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고준
고종석 지음 / 새움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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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가 쉽지 않다. 더위 탓인가. 최근에 읽은 두 권의 책은 고종석의 신간 <독고준>(새움)과 이사벨 아옌데의 <에바 루나>(한길사). 아옌데의 소설은 10년도 전에 읽은 것이지만, 부실한 기억 탓에 다시 읽어도 새롭다. 이 책을 구해준 어떤 ‘외로운 사내’에게 남은 복이 있을 진저. 고종석의 책은 영풍에서 ‘신간 사재기’를 하다 덤으로 샀다.  


<독고준>은 소설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소설이 일정한 서사를 가진 양식이라고 정의했을 때 말이다. 이렇다할 줄거리 없이 최인훈 소설 속 주인공의 나머지 생을 고종석 식으로 연장, 재현한 것이다. 주인공 독고준은 고종석 자신의 자기투영으로 보인다. ‘회색인’이라는 이념적 위치도 그러하거니와 이 책에서 숱하게 보이는 ‘교양체험’의 빛깔과 내용도 영락없는 고종석이다. 그러니 이 책은 고종석의 뛰어난 소설(<엘리야의 제야>같은)보다는 저널에 연재했던 글모음들, 가령 <코드훔치기>나 <여자들>과 같은 책들과 가족유사성이 있다. 내러티브의 전개가 주는 흥미가 아니라 고종석의 교양을 따라가면서, 단속적인 일기에서 펼쳐지는 사건과 인물, 책에 대한 그의 사유를 엿보는 게 재미다.

고종석의 위치는 굳이 구분하자면 중도좌파 쯤 될 것 같다. 서구적 기준으로는 자유주의자일 것이나 한국적 기준에서는 좌파적 사유에 대한 공감과 자유주의적 가치에 대한 전폭적 지지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좌파에 대한 애정과 경사가 두드러지고, 공산주의를 비롯한 집단적 이념에 대해서는 대단히 냉소적이다. 그러면서도 김현과 복거일에 대한 애정이 표나게 도드라지고 서구, 그것도 유럽 지식인의 동향과 사유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소수자에 대한 편애와 집단적 가치에 대한 냉소. 노무현과 김대중에 대한 한편의 호감과 싸늘한 평가는 이 책에서도 산견된다. 곳곳에 산재된 그의 시 해석과 감상은 화사한 수사를 동원하지 않고서도 충분한 공감을 얻고 있다. 시에 대한 그의 해석과 비평은 넘치고 부족함이 없어 질투가 날 정도다.

고종석은 최인훈의 소설 속 인물 독고준을 빌어, 그리고 독고준의 딸인 문학평론가 독고원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교양과 사유를 말하고 있다. 자기의, 자기에 대한 말하기(독고준의 일기). 그리고 그 자기에 대한 또 다른 자기의 말하기(아버지 독고준의 일기에 대한 독고원의 주석). 이 의도된 자기분열적 글쓰기는 두 겹의 자기성찰을 꾀한 것이겠지만, 고종석 식의 ‘구라’를 풀기 위한 방법적 장치이리라. 교양체험의 직접적 노출이 주는 적나라함을 감추기 위한 형식적 장치 같은 것. 그렇다고, 이 책이 나쁜 소설이거나 읽을만한 게 못되는 건 아니다. 60년대 이후 한국의 지식세계에 대한 조망을 획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하다.

하지만 나로서는 공감이 안가는 대목도 많다. 복거일에 대한 그의 존경(?)을 이해할 수가 없다. 복씨는 자유주의적 신념이 지나쳐 거의 맹목적 수준일 경우가 많다. 김현 보다 뛰어나지만 저평가된 김인환에 대한 높은 평가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마 김인환이 특정 에콜에 속해 있지 않은데다 서울대가 지배하는 평론계에 드문 ‘고대’ 출신이어서 그럴 것이다. 독고준의 딸은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으로 유종호 선생의 제자로 그려지는데, 그것도 좀 뜨악한 설정이다. 고종석은 문학평론가로서의 유종호 선생을 주목한 듯한데, 유선생의 최근 칼럼은 거의 조갑제와 동일한 수준이다. 문학에 대한 뛰어난 감식안이 다른 사안에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유선생의 글은 보여준다. 하기야 고종석은 조중동을 보지 않는다니 동아에 가끔 실리는 유선생 칼럼의 극보수성을 감지하지 못했을 수도.

고종석이 잡식성 독서를 통해 보여주는 통찰은 그 의외성으로 하여 반짝거린다. 민주화는 자유주의자가 좌파에 빚진 것이 아니라, 좌파가 자유주의자들에게 빚진 것이라는 인식 같은 것 말이다. 실제로 그렇다. 한국의 좌파는 민주화에 일정하게 기여한 바가 있으나 그것은 기껏해야 모험주의적 극단이거나 지적 마스터베이션을 실천한데 지나지 않았다. 민주화의 실질적 동력은 자유주의자들에게서 나온 게 맞다. 전대협이나 사노맹은 민주적 가치를 체현한 집단이기는커녕 자기도취적 행각을 되풀이한 19세기적 집단이었다. 이쯤 되면 고종석의 정치적 위상은 민주당 좌파거나 진보신당 우파 정도 될 것 같다.

덮고 나니 문예중앙에 실린 한민선(실존하는 시인인지, 허구의 인물인지 모르겠다)의 시를 평하면서 끄집어낸 ‘감정의 서민’이라는 말이 줄곧 머리에 맴돈다. 부자가 아닌 서민이니 참으로 가난하고 궁핍한 서정을 가진 사람이란 얘긴데, 끊임없는 감정의 ‘복지혜택’을 받아야 겨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 것인가. 감정을 국가가 채워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친서민 정책이 난무하는 이 세월에도 나같은 감정의 서민은 계속 서민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아옌데의 <에바 루나>. 마음이 가난한 한 때 아옌데의 풍성한 수다를 읽으며 허기를 달랬었는데, 올 여름에는 그조차도 쉽지 않다. <영혼의 집>, <운명의 딸>, <세피아빛 초상>, <조로>, <파울라>로 이어지는 일련의 아옌데 소설은 언제나 매혹적이었다. 역사와 신화, 여성과 주술, 인종주의적 다양성이 뒤섞이면서 만들어내는 이 남미식 ‘벽화’는 쫀쫀하고 왜소한 요즘 한국소설들과 차원을 달리한다. 아옌데는 다시 읽은 이 소설에서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녀의 소설이 가진 매혹의 비밀은 무엇일까. 제임슨이 말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이 만들어내는 설화적 서사의 매력도 있을 것이고, 인물들의 개성이 펄펄 살아 있는 풍성한 상상도 한 몫 할 것이다. 
 

아옌데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그렇지만 이 소설에도 분방하기 그지없는 섹스와 불온한 열정들이 등장한다. 근친 혹은 근친에 가까운 섹스, 모든 것을 파국으로 몰고가는 사랑과 축축한 욕망.(왜 아옌데 소설에서 섬세하고 애정어린 섹스의 제공자는 항상 아시아나 아랍과 같은 백인 사회의 소수자일까.) 마르케스의 소설 속에 나오는 '부엔디아' 가문도 그렇지만, 남미소설들에서 보여지는 금기를 슬쩍슬쩍 넘어서고 광기와 정상을 오가는 위반의 열정들이 흥미롭다. 대통령 선거에까지 출마했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궁둥이> 같은 소설들. 여성의 엉덩이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은 변태적 욕망으로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욕망이자 생의 환희다.

 

확실히 내 취향은 역사적 변동기를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 취향이다. 판타지와 같은 장르소설의 반리얼리즘은 확실히 아니다. 현실과 역사가 부재한 완미한 단편도 그리 탐탁치 않다. 어느 모로 보나 내 독서관습은 아주 보수적인 셈이다. 누군가는 그런 구식 취향을 욕하기도 했지만, 어쩌겠는가. 지금까지 쌓아온 훈련과 관습이 그러한 것을, 좋아하는 소설만을 읽어도 모자랄 정도로 세상엔 읽을 책도 많은 것을, 그냥 이런 소설들이나 읽으면서 늙어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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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10-08-30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고준을 2/3쯤 읽었는데 모든사이님 리뷰 너무 잘쓰시네요^^ 아직 읽지 않은 대목인 듯하지만 '감정의 서민' 운운했다면 황인숙시인의 시입니다

모든사이 2010-08-31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감사함다. 황인숙 시집을 읽고도 기억을 못해냈네요. 고종석의 트릭에 속은 듯..ㅎ
 
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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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문고에 갔다가 황석영의 신간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엉겹결에 샀다. 서가배치에 상대적으로 민감한 나는 작가명이나 가나다순 배치를 싫어하는 편이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 것은 출판사별 배치인데, 그것도 장르별로 따로 구분해 놓은 게 아니라 한 출판사의 인문, 사회, 문학 등 출판 분야 전체를 아우르는 방식의 배치다. 10여년 저쪽의 교보나 종로서적은 아마 그런 식의 배치를 했던 듯 하다. 그래야 해당 출판사의 ‘색깔’을 알 수 있고, 편집자의 개성도 느낄 수 있다. 어쨌거나 황석영의 <강남몽>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표지를 드러낸 채 누워 널찍한 매대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눈에 띠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설은 황석영 말마따나 ‘강남형성사’다. 그런데, 황석영이 강남형성의 주역으로 꼽은 것은 룸살롱 호스티스와 국정원 직원, 건설업자, 부동산 투기꾼, 그리고 조폭이다. 그것이 외적으로 드러난 양상은 강남 나이트클럽과 백화점, 떳다방 등이다. 한마디로 강남은 환락과 투기와 조폭의 세계다. 권력이 은밀하게 개발을 추진하고, 투기꾼들이 가세해 부풀리고, 조폭이 지켜주는 공간이다. 황석영은 꼭두각시 놀음과 같은 소설을 구상했다고 하는데, 과연, 이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각기 제 몫을 해내며 오늘날의 강남의 전사를 충실하게 재연해낸다.

먼저 전직 북창동 호스티스인 박순녀. 그녀는 아리따운 몸매 덕에 북창동 룸살롱에 진출하고, 여차저차 인연을 이어가 강남에 대형 나이트를 세운다. 서울의 유흥가가 종삼과 북창동 시대에서 강남 룸살롱으로 중심이동 하던 흐름을 그녀의 동선은 정확히 재연한다. 아니, 그 흐름을 타고 떼돈을 번 유흥세력의 면모를 연기하는 꼭두각시다. 오늘날의 북창동은 4대문 안의 대표적 유흥가라는 과거의 전력을 잃어버리고 다소 퇴락했지만, ‘북창동식’이라는 보통명사화된 룸살롱 스타일이 보여주듯이 그 위용은 여전하다. 물론, 강남의 ‘텐프로급’ 이상에 비하면 수질이 한참 모자라지만 말이다.

친일파 밀정이었다가 미군정의 하급관리로, 6.25를 거치면서 정보부 요원으로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했던’ 김진. 그는 강남의 역사적 뿌리를 상징한다. 지금의 강남 아파트들 상당수가 한강 모래사장을 메워 만들었듯이, 그는 봉건 귀족 문화도, 근대 부르주아 문화도 취약한 한국사회에 갑자기 등장한 강남부유층의 뿌리를 드러낸다. 친일과 독재의 그늘에서 쌓아올린 부와 그것의 허망한 추락. 장강의 앞물결이 뒷물결에 밀려 나듯이 전쟁과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벼락부자가 된 전후 1세대 부유층은 뒤이은 IT와 금융 부자들에게 밀려나기 시작했다.

말죽거리 신화의 실제 주인공들인 부동산 투기꾼 심남수와 박기섭. 부동산 불패신화를 만들고 부추겨온 이들은 최근 몇 년까지도 시중의 부동자금을 쥐락펴락하던 떳다방의 원조인 셈이다. 지난 정부는 ‘투기시대의 종말’을 호기롭게 떠들었으나 결국 이긴 것은 이들이었다. 강남개발의 역사가 70년대부터이니 가히 40여년 이상을 승승장구해온 이들의 ‘체험적 진리’앞에서는 어떠한 부동산 정책도 요지부동이었던 것. 그러나 어쩌랴. 이제는 부동산 불패신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같으니, 남은 것은 손낙구의 지적대로 ‘부동산 계급사회’다.

호남 조폭 홍양태. 부산 조폭 칠성파가 상경하지 않은 까닭은 그곳이 일찍부터 일본과의 밀수 등 ‘먹을 것’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곤했던 호남 조폭은 먹고 살거리를 찾아 대거 서울로 상경해 자유당 시절 이정재와 임화수가 지배했던 서울 뒷골목을 차지했다. 전통적 건달의 시대와 신흥 조폭의 시대를 가르는 분기점이 바로 홍양태와 같은 호남 조폭의 서울 상경이 이뤄지던 1970년대. 이들 역시 명동과 종로, 북창동 일대에서 강남으로 진출하면서 강남 형성사의 한축을 담당한다.

그리고 도시빈민의 딸인 임정아. 무너진 삼풍백화점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최후의 생존자. 그녀의 부모는 70년대 산업화의 ‘주역’이었던 공돌이/공순이였으며, 지금의 성남시에서 벌어졌던 ‘광주대단지 사건’의 주인공들. 황석영은 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하게 ‘긍정적 인물’로 묘사되는 임정아를 통해 기형적으로 개발된 도시의 새로운 주역이자 미래를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사모님이 다 해줄 수 있단 말은 하지 마세요”라는 당당한 자기인식을 드러내는 그녀는, 저항보다는 굴종을 선택했던 부모세대인,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와는 다르다.

이들이 이런 저런 인연으로 얽혀 만들어내는 ‘꼭두각시 놀음’은 흥미롭다. 1995년 삼풍백화점의 붕괴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강남의 고현학(考現學)이 아니라, 고고학(考古學)이다. 이 책이 내게 흥미로웠던 것은 소설적 내러티브거나 주인공들의 각축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이 주인공들과 사건들의 실제 인물과 배경을 추리해내는 재미다.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황석영은 이 소설의 인물과 배경을 대체로 실제 인물과 사건에서 따왔다.

무너진 백화점의 회장 김진의 모델은 몇 년전 유명을 달리한 삼풍백화점의 실제 회장 이*다. 군 보안사 준위 출신의 그의 배경부터가 소설속 인물과 닮았다. 투기꾼이자 건설업자인 박기섭은 은마 아파트 건설과 분양 성공으로 느닷없이 중견건설사로 부상했던 한*건설의 정** 회장이 모델이다. 실제의 정회장 역시 세무공무원 출신으로 강남 개발과 더불어 재력을 쌓았고, 그 재력으로 정치자금으로 권력에 손을 대고, 철강회사를 차리려다 부도를 맞고 말았다. 호남 조폭 홍양태와 그의 라이벌  강은촌 , 그리고 두 조폭간의 갈등 속에서 신흥 강자로 부상하는 인물도 서방파의 김태촌, 양은이파의 조양은, OB파의 이동재 등 실제 보스들이다.

소설 속에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는 명동 사보이 호텔 사건(1971)은 바로 전통적 건달의 잔재였던 신상사파의 몰락과 이들 삼대 패밀리의 등장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양은이파의 보스가 행동대장으로 나선 이 사건은 명동 신상사파가 급속하게 몰락하고, 호남 조폭 패권시대를 개막시켰다. 주먹이 사라지고 회칼이 등장하며, 업소보호에서 직접 사업으로, 구역다툼에서 전국구로라는 조폭 세계의 변화는 이들 삼대 패밀리가 만들어낸 새로운 문화다.  한국 조폭의 계보와 역사에 대해 얼마쯤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 속의 내러티브는 픽션 아닌 르뽀 수준에 가깝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이 소설이 실망스럽다면 바로 이런 측면에서였을 것이다. 강남의 형성이 투기와 유흥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거기에는 70년대의 중정과 박정희 정부가 깊숙하게 개입되었다는 사실은 도시사학자 손정목의 다섯권 짜리 <서울도시계획 이야기>(한울)가 더 흥미진진하다. 실제 서울시 도시계획 담당 간부였던 저자가 쓴 이 빼어난 실록은 서울이 왜 파행적으로 건설될 수밖에 없었는지, 왜 600년 수도였던 서울이 파리도 뉴욕도 베를린도 될 수 없었는지를 ‘한국적 맥락’에서 보여준다. 전근대의 역사와 문화를 한순간에 휩쓸어 버린 전쟁과 전후의 난개발, 그리고 투기와 권력의 공생이 만들어낸 괴물이 바로 서울, 그것도 강남이다.  

 

황석영의 이 소설은 거기에 조폭문화와 도시빈민의 삶을 슬쩍 끼워 넣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뒷골목의 언어를 맛깔스럽게 풀어내는 문장들은 왕년의 황석영답다. 특히 호남 조폭 세계의 상스럽고 되바라진 언어들을 복원해내는 솜씨는 거장답다. 친일 밀정이던 김진의 만주시절을 다루는 솜씨도 그렇다. 하지만, 친일독재와 강남형성의 상관관계를 다루는 대목에서는 지나친 역사교양으로 나아갔고, 조폭이야기 또한 너무 일화적 구성에 치우쳐 있다. 이야기의 얼개는 앞서 말했듯이 이미 알려진 실제 사건들이고. 거장이면 좀더 나아갔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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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죄수 - 자오쯔양 중국공산당 총서기 최후의 비밀 회고록
자오쯔양.바오푸 지음, 장윤미.이종화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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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4일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중국의 인민해방군에 의해 학생과 노동자가 총과 대포로 학살당했다. 정확하게 몇 명이 죽었는지도 모르는 이 ‘천안문 사건’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 초년생 시절에 봤던 교지에서였다. 천안문 사건 당시의 대자보와 구호, 사진과 외신보도를 그대로 전재한 대학 교지의  특집은 1980년 광주의 학살을 연상시켰다. 거친 질감의 흑백사진들은 ‘사회주의 중국’의 정치적 억압성과 폭력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인민의 정부, 인민의 당을 표방하고 있는 ‘공산당’이, ‘인민의 군대’가 인민을 상대로 저런 폭력과 살인을 행한다는 역설. 그것은 그해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나온 구호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로 재연될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천안문 사건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당시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던 쟈오쯔양(趙紫陽, 1919-2005)의 실각소식도 그저 그런가 보다 했을 뿐이었다. 천안문 사건도 스탈린의 학살이나 북한의 연안파․소련파 숙청처럼 ‘사회주의 국가’에서 흔히 벌어졌던 여느 사건과 별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천안문 사건 특집을 실은 대학교지 편집자의 의도 역시 사건 자체보다는 ‘사회주의 중국’에서조차 독재에 저항하여 민주화를 부르짖는 마당에 우리도 마땅히 거리에 나서야 할 것 아닌가 하는 것이었을 터이다. 당시는 우리 사회는 여전히 군부 잔당들이 지배하는 곳이었으므로, 대학 교지의 ‘천안문’은 당시에 한국사회에 대한 오마쥬였던 것이다.

쟈오쯔양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천안문 사건 전후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동란을 지지하고 당을 분열시켰다”는 ‘죄목’으로 16년간의 가택연금을 당한 끝에 2005년 사망했다. <국가의 죄수>는 천안문 사건에 대한 자오의 회고이면서 중국 정치엘리트 내부의 정치적 개혁파와 보수파 간의 갈등과 쟁투를 보여주는 실록이다. 자오는 자신에게 뒤집어 씌워진 “동란 지지와 당 분열”이라는 죄목의 부당성에 대해 격정적인 어조로 토로하고 있다. 자오는 천안문 사건이 ‘반사회주의, 반혁명 분자들에 의한 동란’이라는 중국 공산당의 공식적인 입장과 달리, “시대는 변하고 있고, 민주와 법제의 흐름에 따라 반드시 이와같은 사고방식(계급투쟁을 강령으로 하는 오랜 이데올로기)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으며 학생시위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자오의 다음과 같은 옹호는 공산당 간부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시각이다 : “우리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실행한 민주제도는 완전히 형식에 치우쳐 있고, 인민이 주인되지 못하며 소수, 심지어 개인이 통치하는 것이다. ... 오히려 서구의 의회민주제가 그 생명력을 보여준다. 이 제도가 지금 찾을 수 있는 비교적 좋은, 더욱 충분한 민주를 구현할 수 있고 현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또한 비교적 성숙한 제도인 것 같다. 지금은 아직 이것보다 더 좋은 제도를 찾을 수가 없다.”

공산당 일당 지배의 중국사회에서 ‘의회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신념’으로 가진 자가 ‘공산당 지도자’이니 그의 축출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서구의 의회민주주의에 대해 중국은 ‘전인대’(전국인민대표자회의)라는 또다른 ‘대의기구’를 가지고 있으며, ‘인민’의 당인 공산당이 지배하는 곳이니 ‘의회제도’는 ‘부르주아의 정치위원회’ 쯤으로 격하돼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이같은 시각은 천안문 사건의 직접적인 촉발 계기가 됐던 인물 후야오방(湖耀邦, 1915-1989)과 더불어 자오와 중국 최상층부 엘리트 내부의 정치개혁파들이 공유하는 입장이었다.

후야오방이 자오보다는 훨씬 더 능동적이고 개혁적인 면모를 보여준다면, 자오는 이 책에서 잘 드러나듯이 정치개혁에 대한 신념은 있되 우유부단하고 ‘정치적 처세’에 능숙하지 못한 인상이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4.19 직후의 장면과 비슷한 꼴이랄까. 그는 학생 시위대의 요구를 긍정적으로 수용할 것을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줄기차게 주장하지만, 자신의 주장이 덩사오핑의 ‘심기’를 거스를까봐 노심초사 한다. ‘후견정치’가 지배하는 중국에서 최고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는 늙은 자오의 모습은 안쓰럽다 : “나는 단지 그가 오랫동안 신임해왔고, 전폭적인 지지를 보여주었던 내가 비록 학생시위에 관한 그의 결정에는 따르지 않았으나 결코 절박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사람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다.”

거칠게 말해, 중국 지배엘리트들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에 대한 지지와 반대를 중심으로 경제적으로 개혁파와 보수파(마오주의 노선)과 구분되고, 공산당의 개혁과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둘러싸고 다시 개혁파와 보수파가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마오의 사망과 4인방의 숙청 이후 개막된 ‘덩의 시대’는 중국경제의 눈부신 성장을 가져왔고, 이와 동시에 부상한 반부패, 정치적 민주화의 요구는 덩사오핑의 4대 기본원칙(마르크스레닌 마오주의 노선, 공산당 영도, 사회주의 원칙, 인민독재) 하에서 억압되었다. 요컨대, 정치적 민주화 자유화의 사회적 요구는 개혁개방을 통한 경제성장이라는 ‘과실’과 맞교환 된 것이다. 경제를 줄 테니, 정치개혁에 대해 입다물어라. 역자 장윤미 박사는 “중국 공산당이 천안문 사건으로 인해 입은 정치적 타격을 경제성장을 통해 정당화․합리화하려 했다”고 지적한다. 달리 말하자면, 박정희 노선의 중국 버전?

장 박사는 한국의 90%가 넘는 ‘미국박사’들이 가진 불안감을 소개했다. 미국이 세계의 패권국가로 잘 나가던 시절에 이 나라로 유학을 했던 한국 대다수의 학자․지식인들은 미국 패권의 몰락을 무척이나 아쉬워하면서 중국의 부상에 대해 우려를 금치 못한다는 것. 어서 빨리 미국 패권시대가 다시 도래했으면 하는 게 이들의 바램. 아마 이들이 걱정하는 건 자기들이 공부해온 ‘워싱턴 컨센서스’와 같은 미국식 표준과 가치들의 몰락일 것이다. 물론, 그것을 대체할 다른 패러다임은 잘 보이질 않는다. 그럼에도 미국식 가치와 표준은 문제를 해결하지도, 현실을 제대로 해명하지도 못한다. 천안문 사건이 벌어졌을때 미국내 파워엘리트들이 보여준 태도도 마찬가지다.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의 파워엘리트들은 천안문 사건이 중국 붕괴의 서막이 될 것이라 예견했다. ‘인민의 군대’가 자국 인민 수 천명을 죽였으니, 이제 중국은 망할 거라는 파국적 인식을 가졌던 것. 그러나 중국에서는 홍수로 수만명이 죽어도 꿈쩍않았고, 대장정으로 함께 도망쳤던 홍군이 10분의 1로 줄었어도 동요가 별로 없었다. 이런 중국인의 태도를 어찌 미국식 민주주의의 가치와 척도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잊을만 하면 나오는 미국발 북한붕괴론도 이와 똑같다. 와인과 영화를 즐기는 뚱뚱한 독재자가 지배하는 나라는 곧 망할 것이라는 미국의 예견은 그들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지독한 오리엔탈리즘이다.

장 박사는 “국가가 시장화 개혁을 주도하고 일당영도와 민주가 공존하며, 사회참여와 국가통제가 공존하는 이른바 ‘중국식 발전모델’”을 말한다. 맑스레닌주의는 중국에 와서 마오주의라는 중국적 마르크스주의가 됐고, 시장경제는 중국에 와서, 분명 모순어법일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됐다. 민주주의는 중국에 와서 ‘민주집중제’가 됐다. 지오반니 아리기가 희망적으로 관측했던 ‘중국식 발전모델’은 이런 요소들의 모순적 융합의 산물이다. 그것이 국가자본주의이든, 국가사회주의이든, 관료자본주의이든 다른 국가와 경제시스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가 될 것이다.

천안문 사건은 발생한지 20년이 넘었다. 지금도 중국 지도자들은 권좌에 오르면서 당시의 진압을 칭송하는 선서를 한다고 한다.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으로 수백 만명이 죽었지만, 인민의 군대가 직접 인민에게 총을 들이댄 경우는 오직 천안문 사건 하나뿐이다. 천안문은 중국 현대 정치의 아킬레스 건이란 얘기다. 20년도 넘은 이웃나라의 한 사건과 그 사건의 핵심당사자의 회고를 도대체 내가 왜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하나라는 자괴감이 들었는데, 반쯤 읽고 나니 읽지 않는 것보단 낫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자오쯔양은 정말 매력없는 정치인이다. 마오나 덩사오핑에 비하면 중국사에서 단막극 조연이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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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오퍼스 9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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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러브스토리’의 여주인공은 백혈병으로 연인과 이별한다. 뒤마의 로맨스 소설 ‘춘희’의 여주인공 비올레타는 결핵에 걸려 생을 마감한다. 낭만적 사랑의 주인공들은 왜 항상 ‘불치병’으로 최후를 맞이할까. 미국의 근본주의 목회자인 제리 폴웰은 “에이즈는 신이 자신의 법도대로 살지 않는 사회에 가한 심판”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질병은 그저 질병일 따름인데, 인류는 때로 질병을 낭만화하기도 하고, 도덕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극우 선동가 장 마리 르펜이 정적들을 일컬어 ‘에이즈 같은’(sidatique)이라 외치는 걸 보면 때론 질병 그 자체보다 그를 둘러싼 소문과 은유들이 더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수잔 손택은 결핵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자신도 암에 걸려 수술을 받아야 했던, 미국의 대표적인 문필가다. 미국 펜클럽 회장으로 한국을 방문해 구속문인의 석방을 요구하기도 했던 그녀는 극작가·영화감독·소설가·문화비평가·사회운동가 등 전방위 문화활동가로 ‘뉴욕 지성계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고 있다. ‘은유로서의 질병’은 그녀 자신의 체험에서 길어올린 성찰을 바탕으로 질병에 얽힌 신화와 은유들을 해부하는 독특한 에세이다. 그녀의 관심은 결핵·매독·역병·에이즈 등 인류사와 함께 변천해온 질병 그 자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질병이라는 왕국의 지형을 둘러싸고 날조되는 가혹하면서도 감상적인 환상”이다.

질병은 언제 어디서든 형태를 달리하면서 존재했다. 달라진 것은 우리가 질병을 묘사하고 수용하는 방식이었다. 결핵은 빈곤과 결핍의 이미지를 지녔다. 18, 19세기의 문학에서 결핵은 창백한 외모를 지녔으나 비범한 예술적 재능을 지닌 인물과 함께 등장한다. 건강한 사람은 예술과는 거리가 먼 천박한 사람이다. 가령 프랑스의 유미주의 작가 테오필 고티에는 “나는 어렸을 적에 99파운드(약 45kg)이상 몸무게가 나가는 사람이 서정시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토로한다.

시인이란 모름지기 폐결핵에 걸려 있거나 우울증에 걸려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결핵이 문학을 통해 ‘낭만화’되었다면, 암은 정반대다. 암은 미화될 수 없고 파괴돼야 할 절대악이다. 그래서 암에는 항상 전쟁의 수사학이 따라다닌다. 우리 몸을 ‘침략’하고 있는 암은 ‘전쟁’을 통해 ‘발본적으로’ ‘정복’돼야 한다. 매독에는 항상 수치와 도덕적 단죄라는 의미가 붙어다닌다. 에이즈는 한술 더 뜬다. 에이즈는 ‘종말론’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에이즈공포증(aidsphobia)을 유포하는 사람들은 도덕적 타락의 결과 인류에게 피할 수 없는 재앙이 도래했다고 분노한다.

손택은 질병에 덧씌워진 은유들을 까발리면서 그것에 내포된 은밀하면서도 공공연한 ‘정치학’을 폭로한다. 그녀가 이같은 수고를 자처한 이유는 질병의 은유가 국가와 시민사회, 나아가 전 인류가 절망적 위기에 처했다는 공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때로 그 은유들은 독재자의 선동술로 쓰이기도 한다. 히틀러는 “유대인이 국민들 사이에 인종적 폐결핵을 낳는다”고 설파한 바 있다. 우리사회에서 ‘빨갱이’는 ‘암’과 동일시돼 왔다.

질병의 은유는 질병에 걸린 환자들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고,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배제의 수사학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손택이 보기에 그것은 자비와 관용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가치를 훼손한다. 한편으로 금욕주의라는 문화적 퇴행을 부추기기도 하고, 국가기구를 동원해 개인의 신체를 ‘관리’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녀는 “질병 자체에서 이런 의미와 은유들을 떼어내려는 노력이야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고, 우리에게 위안을 줄 것”이라고 말한다.

질병에서 신화와 은유를 벗겨내려는 손택의 작업은 ‘투명성’(transparency)이라는 그녀의 독특한 비평적 시각과 맞닿아 있다. 투명성이란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하는 것”이다. 환자의 고통은, 질병 그 자체의 고통도 있지만, 질병에 씌워진 무수한 은유적 해석들-수치심·편견·범죄 혹은 죄악시하는 태도-에서 비롯하기도 한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질병의 은유를 벗겨내 ‘투명하게’ 질병과 대면하는 게 필요한지도 모른다. 현대는 수사학과 이미지가 지배하는 시대다. 손택이 ‘해석에 반대한다’, ‘사진에 관하여’ 등의 저서를 통해 강조하는 ‘투명성’은 온갖 현란한 이미지들을 걷어내고, 사물 자체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수잔 손택은 이미지와 수사의 층위를 걷어내고 사물의 원형을 찾아가는 ‘현대의 고고학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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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7-29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올해 1월 22일에 별세하신 박완서 선생은 병명이 담낭암이셨다는데, 갑작스럽게 가신 것이 마치 암의 은유가 육신을 추하게 범할 여유를 주지 않으려 하신 것만 같습니다. 암튼 손택의 이 책은 이제 일반인과 전문인 모두에게 공감을 주는 어엿한 고전이 돼 있는 듯 하네요.. 손택은 <사진에 대하여>라는 책이나 소설까지 쓴걸 보면, 관심의 폭이 매우 넓은 해박하고 유연한 지성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사이 2011-07-30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손택 책 가운데 가장 처음 번역된 게 아마 <사진이야기>가 아닌가 하는데, 그 뒤로 대표작들이 대부분 번역 소개된 것 같습니다. 이 리뷰는 책이 나왔을 무렵에 쓴 리뷰인데... 아래 고고학 운운한 걸 두고 푸코를 잘못 읽었네 어쩌네 하던 사람이 기억나네요.. ㅎㅎ

트레바리 2011-08-01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푸코의 고고학에서도 '언어'의 비중은 절대적인 것이고, 언어라는 것이 결국 "은유의 무리들"(니체)이라면, 손택 여사의 작업도 푸코와 공유하는 면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푸코의 선행 작업도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그 때문에 손택의 책이 빛바래지는 않는 것 같네요..
 
Love 러브 - 사랑하는 영혼만이 행복하다
메이브 빈치 지음, 정현종 옮김, various artists 사진 / 이레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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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실어 나르는 것은 말이 아니라 육체다. 나와 타자의 관계를 숙고했던 철학자 임마누엘 레비나스가 “애무 속에서의 타인을 위한 자아”라고 말했던 것도 바로 그 점을 역설한 것이다. 말은 공중에 흩어져 순식간에 날아갈 뿐이지만, 그의 손길은 내 몸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남자와 여자의 에로스만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 친구와 친구 사이에서도 ‘애무’는 친밀함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는 육체적 행위다.

사진작가 지오프 블랙웰은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1999년 뉴질랜드의 한 출판사와 손잡고 ‘M.I.L.K.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 프로젝트는 ‘Moment of Intimacy, Laughter, and Kinship’(친밀감과 웃음, 가족애의 순간들)의 약자로 전세계 사진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사진 공모전의 이름이다. 전세계 1백64개국에서 1만7천여명의 사진작가들이 출품한 4만여장의 사진이 도착했다. ‘러브 : 사랑하는 영혼만이 행복하다’는 이 프로젝트에 공모한 사진들중 ‘사랑’에 관한 것을 모은 사진집이다. M.I.L.K. 프로젝트를 통해 펴낸 세권의 사진집중 두번째 책으로, 다른 둘은 제각기 ‘Friendship’·‘Family’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마지막 권인 ‘Family’도 1월중 출간될 예정이다.

‘러브…’는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사랑의 순간들을 예민한 시선으로 포착해내고 있다. 사춘기에도 이르지 않은 두 소년 소녀가 서로를 눈으로 ‘애무’하고 있는 사진 밑에는 “그토록 중요한 생물학적 현상인 첫사랑을 어떻게 화학이나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이 쓰여 있다. 과학자도 냉정한 관찰자의 시선을 거두고 사랑 앞에 경의를 표해야 하는 법. 복잡한 거리에서 진한 키스를 나누는 커플(아래)에게 풍기문란의 죄를 묻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리라.

갓 태어난 아이를 안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어머니와 할머니, 아기의 세 시선이 교차하는 사진(오른쪽 아래)은 또 어떤가. 이 3대를 잇는 사랑이라는 끈 앞에서 그들의 행복을 잠시 질투해도 좋을 것이다. 쭈글쭈글한 두 노인이 벌거벗은 몸으로 바다를 향해 걷는 사진(오른쪽 위) 옆에 붙은 “당신을 사랑하리. 내 사랑/당신을 사랑하리/중국과 아프리카가 만나고/강물이 산으로 오르며/연어가 거리에서 노래할 때까지”라는 영국 시인 W.H.오든의 시구는 차라리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아내가 병상의 남편에게 점자책을 더듬으며 읽어주는 사진에선 보이지 않되 보이는 것은 아내의 목소리에 필시 담겨 있을 축축하고 곡진한 애정이다.

‘러브…’에 실린 1백장의 사진들은 친밀감·웃음·가족애라는 소제목을 달고 배치돼 있지만 그 사진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오히려 ‘애무’라 할 만하다. 사진들은 바다의 동과 서, 땅의 이쪽과 저쪽에서 보내온 것들로 거기엔 백인종과 흑인종, 황인종이 뒤섞여 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은 ‘육체성’임을 잔잔하게 일깨워 주고 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부단한 애무를 통해 사랑을 키워간다는 메시지다.

이 사진집을 집어 든다면 책 뒷날개에 붙은, 역자인 시인 정현종의 말을 기억하자. “그 감정과 욕망의 순간적인 표정들은 아주 진실해서, 사진 안쪽은 참되고 사진 바깥쪽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게 모두 우리의 순간이기도 한 것이니.” 그러므로 행복은 사진 속에만 있지 않고 ‘바깥쪽’에서 그것을 들여다보는 독자에게도 현현할 터, 그 지복의 순간을 경험해보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다. 사진이 영혼을 빼앗아 간다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속설은 아무래도 진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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