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고 정치 - 김어준의 명랑시민정치교본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 푸른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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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는, 말하자면, ‘저자거리 정치학’이다. 그는 ‘저자’에서 놀며, ‘저자판’의 언어로, ‘저자판’같은 정치를 까대고 희롱한다. 이것은 그의 언어가 부박하다는 비판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저자거리 언어가 뛰어난 정치학자의 그것보다 현실정치를 분석하고 바라보는데 더 유효하다는 의미다. 저자의 언어이기에 대중들은 그의 말을 더 쉽게 알아듣고, 더 빨리 이해한다. 그리고 이 저자판 같은 정치를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도 금새 알아 먹는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김어준에 와서 비로소 한국의 정치비평은 대중의 언어로 하강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출근버스 안에서, 사무실 책상위에서 낄낄대고 읽으면서, 역설적으로 한국의 정치학자들이, 정치인들과 정치부 기자들이 얼마나 한국정치와 대중의 정치감각에 대해 무지한가를 새삼 깨달았다.

김어준은 본인 스스로 ‘노빠’임을 표나게 드러내는데, ‘멋진 사내’라는 그의 평가는, 노무현의 언어와 삶이 분칠된 언어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였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홍준표에 대한 그의 평가와 친밀함도 이런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다. 홍반장의 경박함과 좌충우돌을 비판할 수 있을 지언정, 그에게는 다른 한나라당 의원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질박한 자기 언어와 삶이 있는 것이다. 이런 정치(인)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폼 잡는 이론이나 용어를 빌리지 않고”, ‘정치공학’에 휘둘리지 않는 김어준의 시각에서 나온다. 저자로 내려오니, 저자판 같은 정치가 보이고, 그 저자판에서 드물게 빛나는 정치인들을 발견해낼 수 있는 것이다. 첫머리에 있는 조국에 대한 평가(와 조국이 간과하고 있는 바), 문재인 대망론, 박근혜와 오세훈에 대한 진단이 빛나는 이유도 그래서다.

한국정치를 말하는 정치학자들은 지역과 이념, 세대의 균열구조를 말하고, 정당정치에 관한 이론을 거론하겠지만, 그것은 많은 경우 이론이라는 ‘보편의 언어’로 위장된 정파적 언어인 경우가 많다. 마치 보편적 지식인인양 고상하게 우아 떨며 말하는 일급 학자들이 기실은 폴리페서거나 유력 정치인의 가방모찌에 불과한 사례를 숱하게 봐 왔다. 그러느니 차라리 김어준처럼 “쌩까고” 지지의 이유와 근거를 적나라하게 밝히는 게 낫다. 김어준의 나꼼수가 인기를 끄는 이유도, 고상 우아 죄다 벗어던지고 편향성을 아예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저자의 언어로 말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계몽된 대중’들은 계산과 공학에 능한 한국정치에 질릴 대로 질려버린 것 같다.

이 책을 정말 제대로 읽어야할 사람들은 진보신당 당원들이다. 정치적 선명성을 내세운다고 대중들의 지지를 획득하긴 어렵다는 김어준의 충고는 두고두고 곱씹어야할 과제일 것이다. 노빠들의 노무현 지지에 대해 ‘정치적 광신’이라 매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진보신당 아니, 민노당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대중들에게 그만한 ‘감동’을 준 진보정치인은 찾아볼 수 없다. 감동 없는 정치는 성공할 수 없다. ‘논리’ 이전에, 신자유주의라는 알듯 모를 듯한 ‘추상’이전에,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노력과 사람이 없다는 것을 되돌아봐야 한다. 적어도 이 책에서 김어준이 지적하는 문제들은 전적으로 옳다.

박근혜의 정치학이 아버지에 대한 ‘제사와 효도’ 차원이라는 지적은 김어준다운 유쾌한 통찰이다. 마음 같아서는 김어준의 명랑시민 정치교본을,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와 함께 한국정치를 이해하고 바꾸기 위한 대중을 위한 정치교과서로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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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10-24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단락에 무한 추천을 드리고 싶습니다! 명랑시민 정치교본이라...정말 탁월한 표현입니다^^

모든사이 2011-10-25 16:32   좋아요 0 | URL
명랑시민 정치교본, 그건 제 표현이 아니라 이 책의 부제입니다.. ^^

yamoo 2011-10-26 11:27   좋아요 0 | URL
하하, 저도 이 책 드뎌 구입했습니다. 책 띠에 보니, 부제가 명랑시민 정치교본이라고 돼 있네요..ㅎㅎ

모든사이 2011-10-26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amoo, 네 괜찮은 책 사셨네요..^^ 말하자면 '눈으로 보는 나꼼수'쯤 될 거 같은데요. 유쾌하고 재밌습니다.

콩알탄 2011-11-02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적으로 동감!

복호 2011-11-27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딴지일보 김어준씨 좀더 고전과 역사, 경제, 그리고 사회를 배우고 익혀 사람이 된후에 나서면 좋겠다. 남을 헐 뜯고 비방하며 잘난체 하는자는 정상이 아니다.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한다.자신만이 옳고 바르다고 생각하는 시민단체와 똑 같은 생각이 바로 독선이요, 독재요, 반민주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모든사이 2011-11-29 16:44   좋아요 0 | URL
두어달간 서재를 방치해 놓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달린 님의 댓글을 보고, 알라딘에 님과 같은 분이 계신다는 게 저는 더 놀랍군요. 제가 사사로이 쓴 리뷰에 대해 댓글을 다신 것이고, 또 제 리뷰에 대한 글이 아니라 김어준 개인에 대한 님의 논평이기에 제 입장에서는 충분히 지울만한 글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냥 놔두겠습니다. 김어준의 '책'에 대한 논평이 아니라, 그의 사람됨에 대한 논평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김어준이 이 책에서 자신만이 옳고 바르다고 주장한 것 같지도 않고요. '잘난체'하는 게 문제라는 주장도 조금 어이가 없습니다. 김어준은 이 책에서 충분히 토론가능한 주장을 해놓고 있고, 그것은 한국사회의 바람직한 미래설계를 위해 경청 가능한 주장이라고 생각됩니다. 님 같은 '일차원적 사고'는 전혀 설득력이 없군요.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 편의 글은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를 다룬 김현미 교수의 논문과 2013년 체제를 주제로 한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의 글이다. 한국 사회의 중산층 이하 계층의 삶이 위기에 처한 이유와 대안적 모색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계몽적이다. 민주정부 10년은 물론이고 보수정부 4년에서도 삶의 위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별로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나아진다’는 것이 경제적 삶의 풍요든, 문화적 삶의 질이든, 일상의 행복이든, 분야와 방향에 상관없이 현실은 팍팍하기 그지없다. 지나친 비관론인가. 이른바 ‘안철수 현상’은 한국정치의 제도화 수준이 그만큼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 밥 먹는 문제를 두고 벌어지는  깽판은 겨우 이 정도의 문제조차도 ‘사회적 합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즘 나는 별로 이 나라의 국민이고 싶지 않다.

김현미는 하우스 푸어 등으로 대별되는 중산층의 위기가 ‘재생산 위기’라고 말한다. “한국의 빚더미 중산층은 사회적 재생산 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빈곤계층의 삶의 불안정성과 위기도 문제지만, 중산층의 위기를 심각하게 토론해야 하는 것은 중간 정도의 자산가 계층도 이제 스스로의 재생산을 이루어내지 못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삶의 재생산 영역이 급격하게 시장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장화 상황 속에서는 인공출산, 산후조리원, 육아, 사교육, 취업 사교육, 취업과 사회적 삶의 상승을 위한 건강과 패션(성형, 스타일), 장례와 상조서비스까지 모든 것에 ‘비용’을 지불하고 ‘구매’해야 한다. 중산층의 재생산 위기는 바로 이런 ‘비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벌어진다. “재생산 영역의 상업화는 인간의 물적, 감정적, 인지적 존재성 자체를 아웃소싱하여 개선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70년대 석유파동 당시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저 먼 아랍세계에서 벌어진 일로 시골마을의 전등을 호롱불로 교체해야 했다. 아마도 한국민이 세계화를 몸소 체감하게 된 것은 바로 이 1차 석유파동이 아니었을까. 가보지도 않은, 알지도 못하는 먼 나라의 일이 시골 무지렁이의 삶에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의 확인. 2008년 초 미국발 금융위기도 그렇고, 지금의 유럽 재정위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세계화라는 구조속에서의 우리의 삶은 더욱 심각한 불안정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김현미에 따르면, 그것은 재생산 위기를 타개해보려는 ‘개별화된 가족전략’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한국의 노동자는 가족의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하고, 이를 메우기 위해 시장에서 물질적/비물질적 재화를 구매한다. 가계대출금 상환과 높은 사교육비 때문에 재정난에 빠진 중산층은 다시 주식, 펀드, 부동산 등 불예측성이 높은 재테크에 몰두하거나 맞벌이, 겹벌이 등을 통해 소득을 증가시키고자 한다. 안정성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가족의 사회적 재생산 분야는 가장 투기적이고 불예측적인 시장상황에 의해 그 질이 좌우되는 불안정한 영역으로 전락했다.”  

그러니까, 월급으로 '비용'을 지불해 사회적 삶을 재생산하기 어렵게 된 중산층은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주식과 부동산에 손을 대 '투기적 돈벌이'에 나서게 되고, 그러다 세계경제의 위기라는 또다른 복병을 맞아 워킹푸어, 하우스푸어로 전락한다는 얘기다. 이는 굳이 사회학자의 분석을 빌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가 주변에서 몸소 체험한 현실일 것이다. 재생산 위기는 개별화된 노력을 통해 해결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아이들 밥한끼 주는 무상급식도 ‘정치적 사안’이 되는 나라에서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장기적 전망을 찾기란 어렵다.” 그래, 참 어렵다. 한나라당과 그 당 지지자들이 대오각성한다고 해서 해결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김현미는 “고비용 저효율의 소모전 속에서 끊임없이 공회전을 하는 중산층이 이제 삶의 질과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국가의 책임에 대해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한다”는 다분히 선언적인 대안에 그치고 있다. 그 정치적 선택의 정책적 결과는 아마도 복지의 확충이 될 것인데,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참으로 요원하다. 사회적 재생산을 개인과 가족이 온전히 감당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는 사회적 재생산은 거의 불가능하다. “공공적 자원이 투여되어야할 사회적 재생산 영역이 시장에 의해 지배될 때 중산층은 당연히 ‘빚더미’에 오르게 된다.” 그 비용을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가 함께 떠맡고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사회적 재생산의 탈시장화, 국가에 의한 사회적 재생산이 이뤄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포스트 MB 시대에 요구되는 대안적 방향이다.   

김대호는 2012년 대선과 총선을 계기로 형성될 ‘2013년 체제’를 전망한다. 그는 지금의 한국사회를 규율하는 것은 멀리는 분단 냉전구조를 형성한 ‘1953년 체제’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정상화를 추구한 ‘87년 체제’라고 규정한다. 87년 체제는 어떠한 경제사회 모델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외시하고, 독재권력을 방지하고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추구하는데에만 집중했다. 그 결과는? “독재방지에 치중한 나머지 공공의 핵심인 정치적 안목, 책임성, 국가경영능력등이 매우 약화된 체제”로서, “정치의 혼미와 무능을 틈타 공공적 마인드는 취약하지만 재력, 조직력, 전문성, 여론조작력 등을 가진 관료, 재벌, 토건족, 언론집단, 직능협회 등의 정치사회적 힘이 급성장” 했으며, “진보적 선출권력은 이 거인들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포박, 포섭당하는 위기상황”이라는 것이다.  

MB 정부는 김대중 정부가 완성한 시스템에 박정희적 요소(단속경제)와 현대건설과 서울 시장 시절의 저돌적 추진력과 변칙, 편법“을 결합한 정부다. 김대중 시스템은 기업, 금융, 노동, 공공부문 구조개혁으로 이뤄졌는데, 금융개혁의 일정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은행은 서민과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중개기능을 외면하고 부동산 투기를 위한 자금공급원으로 전락했고, 고용유연성은 대기업과 공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에서만 관철되었다. 중국특수로 돈을 번 대기업들은 고용을 늘리기 보다는 임직원의 보상을 강화하고, 종업원의 고액연봉을 보장함으로써 노조를 순치시켰다. 대기업 노조의 이익과 기업의 이익이 맞아 떨어지면서 비정규직과 청년실업은 급증했다.  

진보좌파는 복지확대, 청년고용할당제와 같은 공공부문의 적극적인 역할, 정리해고 및 비정규직 반대 등의 예외없는 정년보장와 같은 신자유주의의 ‘과잉자유’에 대한 규제를 통해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거창한 명분과 소망과는 달리 현실적 대안이 되기 어렵다. “이 시대 수많은 빈곤과 갈등, 절망, 죽음의 확실한 원흉인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가와 시장’은 단지 규제가 적어서, 경제주체들의 자유가 과잉이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김대호의 입장은 거칠게 정리하자면, 진보적 현실주의라는 레테르를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진보좌파의 주장은 ‘새로운 규제’를 통한 대안이겠으나, 그것이 불러올 ‘풍선효과’를 보지 못하거나 외면하기 때문에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성매매 근절을 위해 집창촌을 철거해야 한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 ‘현실적 허구’인 것과 마찬가지이리라.  

가령, 다음과 같은 주장은 진보좌파 내지 시민사회의 주요 세력들이 경청할 만하다. “민주, 노동, 민중, 시민 세력은 보수와 마찬가지로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화시키는 큰 그림(국가비전) 없이, 대체로 자신이 부당하게 빼앗기고 억눌려온 약자라는 확신을 깔고 상하좌우(공동체 전체)를 살피지 않은 채 자기 권리찾기에만 매진해온 것 아닐까?” 부당하게 빼앗긴 권리를 찾는 것은 정당한 행위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것의 방법론이 역설적으로 부당하게 빼앗는 방식이 되어서는 그 역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 이른바 진보진영이 대화와 타협이라는 정치적 행위에 매우 취약한 사람들이며, ‘결국 역관계가 결정한다’라는 논리로 비타협적 투쟁에만 매몰되어 있다는 것은 잘못된 진단이 아니다. 민노당/진보신당, 민노당과 참여당의 통합 결렬 과정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정치적 갈등의 조정과 타협’에 무능한 인간들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래 맞다, “빼앗긴 권리를 찾아 각개약진만 하면 그것이 곧 공공성이 되는 시대가 더 이상 아닌 것이다.” 아마도 참여정부와 노무현이 좌우에서 협공을 당했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을 것이다. 보수는 그렇다치고, 진보진영에서도 비판을 받은 것은, 이 정부의 한계와 실책도 있지만, 비타협적 권리찾기 투쟁만을 소명의식으로 삼았던 많은 진보진영 활동가들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력 결핍’에도 책임이 있다.  이제는 국가의 재구성, 유능한 정부를 만들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김대호의 말대로, 새로운 2013년 체제는 “국가경영을 오랫동안 준비해온 잘 조직된 정치집단과 지식인 집단”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런 준비된 조직이 있는 집단은 어디인가. 이명박 정부는 “압도적 지지율과 국회의석수, 보수친화적인 검찰과 사법부와 재벌대기업, 시장지배적 언론"이라는 민주화 이래 최대의 호조건 속에서도 "거의 아무런 성과도 보여주지 못했다." 대기업-거대신문사와 방송-의회를 장악하고도 유능한 정부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앞으로 MB만큼 좋은 여건(?)을 가진 집권세력은 아마 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미안하게도 안철수 역시 국가를 재구성하고 유능한 정부를 만들 수 있는 집단이 없고, 민주당도 그러하다. 현재의 진보정당에게 '유능한 정부'를 기대하기란 더더욱 난망하다. 김대호는 ‘자아성찰, 지공무사와 구동존이’의 정치적 상상을 말한다. 포스트 MB시대의 대안적 방향으로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겠으나, 막상 현실로 눈을 돌려보니 여전히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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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리 2011-09-29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데 김대호 소장의 글은 실천문학 2011년 여름호에 게재된 백낙청 선생님의 '2013년 체제를 준비하자'와 프레임이 비슷한 것 같네요.. 백낙청 선생님의 저 글에서 김 소장님의 2010년 다른 글을 몇번 인용하시긴했던데.. 저는 제 얘기(?)같아서 그런지 엄기호 선생님의 '이게 사는 건가';;; 글을 재밌게 봤어여~ㅎㅎ

모든사이 2011-09-29 21:5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백선생의 2013년 체제론에 대한 구체적 응답형식으로 쓰여진 글 같으니 아마 프레임이 비슷하지 않을까. 엄기호, 이 양반은 차암 글을 잘 쓰는 것 같다는 생각. 너절한 인터넷 논객에 비해 성찰의 깊이가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네.

미국사람 2011-10-14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래간만에 왔는데 책을 읽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글을 잘 쓰시는 군요. 일딴 꾸벅...

창비는 안읽어본지가 10년이 훌쩍 넘는군요. 구하기 힘든 곳에 살아서.. 요즘도 70-80년대같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대충 보니 딱딱하기는 예전과 마찬가지. 대학시절 참으로 힘겹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용이 아주 비관적인데 하긴 80년대는 어땠읍니까? 주변에 감방가는 애들로 넘쳐났었는데요. 그러니 너무 비관은 하지맙시다. 그리고 다음 정권은 누가 잡더라도 이명박보다는 낳을 것이라 봅니다.

좋은 글 잘 읽었네요.

모든사이 2011-10-24 18:13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방문 감사드립니다. 제가 요즘 리뷰를 별로 올리지 않아 읽을 만한게 별로 없을 텐데... 비관이라, 네 그렇네요. 턱없는 낙관보다는 차라리 비관이 나은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만. 세상이 그래도 조금씩은 나아지겠지요? 내일 모레 선거 결과를 보면 이런 소박한 낙관이 맞을지 그렇지 않을지 알게 되겠지요.. 감사합니다..^^
 

알라딘이 종로에 새로 오픈한 헌책방에 다녀왔다. 종로에 있는 대형 헌책방이라...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보통 헌책방은 도심이 아닌 부도심이거나 변두리에 있게 마련이고 퇴락한 분위기와 머리가 허연 주인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분위기가 대부분이기 때문. (신촌의 정은책방은 매장을 열 때부터 주인과 인사를 트고 지냈는데, 까맣던 머리칼이 그새 허옇게 변해 있었다. 그만큼 세월이 흐른 것이고, 그래서 지금 더 헌책방 스럽다.) 그런데, 알라딘의 종로 헌책방은 깔끔한 분위기에 잘 정돈된 서가, 헌책 보다 더 많아 보이는 새 책들, 그리고 북적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헌책방이라기보다 출판사의 재고처리용 매장 같았다. 

누군가는 이 곳이 '종로서적'에 대한 향수를 마케팅으로 끌어들였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 진단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교보에 비해 매장 넓이나 구비된 책의 절대적 양에는 못미쳤지만 옛 종로서적은 푸근한 분위기가 있었다. 바로 옆에 있던 양우당 서점도 그랬다. 종로에서 시위를 하다 종로서적 뒷골목으로 도망쳤을 때, 시위대가 건물안으로 들어오자 마자 셔텨를 내려 전경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줬던, 마음씨 좋은 건물 수위 아저씨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다. 종로서적이라는 이름은 그런 향수를 풍긴다. 알라딘 헌책방 손님의 상당수가 나이든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이런 진단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 곳은 다수의 한국·일본·서구소설들. 빈약한 인문사회과학서, DVD와 CD 매장, 깔끔한 실내와 탁트인 쉼터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 서가에 꽂힌 책들은 이빠진 세계문학전집(펭귄판, 문학동네판),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일본 현대 작가의 소설들이 많이 보였다. 열린책들이나 현대문학에서 나온 소설들도 많았다. 인문서나 사회과학서들은 이미 철지난 것들이거나 그다지 내구성이 없어 보이는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요컨대, 매력적인 도서목록을 갖춘 곳은 아닌 셈이다. 더구나 출간된 지 5년 내지 10년 미만의 책들이 많아서 헌책방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 나남출판사판 <겐지이야기>, <아르센 뤼팽 전집> 몇 권,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세 천황이야기> 정도를 샀다. <겐지이야기>는 한길사판과 나남판, 그리고 수 십년 전에 나온 판본 세 가지가 있는데, 각기 1권만 갖고 있던 터라 이참에 2, 3권을 추가로 샀다. 일본의 천황에 대해서는 <근대 일본의 천황제>(이산)와 메이지 유신에 관한 다수의 책을 흥미롭게 본 바 있어 저절로 손이 갔다. 메이지, 다이쇼, 쇼와 세명의 천황을 다루고 있는데, 번역자가 근대일본에 정통한 일본사 전공자여서 신뢰가 갔다. 허명 뿐인 천황이 이 세명의 근대천황을 거치면서 어떻게 ‘발명’되고 ‘무책임의 구조’가 만들었는지는 여전히 일본근대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다.

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서 가와바타의 <잠자는 미녀>를 꺼냈다. 이 사람은 가스배관을 물고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유미적 취향으로는 늙음이 주는 육체의 퇴락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미시마 유키오가 그렇듯이 일본 작가의 자살에는 자신의 미학과 이데올로기, 삶에의 태도가 일치하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다. 물론, 아무리 좋게 보려해도 그럴 수 없지만 말이다. <잠자는 미녀>는 어쩌면 늙음의 추레함을 견딜 수 없었던 가와바타의 내면을 짐작케 해주는 소설인지도 모르겠다. 67세의 노인이 사창가를 찾아 다섯 명의 젊은 아가씨와 차례로 잠을 자는 이야기.

이 소설에서 섹스는 한 장면도 나와 있지 않지만, 에로틱한 분위기가 소설 전반을 지배한다. 그 에로티시즘은 깨어있는 노인과 잠들어 있는 젊은 여자의 선명한 대비에서 온다. 67세의 노인 에구치는 사창가를 방문하는데, 그곳의 규칙은 섹스는 안되고 깨지 않고 내내 잠만 자는 젊은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다. 잠자는 미녀를 깨워서도, 장난을 쳐서도 안된다. 에구치는 그렇게 이곳을 다섯 번 방문해 모두 여섯명의 여자와 잠을 잔다. 그 중 한번은 잠자는 두명의 여자와 함께였다. 에구치의 노인됨은 여자의 싱싱한 몸과 대비되어, 노년의 추레함이 도드라진다. 동시에 이것은 남자의 능동성 대 여자의 절대적 수동성의 대비이기도 하다. 무방비 상태로, 옆에 누가 있는지, 밤새 자신과 같이 잠을 잔 사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채 잠을 자는 미녀(들), 그러고 보니,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여성은 일본식 에로영화의 단골 소재다.

여인들은 에구치에게 어떤 응답과 대응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두 사람 이상의 관계와 그 관계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서사’는 없다. 그래서 이 소설은 에구치의 내면으로 향한다. 그의 옆에는 진홍빛 비로드 커튼 아래서 알몸으로 잠을 자는 여인이 있지만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도, 섹스를 할 수도,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을 나눌 수도 없다. 에구치는 다만 여인을 바라보고 가만가만 만져보고, 몽상에 젖을 뿐이다. 이 몽상은 그가 노인이기에 과거로 향한다. 그가 첫 키스를 했던 여인, 결혼식 뒤 아내와 함께 자신의 집에 도착했을 때 보이던 만발한 꽃들, 출장간 지방에서 만나 잠시 외도를 했던 젊은 여인. 이 소설의 재미는 욕망의 존재와 그 욕망의 실현불가능성을 아슬아슬하게, 그리고 서글프게 보여주는 데 있다. 가와바타이 상상력은 물론 남성 판타지에 입각해 있다. 동시에 지배적인 남성 대 무기력한 여성이라는 비대칭적 성-권력의 발현이기도 하다. 가와바타의 ‘미학적 상상’은 이런 정치적 독해를 빨아들일 만큼 독하다.

이 소설과 함께 실린 <한 팔>도 판타지이긴 마찬가지인데, 이 역시 욕망의 극단적 형태로서 ‘육체성의 소유’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자신의 한 팔을 떼어준다. 살아있는 여인의 한 팔을 품에 안고 집에 돌아온 남자는 여인의 팔과 대화를 하고, 자신의 팔을 떼어 그 자리에 여인의 팔을 붙이기도 한다. 여인의 모든 것은 오로지 한 팔에 집약되어 그녀의 모든 것을 대신한다. 욕망이 어떤 극한에 이르면 대상의 모든 특성이 집약된 어떤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이를 것이다. (프로이드의 전치(displacement)?)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할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한 부분에 집약시켜 그것을 욕망의 대상에게 헌정하는 것. 결혼식 반지는 이것의 상징적 의례 도구이리라. <설국>의 작가다운 지극히 탐미적인 소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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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11-17 0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래전에 나카무라 신이치로라는 작가의 <아름다운 여신과의 유희>(유숙자 옮김, 현대문학)라는 소설을 읽은게 연상되네요.. 정명환 선생이 그 소설에 대해 아주 진지한 비평을 쓰신걸 봤는데, 잘 공감은 안됐지만 노년까지도 성문제란 중요한 문학적 테마구나 싶었습니다.
 
이름 없는 주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5
토마스 하디 지음, 정종화 옮김 / 민음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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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출신 여배우 케이트 윈슬렛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중 하나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떤 ‘운명적 비극성’이라할 만한 것이 묻어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출연했던 많은 영화들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부과된 비극을 운명적으로 수락하는 인물을 연기한다. 중산층 가족의 허위와 폭력성(레볼루셔너리 로드), 10대 소년과 사랑에 빠진 하층 여성(더 리더), 정치선동가의 애인(올 더 킹스맨), 안락한 상류층의 삶을 거부하고 제 몫의 사랑에 투신한 여성(타이타닉) 등 영화속의 그녀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설사 그것이 자신의 삶을 더 큰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하더라도 담담하게 수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여배우들처럼 쭉쭉빵빵 몸매를 만들지 않고 통통한 제 몸 그대로 살겠다는, 여배우로서는 보기드문 결기도 그녀답다. 그녀의 필모그래피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이런 캐릭터를 처음으로 선명하게 각인시켜 주었던 <비운의 주드>다.

토마스 하디의 <이름없는 주드>(민음사)를 읽은 것도 그 때문이다. 수년 전 이 영화를 보고 그 서늘한 감동을 잊지 못해 하디의 원작 소설을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디는 <테스>와 몇편의 시 정도를 제외하고는 잘 몰랐는데, 그 뒤로 <캐스터브리지의 읍장>(한마당)과 같은 하디 소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비운의 주드>의 원제는 <Jude the obscure>다. 번역 판본에 따라서 <비천한 사람 주드>, <이름없는 주드>, <무명의 주드> 등 제목도 제각각이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1980년대 나온 두 개의 판본과 비교적 최근에 나온 민음사판 <이름 없는 주드>이다. ‘이름 없는’ 이라는 형용사가 영어 원제에는 부합할 지 모르나, 원작의 스토리와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는 ‘비운의’라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끊임없이 비가 내리는 지난 여름, 이 서늘한 사랑이야기를 읽으며 겨우겨우 습기 많은 여름밤을 견뎌냈다. 
 

주드 폴리와 수 브라이드헤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자 사촌간인 이 두 사람의 삶을 읽다보면, 삶이란 참으로 어렵고 쓸쓸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하는 데는 온갖 장애물들이 등장하게 마련이고, 때론 예기치 않은 우연들이 틈입하기도 한다. 서로에 대한 절절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성취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설사 성취된다하더라도 그게 곧 행복이 아닐 수도 있다. 남녀 간의 사랑을 소재로 한 소설은 숱하게 많겠으나 이 소설만큼 운명적이고도 비극적인 사랑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운명적’이라는 말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 극복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할 터인데, 애정 소설에 대한 형용사로는 아주 진부한 클리쉐다. 그럼에도 주드와 수의 경우에는 이 말 외에는 달리 쓸 말이 없을 것 같다. 두 사람의 비극적 운명은 이들이 가진 사랑에의 의지가 초래한 것일 수도, 두 사람의 집안에 내려오는 “폴리 집안 사람들은 결혼하게 되면 불행해진다”는 내력에서 온 것 일수도, 당대 영국 사회가 가진 인습과 편견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겠다. 두 사람이라면 심리학이, 집안 내력이라면 숙명론이, 인습이라면 사회학이 필요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근대인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삶의 아이러니’라고 보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선의가 배반을 당하고, 사랑이 참담하게 실패하며, 욕망이 좌절되는 삶의 아이러니는 착하고 선한 근대인이 겪어야할 불가피한 운명일 것이다.

주드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학문’을 하겠다는 야심을 키웠다. 그가 들어가고자 하는 세계는 ‘크라이스트민스터’라는 중세적 대학전통을 잇고 있는 학문의 성지. 이 소설 속의 크라이스트민스터는 가상의 대학공간으로, 하디는 옥스퍼드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주드는 돌을 쪼개고 다듬는 가난한 석공이지만, 밤이면 집으로 돌아와 홀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익히며 대학에 대한 꿈을 꾼다. 언덕 위에 올라 저 멀리 보이는 대학도시 크라이스트민스터를 동경하는 어린 소년의 꿈은, 그러나, 한 동네의 처녀 아라벨라를 만나 풋사랑에 빠지면서 결국 좌절된다. 돼지를 죽여 순대를 만드는 거친 일을 척척 해내는 억척스럽되, 지적 생활과는 거리가 먼 이 여자와의 삶을 위해 그는 계속 돌을 쪼개고 다듬어야 했다. 그의 첫 번째 좌절.

아라벨라와의 불행한 결혼은 그녀가 부모와 함께 호주로 떠나면서 종지부를 찍게 된다. 자신의 유보된 꿈을 실현하게 위해 찾아간 크라이스트민스터에서 그는 사촌간인 수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주드와 수는 가까운 친척이라는 것 외에도 “한 사람이 둘로 쪼개진 것 같은” 존재이자 “속박되지 않으면 얼마든지 잘하는 일을 속박되면 마음이 내키지 않는 습성이 우리 핏줄기에 들어있는” 연인들이다. 둘로 쪼개진 한 몸은, 아마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비유를 끌어들인 것이리라. 본래 한 몸이었던 남자-여자를 제우스가 남자/여자로 쪼갰다는 신화. 그런 플라톤에게서 사랑은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행위다. 그래서 수가 주드의 옛 스승이자 나이차가 많은 필롯슨과 성급하게 결혼을 했어도 두 사람이 서로의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며 두 사람의 온전한 결합을 꿈꾸는 것도 그렇게 이해된다. 주드는 수의 곁을 떠나 사도가 되려 하나 첫 결혼으로 좌절된 학문에의 욕망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수 때문에 좌절되고 만다. 주드는 그의 야심과 성실함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사랑, 제도의 굴레 속에서 좌절당하는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가장 섬뜩한 부분은 주드의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가 두 사람의 아이를 죽이고 자신마저 자살하는 장면이다. 비극의 신인 멜포메네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이 아이가 남긴 유서는 “우리들이 너무 많아서 이렇게 떠납니다”라는 것. 크라이스트민스터의 집주인들이 아이들이 셋이나 되는 이 가족에게 세를 들이지 않으려 하자 이 아이는 임신한 수를 향해 “세상 안에 있는 것보다는 밖에 있는 편이 낫죠?”라며 “어머니는 어째서 이토록 심술궂고 잔인할 수가 있어요! 우리 모두를 좀 더 큰 고통으로 끌고 가는 거예요! 우리 모두가 함께 있을 방이 없어서 아버지가 다른 곳으로 가야하고 우리는 내일 쫓겨 나가야 하는데도 식구 하나를 곧 또 데려오다니!”라고 격렬하게 말한다. 이 대목은 어린아이의 투정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이것은 주드와 수의 사랑의 실존이 필연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어떤 운명적 장벽처럼 느껴진다.

주드와 수의 사랑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둘의 삶은 더 비극적이 되고, 사랑의 결실인 아이들로 인해 더 큰 비극성이 잉태된다. 수는 주드에게 “날 사랑해선 안돼요. 나를 좋아하기만 하세요. 그 이상은 안돼요”라는 말하지만 두 사람의 애정은 그 한계를 용납하지 않는다. 둘은 가정을 꾸리고 살지만 그것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결혼에는 이르지 못한다. 사랑의 감정적 완성과 사회적 공인, 내지는 제도 속의 편입은 두 사람에게 불가능하다. 그것은 “난 오빠의 사랑을 받는 허가가 주어진 순간부터 오빠를 두려워하기 시작할 거예요”라는 수의 진술처럼, 제도 안으로 진입하는 순간 깨어지는 것이다. “서둘러 결혼하고 천천히 후회하라”라는 당대 영국 사회의 권고사항과 상반되게 둘은 결혼에 실패하고 자신들의 사랑이 낳은 비극(아이들의 죽음) 앞에서 결국 결별하게 된다. “안녕하 가세요, 나의 동료 죄인이며, 가장 친절한 친구인 오빠”, “잘 가시오 나의 잘못 생각하는 아내여.” 이어 주드는 다시 돌아온 첫 부인 아라벨라로부터 버림받은 채 죽는다.

죽어가는 주드가 외치는 성경의 구절들은 자기부정의 묵시록으로 기억될 만하다. “내가 태어난 날을 멸하게 하라. 남자 아이를 잉태하였다하던 밤도 멸하게 하라.”“그날이 어둠이 되게 하라. 하느님이 위에서 돌보지 말게 하라. 빛이 그날을 비추지 말게 하라. 그 밤이 적막하게 하라. 거기서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게 하라.” “어찌하여 나는 태에서 죽지 아니하였는가? 어찌하여 어미에서 나오면서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그럼 이제는 조용히 누워 쉬고 있을 것이니, 잠들었을 것이니, 그러면 쉬고 있었을 것이니! 어찌하여 비참한 자에게 빛을 주시고 번뇌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는가.” (욥기) 토마스 하디의 서술은 주인공들의 비극에 대해 그 어떤 감정이입도 드러내지 않을 만큼 차갑고 냉정하다. 하드보일드 문체란 이런 것이 아닐 것인가. 가난한 석공 주드의 주검 옆에는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 그리고 그리어 신약성서와 돌가루가 묻은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가난하고 사랑에 눈먼 석공은 사회적 출세도, 사랑의 욕망도 이루지 못한 채 떠들썩한 축제의 날에 홀로 외롭게 죽어간다. 크라이스트민스터에 돌아온 주드가 이 대학도시의 시민들에게 외치는 다음의 말처럼, 우리의 삶에서 좋은 것은 무엇이고,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패배한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고 나의 가난이었습니다. 내가 한세대 안에 이루려고 했던 것은 대개 두 세대 내지 세 세대가 걸리게 마련입니다. 나의 충동은-애정은- 결점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사회적 이점이 없는 사내에게 방해물이 되지 않기에는 너무나 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좋은 기회를 잡으려면 물고기처럼 냉혈한 인간이 되고, 돼지처럼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비웃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것을 감수할 용의가 있습니다. 나는 그런 대상으로는 딱 맞는 인물이겠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겪은 심적 고통을 안다면 나를 오히려 동정할 것입니다. (중략) 내가 여러분에게 병들고 가난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 나에게서 가장 흉한 면은 아닙니다. 나는 원칙의 혼돈 속에 빠졌습니다. 어둠 속에서 암중모색을 하고 있습니다. 선례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팔구년 전 내가 처음으로 이곳에 왔을 때 나에게는 확고한 의견이 쏠쏠하게 비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견들은 하나씩 하나씩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나에게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의 내 생활법규에서는 나 말고는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오히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실상 기쁨을 안겨주는 내 기호를 따르는 것 이외에 달리 할 것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중략) 내 생각에는 우리의 사회적 구도가 어딘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보다 더 큰 통찰력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서 발견되겠지요. 혹시 정말로 그들이 그것을 찾아낸다면, 적어도 우리 시대에서 말입니다. ‘일평생 사람에게 무엇이 좋을 것인지 누가 알며, 또 몸 뒤의 태양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전도서, 6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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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가스 요사의 <나쁜 소녀의 짖궂음>은 유쾌하다. 남미 작가들의 글은 비극이면서 희극이고, 신화적이면서 현세적이다. 신화적이라는 것은 합리성을 훌쩍 넘어서는 비의적인 것이 두드러진다는 것이고, 현세적이라는 것은 욕망의 질서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매혹의 대상이었던 여인을 평생 사랑했던 한 남자와 그 남자를 둘러싼 여인의 행장기. 여자는 기다리는 존재이고, 남자는 방랑자라는 롤랑 바르트의 고전적 정의를 뒤집어 여자는 끊임없이 방랑하면서 남자 주변을 맴돌고 남자는 평생 그 여자를 흠모하며 떠나지 못한다. 요사는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되, 지리멸렬으로 사랑했던 소설가임이 분명하다. 하기야, 남미 소설가 놈들치고 그렇지 않은 놈들이 어디 있으랴. 창녀촌 다락방에 틀어박혀 소설을 썼던 마르께스부터가 그런 놈이었으니. 때로 우주는 사랑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돈다. 그 세계 밖은 없다.

아사다 지로의 <저녁놀 천사>는 그의 다른 단편들과 유사한 에피소드들로 묶인 소설집이다. 그의 소설은 사람 사는 꼬락서니는 일본이나 한국이나 죄다 비스무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프면 아프고, 즐거우면 즐겁고, 눈물나면 눈물나고, 사랑하면 사랑스럽다. 우울한 날이면 나는 만화책을 보듯이 아사다 지로의 소설을 읽는다. 한때의 박완서가 나에게 그러했고, 한때는 스탕달이 그러했다. 그래서 가끔은 한국 출판사들이 아사다 지로 소설을 앞다투어 번역출간해 내는 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아사다 지로 때문에 나는 일본어를 배울 생각을 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나는 만화책 수준의 아사다 지로에 그냥 만족하련다.

민음사의 만화책 브랜드 자회사인 세미콜론 출판사의 책을 가끔 산다. 이 동네는 주로 유럽에서 나온 만화책들을 펴내는데, 가끔 마음에 꽂히는 책들이 있다. <마담 보베리>도 대구와 서울을 오가는 KTX에서의 한때를 즐겁게 해준 만화-소설책.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은 줄리안 반즈의 <플로베르의 앵무새>부터 여럿 패러디 소설이 존재했는데, 만화버전은 이게 처음이 아닐까 한다. 물론, 보봐리 부인이 아니라 보베리 부인이고, 스토리도 다르다. 고전의 무게와 감동은 덜하나 비교적 장거리 여행의 경우 가방에 넣어갈 만한 책이다. 보봐리 부인의 욕망과 성격이 입체적인데 비해 보베리의 그것은 얕고 천박하다.

박정대의 <삶이라는 직업>, 심보선의 <눈 앞에 없는 사람>, 박형준의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최승자의 <물위에 씌어진>, 김민정의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이게 최근 한달 동안 사고 읽은 시집들이다. 다 읽은 것도 있고, 아직 다 못 읽은 것도 있다. 시집은 그것을 읽을 마음의 준비와 배경, 언어에 대한 매혹이 준비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냥 읽을 수도 있으나, 그럴 경우 아무런 할 말이 없다. 아직 이 시집들에 대해 나는 할 말이 없다. 눈과 머리로는 읽어 내려가고 의미를 궁구하지만, 말해야할 무엇은 아직 없다. 다만 한 가지, 이쯤되니 모든 시집들이 제 몫의 경험을 뒤섞고 버무리는, 제 경험의 넓이와 깊이만큼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다. 일상의 모든 것이 오로지 한 점으로만 회귀하는 것, 텍스트를 텍스트로 놔두자는 것은 비평가의 몫이고, 나는 그렇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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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5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5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