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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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두근두근 내인생>(창비)를 읽다. 그녀의 단편에서 느낀 것은 어떤 단단한 결기와 야무진 문체였는데, 이번 장편은 단편이 주었던 믿음직함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다. 물론, 장편으로서 이 소설은 잘 쓰여진 소설이고 재미도 있고,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소설가로서의 재기도 충분히 높이 살 만하다. 그런데, 소설을 쓰기 시작한지 꽤 된 것 같은데 이번 소설에서 느껴지는 ‘아마추어리즘’은 어쩔 수가 없다. 조로증에 걸린 아이라는 매우 특이한 소재를 아주 흥미롭게 풀어가는 재주는 뛰어나지만, 2%가 아니라 한 10% 쯤 부족해 보이는 통찰과 깊이는 불가피하게 아마추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오랜만에 읽은 한국소설인데, 아마추어의 채 익지 않은 생각이라는 느낌이 들면 괜한 후회스러움이 밀려온다. 이런 소설 읽을 때 차라리 고전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이 나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첫 단편집이 나왔을 때 아주 인상적이고 기대가 컸던 정이현이 <달콤한 나의 도시>라는 드라마 <섹스앤더시티>의 한국 소설 버전을 썼을 때, 그걸 읽느라 허비한 시간에 대해 후회스럽기도 했다. 이른바 본격 문학 취향이어서인지 모르겠으나 정이현의 칙릿 소설은 잔재주로 소설을 엮어가는 어설픈 아마추어리즘으로 보였던 것.

김애란은 그래도 거기서 몇 발자국 더 나아간 듯한데, 여전히 내 성에 차지는 않는다. 소재의 특이함을 찾는 수고로움을 넘어 사람의 삶에 대한 고민의 수고로움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소설이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진부한 인식에 균열과 충격을 내고,새로운 인식과 삶의 지평으로 안내할 수 있는 길의 지도가 되려면 말이다. 장편으로서의 이 소설만 보자면 ‘대학생문학상’을 받은 ‘문학소녀’에서 별반 나아가지 못한 인상이다. 뭐, 소설 따위에 그런 기대를 한다는 게 지나치게 구닥다리스러운 생각일 수도 있겠다. 이 소설은 재기발랄한 대화 정도로 기억하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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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7-04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즘 작가들의 문체 수준은 예전보다 고르게 다들 좋아진 듯한데, 새로운 지도가 될 인식의 충격이 적은 것은, 그것도 결국 상품적 표준을 지향한 균질화의 소산이기 때문이지 않은가 회의를 줍니다. 정이현은 저도 소재의 파격성을 떠나 문체 기량이 만만치 않은 작가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에 했었습니다. 하지만 "문체는 곧 상품"인가 봅니다..^^

모든사이 2011-07-04 13:24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저도 참 게으른 독자이긴 하지만, 김애란은 최근 젊은 작가들중 주목할만한 소설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리뷰를 저렇게 썼지만, 이 사람이라면 더 잘 쓸 수 있을 거 같은데 왜 이 정도 밖에 안됐나 하는 아쉬움의 표현이었습니다..

트레바리 2011-07-04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니, '게으른 독자'시라뇨..?^^ 그럼 종잇장에 손자국도 안 남는 저희같은 미물들은 뭐란 말입니까..?^^

모든사이 2011-07-04 14:49   좋아요 0 | URL
아이고, 저 게으른 독자 맞습니다.. ㅎㅎ
 
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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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생각보다 과격하지 않다. 무장투쟁을 선동하는 것도 아니고 자본주의를 전복하라는 것도 아니다. “불법체류자를 차별하는 사회, 이런 사람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삼는 사회, 언론 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에 대해 분노하고, 정치적 참여를 촉구하고 있는 팜플렛 쯤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조국 서울대 교수는 이 얇은 책 뒤에 쓰인 글에서 “투표하라”고 촉구하고 있는데, 그의 성향으로 보아 ‘한나라당’에 투표하라고 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결국 ‘정권교체’를 위한 젊은층의 투표참여를 말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따라서, 언론에서 떠들썩하게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의 한국적 버전의 결론은 기껏해야 “우리의 정당한 분노와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 바꾸기에 나서자”(조국)라는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의 발기문 수준에 불과하다.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스테판 에셀이 “돌아가자”라고 말하고 있는 레지스탕스 정신이다.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평의회에서 합의한 이념과 정책방향은 좌우를 넘어서 프랑스 사회가 보편적으로 동의하고 합의하고 있는 규제적 원리로 작동한다. 한 사회가 정치적 지향을 막론하고 합의할 수 있는 사회적 지향이 존재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믿는다. 미국의 ‘애국주의’가 그러할 것이고, 일본의 천황제가 그러할 것이다. 물론, 애국주의나 천황제가 바람직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에셀이 말하고 있는 레지스탕스 정신은 프랑스 혁명의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라는 세계사적인 보편이념을 현실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미국과 일본의 그것과 차원을 달리한다. 문제는 한 사회 내부의 정치적 분열과 이념적 혼란 속에서 누구나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의 이념이 존재하고 그것이 규제적 원리로 작동할 때, 그것은 최소한의 공공적 영역을 확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도대체 무엇에 대해, 무엇에 근거하여 분노하는가. 바로 레지스탕스 정신에 반하는 것들에 분노하는 것이다. 보편적 이념을 거스르는 현실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다. 그럼 한국사회에 대해서는 무엇에 대해 분노해야 할까. 우리 내부에 사회적으로 합의가능한 보편적 이념은 존재하는가. 유시민이 말하는 대로 헌법?(<후불제 민주주의>) 바로 그 헌법정신은 조갑제도 말하고 있다. 두 사람의 헌법 해석은 전혀(!) 다르다. 국보법 폐지를 둘러싼 논란도 결국 헌법적 가치에 비춰 그게 부합하는가, 아닌가하는 논란이기도 하다. ‘종북 좌파’의 타도를 외치는 조갑제의 헌법에는 유시민과 달리 헌법이 내장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보편적 원리가 없다. 이것은 에셀이 말하고 있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정신’이 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힘을 합쳐서 투쟁해서 쟁취해낸 가치이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관련될 것이다. 프랑스 국민 모두가 몸과 마음을 바쳐 투쟁해서 얻어낸 고귀한 가치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이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헌법이 몇몇 소수의 정치엘리트의 작품이라는 역사적 사실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아놀드 하우저가 독일의 교양소설을 말하면서 미성년의 주인공이 이런저런 방황을 거치면서 사회적 이념에 동의하고 순응하는 과정을 다룬 소설이라고 지적한 대목이 있다. 교양(bildung)의 사회적 자아가 보편적 이념을 내면화하는 과정인 것이다. 서구 사회에서 이같은 보편적 이념이 존재했음에 비해 우리의 근대는 그러한 이념이 부재했다. 유교도 반공주의도 민주주의도 그렇지 못했다. 언제나 우리의 근대는 부정하고 극복되어야할 것이지 수용되고 내면화할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문학평론가들이 그동안 말해왔던 ‘애비 죽이기’는 이런 맥락에서 거론되었을 것이다. 이제 ‘부친 살해’에서 ‘애비 찾기’로 전환되었다고는 하나, 도무지 ‘애비’의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질 않는다. 그러니, 조국 교수도 이 책 뒷날개에 쓰인 신영복, 홍세화의 ‘추천사’도 방향을 상실한 채 그저 분노하고 참여하라는 막연한 ‘선동질’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한나라당에 투표하지 말고 민주당이나 진보정당에 투표하라는 얘기인데, 그것이 젊은층에게 ‘보편적 가치의 실현’이라고 과연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이명박 대통령도 투표로 당선되었다. 그러니, 투표만으로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것일까.) 스테판 에셀의 이 작은 책이 부럽게 느껴지는 까닭은 바로 우리 사회가 ‘레지스탕스 정신’같은 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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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7-04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쉴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에 "그대의 세기와 더불어 살되 시대의 피조물은 되지 말라. 그대의 동시대인들을 위해 일하되, 그들이 찬양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일을 행하라. 그들의 죄를 함께 하지 않되, 고귀한 체념으로 그들의 형벌은 나누어 지고, 그들이 없이 지내지도 못하면서 잘 감당하지도 못하는 질곡 아래 자유의지로 몸을 굽히라."(안인희 역)라는 구절이 있는데, 모름지기 사회적 자아의 '형성'이란 바로 이러한 내재적 초월의 수련과정이기도 하지 않은가 합니다.

모든사이 2011-07-04 13:31   좋아요 0 | URL
'내재적 초월'이라... 어려운 말이기도 하군요. 쉴러와 괴테의 세기는 그래도 바이마르 공화국의 이념이 있었으니 합의가능한 보편적 이념이 있었다고 봐야겠지요. 괴테가 <빌헬름 마이스터>에서 이르게 된 지점이 거기이고, 하우저가 말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기도 하지요. 의견 감사합니다.

모든사이 2011-07-04 14:51   좋아요 0 | URL
요즘 다른 소설들과 함께 읽고 있는 책이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어제의 세계>인데요. 님이 말씀하신 '파시즘의 대중심리'에 절망한 독일(권) 엘리트의 자살과 유언이라는 점에서 독일 엘리트주의(=독일 고전주의?)의 심리적 귀결을 보는 듯 하더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트레바리 2011-07-04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고..써놓고 쑥스러워 지웠던 댓글에 어떻게 답글 달아주시니 당황스럽습니다..^^;; 그럼 망명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책 리뷰도 기대합니다..
 
써니 - Sunn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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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써니’가 500만 관객을 넘어 상반기 최대 흥행작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이 영화를 본 것은 경기도 신도시의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에 있는 극장이었는데, 과연, 흥행작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말 9시 20분 상영이었는데도 객석이 모두 매진되었다. 옆 자리에 앉은 중년 부부와 아이들은 낄낄 대면서 영화를 보았고, 가끔 눈물을 찔끔거렸다. 남편은 부인에게 휴지를 건네 눈물을 닦게 했고 부인은 눈물을 훔치면서 코를 팽 풀기도 했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저마다 낄낄대고 깔...깔대며 눈물 콧물을 흘리는 영화. 영화평론가들의 미학적 평가와는 별개로 이 영화가 남녀노소를 이렇게 불러 모은 것을 보면, 대중의 가장 예민한 성감대를 건드린 것만은 분명하다.
 

이 영화는 두루 알려져 있다시피 80년대 여고생들의 학창시절을 다루고 있다. 삐쭉삐쭉 솟아난 머리의 신디 로퍼가 부르는 “여자애들은 그저 즐거움만을 바랄 뿐이야”(girl just wanna have fun)가 여학교에 울려 퍼지고, 디제이 박스에서는 리처드 샌더스의 멜랑콜리한 음악(‘reality’)이 나온다. 나이키로 상징되는 당시의 브랜드 열풍, 전투경찰과 시위대가 대치한 거리에 나붙은 ‘록키4’ 포스터에서 실베스터 스탠론이 촌스러운 표정으로 전방을 노려보고 있다. 무엇보다 그 시절의 우리 곁에는 우정을 나눌 따스한 친구들이 있었다. 너도 나도 대입에 목매달지 않았고, 매일 저녁 학원에 가지 않아도 되었던 시대. 극장에 몰려든 중년의 부부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 잠시 그 시절의 추억에 젖어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만 흐르는 시간을 거역한다는 의미에서 ‘자발적 퇴영’의 경험이다.
 

누구에게나 ‘순금(純金)의 기억’은 있을 것이다. 그리스의 서사시적 시대가 인류의 유년기였던 것처럼, 개별적 존재인 우리의 유년기 역시 루카치가 말한 대로,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고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였다. 모두의 가슴 속에는 순수한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었으며, 다가올 미래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충만했다. 하지만 그 찰나의 행복은 잠시였을 뿐, 세상에 내던진 우리는 영화에서처럼, 이번 달 실적에 전전긍긍해야 하는 보험설계사가 되어, 시부모와 아이들에 시달리는 주부가 되어 살아가야 한다. ‘먹고사니즘’이라는 이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은 막강한 것이어서 그 어떤 저항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글라데시인이 아니라, “부자되세요”가 새해 덕담이 되고 있는 시대의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미나(유호정 분)와 그녀의 딸은 사뭇 대조적이다. 미나가 딸 나이였을 때 그녀는 전남 벌교에서 올라온 순진한 여학생이었지만, 딸은 용돈을 위해 아빠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사랑해요, 아빠”라고 말할 줄 아는 여자애다. 세상의 섭리가 시장논리임을 아는 딸은 “사랑해요”라는 말을 팔아 용돈벌이를 하는 것이다. ‘순금의 기억’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직 ‘시장화하지 않은 내면’일 것이다. 당시의 한국 사회가 군사독재 시기이면서도 시장화되지 않은 ‘잉여의 영역’이 남아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내면에도 시장화하지 않은 순진성의 영역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 눈물 콧물 흘렸던 중년 부부의 눈물은 유년기에 대한 그리움이 불러낸 것이면서도, 지금 여기서의 삶에 대한 절망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이 영화에는 병원의 환자들이 텔레비전의 막장드라마에 열광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랑하는 두 연인이 “알고 보니 남매였다”라는 황당무계한 드라마다. 영화속의 환자들처럼, 막장드라마임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기꺼이 속아 넘어간다. 순정이 남아 있지 않음을 잘 알면서도 영화속에서는 순정이 존재하기를 기대한다. 어차피, 순정함을 소비하면서 잠시 눈물을 흘리고 추억에 젖으면 그만인 것, 내일이면 다시 출근하여 거래처 사람을 만나고 상사에게 굽신 거려야함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부모세대가 저질렀던 학창시절의 ‘일탈’을 아름답게 포장하지만, 바로 그 부모들은 자식들의 일탈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옆 자리의 중년 부부가 영화가 끝난 뒤, “영화 끝났다, 빨랑 집에 가서 씻고 자야 내일 학교도 가고 학원도 가지”라고 말할 때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순금의 기억’은 어차피 영화 속에나 있는 법, 우리는 극장에서 과거로의 여행이라는 퇴행성 질환을 잠시 앓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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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6-26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러고 보면, 우리 삶 자체가 내포한 "불신의 자발적 중단"이라는 유서깊은 수용(受容) 이데올로기의 위력을 알겠어요...

모든사이 2011-06-26 18:43   좋아요 0 | URL
그렇지 않고는 대체로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요? 부정적 사유를 내면화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탈주'가 이론 밖에서 어찌 가능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알리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6
유디트 헤르만 지음, 이용숙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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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느 보봐르가 쓴 <이별의 의식>은 병든 사르트르가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던 그녀의 에세이다. 지금은 절판이 되어 구할 수가 없는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보봐르가 사르트르의 시체 곁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이다. 의사는 사르트르의 살이 썩어 들어가니(이를 회저(壞疽)라고 하는데, 최승호의 시집 <회저의 밤>에서 제목으로 쓰인 바 있다.) 시체와 접촉을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보봐르는 사르트르의 시체에 모포 한 장을 덮고 그 곁에 누워 평생의 반려였던 사내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다. 사랑했던, 그리고 바람기 때문에 무척이나 속을 썩이기도 했던 연인을 떠나보내는 보봐르 식의 ‘이별의 의식’인 셈이다. 사르트르는 보봐르와 함께 살면서 젊은 여자를 연인으로 두기도 했고, 보봐르 역시 사르트르와 부부로 지내면서도 미국인 사내와 열정적인 연애를 하기도 했으니, 두 사람은 참으로 기이하고도 끈질기게 부부관계를 유지한 셈이다. 김현이 ‘모포 한 장의 사랑’이라는 에세이 소재로도 써먹은 이 장면은 이 책을 읽은 지 20여년이 지났음에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 <알리스>는 바로 그런 보봐르의 에세이를 상기시킨다. 자신이 사랑했던, 혹은 아주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남자 다섯 명을 하나 둘씩 떠나보내는 사십대 중반 여자의 이야기이다. 이별 이후 여자가 겪는 외로움이 아니라, 이별하는 과정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 그리움과 상실감, 허무와 고독, 그리고 남은 삶에 대한 의지에 관한 이야기다. 이별과정의 내면을 담백하게 보여주는 꽤 괜찮은 소설이다. 알리스 주변의 남자들은 실연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죽어서 사라져간다. 마흔 중반이라는 나이는 ‘이별하는 과정’에 어울리는 연령대일 것이다. 오랫동안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이 암으로 쓰러져 죽을 수 있는 나이이며, 존경했던 10년~20년 위의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죽을 수도 있다. 소설가 유디트 헤르만의 문체는 페이소스를 짙게 깔고 있다거나 감정을 표나게 드러내지 않는다. 담담한 견디기라고 해야할 마음의 상태를 이 여자 소설가는 대단히 세밀하고 단단한 문체로 실어나른다. 사람들과의 이별의 과정은 이런 식의 비유적인 풍경묘사로 나타난다.

“가로등은 맥없이 스러져 갔고, 간이매점과 광고지가 부착된 기둥은 공중으로 날아갔고, 주변의 모든 것들이 삐걱거리고 치익거리고 부스럭거리면서 노글노글해지고 얇아졌으며 한줌 먼지로 변해 사라져버렸다. 시청 종탑의 윤곽은 멀리서 흐물흐물해져 푸른 하늘에 녹아들어갔다. 낡은 종탑 시계는 다른 모든 것에 섞여 들어가면서도 한동안 하늘에 걸려 있다가 사라져 버렸다.”

옛 연인 미햐는 병으로 죽었고, 알리스는 그의 아내와 아이 곁에서 죽기 직전의 며칠을 함께 보낸다. 25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70대 노인 콘라트도 열병으로 죽어가고, 알리스는 그의 남은 아내와 함께 마지막 나날을 함께 보낸다. 리하르트도 그렇게 죽어갔고, 그녀는 마르가리테와 장례식 준비를 한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자살한 삼촌 말테의 흔적을 찾기 위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의 게이 짝을 찾아 죽음의 흔적들을 좇기도 한다. 그녀의 마지막 남은 연인 라이몬트 역시 죽었다.  모두들 죽었는데도 알리스는 그들이 곁에 있음을 느낀다. 사람은 가도 흔적은 남고, 그 흔적을 안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짙푸르게 남아 있는 것이다. 이별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알리스는 라이몬트를 날마다 보았다. 매일, 알리스는 라이몬트를 어디에서나 보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라이몬트가 가지고 있었던 형상과 존재 형태가 그렇게 다양했단 말인가. 그는 세상 누구일 수도 있었다. 그는 중앙역 에스컬레이터 위에 서 있었고, 역의 높은 회랑을 떠다니듯 걸어갔고, 가벼운 여행 가방을 손에 들고 옆모습을 보이며 걷기도 했다. 여행자이지만 서두를 필요가 없는 사람 같았다. 알리스는 누군가를 옆으로 밀치며 급하게 그 뒤를 따라가면서 라이몬트가 에스컬레이터를 벗어나 출구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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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6-26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글을 보니, 저는 왠지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리너즈>의 "죽은 자들"에 나오는 마지막 장면의 묘사가 떠오르네요...

"한사람 한사람, 그들은 모두 그림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 음울하게 빛바래고 시드는 것보다는 수난의 충만한 영광 속에 과감하게 저승으로 건너가는 것이 더 나으리라. 그는 자기 곁에 누운 여자가 그녀에게 나는 살고 싶지 않다고 얘기하던 연인의 눈동자를 가슴속에 그토록 오랜 세월 꼭 품고 있었던 것을 생각했다. ..... 그의 영혼은 무수한 죽은 자들이 사는 영역에 접근한 것이었다. 그는 그들의 불안정하고 깜박이는 존재를 의식했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 자신의 정체성은 만져지지 않는 어떤 잿빛의 세계 속으로 스러져가고 있었다. 견고한 이 세계 자체가, 이 죽은 자들이 한때 키웠고 세웠고 또 그 안에서 살았던 그곳이 해체되고 또 줄어들고 있었다." (김정환&성은애 역)

모든사이 2011-06-26 22:37   좋아요 0 | URL
네, 더블리너스의 하고 많은 판 중에서 저와 똑같은 번역본을 읽으셨다니 더욱 반갑네요. 님 글의 댓글은 더블리너스에 대해 예전에 쓴 리뷰로 대신하겠습니다. 혹시 읽으셨을지 모르겠으나, 이 블로그 뒤편에 있습니다.(http://blog.aladin.co.kr/myforties/4206267)

트레바리 2011-06-27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더블리너스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정말 풍부하신 독해력 감탄합니다. 창비본은 좋다고 생각하는데, 위에서 '수난의 충만한 영광'에 나온 '수난'이 원문에는 passion으로 되어있어, '열정'으로도 옮길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도 있습니다. "상대역들"이란 단편은 해방 전에 양주동이 "샐러리맨"으로 번역한 적도 있습니다.

모든사이 2011-06-27 14:3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양주동과 조이스라, 조이스가 더 나이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참 안어울리는 조합처럼 느껴지는군요. 모더니즘과 향가 연구의 차이 때문일까요? ㅎㅎ 댓글 감사드립니다..
 
문재인의 운명 (반양장)
문재인 지음 / 가교(가교출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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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의 운명>을 오후부터 읽기 시작해 새벽 두시에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만큼 흡인력이 있었다. 그가 다루고 있는 시기가 거의 동시대라 할 수 있는 근접과거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가 바라보는 한국사회에 대한 시각에 대부분 동의했고,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참여정부는 실패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공한 정부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문재인이 이 책에서 줄곧 강조하듯이 ‘역량’의 부족이었다. 그의 과거사와 노무현과의 인연은 가슴이 아프기도 했고,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다. 그는 아마도 외모에서 풍기는 면모와 속에 품고 있는 마음결이 똑같은 보기 드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의 이름 석 자를 알게 된 것은 이른바 <한국사회의 이해> 사건에서였다. 진주 경상대의 진보적인 교수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같은 제목의 교양서가 국보법 위반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혐의로 기소되었던 사건이다. 민노당 정책위원장을 했던 경제학과 장상환, 한때 서울대 폐지론을 말했던 사회학과 정진상, 그리고 여전히 완강한 ‘강단 트로츠키주의자’로 살아가는 정성진 등이 집필한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의 산실이 된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소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마르크스주의연구>라는 무시무시한(?) 정기간행물을 내고 있다.) 신문에는 그 사건의 변호인이 문재인이라고 나와 있었다. ‘인권변호사’하면 한승헌, 조영래, 홍성우, 이돈명 등을 떠올리게 마련이었는데, 부산에서도 이런 일로 변호에 나서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노무현이 유력한 대선주자로 떠오를 무렵, 가깝게 지내던 판사출신의 법조인은 노무현은 분수 모르고 날뛰는 ‘가짜’지만, 문재인은 ‘진짜 빨갱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명색이 판사로서 30여년 간을 일했던 그가 보여주는 대단히 ‘나이브한’ 인식에 대해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냥 웃고 말았다. 70년대의 학생운동과 노동인권 변호사로서의 활동이 그가 말하는 ‘빨갱이’의 근거였는데, 법조인의 논리치고는 참으로 조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짜/진짜 논리는 노무현에 대해서는 서울대도 나오지 않은 ‘상고출신’이기에 인정할 수 없지만, 문재인은 ‘비록’ 경희대 출신이지만 사법연수원 차석이라는 뛰어난 성적이 있기 때문에 인정할 수 있다는 식이었다. 아마도 서울대를 나온 법조엘리트들이 노무현과 문재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로 그러했을 것이다. 

몇 해 전 참여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여름에 추천하는 책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오영교 행자부 장관은 잭웰치의 자서전을 꼽았고, 곽결호 환경부 장관은 <꿈의 도시 꾸리찌바>를 꼽았고,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은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선물>(스펜서 존슨)를 꼽았다. 흥미로웠던 것은 박기영 과학기술보좌관이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꼽았다는 점, 그리고 문재인이 <책 한권 들고 파리를 가다>라는 책을 추천했다는 것이었다. 정부혁신을 맡고 있는 행자부 장관이 가차 없는 구조조정으로 ‘중성자탄 잭’이라는 별명을 얻고 있는 잭 웰치를 ‘사부’로 삼고 있다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환경부 장관이 꾸리찌바를 말하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것이지만, 김근태가 ‘대중추수적으로’ 말랑말랑한 베스트셀러를 꼽는 것을 보고 다분히 정치인스러운 추천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느 프랑스비평가는 글은 곧 사람이다, 라는 말을 했지만, 이 말은 책은 곧 사람이다, 라고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박기영이 사라마구의 책을 선정한 것은 ‘정치인’이전에 ‘교양독서가’로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청와대를 비롯하여 한국의 관료사회에서 사라마구의 독자를 찾기는 아마도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은 중국인 부부가 쓴 파리 여행서를 추천한 것이다. 업무상 관련이 있는 책도 아니고, 그 책이 대단히 명성높은 책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 문재인은 정말 그 책을 읽었던 것이고, 감동도 받았던 것이고, 언젠가 파리의 유적들을 돌며 프랑스 혁명의 흔적들을 찾고 싶은 소망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참여정부 초기 민정수석을 하다 사표를 낸 뒤 히말라야 트래킹을 갔던 것이다. 어느 날 홀연히 자신의 자리를 버리고 자유를 찾아 떠날 수 있는 내면을 가진 인간, 청와대 수석 가운데 그런 희귀한 내면을 가진 사람을 보았던 것이다. 이 책에는 그런 문재인의 성향이 물씬 묻어난다. 
 

진정성(authenticity)이 그것을 형성하는 ‘주체’와 성찰적 ‘내면’, 그리고 그 내면의 주체가 투신하게 될 ‘공적 지평’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갖는다는 김홍중의 지적(<마음의 사회학>)을 따르자면, 문재인의 얼굴은 희귀하게 그런 진정성의 표정을 갖고 있다. 이 책에서 느끼게 되는 그의 면모는 그 어떤 것으로 환원되지 않은 개인이면서 특정한 시기의 주요한 정치적 행위자였으며,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진보적 개혁과 일치시키려 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문재인은  자신의 내면과 거기서 말미암은 공공적 실천행위가 행복하게 일치하는 보기 드문 존재다. 
 

그와 노무현을 어디에 비유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와 엥겔스? 박정희와 김종필? 전두환과 장세동? 김대중과 박지원?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지적, 물질적 후원자라는 점에서는 노-문 둘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5·16 쿠데타에 함께 뜻을 모았다는 의미의 ‘동지’라는 점만 빼고는 하나도 닮지 않았다. 전과 장에 비유했다가는 아마 돌에 맞을 것 같다. 김대중과 박지원은 주군과 가신으로 얽힌 엄격한 상하관계였다는 점에서 역시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했던 ‘동업자’였으며,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의 ‘동지’였으며, 대통령과 수석, 비서실장으로 얽힌 ‘정치적 동반자’였다. 노무현과 문재인의 길고 오랜 정치적 동반의 과정은 그들이 사적 이해관계로 얽힌 존재들이 아니라, ‘가치의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노무현은 판사임용을 거부당한 그를 동업자로 끌어들이면서 관계를 맺었지만, 시국사범과 노동자에 대한 인권 변호를 통해 ‘가치동맹’으로 발전했으며, 참여정부의 탄생과 몰락이라는 또다른 운명까지도 함께 했다. 노무현재단의 이사장인 그가 지키려 하는 것은 아마도 그 오랜 세월동안 공동으로 일구었던 ‘노무현의 가치’(그것은 또한 문재인의 가치이기도 하다)일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구절,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은 이 가치의 공동체가 이룬 최고의 연대감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언론에서는 이런 ‘문재인의 운명’을 두고 정치인으로 나설 것이라 섣불리(혹은 고의적인 부추김으로) 전망하지만, 아무래도 그는 정치인의 유전자를 타고나지 않은 것 같다.

문재인은 “진보 개혁 진영이 요구하는 수준의 ‘개혁’과 ‘복지국가’를 정권의 힘만으로 해낼 수 있는가. 지금 우리 사회의 정치적 지형 속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참여정부가 증명한 것, 참여정부가 남긴 교훈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진보개혁 진영의 역량에 대한 지극히 현실적인 진단이면서, 동시에 어느 정당이든 곱씹어 봐야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에만 당선되면 모든 것을 할 수가 있다거나 대통령만 사라지면 모든 악이 제거될 것이라는 생각은 일종의 메시아주의다. 우리사회의 진보는 한 국가를 책임지고 운영하기에는 정치적 능력도, 사회문화적 역량도 턱없이 부족하다. 보수는 달리 거론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참담한 수준이다. 이 책의 출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중수부장의 “오만한 태도”는 논외로 하고, 문재인이 제기한 이런 문제나 차분히 성찰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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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6-25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은 곧 사람이다"는 18세기 佛 박물학자 뷔퐁이 학술원 회원될 때 연설에서 한 말이라고 정명환 선생의 "문학을 생각하다"에 나오네요..^^

모든사이 2011-06-25 17:44   좋아요 0 | URL
정명환 선생의 <문학을 생각한다>를 찾아보니, 글이 아니라,'문체는 인간이다'라고 나오는 군요. 뭐, 워낙 고전적인 말이라서 요즘 같은 세상에 거론하기에는 조금 올드패션이기도 한.. 정명환 선생이 이 글을 쓴게 1967년인데, 그때의 예술의 주류는 문학이었을 것 같은데, 참으로 머언 먼 나라의 이야기지요..ㅎㅎ

트레바리 2011-06-26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데, 책 제목은 <문학을 생각하다>입니다..^^ 왜 <문학을 생각한다>로 짓지 않았는지, 그 책 저자 서문에 나오네요..^^

모든사이 2011-06-26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역시 찾아보니 그렇군요. 이 블로그의 배경이 되는 책꽂이의 위에서 두번째 오늘쪽 두번째 칸에 정명환 선생의 책이 꽂혀 있지요. 그런데, 정명환 선생의 책을 읽으시다니 그쪽 전공이 아니라면 님도 대단한 분이시군요. 평론집이 읽히지 않는 시대인데, 더구나 한참 전에 정년 퇴직한 사르트르 연구자의 글을 꺼내 읽는 것은 요즘 상황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지요. 반갑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1-08-21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 사는 세상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타고 들어옵니다.
와~ 엄청난 글입니다. 모든사이님의 글을 보니 정말이지 제 자신이 원래 작고 수준이 약한 존재인 것을 알고 있는데, 더더욱 느꼅니다. 글의 진정성에서 심오함이 배겨 나온 것이 차마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8월 26일 부산 MBC에서 문재인 변호사님의 북콘서트 보러 가는데 정말 기대되는데, 이 글을 보면서 더욱 기대됩니다.

모든사이 2011-08-21 09: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님께서 너무 과찬을 하시네요.. ^^ 글이 좋은 게 아니라, 문재인 변호사가 훌륭해서 그렇지요...

미국사람 2011-08-23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러 생각이 나는 글입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눈물이 날뻔 했네요.

글쎄 현재 한국의 진보나 보수가 국가 운영능력이 있는가 생각해봅니다. 노무현의 실패는 능력의 부족에서 기인했고 이명박의 현재 모습은 실패한 정권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듯한데 이는 국가운영 철학의 부재에서 출발한 듯 합니다. 철학이 부족한게 아니라 아주 없는 듯...

지도자의 능력이 국민의 수준이라는 말이 있지만 80년 이후 한국 지도자의 수준은 국민 수준을 못따라간게 아닌가 합니다. 아니면 한국 정치의 수준이나 과정이 능력있는 정치인을 도태시키는 것이었든지...

님의 진정성이라는 말의 사용방식에 진정으로 동의하고 싶네요. 진정성이란 작위적으로 만들어낼수 없는 법. 문제인에게서 진정성을 보았다는 것. 그렇군요.

불행히도 이명박에게서는 진정성을 참으로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 시대의 불행입니다.

참 훌륭한 글이네요. 혹시 글로 먹고사시는지....

모든사이 2011-08-23 09:5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노무현이 포스트모던 정치가였다는 일각의 평가가 맞다면, 그의 수준을 국민이 못 따라간게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엠비 정부는 철학도 방향도 없는데, 이건 그의 기본소양이 너무 없어서 라고 봅니다. 공부와 사고의 수준이 칠십년대에 머물러 있는. 거창한 철학의 문제가 아니고요.


저는 글 써서 밥먹는 사람은 아닙니다. 예전엔 그 비슷했지만... 거듭 관심 감사드립니다.

미국사람 2011-08-24 02:1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렇게 훌륭한 글이 이렇게 숨어있다는게 아깝군요.

하긴 글써서 먹고 살기 쉬운 세상은 아니죠. 혹시 김재태라고 아는지 모르겠읍니다. 대학 동창이고 시사저널 기자였고 괜찮은 친구였는데 먹고 살기 힘들었는지 이상하게 되었더군요. 이 친구를 탓해야할지 아니면 세상을 탓해야할지. 10여년만에 한국에 갔더니 이 친구를 탓하기보다는 신세가 딱하게 됐다고 동창들이 동정을 하더군요.

슬픈 세상입니다.


모든사이 2011-08-25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사람, 말씀하신 분은 잘 모르겠군요. 아마도 시사저널 파업을 하면서 대다수 기자들은 거기를 나와 시사인을 차려 독립했고, 그 분은 원래의 시사저널에 그냥 남은 것 같네요. 시사저널 사태는 대기업과 언론의 관계, 특히 삼성의 '언론관리술', 그리고 광고와 언론산업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생각됩니다.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 남은 자들은 남은자들의 논리가, 떠난 자들은 떠난 자들대로의 논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 오묘한 실존의 논리(?) 앞에서는 뭐라 말하기가 그렇네요. 문제는 자존심을 지키면서 언론의 길을 갈 수 있는 환경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현실에 있는 것 같습니다. 신세가 딱하고 말고 이전에 말이지요.. 사실, 모든 사람들은, 저를 포함하여 두루 딱하지요.

2011-09-02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든사이 2011-09-02 17:23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