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 홈즈가 틀렸다 패러독스 4
피에르 바야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여름언덕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피에르 바야르는 움베르토 에코보다 재기나 유머감각에서 훨씬 아랫길이다. 에코가 보여주는 풍자와 비아냥에 비하자면 너무 진지한 편이다. 그럼에도 서구 인문학의 계보와 이론을 종횡하며 독자를 기죽이는 다른 이론가들보다야 더 유쾌하고 발랄하다. <셜록 홈즈가 틀렸다>(백선희 옮김, 여름언덕)를 읽고 느낀 생각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되풀이 읽어야 겨우 해득할 수 있는 책과 아무 생각없이 그저 낄낄대며 읽어가는 소설의 중간쯤 되는 책이겠다. 인문학 독서에 맛을 들인 독자가 지하철에서 ‘치매방지용'으로 읽기에 딱 좋다. 충분히 지적이면서도 아주 잘 읽힌다. 적당히 사유를 부추기면서 읽는 재미도 함께 주는 책이다. 가격과 부피, 심지어 활자가 인쇄된 종이의 재활용 종이 재질까지도 이런 평가에 딱 알맞다.

이런 책들은 내 경우에 ‘대가의 외도’ 쯤으로 분류될 수 있는 범주에 속한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쓴 ‘재즈’에 관한 책,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영림카디널)이거나 후기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으로 잘 알려진 경제학자 에르네스트 만델이 쓴 범죄소설 비평서 <즐거운 살인>(이후) 같은 경우다. 자신들이 기초하고 있는 이론적 토대를 의외의 분야에 적용하면서 매니어로서의 취향과 결을 보여주는 책 말이다. 경제학 책만 쓰는 경제학자, 문학비평서만 내는 평론가, 정치학 책만 내는 정치학자, 이런 사람들은 참으로 인간적 매력이 없다. 김우창 선생이 동양화를 분석하거나(<풍경과 마음>), 김현이 만화에 대해 쓸 때(<김현 예술기행>), 나는 그들의 읽기의 폭과 깊이에 대해 경의를 표하게 된다.

바야르의 책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이어 두 번째인데, 이 책은 <바스커빌가의 개>에서 홈즈가 내린 결론이 틀렸다는 것을 주저리주저리 풀어 놓은 책이다. 바야르는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문학평론가인데, 역시 비평가들이란 참으로 쓸데없는 호사가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리소설을 읽고 비평하는 것도 모자라, 거기 나오는 탐정의 추리가 왜, 어떻게 틀렸는지 시시콜콜하게 따지며 책 한권을 쓰고 있다니 말이다. 추리소설이 소설일진대, ‘미학적 비평’을 넘어서 허구 세계의 실재성에 대해 문제 삼고 있으니 말이다. 몇 년 전 고전문학 전공 교수가 홍길동전 연구에 평생을 바친 나머지 “홍길동은 살아 있다”라며 홍길동이 실존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책을 쓴 적이 있었다. 허구와 실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그 사이의 경계를 지우려는 시도인 셈이다. 허구와 실재 사이의 경계를 지우고 그 둘이 넘나든다는 시각, 이거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 아닐까?

물론, 바야르는 그런 멍청이가 아니다. 그는 허구와 실재를 구분하는 시각을 ‘분리주의’로, 둘이 넘나든다는 시각을 ‘통합주의’로 부르고 있다. 바야르는 후자다. 그는 “허구와 실재 사이의 높은 투과성에 대한 확신”이 있으며, “어떤 허구 세계에 어느 정도 긴 시간 동안 살게 되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뿐 아니라 이 세계의 주민 역시 때때로 우리 세계와 와서 산다”고 본다. 그러니까 우리는 길거리에서 책 밖으로 걸어 나온 돈키호테를 만날 수도 있으며, 교외의 산책길에서 보봐르 부인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우리가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 모스크바 역에서 안나 카레리나를 만나 인사를 나눌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한발 더 나아가 “문학작품의 인물들이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도 그렇고 그 세계와 우리 세계를 오가는 데도 어떤 자율성을 누린다고 믿는 신념”에까지 이른다. 셜록 홈즈는 그를 창조한 코난 도일의 손에서 벗어나 작가를 배반하기도 하고, 스스로 자가발전 하여 작가가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며 자신들의 세계를 창조해나간다는 생각이다. 바야르는 정신분석학자답게 셜록 홈즈를 죽이고 나서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코난 도일의 욕망과 무의식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코난 도일은 “내가 홈즈를 죽이지 않으면 그가 나를 죽일 것이다”라며 홈즈와의 정신적 공생이 주는 불안을 토로한다. 피그말리온 신화처럼, 작가는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 질투를 느끼기도 하며 사랑을 느끼기도 한다. 텍스트와 실재를 혼동하는 이런 태도는 비정상적인 것이 아닐까? 바야르는 오히려 그것이 더 위험하다고 말한다.

“문학작품 속 인물들이 그들이 살고 있는 책 속에 갇혀 있다고 상상하는 건 위험한 허상이다. 홈즈의 예와 그가 자신의 창조주를 괴롭히는 방식은 인물들이 가진 자율성이 어떤 순간에는 우리 세계로 건너와서 우리와 더불어 조화롭게 지내거나 우리의 실존을 깊이 뒤흔들어 놓을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진짜 환상적 차원은 다트무어 황무지를 공포로 사로잡는 무시무시한 개보다는 작가와 독자가 문학작품 속 인물과 맺는 관계에 있다. 책의 마력을 텍스트에만 한정하는 것은 허상이다. 텍스트란 책을 가까이하는 위험을 무릅쓴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모은 집합의 핵심일 뿐이다.”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텍스트를 접할 때 인식하게 되는 어떤 ‘심리적 실재’는 확실히 존재하는 것 같다. 우리는 홈즈의 활약에 열광하기도 하며 범죄자를 증오하기도 한다. 텍스트를 읽는 순간은 지금 여기의 ‘나’를 잠시 잊고, 텍스트의 내부로 걸어 들어가는 경험이다. 그것은 비가시적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실재가 아니며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 대한 사랑도 역시 심리적 실재이며 내면의 진실일진대, 가시성 여부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우리는 텍스트로 이루어진 ‘세계체제’ 속에 사는 거주민들이며 그 세계 바깥은 없다.

그런데, 도대체 셜록 홈즈가 뭐가 틀렸다는 건가. <바스커빌가의 개>에서 범인은 유산상속을 노린 스테플턴이며 그는 바스커빌가의 전설을 기민하게 활용하여 자신의 살인을 은폐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황무지의 늪 너머로 사라져 버린다. 홈즈의 추리는 거기서 그친다. 그러나, 바야르는 이 사건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재구성하면서 범인은 그가 아니라 그의 아내 베릴이라고 주장한다. 코난 도일은 스테플턴을 범인으로 하여 소설을 써 내려 갔지만 텍스트는 그의 의도를 보기 좋게 배반하여 전혀 다른 결론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베릴이 범인임을 밝혀 나가는 바야르의 추론과 근거들은 작가의 서술보다 오히려 더 치밀하다. “무기도 협박도 상처를 주는 말도 없는 살인, 희생자가 다른 인물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스스로 죽는 살인, 범죄 역사상 이보다 더 멋진 성공을 찾기란 어려울 것이다.”

진짜 범인인 베릴은 남편인 스테플턴을 범인으로 몰아세우고, 작가 코난 도일과 홈즈의 집요한 추적을 따돌리면서 가장 성공적으로 완전범죄를 성취해냈다. 텍스트는 작가에 의해 서술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써내려가는 순간 작가의 손을 떠나 스스로의 길을 간다. “문학작품 속 인물들이 실재 세계와 허구 세계 사이를 거침없이 돌아다닌다는 우리의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허구 속에서 서로 다른 시대를 돌아다니는 일도 있다고, 문학 세계도 우리네 세계처럼 유령들로 가득하다고 가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광화문 한복판에서 애련에 몸살을 앓는 안나 카레리나를 만난들 하등 이상할 것이 없고, 21세기 디지털 TV에서 온갖 돈키호테들을 만난다하더라도 눈 비빌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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