는 송어의 잘못이다.(그런가, 이제 알았네) △낚시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보기 좋은 것은 가족이 와서 아빠기 회 떠먹이는 모습이다. 모름지기 애비란 먹을 것을 물어오는 존재이다.(저 가련한 수컷-애비의 운명!) △군소가 많이 나는 해는 바람이 많이 분다고 한다.(바람과 생물의 저 깊고 깊은 운명적 링크) △서양요리의 아스파라거스는 분향소의 흰 국화 같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죽인 생명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아스파라거스를 접시위에 올렸단다.(그러면, 삼겹살 옆에 놓인 상추는 돼지의 운명의 비는 것?) △포장마차 따끈한 홍합 국물에 소주 한잔은 추운 겨울 강력한 유혹이다. 그런데 이건 양식한 것이다.(그렇군, 자연산 홍합은 ‘담채’라는군) 붉은 게 홍합 암컷이고, 흰 것은 수컷, 암컷이 더 맛있다. △봄철 어미 망상어를 잡으면 임산부처럼 배가 볼록하다. 꼬물꼬물한 새끼들이 잔뜩 들어있는 것이다.(생선도 뱃속에서 아이들을 키워 내보내는 구나) △날치는 가장 멀리 갈 때는 3~400미터 날아가기도 한다.(아, 푸른 바다 위를 떼지어 날아가는 ‘날치’들의 경쾌한 활강을 상상해보라)

△(자연산 김 값을) 깎지 말자. 만드는 과정을 보았다면 눈물 난다.(사람의 손을 거치는 것들치고, 눈물샘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풍천은 지명이 아니라 바람이 들어오는 하천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다(이제, 고창 선운사 앞의 그 숱한 풍천장어집들을 다시봐야 겠구만) △아는 만큼만 먹을 수 있다.(유홍준이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이제 알아야 먹기도 하는군) △(학꽁치) 이녀석들이 몰려오면 겨울바다는 은비녀를 뿌려 놓은 것처럼 변하고 객바위나 방파제는 아연활기를 띈다. 마을 영감님도, 환갑 다되어 가는 노총각도, 어린학생도 와서 낚는다.(학꽁치떼 몰려드는 바닷가에서 긴 뜰채로 꽁치를 잡는 저 풍경이라니!) △(낚시 밑밥용으로 남극의) 크릴 새우가 약 80% 사라졌단다. 이거 펭귄 밥이다.(온대지방의 낚시꾼들 때문에 남극 펭귄이 굶어죽어가는 이 글로벌한 세상) △복어 독인 테트로도톡신은 독중의 독이라는 소리를 듣는다.(그래서 더 쎈 독이 약한 독을 물리친다. 복어가 해장에 좋은 이유) △광어와 도다리, 우도좌광, 좌도우광(이 놈들은 보이는 쪽에 따라 눈알이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있는 모양)

이 책은 각 장마다 손암 정약전 선생의 ‘자산어보’의 관련 대목을 인용해 놓았는데, 실학의 자장안에서 공부했던 손암선생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인어’(人魚)를 묘사해 놓은 부분이 재밌다. “모양은 사람을 닮았다. 역어는 바닷 속 인어로서 눈썹 귀 입 코 손 손톱 머리를 다 갖추고 있으며 살갗이 옥처럼 희고 비늘이 없고 꼬리가 가늘다. <술이기>에 이르기를, 교인(鮫人, 인어)은 물고기와 같으나 물속에서 옷을 버리지 않고 눈이 있어 곧잘 우는데, 눈물이 구슬이 된다고 했다.” 중국 사람들이 구라 잘 치기로 유명해 황당한 구라 모음집인 <산해경>을 냈다지만, 이런 산해경스러운 실학자의 설명은 뜨악하다. 당시로선 절해고도였을 흑산도에서 역시 유배를 떠난 형 정약용을 생각하는 와중에 떠올리는 실학자 정약전의 인어 생각이라니. 아마 외로움이 불러낸 허깨비였을 터인데, 그런 상상이라도 없었으면 어찌 버텼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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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2-13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어와 숭어가 발음만 비슷하지 전혀 다른 어종인데 아직까지 슈베르트의 숭어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 건 이른바 학교에서 가르치는 거짓말 때문이지요.국내에서 잡히는 송어 중 무지개 송어가 외래종이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11-02-13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소는 생김새가 괴상해서 식용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모든사이 2011-02-14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군소는 이 책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바닷가에서는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을 거 같다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